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주석님 서거 10주년 추모대회에 다녀와서

김현환 (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김일성주석님께서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만사를 제쳐놓고 평양으로 달려가 주석님의 영구 앞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주석님의 서거일 마다 어디에 있건 개인적으로나 단체로 추모식을 가졌다. 주석님께서 창시하신 주체사상은 내 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고 그 분의 생애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주석님께서 서거하신 후 이북의 인민들은 많은 시련의 고비를 넘겼다. 그들만이 지켜온 주체사회주의를 포기할 것이냐 지킬 것이냐 하는 기로에 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북의 민중들은 주석님의 유훈을 받들고 그들의 생명인 주체사회주의를 잘 지켜 내었다. 주석님께서 서거하신 후에도 나는 자주 이북을 방문하여 그들의 고난을 목격하고 눈시울을 적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동구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1991년 소련이 붕괴된 후 이북은 거대한 시장을 잃었고 거기다 주석님 서거 후 연이어 몰아닥친 자연재해로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감행해야 하였다. 그러나 이북의 민중은 지도자를 원망하고 분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일을 더 달라고 하였고 청년들은 자원하여 평양-남포간 도로를 건설하겠다고 나섰다. 군인들은 칠보산과 구월산, 용문대굴을 비롯하여 많은 관광지를 꾸려 놓았으며 중소형 발전소를 건설하였고 여기저기 어려운 토지정리사업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전에처럼 배급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이북의 민중은 정부를 원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동안 주석님과 국방위원장님의 영도하에 얼마나 자신들이 근심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아왔는지를 회고하며 사회주의를 버릴 것이 아니라 더욱 힘차게 지켜야겠다는 결심을 다지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해 주려고 일생 노고를 바치신 주석님을 더 잘 모시기 위하여 금수산기념궁전을 훌륭하게 꾸려 놓았고 주석님의 유훈을 관철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나는 미국에서 같이 간 일행들과 함께 7월7일 순안 비행장에 내리자 만수대 언덕에 모셔진 주석님 동상으로 향하였다. 거기에는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이 각처에서 주석님께 인사하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외국인들도 눈에 띄었고 어린애들도 많이 보였으며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들도 많이 보였다. 집단별로도 줄을 서서 방문하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들은 안내자가 세워주는 대로 어느 큰 대열의 앞에 서서 꽃바구니를 동상 앞에 바치고 주석님께 정중한 인사를 드렸다. 우리는 숙소에 짐을 풀고 오늘과 내일 추모기간 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기로 하였고 엄숙한 마음으로 지낼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다.

   주석님 서거 10주기가 되는 7월8일 우리들은 중앙추모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어느 장소에 집결하여 평양체육관으로 향하였다. 검문검색이 심한 것으로 보아 김정일국방위원장님께서 추모 모임에 참석하시지 않겠나 짐작하였다. 내 짐작대로 국방위원장님께서 참석한 가운데 중앙추모모임이 시작되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김영남 위원장이 국방위원장님의 위임을 받아 추모사를 하였다. 주로 주석님의 생애와 업적에 대하여 소상히 말씀하셨다. 오후에는 금수산 기념궁전을 찾아 주석님께 직접 인사를 드렸다. 나는 여러 번 이 곳을 방문하였지만 늘 살아 계시는 주석님께 인사드리는 자세를 취하였다. 나는 가끔 우리 일행을 대표하여 인명록에 글을 남겼는데 그 때 마다 살아 계신 주석님께 직접 인사를 드리고 대화하는 형식으로 글을 남겼다.

   우리 일행은 다음 날 새벽에 비행장으로 나가 일본 총련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백두산으로 향하였다. 주체의 여명이 밝아온 혁명의 고향 백두산에 직접 가서 주석님의 혁명정신과 선군조선의 사상과 기백, 의지를 배우고 더 일을 잘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삼지연에 도착하여 주석님 동상에 인사를 드리고 그 주변에 조각된 군상들에 대한 해설을 강사선생으로부터 들었다. 삼지연 읍을 지나 숙소인 베개봉 호텔로 향하였다. 삼지연 읍은 문자그대로 천지개벽을 하였다. 삼지연 지역을 스위스의 제네바처럼 꾸민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베개봉 산마루를 향하여 곧게 난 대로 옆에 즐비하게 늘어선 별장같은 아름다운 현대 주택과 공공건물들이 들어서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였다. 작년 겨울 11월에 여기를 방문하여 눈 속에 건설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제는 거의 완성이 되어 눈앞에 새로운 선경의 도시가 펼쳐져 있어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해외동포들이 방문할 때마다 우리를 안내해 주는 해외동포영접국 지도원들도 여럿이 지원하여 이곳에 와서 건설을 하였다고 한다. 여기의 모든 주택들과 공공건물들은 전기난방화가 이룩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건설과정에 자원건설자들은 새집, 새 마을, 새거리들만을 세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백두산형의 선군시대의 새 인간들, 백절불굴의 빨지산으로 키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백두산의 장군 김정일위원장님과 함께 끝까지 혁명을 할 선군혁명동지로 성장해 갔던 것이다.

   우리 일행은 호텔로 가기 전에 <백두관>에 들러 현대식 컴퓨터로 백두산일대를 설명해 놓은 녹화도 보고 강사선생의 해설도 들어 백두산 전체에 대한 윤곽을 갖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호텔에 여장을 풀고 호텔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감자로 만든 떡과 만두 그리고 산나물을 맛있게 먹었다. 감자가 너무 맛있어 흰밥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대홍단 감자농장이 있어 감자를 많이 생산한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감자로 배를 채우고 정일봉으로 향하였다. 정일봉 바로 밑에 주석님께서 항일투쟁시기에 비밀 캠프로 사용하시던 밀영이 있었고 그 옆에 또 하나의 밀영이 있었는데 그 곳이 바로 김정숙여사께서 김정일위원장을 낳은 고향집이었다. 일전에 내가 쓴 글 [김정일위원장은 어떤 분이기에 김일성주석님을 계승했는가]에서 언급한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이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나무로 만든 칼, 총, 쌍안경, 그리고 셈놀이 나무토막 등이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 이튿날 우리 일행은 새벽 3시에 일어나 백두산 해돋이를 구경하기 위하여 천지로 향하였다. 장마철인데도 날씨가 청명하였다. 호텔에서 1시간 반정도 달려 천지에 도착하였다. 장마철인데도 다행히 천지가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날씨가 맑았다. 처음 백두산을 방문하는 몇 사람은 "야!" 소리를 내며 사진 찍기에 바빴다.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가서 조종의 산 백두산에 업드려 천지를 향하여 3번 큰절을 하였다. 나의 성조님들인 환인, 환웅, 단군님들께와 김일성주석님께, 그리고 나의 조상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나는 조금 높은 쪽으로 올라가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마침 동쪽에서 찬란한 태양이 떠올라 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태양이다!" 소리 쳤다. 모든 사람들이 동쪽을 향하고 사진을 찍어댔다. 백두산의 해돋이를 보다니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나는 여기 백두산에서부터 통일조국의 찬란한 해돋이가 밝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나는 백두산에 십여 차례 왔는데 올 때마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성산이며 참으로 신비하다는 생각을 늘 하곤 하였다. 계절에 따라 백두산은 그 아름답고 웅장한 자태를 맘껏 들어내 보여주었다. 나는 백두산의 정기와 찬란한 아침 태양의 빛을 받아 기운이 용솟음쳐 옴을 느꼈다.

   우리 일행은 천지로 내려갔다. 일부는 2116개의 돌로 만들어진 계단으로 걸어 내려갔고 나와 일부는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갔다. 만병초가 여기저기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천지에 이르자 우리들은 맨발로 물 속에 들어가 누가 가장 오래 머무르나 내기를 하였다. 물이 너무 차서 10초를 견디지 못하고 나오는 사람도 있었고 5분 넘게 참는 사람이 3명이나 있었다. 나는 한 1분 정도 있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나왔다. 그 곳에서 우리 일행을 만나 준 분은 자연과학 박사님으로 그곳에 몇 명의 연구사와 함께 백두산지역의 날씨와 자연생태, 등에 대해 연구하는 사업을 한다고 했다. 그 분은 직접 연구사들과 함께 우리 일행을 위하여 산천어를 잡아 두었다가 회를 직접 떠서 우리들에게 주었다. 그는 천지 못에 고무배까지 띄워 우리를 태워주었다. 그의 소박한 봉사정신에 우리 일행은 모두 감사를 표했다. 이북사람들은 이처럼 지위 고하, 나이를 막론하고 남을 위하여 격식을 갖추지 않고 솔선수범하여 봉사하는데 익숙해 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몇 개의 밀영과 아름다운 이면수 폭포를 참관하였다. 우리가 백두산을 떠나려 하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감명깊은 백두산 참관이었다. 나는 비행기에 타자 눈을 감고 최근에 박현철 시인이 쓴 백두산 서사시를 조용히 읊어 보았다.

   "백두산을 해발고의 높이로 재지 마시라
    그 높이는
    억천만 번 죽더라도 싸워 이기는
    백절불굴의 혁명정신의 높이
    오직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혁명의 만년 재부의 높이
    위대한 장군님 안겨주신
    선군조선의 기상과 위력의 불멸할 높이여라."

   잠시 졸다 보니 벌써 순안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우리 일행은 평양에 도착하여 호텔에서 식사를 한 후 저녁에 술 한 잔 하러 평양 교외의 어느 식당으로 갔다. 젊은 여자 봉사원들이 아코디온을 가지고 와서 노래를 불러 주었고 우리들도 노래를 불렀다. 식당의 사장선생도 참가하여 우리와 같이 어울리며 노래를 불렀다. 그는 6살 때 일본에서 이북으로 온 일본 교포로서 김책공대를 나온 인재였다. 부인도 일본 교표라고 했다. 그는 중국 심양에 식당을 새로 내오려고 하는데 정부에서 왜 중국에 식당을 하려고 하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돈을 더 벌어 조국의 강성대국건설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했더니 쉽게 정부가 허가를 해주었다고 하면서 그는 문득 우리를 보면서 "우리 나라는 진리가 통하는 나라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아마 이남이나 일본에서라면 그런 사업상 허가를 받으려면 관리들에게 돈도 써야 하고 아첨도 해야 하지만 이북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그 말이 나의 뇌리에 사무쳤다. "진리가 통하는 나라"를 언제 우리가 경험했던가! 우리가 경험한 나라는 대개 "돈이 통하는 나라" 아니면 "권력과 빽이 통하는 나라"였다. 일반서민들이 무엇을 하나 하자면 참으로 힘든 나라가 이남과 미국 같은 자본주의 나라들이다. 도대체가 진실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우리들은 살아왔다. 현재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조금 다른 의견을 내놓으면 흑백논리로 정죄하기에 바쁜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들은 교육을 받으며 살아왔다. 심지어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그 내용도 알지도 못하게 하면서 반공을 국시로 삼고 그것을 암기하라고 했던 암흑시대도 있었고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고 정권을 잡은 살인마들이 조폭문화를 강요한 때도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진리가 통하는, 민중의 소리가 통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 이 평범한 식당의 사장선생이 "이북은 진리가 통하는 나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 동안 이북을 여러 번 방문하였지만 이 사장선생이 지적한 표현처럼 이북 사회주의사회의 특징을 잘 표현한 말을 찾지 못하였다. 결국 우리가 세우려고 하는 이상국가라는 것이 결국은 <진리가 통하는 나라>가 아니겠는가. 나는 식당에서 기분 좋게 노래부르고 놀다가 호텔로 돌아와 사장선생이 한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며 왜 이북이 진리가 통하는 나라로 되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우선 이북은 최고 지도자 자신이 민중 속에 직접 들어가 민중과 더불어 진리를 찾아내고 진리를 지키며 실천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이북의 최고지도자였던 김주석님과 현재의 최고 지도자인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은 늘 민중 속에 들어가 민중들의 자주적인 요구와 이해관계를 찾아내어 그것을 반영한 의식형태인 자주적인 사상의식을 정립하고 그것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실정에 맞게 그것을 정책에 반영하는 민중중심의 정치, 즉 인덕정치를 해왔다. 몇 명 안 되는 특권계급의 요구와 이해관계가 아니라 절대다수의 민중의 자주적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의식인 자주적인 사상의식이 바로 진리가 아닐까? 김정일 위원장은 이 자주적인 사상의식을 구현하고 있는 인덕정치를 방해하는 자들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항상 민중 속에 들어가 민중과 더불어 살며 그들의 진정한 자주적 요구와 이익을 실현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는 주석님께서 서거하신 후 3개월이 되오는 1994년 11월1일 주석님께서 자기에게 직접 보여준 사랑과 믿음의 정치, 인덕정치를 반드시 실현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그것을 방해하려는 외부의 적인 제국주의와 내부의 적인 일꾼들의 세도와 관료주의, 부정부패에 대하여 세밀하게 분석한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는 노작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민중이 자기운명의 주인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으로 등장한 자주성의 시대에 자주성을 위하여 투쟁하는 민중의 이념이며 혁명적 기치인 사회주의는 "과학"으로서 제국주의자들과 반동들이 아무리 파괴하려고 하여도 "진리는 가리울 수 없고 말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단호히 선언하였다. 그는 이 노작에서 왜 사적 소유제도의 산물인 개인주의 사회에서 진리가 통할 수 없는지, 왜 민중의 생명인 자주성이 실현될 수 없는지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사적 소유와 그에 의하여 산생되는 개인주의에 기초한 사회는 불피코 사회를 적대되는 계급으로 분열시키고 계급적 대립과 사회적 불평등을 가져오며 인민대중에 대한 소수 지배계급의 착취와 압박을 동반하게 된다."
   따라서 진리가 통하는 사회가 되려면 "개인주의에 기초한 사회로부터 집단주의에 기초한 사회, 사회주의, 공산주의에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 인류사회발전의 역사적 총화"라고 김위원장은 진단하였다. 자본을 소유한 소수의 지배계급이 대다수의 민중을 착취하고 압박하는 개인주의사회에서는 지배계급들의 세도와 관료주의, 부정부패로 민중들의 진리의 외침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사람의 인격적 가치가 교환가치로 전환되고 그것이 돈과 재물에 의하여 평가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정치가 "금권과 결합된 가혹하고 교활한 억압정치, 약탈정치"로 되기 때문에 진리와 사랑, 믿음과 자주성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 오로지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이 민중의 손에 장악되여 있는 사회주의사회에서만 특권계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민중의 소리가 수렴될 수 있고 진리가 통할 수 있으며 정치도 사랑과 믿음의 정치, 인덕정치로 될 수 있다고 김위원장은 이 노작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사회로 가는 과도기 사회인 사회주의사회에서도 낡은 사상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고 외부로부터 낡은 사상을 부식시키려는 제국주의의 "사상문화적 침투책동"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간부들 속에서 "세도와 관료주의 부정부패 현상을 철저히 뿌리뽑기 위한 교양사업과 사상투쟁을 계속 줄기차게 벌려나가야 한다."고 그는 이 노작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이북 사회주의사회에 사는 모든 성원들은 "서로 믿고 사랑하고 도우면서 화목한 대가정을 이루고 다같이 삶의 보람과 행복을 누리는 것"이 이북 사회의 "참모습"이지만 "새 세대들의 장래가 부모들의 돈주머니에 따라 좌우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그들이 사회적 불평등과 사회악의 희생물로 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그는 마음 아파하였다. 그러나 민중중심의 사회주의사회인 이북에서는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동지적 단결과 협조,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가장 훌륭히 구현하며 정치도 사랑과 믿음의 정치," 즉 "인덕정치"로 전환되기 때문에 진리가 통할 수 있고 민중도 "정치의 대상"으로부터 "정치의 주인"으로 되기 때문에 사랑과 믿음을 받을 수 있다고 그는 이 노작에서 분석하고 있다. 나는 내가 여행할 때마다 늘 가지고 다니는[사회주의는 과학이다]는 소책자를 되풀이 읽으면서 왜 우리가 만난 식당의 사장선생이 이북은 "진리가 통하는 나라"라고 한 그 이유를 잘 알게 되었다.

   다음 날 나는 황해도 인산군에서 온 나의 어머니와 꼭 닮은 외삼촌을 호텔에서 만났다. 외삼촌을 모시고 같이 온 외사촌 누이동생 봉녀는 나를 보자 "오빠!"하고 외쳐대며 내 가슴에 안겼다. 나는 외삼촌의 손을 잡고 포옹을 하였다. 나는 이럴 때마다 내 온 몸이 짜릿해 지는 감격을 맛보며 핏줄의 중요함을 새삼 느끼곤 한다. 순박한 황해도 시골 노인인 삼촌과 시골처녀인 봉녀를 보면 순수한 조선사람을 만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자본에 찌들지 않은 참된 인간형을 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과 호텔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올해 농사가 잘 되었는지 살기는 어떤지 물었다. 농사도 잘 되고 생활도 점점 나아진다고 했다. 나는 그들을 평양역전까지 바래주었다.

   그들을 바래주고 터벅터벅 걸어 호텔로 돌아오면서 김포에서 외삼촌을 만날 날만을 기다리고 계신 83세의 나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가슴이 저려왔다. 큰아들인 나는 이북을 자주 방문하면서 그때마다 인천 국제공항을 통과하지만 이남 정권이 비자를 주지 않아 노모도 마음대로 만나지 못하고 있는 처량한 신세이다. 통일운동을 한 죄 때문이다. 같이 여행하던 다른 사람들은 쉽게 인천공항을 빠져나가 가족의 품으로 가는데 나만 남아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심정은 착잡하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나도 자유스럽게 이남을 드나들게 될 것이다. 그 날이 머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며 미국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