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 고 록]

 

 

 제 1 부

항  일    혁  명

( 5 )

제13장 백두산으로

6. 애국지주 김정부
 

 


 세계의 정치무대에 공산주의자들이 등장한 때로부터 만국의 무산자들은 『지주, 자본가들을 타도하라! 』는 구호를 들었다. 우리 나라의 근로대중도 이 구호를 외치며 오랫동안 외래제국주의세력과 결탁된 반동적인 착취계급을 매장하기 위한 준엄하고도 첨예한 계급투쟁을 벌여왔다.

한때는 국민부의 정당조직인 조선혁명당의 좌파인물들까지도 타도 지주, 타도 자본가를 자기들의 투쟁목표로 선포하고 타도선풍을 일으켜나갔다.

우리도 지주, 자본가를 반대하는 것을 자기의 이념으로, 투쟁목표로 삼고 있었다는데 대해서 숨기지 않는다.남의 피와 땀으로 기생하는 착취자들을 반대하는 것은 우리가 일생을 통해 견지해오고 있는 원칙이다.나는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지금도 착취자들을 반대하고 있다.수억만 근로대중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을 때 그들의 고혈로 이루어진 재부를 탕진하며 호의호식하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증오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물질적 부의 분배에서의 공정성과 사회적 평등의 실현을 주장하는 인도주의적 이념에 대해서는 전 세계의 진보적 인류가 다 긍정하고 있다. 우리는 한줌도 못되는 몇몇 유산자들과 그 대변자들에 의한 정치적 독재, 경제적 독점, 도덕적 타락을 반대하며 그 모든 것에 조종을 울리는 것을 자기의 신성한 의무로 여기고 있다.

물론 구체적 실천에서는 착취계급을 타도하는 문제와 그 계급의 개별적 존재, 개개의 유산자를 대하는 문제를 엄격히 갈라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일혁명시기 일본제국주의와 그 하수인이 된 악질적인 유산자들만을 투쟁의 과녁으로 삼았다.

그러나 지난날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계급관계에서 투쟁일면만을 강조하던 나머지 애국적이며 반제적인 요소를 가진 지주들과 민족자본가들을 대하는 데서 좌경을 범하였다. 유산자들을 구체적인 조건과 실태를 고려함이 없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턱대고 청산하며 수탈하고 학대하는 융통성없는 정책을 실시한 것으로 하여 일련의 나라들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조성되었다.

이것은 반공에 환장한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를 헐뜯을 수 있는 언질을 주었다.

공화국 북반부에는 지주, 자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계급교양이 높은 수준에서 심화되어 모든 일꾼들이 계급노선과 군중노선을 잘 결합시켜 나가고 있다. 부자일반을 다 나쁘다고 보던 일면적인 견해, 그 경력과 공로에는 관계없이 지주, 자본가 계급출신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누구나를 막론하고 다 한방망이로 다스려야 한다고 보던 편협한 관점은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출신성분이 좋지 못하다고 고민하던 사람들이 입당하였다거나 적재적소에 등용되어 낙천적으로 살아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기자신이 지니는 행운에 못지 않게 기뻐하는 것이 우리시대의 군중심리이다. 이것은 조선노동당의 광폭정치에 의해 마련된 귀중한 결실이다.

우리는 이러한 광폭정치를 반세기 전에도 하였고 지금도 실시하고 있다. 진정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벌써 항일혁명시기부터 민족대단결의 기치를 들고 출신과 신앙과 재산정도가 서로 다른 각계각층의 군중을 하나의 역량으로 묶어세우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지주 김정부에 대한 이야기는 지주, 자본가에 대한 우리의 구체적 견해를 이해하는 데서와 우리가 실시하고 있는 광폭정치의 역사적 뿌리를 파악하는 데서 일정한 도움을 주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김정부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36년 8월말이었다. 지양개 부락에 모연공작을 나갔던 소부대 성원들이 깊은 밤중에 「친일지주」들이라고 하면서 칠순이 넘어보이는 노인과 그밖의 몇몇 사람들을 데려왔다.

우리는 그때 마가자라고 부르는 이도강 근처의 임산마을에서 군중사업을 하고 있었다.

억류된 사람들의 명단에서 김정부의 이름을 발견한 나는 놀랐다. 그를 「친일지주」 라고 데려왔으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의 소부대 책임자를 이동학이라고 회상하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내 기억에 의하면 김정부를 붙들어온 사람은 김주현이다.

나는 김주현을 불러다가 엄하게 물었다.

『김정부를 타도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까닭은 무엇이요? 』

『저 영감은 땅만 해도 자그만치 150정보나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한 지주가 그렇게 많은 땅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그래 소유지가 150정보나 되는 지주라고 해서 다 타도대상으로 된다는 법은 누가 만들었소? 』

『사령관동지, 법이라니오. 부자 하나면 세 동네가 망한다고 했는데 저런 부자 하나만 있으면 열 동네가 망하고도 남겠습니다.』

나는 김주현에게 그 다음 증거는 무엇인가고 물었다.

김주현은 김정부가 일본영사관 분관 참사원이란 자와 가깝게 지낸다는 것, 그 참사원이 경상북도 영천인가 어디에서 이또라는 일본인 자본가를 데려다가 김정부에게 6,000원이나 되는 거금을 알선해 주어 목재상을 하게 했다는 것, 김정부가  자동차까지 한대 사가지고 장사질을 크게 할 수 있은 것은 다 일제놈 떨거지들을 등에 업은 덕이라는데 대하여 누누이 설명하였다.

『다른 증거도 또 있소? 』

『또 있지요. 증거가 한두가지 아닙니다. 김정부는 호림회장 겸 농촌조합장의 벼슬을 하면서 만주국 관청출입도 뻔질나게 한다고 합니다. 김정부의 아들 김만두도 제 애비의 그늘 밑에서 몇해동안 이도강 구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김정부에게 우점은 전혀 없다던가고 묻자 김주현은 좀 얼떠름해졌다. 우점에 대한 반영은 수집하지도 않았거니와 내가 그런 것에 관심을 두리라고는 미처 상상도 못한 모양이었다.

『우점이라니요. 그런 친일분자한테 우점같은게 있을게 뭡니까.』

소부대 책임자의 보고는 마디마디가 다 부정적이었다. 시종일관 주관적인 해석으로 가득찬 그의 보고는 어쩐지 내 가슴을 답답하게 하였다. 계급투쟁과 계급성밖에 안중에 두지 않고 있던 종래의 타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데다가 김정부에 대한 구체적 파악이 없는 그들은 우리가 장백땅으로 나오면서 중요한 통일전선사업대상으로 점찍어 놓았던 그에게 「친일지주」 니, 「반동분자」 니 하는 어마어마한 딱지를 붙이고 지주자신은 물론, 그의 아들까지도 붙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통일전선방침에도 맞지 않고 조국광복회 창립선언문이나 10대강령 정신에도 어긋나는 행위였다.

심지어 그들은 김정부의 집에 전화기가 있는 것 까지도 친일의 증거로 삼았다. 그가 전화를 놓은 것은 순수 호강만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밀정질을 하고 싶어서 그런 기구를 설치하였을 것이다, 통화를 한다면 어디하고 하겠는가, 영사관이나 경찰이나 만주국 관청밖에 더 있는가, 그런놈들과 전화질을 한다는거야 고발질이나 하자는 수작이지 무엇이 더 있겠는가 하고 소부대책임자는 기염을 토하였다. 사실 그 당시 개인이 집에다 전화를 놓고 사용한다는 것은 평백성들로서는 꿈에도 상상 못 할 호강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집에다 놓은 전화기를 친일의 표적으로 보고 이적행위의 수단으로까지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생억지가 아닌가. 만일 모든 대원들이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평가한다면 우리의 통일전선정책은 실천에서 엄중한 난관에 부딪칠 수 있었다. 이것은 김정부 한사람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소부대 성원들을 꾸짖기 전에 우선 마음속으로 아랫사람에 대한 교양을 심도있게 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였다. 우리가 무송에서 장울화와 거래할 때에도 일부 사람들은 편견을 앞세우면서 우려하였다. 장울화가 보낸 여러 발구의 원호물자와 거액의 돈이 우리의 수중에 들어왔을 때에야 그들은 비로소 자산계급의 인물들 중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런데 장백에 나와서 150정보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지주를 보게 되자 그들의 눈에서는 또다시 가시가 일어섰다.

어찌하여 장울화를 동행자라고 인정한 사람들이 김정부가 통일전선대상으로 될 수 있는 인물이라는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가.

이것은 통일전선정책과 관련된 우리의 교양사업에 빈구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우리가 말하는 각계각층의 군중 속에는 실로 그 경력과 생활처지가 서로 다른 천태만상의 인간들이 있다. 그 모든 인간들과의 사업에 다 들어맞는 유일한 처방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나 다 참고할 수 있는 원칙만은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 당시 사람들을 평가하는 데서 기준으로 삼은 원칙은 무엇인가? 그것은 친일인가, 반일인가, 애국애족의 정신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민을 사랑하고 일제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다 우리와 손을 잡을 수 있으며 반대로 나라와 민족, 인민은 안중에 없고 자기 개인의 향락과 안일을 위해 친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투쟁대상으로 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었다.

우리는 김정부도 이런 관점에서 보고 통일전선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장백에 나오면 그에게 협조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든가 밀영에 데려다가 만나려고 계획하였다.

『내가 보건데 김정부에 대한 동무들의 평가는 도식적이고 비과학적이다. 사람을 그렇게 피상적으로 보면 안된다. 동무들이 친일지주라고 보는 김정부는 사실 애국지주이다. 내가 그의 과거를 잘 안다. 동무들은 지양개에 나가서 한두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보고 김정부가 여사여사하고 김하사가 여사여사하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망탕 평가하는데 그것은 껍데기만 보고 속은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이다. 김정부가 그렇게 나쁜 지주일 것 같으면 지양개 인민들이 무엇 때문에 자기네 마을에다 그의 송덕비를 세웠겠는가. 동무들은 지양개에 김정부의 송덕비가 있다는 것을 아는가?』

소부대 성원들은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나는 소부대 성원들에게 동무들이 김정부의 과거경력을 알게 되면 친일지주라고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타도대상이 아니고 포섭대상이며 반동지주가 아니고 애국지주라는 것을 이 자리에서 보증한다고 말하였다.

『사령관동지, 우리가 사령관동지의 의도를 모르고 김정부를 잘못 취급했습니다. 소부대의 이름으로 사과를 하고 그를 지양개에 돌려보내겠습니다.』

김주현이 자책감에 못이겨 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인데 돌려보내지는 마시오. 이왕 이렇게 된 바에는 밀영에 데리고 들어가서 품을 놓고 담화를 해보고 싶소. 동무들을 대신하여 사과는 내가 하겠소.』

그날 나는 소부대 성원들에게 김정부를 통일전선대상으로 볼 수 있는 근거에 대하여 아는대로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 지주의 경력은 그날중으로 온 부대에 다 알려지게 되었다.

김정부의 출생년대는 대체로 1860년대 초라고 짐작된다. 우리가 장백지방에 나갔을 때 그는 벌써 70대에 이른 늙은이었다. 그의 고향은 평안북도 의주군 청수동이다. 내가 길림에서 공부할 때 의주태생인 장철호는 부호라는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독립군 운동에 투신해온 김정부에 대하여 애정을 가지고 자주 말해주었다.김정부의 아들 김만두는 장철호와 오동진의 청수동 시절의 죽마고우이다.

독립군이 장백땅에서 한창 기세를 올릴 때 김정부는 군비단의 남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가산을 털어 독립군에 천과 식량을 비롯한 여러가지 후방물자들을 대주었다. 군세가 강성하던 시절에는 지양개에서 농마도 내고 물방아를 놓고 쌀도 찧어 단의 식량으로 섬겼다.

김정부의 집은 길림, 무송, 임강, 팔도구, 화전 등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자들이 장백으로 왕래할 때 이용한 숙박소인 동시에 회합장소이기도 하였다. 그런 연고를 보더라도 나는 김정부 노인을 무심히 대할 수 없는 처지였다.

김정부는 후대교육을 위해서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지양개골안에 그가 주관하는 구학서당이 생긴 것은 1920년경이었다. 자기 작인의 자식들을 다른 고장의 아이들보다 더 똑똑하게 개명시켜보려는 야심은 그로 하여금 구학서당을 신학문 위주의 4년제 소학교로 개편하게 하였고 얼마후에는 그 학교를 150명 이상의 학생을 가진 6년제 사립학교로 전환시키는 혁신적인 조치를 취하게 하였다. 김정부는 인접부락들에서 지양개로 찾아오는 아이들까지도 다 학교에 받아들이었다. 그 종산사립학교의 운영비와 교원들의 생활비는 작인들에게서 받은 소작료로 보장하였다. 학교에서는 자주독립과 애국애족의 사상을 심어주는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지양개의 소작농들은 자원적으로 소작료를 냈다. 농사작황에 따라 한가마니를 바치고 싶으면 한가마니를 바치고 열가마니를 바치고 싶으면 열가마니를 바치었다. 그것은 김정부가 지주로서 작인들에게 토지의 양과 질에 따르는 현물납부량을 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주와 작인들 사이에는 소작계약조차 맺어있지 않았다. 말하자면 1년 소출중에서 몇프로는 농민이 먹고 몇프로는 지주에게 바친다는 약속이 없었다.

한때 지양개에서 김정부의 소작농으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항일혁명투사 이치호는 세상에 김정부와 같이 선량하고 통이 큰 지주가 있다는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우리는 그 지주의 땅을 부치면서도 소작료가 얼마인지를 몰랐다, 장리쌀을 여러번 가져다 먹으면서도 이자를 붙여 돌려준 일이 없다, 그래도 김정부는 추궁하지 않고 매사를 작인들의 자원성에 맡기었다, 인민들이 그의 집 앞에 송덕비를 세운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가 지양개 등판에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지만 그것은 사실 벌방에 있는 15정보의 옥답보다 별로 나은 것이 못되었다고 말하였다.

지양개 사람들은 한결같이 『우리 아바이』 ,『우리 부장님』,『 우리 교주어른』 하면서 김정부를 찬양하였다. 그것은 실로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웃의 지주들은 김정부의 덕행을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작인들이 지양개를 넘겨다보며 김정부의 소작농들을 부러워할까봐 걱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계약을 맺지 않고 소작료를 내키는대로 납부하게 하는건 지나친 선심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는 살림살이가 3∼4년 안팎에 거덜이 날 것이라고 하면서 김정부를 설유하였다.

이웃의 지주들이 이따금씩 그런 걱정을 해도 김정부는 꿈만해하였다. 소작계약이 없다고 우리 세식구가 굶어죽기야 하겠는가. 작인들이 배부르면 나도 배부르고 작인들이 배고프면 나도 배고픈 것이니 그런 이치를 생각해서 인정을 품앗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하였다.

김정부가 이런 선덕을 지닌 부호였기 때문에 만주국 관청이나 일본영사관에서도 그를 감히 허술하게 대하지 못하였다.

소부대성원들이 데리고 온 지주들 가운데는 김하사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도 역시 애국적인 지주였다. 그에게 김하사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그가 구한국의 신식군대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본명은 김정칠이었다.

김하사는 10대의 나이에 이조군대에 탄원하여 일찍부터 군인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한때는 우리 나라 첫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참군하였으며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을 때에는 그에 열렬히 공명하기도 하였다.

농촌초부와 같이 소박하고 정결한 그의 모습에는 강건한 정치적 신념이 비껴있었다. 갑오개혁때 왕궁호위를 전문으로 하는 시위연대에 있던 그는 그후 진위대로 옮겨갔으며 망국 이후에는 의병활동에 뛰어들었다가 의병운동이 조락하자 생업에 파묻히었다.

김하사는 구한국말기 신식군대가 존재한 거의 전기간을 하루와 같이 근실하게 복무한 군인으로서 이조군대의 사멸과정과 근대조선이 겪어온 파란만장의 국난을 고스란히 체험한 역사의 산 증견자였다. 김정부의 말에 의하면 그가 오랜 기간을 만근하면서도 하사관 이상의 직급에 등용되지 못한 것은 북관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김하사는 이조의 위정자들이 정배지라고 차별시하는 갑산출신이었다. 봉건조정이 군정개혁도 표방하고 문벌폐지도 부르짖었으나 서북관 사람들을 인재등용에서 제외하던 구시대의 유습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김하사는 10정보의 땅과 여러마리의 부림소를 가지고 있는 지주였으나 사고와 행동에서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애국자였다.

그런데 그때 적지않은 사람들은 우리가 김정부나 김하사같은 사람들도 통일전선대상이 된다고 하면 입을 딱 벌이면서 땅이 그렇게 많은데도 포섭대상이라니, 이건 「계급협조」 가 아닌가고 하면서 얼떨떨해하였다.

사실 마르크스나 레닌의 명제가 공산주의자들의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지침으로 통하던 반세기전만 해도 우리가 모모한 지주와 손을 잡으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탈선이라고 시비하였고 우리가 이러저러한 자본가를 동맹자로 만들려고 하면 레닌주의에 대한 이단이라고 하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은 우리 나라의 구체적 특성과 우리 혁명의 산 현실을 떠나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나치게 절대시하고 교조적으로 대한 후과였다.

해방전 조선농촌에서의 계급분화와 토지소유관계의 변화과정을 반영한 통계자료들을 보면 일본인 대지주의 대열이 늘어날 때 조선인 대지주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중지주나 소지주로 영세화되었거나 몰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봉건적 토지소유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총독정치의 지반을 다지었다. 그 과정에 일부 토착지주들은 총독부의 지지 밑에서 토지와 자본을 늘이여 공상업에 돈을 투하하는 대지주로 되고 매판자본가로까지 되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조선인 지주들은 중소지주로 남아있었다.

일제의 강점과 식민지 통치로 말미암아 그 처지가 영락된 일부 중소지주들이 소극적이나마 반일애국을 지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 우리 나라의 지주, 자본가들 중에는 항일혁명을 적극적으로 후원해준 사람들도 있고 해방이 되자마자 땅과 공장을 송두리째 나라에 바치고 평범한 근로자가 되어 새 조국 건설에 헌신한 사람들도 있다. 개인의 치부보다도 조국과 민족의 번영을 더 귀중히 여기는 이런 양심적인 자산가들에게는 공산주의자들의 시책에 반기를 들 정치적 이유도 없고 그들이 주관하는 혁명운동을 방해하여 나설 아무런 감정심리적 기초도 없다.

물론 나도 어린 시절에는 지주, 자본가라면 모두 놀고먹는 기생충들이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자산가들 속에도 양심적인 자산가가 없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을 애국적인 자산가와 반동적인 자산가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창덕학교 시절에 백선행이 학교에 많은 땅을 기부하였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였다.

장울화와의 인연은 나로 하여금 자산가 일반을 다 타도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계기를 지어주었다. 나는 진한장을 통해서도 부자들에 대한 관점을 더욱 똑똑하게 정립하였다.

만일 우리가 이런 애국적인 사람들을 자산가라고 하여 타도하거나 따돌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혁명의 지지자들을 배척하는 것으로 되며 애국적인 자산가는 물론, 수많은 군중을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군중은 그런 인정사정없는 혁명을 외면할 것이다. 기뻐할 것은 오직 적들 뿐이다. 계급투쟁에서의 사소한 오유나 탈선은 결국 원수들의 전략에 발을 맞추는 최대의 이적행위로 된다.

나는 유격대 대장으로서 김정부와 그 일행에게 우리 사람들의 과실에 대하여 사과하지 않을 수 없는 딱한 처지에 빠지었다.

소부대책임자는 나의 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대기하고 있던 김정부 일행을 내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 사람들이 밤중에 갑자기 무례하게 데려오게 되어 안되었다고 심심히 사과하였다.

김정부는 아무 응대도 하지 않고 적의와 불안이 엇갈리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모두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여 속을 조이는 모양이었다. 그들에게 좀더 살뜰하게 말을 하고 싶었으나 교감이 잘 되지 않았다. 그처럼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는 도저히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어떤 군대어른들인지는 모르겠으나 독립군이면 요구되는 군자금 액수나 대주고 호적이면 방표값이나 말해주시오.』

얼음장같은 공기속에서 맨처음으로 울린 것은 김정부의 가시돋친 목소리였다. 그 말은 방안의 긴장된 공기를 더욱 팽팽하게 하였다. 김정부와 그 일행은 분명 우리를 독립군이나 호적으로 보는 모양이었다.

방표란 호적이나 반일부대들이 흔히 쓰는 인질전술을 말하며 방표값이란 인질을 놓아줄 때 그 대가로 받는 돈을 의미한다. 김정부 자신도 호적들한테 인질로 두세번 잡혀가 모진 곤욕을 치른 사람이었다.

지주일행은 숨소리를 죽이고 나를 지켜보았다. 방표값을 엄청나게 부를까봐 속이 떨리는 모양이었다.

그때 소부대 책임자가 담배 10갑을 들고 내 앞에 다시 나타나 지양개 마을의 가게방 주인에게 값을 치르지 못하고 돌아온데 대하여 보고하면서 주인이 너무도 사양하기에 그만 담배값을 물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지주일행을 향해 우리 소부대 책임자에게 10갑의 담배를 돈을 안받고 준 지양개의 가게방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고 물었다.

『그 김세일이란 양반은 마음씨가 고운 사람입니다. 당자는 몸이 불구이고 아내가 삯방아를 찧어 그럭저럭 연명을 해가는 집안입지요. 정상이 하도 가긍하길래 돈 얼마간을 주면서 잡화상이라도 해보라고 했더니 그 돈으로 구멍가게를 차리지 않았겠습니까.』

김만두가 일행을 대표해서 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소부대책임자를 책망하였다.

『궁상스럽게 사는 집안인데 동무가 처신을 잘하지 못한 것 같소. 주인이 사양한다고 값을 치르지 않고 덜렁덜렁 돌아왔으니 그게 어디 인사가 됐소?』

이런 말이 오간 다음 놀랍게도 방안의 분위기는 일변하였다.

지주들은 무슨 충격을 받았던지 서로 의미심장한 시선들을 주고받으며 귓속말로 수군거리었다. 나의 책망이 지나치다고 나무람하는 것 같았다. 다시 말을 걸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 스산한 날씨에 노인님들이 밤길을 걷게 해서 죄송합니다. 파악이 없는 고장들을 돌아다니다보니 더러 이런 실수도 하게 됩니다. 우리 동무들이 좀 공손치 못하게 굴었다 하더라도 널리 양해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내가 이런 말로 재삼 사과를 하자 지주일행은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럼 이 부대는 무슨 부대인지? 차림새를 보면 호적 같지도 않고 또 왕년의 독립군 복장도 아닌데…』

김정부도 호기심을 가지고 나를 유심히 살펴 보았다.

『우리는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조선인민혁명군입니다.』

우리는 그 대답으로써 장백의 유지들과 첫 통성을 하게 된 셈이었다.

『인민혁명군이라니! 일전에 무송에서 왜놈들을 혼쌀냈다는 그 김일성장군 부대란 말이요?』

『네, 그 부대입니다.』

김일성장군은 지금도 무송에 계시는가요?』

『아닙니다. 김선생, 인사가 늦어서 미안합니다. 제가 바로 김일성입니다.』

김정부는 반신반의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다가 쓴입을 다시었다.

『 70이 넘은 늙은이라고 얕잡아보지 마시오. 아무렴 축지법을 쓴다는 김일성장군이 그렇게 홍안일수야 있겠소. 김장군은 우리 속인들과는 다르우다. 그분은 이빨까지도 쌍줄로 났다는 기인이지요.』

그때 김주현이 대화에 끼여들어 바로 마주앉으신 분이 다름아닌 우리 김일성사령관이라고 말하였다.

그제야 김정부는 비로소 내가 김일성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미처 장군을 몰라보아 황송하다고 하면서 양해를 구하였다.

『이왕이면 노장보다 약관의 장군이 더 좋지.』하고 그는 김하사를 향해 말하였다.

김하사도 나라를 찾는 싸움이 한두해에 끝날 일이 아닌 것만큼 건강한 청년장군이 더 믿음직하다고 대답하였다.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담화를 계속하였다.

지주들은 그날 나에게 많은 질문을 하였다. 지어 김만두는 김장군님이 「사흘천기」 를 내다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정말인가 하는 엉뚱한 질문까지 하여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엉터리없는 질문이었지만 나는 계면쩍은대로 어차피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사흘천기를 본다는 것은 허황한 소리입니다. 사흘천기를 미리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민혁명군이 인민들과 연계를 가지고 좋은 정보들을 제때제때에 잡아쥐기 때문에 정세판단을 잘할 뿐입니다. 내가 보건대는 인민이 제갈량입니다. 인민의 지지와 도움이 없이는 우리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장군이 백성들을 그렇게 하늘만치 쳐주니 송구스럽소이다. 우리도 장군의 대사를 도와주어야겠는데 무슨 일을 했으면 좋을지 방도나 가르쳐주시오.』

『사실은 우리도 장백으로 나오면서 여러분들을 만나면 그런 의논을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무장을 들고 만주광야에서 여러해동안 일제침략자들을 때려부수기 위한 혈전을 벌여왔습니다. 맨주먹으로 시작한 싸움이었지만 인민혁명군은 지금 도처에서 적을 족치고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인민이 우리를 도와주고 받들어주지 않았더라면 혁명군은 오늘과 같이 강대한 역량으로 자라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발톱까지 무장한 일본군대를 타승하고 조국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전민족이 일치단결하여 힘과 마음을 다 합쳐야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지주건, 자본가건 다 동원되어 인민혁명군을 후원해야 합니다.』

지주들은 나의 말에서 큰 힘을 얻은 것 같았다.

『나라를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 혁명을 지원할 의무가 있고 권리가 있습니다. 선생이 지양개 등판에다 수십만평의 화전을 일군 것은 돈과 쌀로 독립운동에 보탬을 주려는 것이 아니였습니까. 그래서 소작농들과 독립인사들이 뜻을 합쳐 선생의 송덕비까지 세우지 않았습니까!』

『실례이지만 장군은 이 졸부의 과거를 어쩌면 그렇게도 잘 알고 계시오?』

『선생의 함자는 선친을 통해서도 듣고 오동진, 장철호, 강진건 선생들을 통해서도 익혀두었습니다.』

『선친의 성함이 무엇이기에?』

『김형직이라고 합니다. 우리 아버님께서 팔도구와 무송에 계실 때 선생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런 변이라구야!…』

김정부는 눈을 슴뻑거리며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김장군이 김형직의 자제분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니… 이 늙은게 몇해째 초야에 묻혀 속절없이 지냈더니 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도 모르는 속물이 되고 말았소이다. 이렇건 저렇건 장군의 선친과 나는 가까운 사이였지요.… 오늘 선친이 밟고 다니던 땅에 군사를 이끌고 온
장군을 보니 그 감격을 무엇이라고 표현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소이다.』

『나도 역시 선생과 같은 애국인사를 만나고 보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동무들이 깊은 속내도 모르고 선생을 연행해왔는데 나는 그들에게 김선생은 「친일지주」나 반동지주가 아니라 애국지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선생을 위해 지양개 사람들처럼 비석을 해세우지는 못할망정 애국지주를 「친일지주」로 보는 허망한 실수야 하겠습니까.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심신을 깡그리 바쳐온 자신의 지난날들을 자랑으로 여겨야 합니다.』

김정부는 눈물을 흘리면서 거듭 사의를 표시하였다.

『김장군이 나를 애국지주라고 하였으니 이 늙은 몸은 당장 흙이 된다고 해도 여한이 없소이다.』

김만두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였다. 다른 지주들은 불안과 부러움이 엇갈리는 시선으로 김정부 부자를 바라보았다.

그 심정을 알아맞힌 김정부가 동행한 지주들을 가리키며 의젓이 말하였다.

『장군, 사실은 저 사람들도 반동지주는 아니오. 내가 장군 앞에서 목숨을 걸고 보증하오. 장군이 만일 나를 신임한다면 저 사람들을 역적으로 보지 말아주었으면 합니다.』

『선생님이 보증하는 분들이라면야 왜 믿지 못하겠습니까. 친히 보증하신다면 나도 저분들을 나쁘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지주들은 그 말을 듣자 감사하다고 하며 연방 고개를 조아리였다.

첫 담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그날의 담화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인상깊이 남아있다. 만일 그것이 친일분자들의 죄행을 조사하는 심문이었거나 그 어떤 죄상을 고발하는 성토모임 같은 것이었다면 나는 지금도 김정부 일행을 만나던 마가자의 임산 노동자합숙에서 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그날밤 자정이 다될 때까지 계속된 지양개 유지들과의 담화를 이토록 즐거운 마음으로 회고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때 그들 중 누가 소작인들을 어떻게 착취하였고 일제의 식민지정책을 어느 정도로 협조하였으며 조국과 겨레 앞에 떳떳치 못한 일을 얼마만큼 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캐여묻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지주들이 친일분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그들에 대한 신임까지 서슴없이 드러내놓았다. 그 신임 때문에 지주들은 그날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사실상 그날의 담화는 통성이나 하고 대문을 열어제낀데 불과하였다. 우리가 의논하고 싶었던 기본문제들은 죄다 앞에 놓여있었다. 우리의 목적은 우선 「조국광복회 창립선언」 정신에 맞게 지양개의 지주들을 사상적으로 인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을 물질적으로 후원하게 하자는데 있었고 그들을 통하여 장백일대의 유지들을 혁명의 관조자, 방해자로부터 혁명의 동정자, 지지자, 협조자로 만들자는데 있었다. 그러자면 아직도 그들과 많은 담화를 해야 하였다.

그러나 나는 김정부만은 인차 그의 아들과 함께 지양개로 돌려보내려 하였다.

그 다음날이었다. 내가 김정부 노인을 만나 마을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자 그는 펄쩍 뛰며 내 말을 막았다.

『장군, 나는 간밤에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였소. 이번에 내가 장군을 만난 것은 정말 천지신명의 도움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 내가 일찍부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보려고 여러모로 전력했지만 별로 해놓은 것이 없구려. 나도 이제는 늙었소. 기력도 쇠진했지만 덕행 하나만으로는 민족을 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소. 인생말년에 조국광복에 이바지할길 바이없어 모대기던 차에 이렇게 장군을 만났으니 이것이야말로 천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

내가 여기에 있어야 우리 아들 만두가 지양개에 돌아가더라도 나를 코에 걸고 원호물자들을 보내줄 수 있소. 아버지를 데려오자면 유격대에 물자들을 보내주어야겠다, 내가 산에 식량이랑, 천이랑, 신발이랑 보낸다고 해도 당신들은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하면 놈들도 할 말이 없지 않겠소.』

나는 노인의 말에 저으기 감동을 받았다. 그 말마디들이 양심의 외침으로 폐부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뜻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었다.

『노인님 심정은 잘 알겠습니다. 그 고결하신 말씀만으로도 큰 힘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여기는 노인께서 계실만한 곳이 못됩니다. 처소라고 할만한 자리도 별로 없고 또 음식도 변변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제 날씨도 더욱 추워지고 일제놈들의 「토벌」 도 심해지겠는데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셔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막무가내로 옹고집을 부리었다. 그는 자기가 유격대의 병정으로 싸우지는 못할망정 나라의 독립에 공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빼앗지 말아달라고 거듭 간청하였다. 나는 김정부 노인을 얼마간 밀영에 머물러있게 하고 그의 아들만을 먼저 마을로 돌려보내었다.

우리는 밀영에 지양개의 유지들을 위한 거처를 특별히 따로 마련해놓고 있는 성의를 다하여 그들을 돌보아주었다.

아무 것도 없는 산중생활이었으나 온 부대가 죽으로 끼니를 에울 때에도 지양개의 지주들에게만은 비상시에 쓰려고 저축해 두었던 흰쌀포대를 터쳐 밥을 지어주었다. 우리 대원들에게는 엽초를 공급하면서도 그들에게만은 특별히 가치담배를 대접하였다. 김정부는 그때 밀영에서 생일도 쇠고 1937년 설명절도 쇠었다.

그 노인의 생일이 아마 음력 12월 어느날이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도 김정부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지양개에서 아들이 마련해 보내기로 한 원호물자가 도착하기 전에는 밀영을 떠날 수 없다고 그는 고집하였다.

나는 김정부 자신은 물론, 그 일가 앞에서 죄를 짓는 것 같은 자책감을 느끼였다. 70고령의 노인을 집에도 보내지 않고 산중에서 생일을 맞게 한다면 이보다 더 몰인정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적구사업을 하는 공작원들에게 부탁하여 백미, 육류, 술 등의 식료품들을 마련해 놓았다가 노인의 생일날 전령병에게 지워가지고 그가 있는 밀영으로 찾아갔다. 진수성찬은 아니었지만 그때 우리가 김정부를 위해 차려준 생일상은 인민혁명군의 역사에서 거의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전우들의 결혼식을 축하해줄 때에도 그런 음식상을 차리지 못하였다. 그 당시 유격대원들의 결혼식이란 밥 한그릇에 국 한사발이면 고작이었다.

김정부는 생일상을 보자 눈이 휘둥그래서 물었다.

『음력설도 멀었는데 이건 갑자기 무슨 성찬이요?』

『오늘은 선생의 생신날입니다. 인민혁명군의 이름으로 선생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나는 잔에 술을 가득 부어 노인에게 권하였다.

『김선생, 이 엄동설한에 험한 산중에서 생일을 쇠게 해서 죄송합니다. 변변치 못한 생일상이지만 성의로 생각하고 많이 들어주십시오.』

술잔을 받아쥔 김정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었다.

『유격대원들이 통강냉이죽을 먹으며 나라를 찾으려고 신고하는걸 보니 이 늙은 것은 하루 세끼씩 먹는 더운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소. 하물며 이 산중에서 나같은 늙은이의 생일이 다 뭐요. 진정 장군의 은혜는 백골난망이웨다.』

『아무쪼록 나라가 독립될 때까지 장수하시기를 바랍니다.』

『나같은 늙은이야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떻겠소. 그러나 장군만은 옥체건강해서 기어이 도탄에 빠진 민족을 구원해야 하오.』

나는 그날 김정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심한 추위가 닥치고 산에 눈이 많이 내려쌓여 이번에는 우리가 김정부를 마을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노인이 심산의 눈길에서 무슨 변고라도 만날 것 같아 그런대로 밀영에서 겨울을 나게 하였던 것이다.

김정부는 넉달 남짓한 밀영생활에서 받은 인상을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그것은 인민혁명군에 대한 종합적인 인상인 동시에 그가 오랜 세월을 두고 주시해온 조선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집약적인 평가이기도 하였다.

『털어놓고 말해서 나는 지금까지 공산주의자들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아왔소이다. 그런데 김장군이 하는 공산주의는 판이하오. 같은 지주도 친일, 배일로 갈라서 친일만 치니 그런 공산주의를 누가 나쁘다고 하겠소. 왜놈들은 유격대를 공비라고 하는데 그건 다 개수작이지. …그동안 유격대의 밥을 먹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였소. 물론 결심도 새롭게 다졌구. 이제 내가 살면 몇해를 더 살겠소. 하지만 여생을 값있게 바치겠소. 죽어도 인민혁명군의 뒷시중을 하다가 죽을 작정이웨다. 이 김정부는 살아도 죽어도 김장군의 편이라는 것을 믿어 주시오.』

김정부는 밀영에 와서 우리의 적극적인 동조자가 되었다.

우리가 교양대상, 경제모연공작대상으로 삼고 데려온 지주들 중에는 농민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지주들도 있었다. 그런데 김정부가 그들을 보증해 나서고 좌상이 되어 꼼짝달싹 못하게 휘어잡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반일애국의 길에 나서도록 좋은 영향을 주었다.

김정부는 인민혁명군의 후방사업을 도와 3,000여원에 달하는 많은 자금을 내놓았으며 천과 식량을 비롯한 여러가지의 물자들을 해결해주었다. 우리는 그가 사들인 천으로 부대의 모든 대원들에게 솜옷과 군복을 다 해입히었다.

김정부의 아들은 지양개로 돌아간 다음 우리 앞에서 결의한대로 유격대에 대한 후원을 통이 크게 하였다. 그는 밀영에서 내려가자마자 관청에서 받아온 소중에서 10여마리를 팔아 많은 돈을 마련하였다. 그 당시 현 당국에서는 지양개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킨다면서 황무지를 개간하라고 그에게 신용대부형태로 수십마리의 소를 내여주었다. 그후에도 그는 현청에 가서 보증서를 쓰고 좋은 소 20여마리를 집으로 끌고 오다가 우리에게 넘겨주었으며 자기 집에 있던 재봉기까지 원호물자로 실어보냈다.

인민혁명군이 백두산 지구에 나온 후부터 적들은 장백인민들에 대한 통제와 억압을 강화하였다. 김정부의 집도 감시대상이 되었다.

어느날 김만두는 장백경찰서에 불리워가서 문초를 받았다.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당신이 김일성부대와의 연계 밑에 그들에게 많은 물자들을 넘겨주고 있다는데 그들과 어떤 연계를 가지고 있으며 후방물자들로는 어떤 것을 얼마만큼 넘겨주었는지 솔직하게 말해보라.』

김만두는 시치미를 뻑 따고 엄살부터 부리었다.

『당신들은 마치 우리가 김일성부대와 무슨 내통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해이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연계라는 것은 있지도 않거니와 또 있을 수도 없다. 아무렴 공산군 부대가 우리와 같은 대지주를 끄나불로 쓰겠는가. 지금 우리 아버지가 공산군 밀영에 억류되어 있다는 것은 당신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구원하려고 그들에게 물건을 좀 가져갔는데 어쨌단 말인가. 나는 집재산을 다 들이밀어서라도 아버지를 구원하고 싶은 일념 뿐이다. 당신들이 만일 그런 경우를 당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김만두의 말이 사리에 맞는다고 생각한 경찰은 그이상 더 심문하지 않고 그를 놓아주었다.

김정부 부자는 이처럼 혁명군을 원호하느라고 전답과 역축을 많이 팔았다.

김정부는 독립군에 식량과 자금을 대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여 지주가 되었는데 독립군을 위해 다 쓰지 못한 재력과 금력을 인민혁명군의 뒷시중을 하느라고 모조리 소비하였다. 지주, 자본가들에게 있어서 생명으로 되고 있는 치부 그 자체를 단념하고 그 치부를 끊임없이 뒷받침해주는 재산을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바친다는 것은 사실 말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 김정부의 애국심의 심도가 있고 항일혁명에 이바지한 공로의 높이가 있다. 나는 항일혁명 전기간 김정부와 같은 애국충정을 품고 그처럼 통이 크게 우리를 지원해 준 대지주를 별로 보지 못하였다.

훗날 밀영에 와서 그가 눈으로 보고 심장으로 느낀 것의 일부가 「삼천리」라는 잡지에 나와의 회견기 형식으로 발표되었다.

그 회견기의 일부 대목을 아래에 그대로 소개하려고 한다.

『「…김일성」 이라 하면 국경일대에선 너머나 알니엇고 신문지나 본 사람은 누구나 기억하리라.

총사장이란 이름을 가지고 ×에 가까운 만인, 조선인 부하를 이리저리 통제해가며 습격싸흠. 완강히 군대와 저항해가며 산중소굴을 지휘해가는 그! 은근히 동의자를 규합하며 이일저일을 꿈꾸는 그! 그는 과연 어떤 인간인고?

김정부옹은 많은 흥미를 가지고 이 수수꺽기의 인간을 회견하였든 것이다.

후리후리한 키, 우락부락한 말소리 음성을 보아 고향은 평안도인 듯. 예상보다 연령은 너머나 젊은 혈기방장의 30미만의 청년. 그는 만주어에 정통, 어대까지 대장이란 표적이 없고 복장, 식음에까지 하졸과 한가지로 기거를 같이하며 감고를 같이하는데 그 감화력과 포용력이 잇는듯하게 보엇다.

「노인님 추운데서 얼마나 걱정되십니까.」그는 이렇게 부드러운 인사를 들이고는…

「… 우리 젊은 몸이 따뜻한 자리 평안한 생활을 누가 싫여하겠오. 2∼3끼씩 보리죽도 못얻어먹어가며 이 고생을 달게 하는 것은 다 그리되어 그리것이요. 나도 눈물도 있고 피도 있고 혼도 있는 인간이요. 그러나 이 추운 겨울을 우리는 이렇게 도라다니는구려.」

그는 생각든바와는 좀 달느게 비적수괴답지 안케 음성도 조용하고 태도도 우락부락하지 안엇다.

그는 김옹을 여러가지 말노 위무해가며 지금은 엄동이라 설중에 촌보를 옴길 수 없고 새봄에는 꼭 노인님을 환가시킬터이니 안심하라고 하고 부하간수에게 특별우대하기를 명하였다고 한다.…』

이 글은 혜산에 있던 박인진의 제자인 양일천이란 사람이 썼다. 김정부는 일본당국의 감시와 통제 속에 있는 언론 앞에서 자기의 진심을 비교적 솔직하고 대담하게 고백한 것 같다. 인민혁명군의 움직임에 대한 보도관제가 심한 때에 잡지 「삼천리」 가 이런 정도의 기사를 실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김정부는 나의 권고대로 왕청하마탕에 이주하여 살다가 거기서 해방의 날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김정부를 만날 때 20대이던 나도 이제는 어언 팔순이 넘었다. 그러니 김정부의 그 당시 나이보다 10년 정도 더 든 것으로 된다. 80고개에 오르고보니 유격대의 밀영지에서 그가 겪은 신고가 자기자신의 신고처럼 더 절실히 헤아려지게 된다. 있는 정성을 다하여 노인을 공대하느라고 하였지만 그 정성에도 빈 구석은 많았을 것이다. 그를 더 따뜻하고 푸짐하게 대접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나는 김정부 자신을 위해서는 천묘도 해주지 못하고 비석조차 세워주지 못하였다.

돌이켜보면 백두산에 처음 나왔을 때 우리 부대는 매우 어려운 형편에 놓여있었다. 돈이 있는가, 쌀이 있는가, 천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김정부가 많은 것을 해결해주었다. 그것은 독립운동의 선배로서 조선의 참된 아들딸들에게 바치는 일생일대의 선물이었다. 나는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다.

김정부와 같은 유산자, 대지주가 발휘한 양심과 애국적 장거, 그것은 일제를 반대하는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쳐가는 데서 무시하지 못할 공헌으로 되었으며 우리의 위업에 대한 힘있는 지지로 되었다. 1920년대와는 달리 무력항쟁이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1930년대에 와서 지주나 자본가들이 우리를 물질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와준다는 것은 생명까지도 내대야 하는 모험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김정부는 그것을 해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김정부를 애국자로 보는 근거이며 수십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를 잊지 못하는 이유이다.

우리 나라의 절반땅에는 지금도 지주, 자본가들이 남아있다. 그들 중에는 억대의 자산가들도 있다고 한다. 반동적인 자산가들도 있겠지만 애국적인 자산가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통일된 연방국가에서 지주, 자본가들을 대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입장과 태도는 어떠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애국지주 김정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