[회 고 록]

 

 제 1 부

항  일    혁  명

( 5 )

제13장 백두산으로

  5. 백 두 산 밀 영



 우리가 만강부락을 떠난 것은 철늦은 감자꽃이 한창 피어 있던 8월말경이었다. 수확의 계절을 고대하던 화전들에서는 보리가을이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었다.

대열은 묵묵히 남으로 흘러 갔다.

나의 전우들은 연대정치위원 김산호로부터 애젊은 전령병들인 최금산이나 백학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백두산지구진출이 가지는 의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백두산은 군사지형학적 견지에서 볼 때 일부당관 천부막개한 천연요새라고 말할 수 있다. 일부당관 천부막개란 한사람이 지키는 관문을 천사람이 열지 못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아군이 지키기에는 유리하고 적이 공격하기에는 불리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격전을 확대하는 데서 백두산보다 더 적중한 기지는 없었다. 고려의 윤관과 이조의 김종서도 바로 이 백두산지구를 타고 앉아 보국개척의 중임을 수행하였다. 남이장군 역시 백두산 부석위에서 천하를 평정할 웅대한 꿈을 꾸었다.

백두산이야말로 조선인민혁명군이 의거해야 할 지상제일의 보루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에 새로운 형태의 근거지를 꾸리고 국내진출을 강화한다고 하여 지난날 만주땅에서 모처럼 개척해 온 활동무대를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백두산을 거점으로 삼고 조선과 중국, 두 나라 지경을 들락날락하며 종횡무진의 싸움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천험의 백두산을 군사적 요새로 중시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정신적 의미를 또한 특별히 중대시하였다.

백두산은 우리 나라 조종의 산으로서 조선의 상징이며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사의 발상지이다.

조종의 산 백두산에 대하여 조선사람들이 얼마나 우러러 보았는가 하는 것은 백두산 장군봉밑의 천지기슭 바위의 비석에 새겨 진 「대태백 대택수 용신비각」이라는 글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나라의 생존이 심히 우려되었던 20세기초에 대종교나 천불교의 관계인물인 천화도인에 의하여 세워 진 그 비석에도 밝혀 져 있는 것처럼 백두산을 지키는 천지의 용신이 이 나라 사람들을 무궁토록 안정하게 해줄 것을 기원하고 있었다.

백두산에 대한 숭상은 곧 조선에 대한 숭상이었고 조국에 대한 사랑이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백두산을 조종의 산으로 특별히 사랑하고 숭상해 온 것은 조선민족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고구려영토확장시대의 부분노나 을두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이장군이 지은 웅건장중한 시구들을 외우면서, 윤관과 김종서의 보국개척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백두산에 깃들어 있는 선열들의 애국혼에 감동되고 매혹되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의 마음 속에 점점 더 높이 솟은 백두산은 조선의 상징인 동시에 광복거사의 상징으로 되었다.

백두산을 타고 앉아야만 민족의 모든 역량을 항쟁의 마당으로 불러 낼 수 있고 그 항쟁의 최종적인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는 사상은 1930년대 전반기의 항일혁명투쟁이 가져다 준 총화이며 응당한 귀결이기도 하였다.

만강에서 백두산으로 가려면 되골영을 넘어야 한다. 되골영은 두메의 늙은 포수들조차 향방을 잘 가늠하지 못하는 태고연한 처녀림들로 덮여 있었다.

석달전에 선발대의 사명을 띠고 장백에 파견되어 가서 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하고 돌아 온 김주현이 길잡이가 되어 대오를 안내하였다. 그가 인솔한 소부대는 백두산쪽에 나가 그 일대의 적정과 지형들을 정찰하고 주민동향들을 조사하면서 알맞춤한 밀영후보지들을 탐색하는 한편 부대의 진출통로를 성과적으로 개척해 놓았다.

우리는 만강천줄기를 따라 골짜기로 깊숙이 들어 가다가 되골영의 울울창창한 원시림 속에 스며 들었다. 계절을 따지면 여름이 끝나지 않은 때었으나 고산지대의 넓은잎나무들에는 단풍이 들고 선기가 났다.

우리는 되골영을 넘는 이 행군길에서 26번째의 국치일을 맞이 하였다.

만강을 떠난 우리가 신들메를 갈아 대며 남하행군을 다그치던 그 시기는 또한 제7대 조선총독으로 임명된 일본 육군대장 미나미가 서울에 들어서던 때와 거의 일치한다. 우리는 무송현성전투를 치르기전에 신문지상을 통하여 미나미가 우가끼의 뒤를 이어 새 총독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가 우리들과 엇비슷한 때에 조선에 들어서리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미나미의 서울행차와 조선인민혁명군의 백두산진출이 같은 때에 있게 된 것은 우리들의 심리에 미묘한 자극을 주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강점이 후안무치한 강도행위었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네들은 처음부터 그 강점을 합법적이며 정당한 것이라고 묘사하였지만 「합방」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강도행위였다. 강도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생활철학이 있다. 남의 것을 강도적으로 빼앗아 거머쥐고는 그것을 찾자고 하는 주인을 도리어 강도라고 우겨 대는 것이다.

적반하장에 이골이 난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비칭으로 사용한 「비적단」,「마적단」, 「공비단」하는 따위의 표현들은 모두가 그와 같은 강도의 논리를 타고 고안된 악명들이다.

강도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죄다 거꾸로 뒤집혀 지는 법이다.

불청객 미나미는 제법 주인행세를 하면서 대낮에 서울장안으로 버젓이 들어서고 반면에 주인인 우리들은 길도 없는 밀림을 헤치며 제 나라 땅으로 숨어 들어 가야 했으니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나는 되골영을 넘어 서자 본래의 행군계획을 변경시켜 압록강연안을 에돌아 백두산으로 들어 가기로 작정하였다. 국경지대의 인민들도 만나보고 국내동포들에게 우리의 총성도 들려 주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들린 곳은 덕수골이었다. 우리 부대에는 이제우, 형권삼촌이 지도한 장백지방의 지하조직에서 다년간 청년들과의 사업을 하다가 입대한 대덕수출신의 신입대원이 한명 있었다. 그의 이름은 강현민이었다. 그가 혁명군에 입대한 것은 우리가 무송지방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약담배를 가지고 다니면서 소장사를 하느라고 무송으로 들락날락하다가 우리 공작원들의 알선으로 나도 만나고 유격대에도 입대하였다.

우리는 강현민과 김주현이네 선발대를 통하여 덕수골 일대의 주민동향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요해하였다.

덕수골은 장백의 모든 주민지구가운데서도 농촌혁명화가 가장 잘된 고장이었다. 그곳에는 3.1인민봉기이후 독립운동자들이 개척해 놓은 반일애국투쟁의 전통과 그 투쟁을 통해 끊임없이 단련되어 온 믿음직한 군중토대가 있었다.

 

덕수골은 강진건이 지도한 독립군의 본거지였다. 독립군은 덕수골에 4년제소학교를 세우고 청소년들과 농민들에 대한 계몽활동도 하였다.

팔도구시절에 우리 아버지도 여러번 이 고장을 다녀 갔다.

독립군단체들의 해체로 독립군운동이 쇠퇴기에 들어 서고 있을 때 이제우의 무장소조가 「ㅌ.ㄷ」의 강령을 들고 덕수골에 진출하여 군사정치활동을 벌이었다.

이제우가 체포된 후에는 형권삼촌이 최효일, 박차석과 함께 덕수골을 거점으로 삼고 이 일대에서 대중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였다. 그들의 노력에 의하여 장백지방에는 백산청년동맹 산하조직이 결성되었다.

동맹은 정치군사훈련소를 설치하고 수많은 정치공작원들과 유격대원후비들을 육성하였다.

조선혁명군 무장소조가 국내로 떠나가고 동맹간부들중 많은 사람들이 감옥으로 끌려 간 다음에도 동맹원들은 지하에서 꾸준히 투쟁을 계속하였다.

우리는 수많은 애국지사들과 공산주의자들에 위하여 계몽되고 교양되고 혁명화된 대중적 지반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부대가 덕수골지경에 들어서자 김주현은 선발대로 나와 활동할 때 믿음직한 인물로 점찍어 두었던 염인환노인의 집으로 나를 안내하였다.

어느 구석을 둘러 보나 가난이 푹 배어 있는 촌의원네 집이었다. 침술이 능하기로 소문나서 덕수골일판에서는 물론이고 장백이나 임강, 지어는 압록강건너에서도 발구나 달구지로 모셔 가기도 한다는 의원이라지만 약값의 본전도 걷어 들이지 못해 이 집의 안주인은 끼니때마다 빈바가지를 치마폭에 감춰 들고 쌀동냥을 다니는 형편이라 하였다. 그전날 의원간판을 내걸었던 팔도구와 무송 시절의 우리 집을 방불케 하는 살림이었다.

염노인은 자청하여 내 손맥을 짚어 보고 지나치게 과로하고 식음을 소홀히 한탓에 신기가 허해 졌다면서 산삼 한뿌리를 내놓았다. 만강의 허락여노인도 우리와 헤여질 때 몸보신에 쓰라고 하면서 장철구와 백학림에게 산삼 몇뿌리씩을 쥐여 주었다고 하였다.

『일본군과 만주국군이 무송에서 김장군이 인솔한 항일연합부대에 얻어 맞고 수백명이나 북망산귀신이 되었다는데 그게 정말이웨까?』

염노인이 나에게 한 질문이었다. 무송현성전투소식이 벌써 이 고장에도 파다하게 퍼진 모양이었다.

내가 정말이라고 하자 노인은 무릎을 철썩 쳤다.

『됐수다. 이제는 조선이 살아 났수다!』

우리에게 하룻밤의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한끼의 감자보리밥을 내놓은 것때문에 훗날 염인환노인은 이도강경찰서에 끌려 가 학살되었다. 노인이 당한 불행을 상기하느라면 지금도 살이 떨린다. 언제인가 소부대를 데리고 그 지방을 지나게 된 기회에 나는 일부러 염노인의 묘소를 찾아서 제주를 붓고 절을 드리었다.

다음날 우리는 새벽이슬을 걷어 차며 대덕수로 향하였다.발밑으로 마을이 굽어 보이는 등성이에서 삶은 감자 몇알씩으로 대강 조반을 굼때였다. 나는 이동학중대장에게 깃발대를 준비하였다가 대덕수로 내려갈 때 대열선두에서 깃발을 높이 들고 나팔소리를 내라고 지시하였다. 기가 눌려 사는 우리 인민들에게 조선인민혁명군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우리를 맞이한 대덕수사람들의 기쁨과 놀라움은 한량 없었다. 신식보총에 기관총까지 그쯘하게 갖춘 수백명의 조선군대가 대낮에 그것도 깃발을 들고 천하가 들썩하게 나팔소리까지 내며 나타나기는 마을이 생긴이래 처음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 고장사람들에게 만강에서와 같은 연극공연을 펼쳐 보일 작정으로 가설무대를 준비시켰다. 그러나 점심이나 지내고 하려던 공연계획은 실현할 수 없게 되었다. 점심상을 받아 놓고 수저를 들려는데 불시에 적들이 밀려 들었다. 그 바람에 누렇게 익어 가는 보리밭을 사이에 두고 싸움이 벌어 졌다.

다 익은 곡식이 피해를 당할가봐 마음 씌어지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적들은 보리밭 맞은편에서 고랑을 따라 접근하였다. 나는 적들이 보리밭을 거의다 벗어져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사격신호를 올리었다.

우리 대원들이 그 싸움을 솜씨 있게 치르었다. 적들은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고 이도강쪽으로 퇴각하였다. 그것이 장백에 나와서 진행한 첫 싸움이었다. 대덕수에서 울린 첫 총성으로써 우리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에 나왔다는 것을 조국인민들에게도 알려 주고 적들에게도 알려 주었다.

마을은 명절처럼 흥성거리었다. 이웃마을사람들까지 대덕수에 모여 들어 우리의 승전을 축하해 주었다. 인민들은 감자떡을 치고 농마국수를 눌러 우리를 환영하였으며 우리 대원들은 춤과 노래로 그에 답례하였다. 나는 선동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에 대한 반응이 좋았다.

팔자수염의 한 노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장군이 백두산에서 「조선독립을 위해 싸울 생각이 있는 사람은 여기에 다 모여라.」하고 소리만 쳐 주시오. 그러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거우다. 나도 비록 늙고 허리굽은 몸이지만 아무 시중이건 다 들 수 있수다.』

후에 알고 보니 그 고무적인 말을 해준 노인이 소덕수의 「꼽새영감」이었다.

「꼽새영감」에 대해서는 「대통영감」도 잘 알고 있었다. 「대통영감」이 군비단에서 함경남도 통신사무국장으로 사업할 때 「꼽새영감」은 거기서 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는 것이다. 「대통영감」은 10여년만에 감격적인 해후를 하게 된 옛날의 전우를 자랑스럽게 소개하였다.

「꼽새영감」의 본명은 김득현이다. 김세현은 독립군활동을 할 때부터 쓰기 시작한 가명이다. 그는 선천적인 곱사등이가 아니었다. 그저 곱사등이처럼 등이 몹시 굽었을 뿐이다. 본래는 그도 허리가 꼿꼿하고 가슴이 쩍 벌어 진 균형잡힌 몸매의 청년이었다. 그가 꼽새처럼 허리가 휘어 든데는 경의를 표할만한 사연이 있었다. 그는 함경도 태생이었는데 「합방」직후의 음산한 시절에 살길을 찾아서 덕수골로 이주해 왔다. 이 고장은 떠나 온 고향과 조국에 대한 향수로 살아 가는 유랑민들의 개척촌이었다. 덕수골에 잃어 버린 조국을 되찾고 고향에 돌아 갈 길을 열어 준다는 군비단이라는 것이 생겨 나자 김득현은 주저없이 거기에 입단하였다. 그는 단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13살짜리 귀한 딸을 남의 민며느리로 보내는 것도 서슴지 않았으며 무기를 구하려고 내전을 치르고 있는 먼 러시아땅에 가서 그곳 싸움터에까지 뛰어 들었다.

그러나 10여년에 걸쳐 그처럼 헌신적으로 활약한 것 때문에 후에는 여느 단우들보다 더 긴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수인들은 하루 14시간, 15시간씩 수동직기로 천을 짜내는 일을 강요당하였다. 조금만 허리를 펴도 채찍과 몽둥이가 그들의 등어리를 사정없이 들부수었다. 7 ~ 8년간이나 지속된 그 지긋지긋한 고역은 마침내 김득현의 허리를 영영 휘여 놓고야 말았다.

「꼽새영감」은 폐인처럼 보였으나 그의 가슴 속에 간직되어 있는 애국열과 투쟁열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그가 이제우의 무장소조에 선참으로 흡수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김주현을 만난 때로부터 우리가 백두산에 나오기를 일일천추로 고대해 왔다고 고백하였다. 김주현은 장백에 선발대로 나왔을 때 이미 그와의 친교를 맺어 두었다.

간단한 연예공연과 연설을 마친 다음 나는 부대에 철수명령을 내리었다. 마을사람들은 정을 붙이자마자 이렇게 훌쩍 떠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하룻밤만이라도 묵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나는 부득이 떠나야 할 까닭을 설명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적들이 증원대를 끌고 어느 시각에 달려 들지도 모르니 우리가 자리를 떠야 마을이 피해를 당하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우리가 떠날 때 길잡이는 다름 아닌 「꼽새영감」이 하였다.

나는 김득현노인에게 「조국광복회10대강령」과 「조국광복회창립선언」 이 등사되어 있는 소책자를 주었다. 우리가 압록강연안에 나와서 이 소책자를 준 사람으로는 그가 첫번째이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덕수지구에는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이 생겨 났다.

「꼽새영감」은 16도구의 한 분회성원이었다. 덕수지구의 여러 말단조직들 가운데서 그 분회조직이 가장 핵심적인 조직이었다. 오늘날의 총련에서처럼 모범분회라는 칭호를 제정할 수 있었다면 그 분회가 제일 선참으로 모범분회가 되었을 것이다. 김득현노인은 여러마리의 개를 길렀다. 후각이 유달리 예민한 그 영악한 맹견들 때문에 밀정이나 경찰들은 그 집에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였다.

그 집 개들이 사람을 신통히 가려 냈다. 우리 사람들이면 초면인물이 접근해도 짖지 않았다. 김주현, 김확실, 김정숙을 비롯하여 개별공작을 나가는 우리의 소부대성원들이나 연락원들이 덕수지구에 가면 「꼽새영감」의 덕을 많이 입곤 하였다.

김정숙이 한번은 단독임무를 받고 장백현 중강구쪽에 다녀 온적이 있었다. 우리가 백두산에 나온 그해 초겨울이었다. 그 당시 개별임무를 받고 나다니게 되는 동무들은 도중양식으로 생쌀이 아니라 주먹밥이나 삶은 감자 같은 익은 음식을 가지고 다녔다. 간도의 항일근거지들에서도 개별임무를 수행하는 통신원들은 그렇게 하였다. 여러 사람이 짝을 지어 다닐 때에는 망을 세워 놓고 밥을 지어 먹어도 되지만 혼자서는 불을 피우고 밥을 지어 먹을 수 없었다. 「산사람」이라는 표적이 나기 때문이다. 정숙이도 삶은 감자 몇알을 싸들고 요방자를 떠났다가 노상에서 언 시래기를 씹고 있는 노파와 아이를 만났다. 정숙은 그 정상이 너무도 가긍해서 눈물을 흘리었다. 그는 자기의 도중식사를 그 유랑 고아와 노파에게 고스란히 넘겨 주고 나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옮겨 놓으며 산길을 톺았다. 훗날 그는 자기가 어떻게 「꼽새영감」네 집에까지 가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꼽새영감」내외가 자기의 양옆에 미음그릇과 숟가락을 든째 울며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그 집 내외는 미음도 써주고 녹두지짐도 부쳐 주고 종자닭을 잡아 곰도 해주면서 정숙이를 극진히 간호하였다. 그런 간호가 아니었더라면 자기가 살아서 백두산밀영으로 돌아 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정숙은 해방후에도 여러번 외웠다.

「꼽새영감」이 우리 밀영에도 여러번 왔었다. 온전치도 못한 몸으로 후원물자를 지고 들어 왔다가는 기회를 엿보아 다른 사람 모르게 나를 찾곤 하였다.

우리가 반절구전투를 할 때에도 그는 길잡이를 서주었다. 1939년에 소덕수의 수림 속에서 5.1절경축대회를 벌였을 때에는 농민대표로 참석하여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1942년초에 나는「꼽새영감」이 병사하였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백두산시절에도 그 후에도 「꼽새영감」에 대하여 종종 추억하곤 하였다.

1947년 11월 나는 갓 설립된 만경대혁명학원 학생들에게 입힐 교복이 마련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그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보고 싶어서 원아들을 몇명 보내달라고 한적이 있다. 그때 우리 집에 온 아이들중에는 「꼽새영감」의 아들 김병순도 있었다.

그후 학원으로 찾아 간 김정숙은 병순이를 따로 만나 유격대시절부터 애용해 오던 만년필을 선물로 주면서 공부를 잘하라고 당부하였다.

1949년 8월 김병순은 새 군관복에 소대장견장까지 달고 나와 김정숙 앞에 나타났다. 경비소대장으로 배치되어 온 것이다.
정말 기이한 인연이었다.

그날부터 그는 우리곁을 하루도 떠나지 않았다. 정숙동무를 잃은 슬픔도 함께 겪었고 충청북도 수안보의 전선사령부에도 같이 갔으며 자강도 고산진의 최고사령부에도 같이 가서 지냈다. 그후에도 오랫동안 우리곁에 가까이 있었다.

나는 항상 내 신변가까이에서 떠돌고 있는 「꼽새영감」의 마음을 느낄적마다 대덕수마을에서 그가 한 말과 소덕수등판의 달밤을 추억하곤 하였다.

소덕수등판에서 숙영한 이튿날 우리는 부대를 마등창수림 속에 이동시키고 대원들을 휴식시켰다. 나도 풀밭에 누워 책을 보다가 굳잠이 들었는데 총소리가 났다. 15도구방향과 이도강방향에서 밀려 온 적들이 남북양쪽에서 거의 동시에 달려 들었다. 무성한 숲은 적아를 구분하기 어렵게 하였다. 만일 우리가 감쪽같이 빠져 나가면 적들의 협공을 저들끼리의 골육상쟁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우리는 마등창수림에서 슬쩍 빠져 나와 15도구 골등판으로 올라 갔다. 그 등판에서 적들끼리 싸우는 꼴을 구경하였다. 그것이 세칭 소덕수전투라고 하는 마등창망원전투이다.

그날 적들끼리의 맹렬한 싸움이 서너시간쯤 실히 걸렸던 것 같다. 구경군들이 지루할 정도였다. 적들은 이렇게 장시간 싸우다가 이도강쪽패가 정 못견디겠던지 먼저 퇴각나팔을 불었다. 그 나팔소리를 듣고서야 15도구쪽패도 제편끼리 싸운줄 알았는지 사격을 중지하였다.

수백명의 유격대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온데간데 없으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이 불가사의한 문제에 대한 해명을 적들은 우리의 「둔갑술」에서 찾은 것 같다. 우리가 「둔갑술」을 써서 「승천입지」하고 「신출귀몰」한다는 소문이 국경지대에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한것이 이 소덕수전투가 있은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날 적들은 담가가 모자라 신창동의 집집마다에서 문짝이라는 문짝은 다 뜯어다가 저들의 시체를 거두어 가지고 황황히 꽁무니를 뺐다. 그통에 신창동사람들은 한동안 문대신 가마니짝을 달고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덕수와 소덕수에서 인민혁명군이 울린 총소리는 장백과 그 대안의 조국인민들에게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전투가 끝난 다음 우리가 감자밭이 결딴난데 대하여 걱정하자 신창동의 한 농민은 이렇게 말하였다.

『감자밭은 결딴났지만 악귀 같은 왜놈군대들이 저렇게 죽탕이 되어 나딩구는걸 보니 풍년든 감자밭을 보는 것보다 더 기쁘오다.』

덕수골일대에서는 그후 여러명의 청년들이 입대를 탄원하였다. 그들의 입대는 장백지방에서 혁명군 대오를 급격히 확대시킨 대대적인 참군운동의 서막으로 되었다.

인민혁명군의 장백진출과 군사적 위세 앞에서 적들은 대경실색하였다. 장백지방 경찰기관들에서는 경찰들이 집단적으로 사직서를 내고 공직을 회피하는 이직은퇴바람이 불었다. 적들의 통치체계에서는 심한 혼란이 일어 났다. 이도강에서는 집단부락출입도 앞문으로가 아니라 뒷문으로 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장백땅에 와서 군사작전만 한 것이 아니었다. 대중을 교양하고 결속하기 위한 조직정치사업도 진행하였다. 우리의 정치공작원들에 의하여 덕수골, 지양개골 일대에서는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이 도처에 꾸려 졌다.

국내에서도 조직들이 꾸려 지기 시작하였다.

백두산주변의 곳곳에 생겨 나기 시작한 그 조직들은 새로 창설되는 근거지의 믿음직한 정치적 지반으로 되었다.

우리는 소덕수전투가 있은 다음에도 압록강연안의 여러 마을들을 돌면서 장백현 15도구 동강, 13도구 룡천리, 20도구 이종점 등 곳곳에서 연속  전투를 벌였다. 압록강연안일대는 벌둥지를 쑤셔 놓은 것처럼 소란스러웠다.

우리가 우회노정을 택하면서 세웠던 목적은 원만하게 달성된 셈이었다. 이제는 백두산으로 들어가 보금자리를 틀 때가 되었다. 나는 김주현과 이동학을 앞세우고 백두산밀영후보지로 향하였다. 부대의 기본지휘성원들과 경위대 그리고 일부 전투중대들이 우리와 동행하였다. 나머지 인원들에게는 장백쪽에서 좀더 소란을 피우라는 과업을 주어 떨구어 놓았다.

김주현, 이동학, 김운신 등에 의하여 탐색된 소백수골은 우리가 백두산지구에 잡아 놓은 국내의 첫 밀영후보지였다. 소백수골에서 서북방향으로 40리가량 되는 곳에는 백두산이 솟아 있고 20리쯤 되는 지점에는 선오산, 동북방향으로 15리 정도 떨어 진 수림 속에는 간백산이 각각 솟아 있었다. 소백수골뒤에 길게 가로 놓여 있는 산은 사자봉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부대를 이끌고 소백수골로 나온 것은 집을 떠났던 주인이 오래간만에 자기 집으로 돌아 온 것과 같은 경사였다. 항일혁명이라는 큰 역사의 흐름으로 볼 때에는 활동중심을 동만에서부터 백두산으로 옮겼다고 할 수 있다.

집을 떠나서 객지에 얼마간 가 있던 사람이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 오면 그것은 이웃들에게도 경사로 되는 법이다. 그러나 어느 시인의 시에도 있는 것처럼 『날새도 고적에 애태우다 날아날아 떠나고야』만다는 백두의 중중심처 소백수골에는 우리를 축하해 줄만한 이웃조차 없었다. 우리를 맞이 한 것은 설레이는 수림과 골개물 뿐 이었다. 조국의 인민들은 아직 우리가 소백수골에 나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대오를 짓고 100리밖에만 가면 두팔을 벌이고 우리를 뜨겁게 안아 줄 조국의 인민들을 얼마든지 만나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100리밖에는 총검을 들고 우리를 겨누는 섬나라불청객들이 있었다. 그 불청객들만 아니라면 우리는 백두산의 눈사태처럼 쓸어 내려가 사랑하는 인민들과 격정에 넘치는 상봉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로지 싸움만이 우리에게 조국동포들과의 상봉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 우리는 바로 그 싸움을 위하여 백두산지구에 나왔고 그 싸움을 위하여 소백수골에 보금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그때 나와 함께 소백수골에 나왔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금자리로 삼았던 그 깊고 깊은 골짜기가 훗날 온 세상사람들이 찾아 오는 유명한 사적지로 되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낙엽이 끊임없이 떠내려 오는 소백수물줄기를 따라 골안으로 올라 갔다.

오늘날 소백수골을 찾아 드는 답사자들은 이 고장이 반세기전만 해도 얼마나 태고연한 적막강산이었는지를 아마 상상도 못할 것이다. 관광버스와 답사자들이 줄지어 다니는 훌륭한 포장도로, 고급호텔에 비겨도 그닥 손색 없을 답사숙영소들과 숙영소마을, 사철 끊임없이 이어지는 행렬들과 노랫소리, 이 모든 것으로 지금은 지난날의 정적과 정갈이 새롭게 가꾸어 졌지만 우리가 첫 발을 들여 놓던 그 당시는 산짐승들이 지나다닌 자국조차 쉽사리 찾아 볼 수 없었던 원시림지대였다. 개벽이래의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은 당시의 소백수골은 그 뛰어난 경개와 천험의 요새다운 지세부터가 우리 마음에 들었다.

소왕청 마촌시기에 우리 유격대지휘부가 자리잡고 있은 이수구골의 자리가 대단히 좋았다. 골도 깊고 산세도 험하여 적들이 수월히 범접할 수가 없었다. 어쩌다 가까스로 기여든다 해도 쳐물리 치기 좋은 지세였다. 사자봉아래쪽의 합수목에서 백두산밀영자리로 들어 가는 소백수골의 지형과 산세는 신통히도 소왕청의 이수구골과 비슷하였다.

이수구골과 소백수골이 약간 차이나는 점은 이수구골보다 소백수협곡이 좀더 웅심깊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골안깊이 들어 갈수록 그 차이는 현저해 진다. 천산만악을 거느린 백두영봉의 갈피 속에 자리잡은 골짜기인 것만큼 역시 골도 깊고 산도 덩지가 컸다.

우리는 어둡기전에 장수봉 맞은편 산언저리와 소백수가에 숙영천막을 치고 그날 밤을 지냈다.

나는 하룻밤에 서너시간이상 잠자는 경우가 드물다. 산에서 싸울 때도 대체로 새벽 2시경이면 어김없이 깨여나 불을 켜 놓고 책을 보곤 하였는데 그날 밤에는 너무 곤해서 새벽독서를 하지 못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사이에 서리가 내렸다.

백두산지구는 여느데보다 겨울도 길고 눈도 많이 내린다.

이 지구에 한번 내린 눈은 쉽게 녹지 않는다. 6월말이나 7월초까지도 묵은 눈을 볼 수 있는가 하면 9월하순이나 10월초순에는 산정에 내려 앉는 햇눈을 볼 수 있다. 눈이 쌓이고 덧쌓여서 사람의 키를 넘는 때도 많은데 그렇게 되면 눈속에 굴길을 뚫어야만 다닐 수 있다. 밀영밖으로 나다닐 때는 설피를 신어야만 하였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깊은 눈구뎅이 속에 빠져 들어 불상사를 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풍과 폭설의 위협을 무시로 받고 있는 이 엄혹한 고산지대에도 사계절의 구별은 있어 우리는 서로 다른 계절이 베풀어 주는 혜택을 입을  수가 있었다.

나는 노흑산전투를 할 때 청취를 처음 먹어 보았는데 맛이 아주 좋았다. 쌈을 싸먹으면 부루보다 오히려 낫다. 병풍은 장백현 19도구 이훈의 집에 가서 처음 먹어 보았다. 그것도 역시 별맛이었다.

그런 산나물들이 백두산지구에 많았다. 청취는 대홍단벌에 많았고 병풍은 삼지연부근에 많았고 무수해는 베개봉에 많았다. 작식대원들이 따들인 그 산나물들이 우리 백두산「주민」들의 여름식탁을 풍성하게 해주곤 하였다.

백두산밀영에서 정착생활을 할 때 작식대원들은 터밭을 마련하고 남새농사까지 지었다. 새초밭 한옆에 터밭이 있었다.
여러가지 남새농사를 지었으나 배추, 무우는 안되었다. 그러나 부루와 쑥갓만은 잘 자랐다.

소백수의 산천어도 이따금씩 식탁에 올랐다. 그때는 마리수가 적었지만 지금은 양어가 잘 되어 마리수도 많아 졌다.

백두산밀영지에 처음으로 들어 온 다음날 나는 지휘성원들과 함께 밀영후보지를 돌아 보았다. 선발대동무들이 내정해 준 병영위치들도 살펴 보았다. 그리고 간부회의를 하였다. 이 모임에서는 남호두를 출발하여 백두산에 이르기까지의 원정에 대하여 총화를 지었다. 백두산을 타고 앉아 해나가야 할 사업에 대하여서도 진지하게 토의하고 분공도 조직하였다.

그 모임에서 토의되고 모임뒤에 곧 실천행동으로 옮겨 진 문제를 한마디로 집약하면 우리 앞에 긴절한 과업으로 나서고 있는 백두산근거지창설을 적극 다그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밀영건설과 조직건설이라는 두가지 의미를 포괄하고 있었다. 즉 백두산근거지를 창설한다는 것은 백두산지구에 밀영들을 건설한다는 것과 백두산기슭의 주민지대들에 지하혁명조직들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1930년대 전반기에 우리가 동만에서 창설하였던 유격구와 후반기에 백두산에 나와서 새로 창설한 백두산근거지사이에는 내용상에 있어서나 형태상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전반기의 동만유격구는 고정된 유격구를 유격활동의 본거지로 삼은 근거지로서 눈에 보이는 공개적인 혁명근거지였다. 그러나 우리가 후반기에 새로 창설한 백두산근거지는 은폐된 밀영들과 지하혁명조직들에 의거하여 군사정치활동을 전개한 보이지 않는 혁명근거지였다.

전반기에는 근거지안의 인민들이 인민혁명정부의 시책 속에 살았고 후반기에는 지하조직망에 망라된 인민들이 표면상으로는 적의 통치를 받았으나 안속으로는 우리의 지령과 노선에 따라 움직이었다.

전반기에는 유격구사수를 위한 방어에 큰 힘을 넣어야 하였지만 후반기에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유격활동을 광활한 지역에서 벌여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근거지형태를 바꿈으로써 주동적인 공격자의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근거지를 확대하면 확대할수록 우리의 활동령역은 그만큼 더 넓어 지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백두산밀영을 중심으로 장백의 넓은 지역과 장차로는 백무고원, 개마고원, 낭림산줄기로 뻗어 나가면서 근거지를 국내종심깊이 확대하며 더 나아가서는 무장투쟁의 불길을 북부조선으로부터 중부조선을 거쳐 남부조선에 이르는 전국적 판도에로 번져 가게 하는 동시에 당조직건설과 통일전선운동을 확대발전시키고 전민항쟁준비도 강력히 추진시킬 작정이었다.

밀영망창설과 지하조직망건설이 이처럼 우리들의 존망과 생사운명, 나아가서는 항일혁명의 승패를 좌우하는 초미의 문제로 되어 있은 것만큼 우리는 이 문제들에 대한 해결에 선차적인 관심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밀영건설을 1차적 과제로 내세우고 이 과업을 각 부대에 맡기였다. 먹고 입는 문제의 해결과제는 김주현에게 맡기였다. 밀영설치와 운영을 위한 이 두가지 문제는 통속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식의주문제이기도 하였다.

지하조직망건설을 방조해 줄 인재를 적극 탐색하며 우리 인민의 사기를 북돋아 주어 그들이 광복성업에 발벗고 나서도록 필요한 전투활동을 진행하는 것도 역시 중요한 문제였는데 이 두가지 과업은 이동학의 중대에 맡겼다.

지휘관들은 백두산근거지창설을 위한 분공수행에 지체없이 착수하였다. 김주현과 이동학이 중대를 이끌고 떠나갔다. 그밖의 여러 사람들에게도 개별임무를 주어 공작지로 떠나보낸 다음 나도 경위대와 7연대의 일부 성원들을 데리고 곰의골로 향하였다. 황공동부락에서 갈라진 부대의 기본역량과 만나게 되어 있는 곳이 곰의골이었다.

소백수골에서 곰의골로 갈 때의 걸음이 자못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때 선오산과 삼단폭포를 보았는데 참으로 신비경이었다. 우리 일행은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여 숲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대탁온천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쪽으로 어떻게 빠져 나가야 할지 알수 없는 수림의 바다에서 향방을 잡지 못하고 2시간나마 왔다갔다 하다가 몇개의 정찰조를 여러 방향으로 내보냈더니 그중의 한 정찰조가 노인 한분을 모셔 왔다. 백두산턱밑에서 홀로 산다는 늙은이라는데 만강쪽에 소금과 좁쌀을 얻으려 내려갔다 오던 길에 우리 정찰조를 만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노인의 안내를 받아서 그가 사는 대탁의 초막으로 갔다. 그 초막옆에는 아주 좋은 온천이 있었다. 물이 어찌나 뜨거운지 가재를 넣으면 빨갛게 익었다. 우리는 그 물에서 목욕도 하고 빨래도 하고 가재도 익혀 먹었다. 언제인가 텔레비젼화면에서 이슬란드사람들이 추운 한겨울에 야외온천욕을 하는 것을 보니 대탁에서 온천욕을 하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그때 대탁의 노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떻게 되어 백두산턱밑에까지 들어와 살게 됐는가고 물었더니 노인의 대답이 원래는 벌방에서 살았는데 시운이 기울어 지는 것을 보고 조종의 산으로 올라 왔다고 하였다.

『망국노의 수치를 안고 죽기는 매일반인데 죽어도 백두산밑에 와서 살다가 죽고 싶은 생각이 나겠지요. 나에게 천자문을 배워 주던 서당훈장님은 늘 조선사람은 백두산을 안고 살다가 백두산을 베고 죽어야 한다고 말했수다. 정말이지 그 말씀은 비석에라도 새겨 두고 싶은 금언이었습지요.』

미간을 쪼프리고 백두산쪽을 응시하는 노인의 시선을 따라 끝없이 가느라면 그가 걸어 온 구질구질한 한생의 진창길이 펼쳐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나는 심경이 자못 엄숙해 졌다. 백두산밑에서 살다가 백두산을 베고 죽겠다는 노인의 말은 나를 감동시키였다.

『그래 백두산 두메맛이 어떻습니까?』

『별맛입니다. 감자농사와 노루사냥으로 고달프게 살아 가고 있기는 하지만 왜놈의 꼴을 보지 않으니 살이 지는 것 같수다.』

그 노인과의 담화는 나로 하여금 백두산의 존재가 우리 민족의 정신생활에서 굳건한 기둥으로 되고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하였으며 백두산을 혁명의 책원지로 삼은 것이 천만번 옳았다는 것을 새삼스레 절감하게 하였다. 이웃도 없이 홀몸으로 백두산에서 인생말년을 강인하게 보내는 그는 참으로 애국적인 노인이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 늙은이의 성씨를 묻지 못하고 헤여진 것이다.

나자구등판의 마노인처럼 그에게도 책이 많았다. 우리가 온천욕을 마치고 대탁을 떠나 곰의골로 향할 때 노인은 나에게 여러권의 소설책을 선물하였다. 훗날 우리는 바로 대탁온천지에 전장에서 부상당한 대원들과 허약자들을 위한 요양소를 꾸리었다.

우리 일행이 곰의골에 도착한 후 어느날 교하지방에서 활동하던 2연대 성원들이 곰의골로 찾아 왔다. 권영벽, 오중흡, 강위룡 등이 바로 그때 교하에서 돌아 온 사람들 속에 끼여 나와 함께 쌓였던 회포를 나누었다.

그들은 우리를 찾아 오느라고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하였다. 추운 날씨에 홑옷을 입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백두산으로 찾아 오다가 어느 목재소를 치고 소를 얻었는데 우리를 위해 두마리는 산채로 끌고 왔다. 피골이 상접한 그들의 모습과 헐어 빠진 여름군복을 보고 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들도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들에게 새옷을 갈아 입혔다. 겉옷뿐 아니라 내의도 갈아 입히고 행전과 지하족도 갈아 주었다. 세면도구도 일식으로 공급해 주고 담배와 성냥까지 내주게 하였다.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교하쪽에서 돌아 온 강위룡은 박영순과 함께 곰의골, 횡산, 홍두산 지구의 여러곳에 밀영들을 꾸리었다. 박영순과 강위룡은 도끼 하나만으로도 1개 연대가 넉근히 숙영할 수 있는 커다란 귀틀집을 2 ~ 3일사이에 척척 지어 내는 훌륭한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장백지구의 밀영건설에서는 아마 그 두 사람의 수고가 제일 많았을 것이다. 조국안이네 부대사람들이 곰의골에 왔을 때 우리 부대 사람들이 단 하루사이에 자기들의 숙소를 지어 놓는 솜씨를 보고 경탄하였던 것도 기실은 그들의 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곰의골에서 얼마동안 지내다가 소백수골로 돌아 왔을 때에는 이미 여러 지점의 밀영지들에 새 귀틀집들이 일어 섰다. 사령부와 부대 병실들, 출판소와 재봉소건물들, 위병소와 차단소들이 밀림속 곳곳에 생겨 났다.

밀영의 귀틀집출입문들에 노루발쪽손잡이가 달리게 된 것이 그때부터였다.

그 하찮은 노루발쪽손잡이가 나에게는 역사적 시기를 구획짓는 이정표처럼 뇌리에 새겨져 있다. 우리의 백두산 「주택」들에 노루발쪽이 문손잡이로 달리게 된 때로부터, 다시 말하여 소백수골에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꾸려 지게 된 때로부터 백두산밀영은 조선혁명의 본거지로, 중심적 영도거점으로 되었다.

백두산밀영은 조선혁명의 책원지인 동시에 심장부였으며 우리의 중핵적인 작전기지, 활동기지, 후방기지었다.

바로 그 백두산밀영으로부터 미구에 북부, 중부 조선의 곳곳에 부채살같이 뻗어 나가면서 수많은 비밀근거지들이 생겨 나게 되었다.

그 밀영들에서 삼천리 방방곡곡에 혁명의 불길을 지피기 위하여 권영벽, 김주현, 김평, 김정숙, 박록금, 마동희, 지태환 등의 수많은 정치공작원들이 전국각지로 떠나갔으며 또한 백두산으로 우리를 찾아 왔던 이제순, 박달, 박인진 등의 수많은 인민의 대표들이 새로운 혁명의 불씨를 안고 다시금 인민들속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우리의 부대들이 원수들을 찾아 출전의 길을 떠났다. 혁명의 운명과 직결된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거의 전부 백두산밀영에서 구상되고 설계되고 행동에 옮겨 졌다.

백두산밀영망에 속한 위성밀영들은 조선쪽에도 있었고 중국쪽에도 있었다.

사자봉밀영, 곰산밀영, 선오산밀영, 간백산밀영, 무두봉밀영, 소연지봉밀영 등은 조선쪽에 꾸려 놓은 밀영들이었으며 곰의골밀영, 지양개밀영, 이도강밀영, 횡산밀영, 이명수밀영, 부후물밀영, 청봉밀영들과 무송지구의 여러 밀영들은 서간도쪽에 꾸려 놓은 밀영들이었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면서 그 모든 밀영들을 다 이용하였다.

백두산지구의 밀영들은 각이한 사명과 임무를 수행하였다. 순수한 비밀병영의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재봉소나 무기수리소, 병원 같은 후방밀영의 역할을 한 것도 있었으며 공작원들의 중간연락소나 숙영소 역할을 한 것도 있었다.

백두산밀영망의 심장부는 소백수골의 밀영이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우리는 소백수골의 밀영을 「백두산 1호밀영」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백두산밀영」이라고도 부르고 「백두밀영」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최대한의 안전과 비밀을 보장하기 위하여 거기에는 사령부직속 부서성원들과 경위대를 포함한 일부 골간부대만 있게 하고 출입도 엄격히 제한단속하였다. 그 당시 우리와 함께 상시적으로 지내지 않는 부대나 개별적 사람들이 사령부에 찾아 왔을 때에도 소백수골의 밀영에서 만나지 않고 2호밀영 (사자봉밀영)에 나가 만나주곤 하였다. 2호밀영에서는 사령부를 찾아 온 부대나 개별적인 방문객들을 맞아도 주고 쉬우기도 하고 떠나 보내기도 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에게 강습이나 훈련도 주었다. 2호밀영은 사령부를 찾아 온 사람들의 접수소인 동시에 대기소이기도 하였고 면담소인 동시에 숙소이기도 했으며 또한 강습소인 동시에 훈련소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 사령부로 찾아 오는 통신원들도 흔적을 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명수쪽에서 올라 오다가 소백수골어귀에서부터는 소백수물줄기를 따라 다니게 하였다. 우리는 밀영의 처소들을 누구에게나 다 알리지 않았다. 누구나 다 아는 것은 비밀이 아니고 밀영도 아니다.

백두산밀영과 그 주변 밀영들이 있는 곳을 속속들이 알고 있은 것은 김주현과 김해산, 김운신, 마동희와 같이 연락임무를 도맡다싶이 했던 몇몇 사람들과 소수의 지휘성원들 뿐 이었다.

백두산밀영과 그밖의 다른 밀영들 그리고 거기서 지냈던 우리 「주민」들이 항일혁명이 승리할 때까지 자기들의 존재를 고이 숨겨 보존할 수 있은것은 천만다행스러운 일이다.

백두산은 나의 청춘시절의 「집」이었다. 어린 시절의 고향집식솔에 비할 수 없는 많은 식솔들이 나와 함께 거기서 지내며 백두산의 눈비를 맞았고 오늘의 조국을 꿈 꾸었다.

백두산에서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던 그전날의 백두산개척자들 가운데서 지금 남아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런 사정은 우리로 하여금 후세들에게 백두의 갈피갈피에 차넘치는 우리 당의 혁명역사와 선열들의 투쟁업적을 소개하고 전해 주어야 할 선대로서의 사명을 제때에 올바로 수행할 수 없게 하였다.

나도 백두산밀영을 제때에 찾아 주지 못하였다.

건당, 건국, 건군 사업과 전쟁, 복구건설 등 하도 많은 일감을 짊어 지고 있다보니 젊어서는 백두산시절의 본거지로 와볼 짬을 내지 못하였다.

박영순이네가 살아 있을 때에 백두산밀영의 옛 자리들을 후대들에게 찾아 주라고 몇번이나 일렀지만 그전날의 그 날파람 있던 목수도 자기들이 직접 지은 곰의골이나 지양개, 횡산의 밀영자리들과 청봉, 베개봉, 무포 같은 숙영지자리까지는 찾아 내면서도 백두산밀영자리는 끝내 못찾아 내였다. 그렇다고 그들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그들은 그 밀영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백두산밀영자리는 늦게나마 내가 찾게 되었다. 어찌다 짬이 생긴김에 백두산지구 밀영들을 꾸려 놓은 것을 보고 싶어 그곳에 간적이 있었다. 그런데 돌아 오면서 소백수다리가 있는 한 고장의 지세가 하도 눈에 익어 보여 답사성원들을 소백수골로 파견하였다. 100여길쯤 되는 벼랑바위봉우리가 있는 골안에 찾아 들어 가면 그리 넓지 않은 새초밭이 있을테니 한번 찾아 보라고 일러 보냈다. 그러면서 그 골안은 산과 산이 서로 붙어 있기 때문에 밖에서 보아서는 잘 알리지 않는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그 지구가 당시까지만 하여도 어찌나 무시무시하고 험했던지 압록강연안 참관도로를 내기 위하여 언제인가 현지에 책임서기와 군사무관을 답사보낸적이 있는데 그들이 그만 원시림 속에서 길을 잃고 숱한 애를 먹은 일도 있었다. 호위중대를 보내어 그들을 겨우 찾아 데려 왔다. 실로 미혼진에 못지 않은 혼미의 지대었다. 소백수골로 들어 간 탐사, 답사 성원들은 마침내 그곳에서 먼저 구호나무들을 발견한데 이어 집자리와 숙영자리들도 찾아 내었다. 이리하여 우리 혁명의 후세들 앞에 백두산밀영이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게 되었다.

오늘날 백두산은 우리 혁명의 2세, 3세, 4세들에게 1세들이 지녔던 백두의 혁명정신을 따라 배우게 하는 학교로 되고 있다. 광활한 백두대지에는 대노천혁명박물관이 형성되었다.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백두산의 상징적 의미는 풍부해 졌다. 실제에 있어서 백두산은 이미 30년대 후반기에 자기의 고유한 상징적 의미외의 새 의미를 띠기 시작하였다.

사화산이던 백두산에서 분출한 「광복혁명」의 용암은 2천만동포의 주목을 끌었다. 항일혁명의 불길이 미쳐 간 곳곳을 돌아 본 작가 송영은 자기의 답사기행문집에 「백두산은 어디서나 보인다」는 표제를 붙였다. 그 표제가 말하듯이 우리가 백두산을 타고 앉은 때로부터 백두산은 어디서나 보이는 광복의 활화산, 혁명의 성산으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