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 고 록]

  

 제 1 부
 

항  일    혁  명

( 5 )

제14장   장 백 사 람 들


2.   
이     제      순

 

우리는 백두산 지구에 나오자마자 밀영건설을 빠른 속도로 추진시키는 한편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는 주민지대들에 조국광복회 조직을 내오기 위한 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조국광복회망 건설의 첫 대상지로는 백두산을 직접 끼고 있는 장백지구와 국내의 갑산지구가 선정되었다. 

조직건설의 어려운 과업을 용의주도하게 수행해 나가자면 생명을 걸고 우리 일을 도와줄 수 있는 믿음직한 인물들을 찾아내야 하였다. 

나는 서간도에 진출한 직후 소부대를 파견하면서 이동학 중대장에게 재삼 강조하였다. 동무네의 기본임무는 인재발굴이다, 장백땅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믿음직한 조력자를 찾아내라, 적을 치는 것은 부차적 임무이다, 인재탐색에 주력하면서 싸워 이길만한 적만 치고 그렇지 않으면 피하라고 일러주었다. 

이동학은 이 과업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그는 이제순을 데리고 밀영에 돌아왔다. 이동학이란 사람이 몹시 덤비는 것 같지만 내속은 아주 찬찬한 묘한 사람이었다. 말을 어떻게나 빨리 해대는지 처음 듣는 사람들은 정신이 얼떨떨해질 지경이었다. 그는 늘 빠른 말씨로 대원들을 볶아댔다. 그래서 동료들은 그에게  「보따지」 라는 별명을 붙이었다.  「보따지」라는 별명은  「복닥질」 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 같다. 

이동학은 중대를 데리고 장백땅을 한바퀴 빙 돌다가 20도구 등판에서 청소년들의 아침체조를 지도하는 젊은 촌장을 만났다. 그 촌장이 바로 이제순이었고 아침체조를 하던 동네가 신흥촌이었다. 이제순은 촌장인 동시에 야학선생이었다. 신흥촌 사람들은 늙은이건 젊은이건 부녀자이건 할 것 없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자기네 촌장을 가리켜 우리 선생, 우리 선생 하면서 존경하였다. 

이동학은 이제순이 어떤 사람인가를 가늠해볼 작정으로 그에게 중대가 2∼3일 정도 소비할 수 있는 식량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촌장은 중대성원들이 다 지고도 남을만큼 엄청난 양의 식량을 잠깐사이에 모아놓고 밀영까지 져다 드리겠다고 자청해나섰다. 말솜씨도 좋았지만 통이 또한 이만저만 크지 않아서  「보따지」 는 초면의 이 촌장에게 대뜸 반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후에 경솔하다는 비판은 좀 받더라도 이제순을 사령부에 직접 소개하고 싶었다. 그래서 촌장이 짐을 져다 주겠다고 할 때 그 청을 얼른 받아들이었다. 

촌장이 마을사람들을 휘동해가지고 자진해서 쌀짐을 지고 갔다는 사실이 적들에게 알려지면 시끄러운 일이 생길 것 같아  「보따지」 네 대원들은 이제순에게 포승을 지워 마치 큰 죄인이라도 호송해가는 것 같은 흉내를 내었다. 

신흥촌을 떠난 식량운반대가 밀영에 도착한 것은 사흘 후 였다. 밀영에서 20∼30리 밖에 안되는 곳에 다달았을 때 이동학이 마을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내려고 하자 이제순은 자기를 밀영까지 따라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동학은 이제순의 마음을 중떠보려고 일부러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였다. 

『그건 곤란하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비밀기지에 데리고 들어가겠는가?』

그러자 이제순은 이동학의 팔을 잡고 아주 기발한 제의를 하였다. 

『그렇다면 나를 놓고 한 번 시험을 쳐보는 것이 어떤가? 가령 목숨까지도 걸고 풀어내야 하는 일감을 맡길 수 있지 않는가.』

이동학은 촌장의 제의를 받아들여 3일 동안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통버선 5켤레와 행전 5짝을 만들어오라고 하였다. 당신이 버선과 행전을 만들어가지고 제시간에 돌아오면 밀영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요, 제시간에 돌아오지 못하거나 빈손으로 돌아오면 불합격이라고 하였다. 

이제순은 그까짓거야 못해내겠는가, 그런 문제라면 얼마든지 합격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신흥촌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내와 장모를 시켜 하룻밤사이에 아내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한 채밖에 없는 이불을 뜯어 5켤레의 버선과 5짝의 행전을 만들어가지고 접선장소에 다시 나타났다. 

이동학은 그제서야 이제순을 부둥켜안고 통성을 하였다. 그는 자기의 별명이  「보따지」 라는 것과 고향이 어디라는 것까지 친절하게 대주고 나서  『결국은 내가 당신네 이불을 거덜나게 했구려』  하였다. 이제순은 시험에 합격한 셈이었다. 

내가 백두산 지구를 한바퀴 선회하고 돌아오자 이동학은 신흥촌이라는 동네에서 좋은 청년 한 명을 물색하였는데 사령관동지께 소개해드리고 싶어 밀영까지 데려왔다고 하면서 이제순에 대한 자랑을 한바탕 늘어놓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제순은 밀영에 들어와 지내는 며칠동안 대내출판물들을 읽느라고 잠시도 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어찌나 이악하고 직심스러운지 그사이 유격대원들을 따라다니며 무기분해결합법과 방위판정법까지 다 배워두었다고 하였다.

『사람이 똑똑하고 대가 바른데다가 혁명을 하자는 열의도 높고 정열가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푸접이 또 어찌나 좋은지 며칠사이에 우리 동무들을 다 친해놓았습니다. 군중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동학의 견해가 과장된 것이 아니라면 신흥촌 촌장에 대한 총적평가는 좋은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제순은 여자처럼 곱살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언제나 새물새물 웃는 것 같은 눈이었다. 겉보기에는 상당히 부드럽고 유약한 사람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강쇠처럼 굳건한 속대와 바위와 같이 드놀지 않는 신념과 냉철한 사고력을 가진 강의하고 이성적인 인간이었다.

빈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이제순은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하였다. 가난 때문에 학교문전에도 가보지 못하고 어머니를 도와 남의 집 밭들을 돌아다니며 삯김을 맸고 10살 적부터는 이웃마을 지주집에 가서 머슴살이를 하였다. 11살 되던 해의 어느날 저녁 그가 지주집 머슴방에서 짚신을 삼고있을 때 문득 어머니가 찾아왔다. 몹시 보고싶었던 어머니였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노전머리에 앉을 때도 눈을 들지 않았다. 너 왜 그러느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그냥 짚신만 삼았다. 가련한 어머니는 아들의 다정한 말 한마디도 들어보지 못 한 채 머슴방을 나섰다. 그제야 이제순은 일손을 놓고 뒤쫓아가서 울먹거리며 말하였다.

『어머니, 다시는 오지 말아요. 어머니가 오면 지주집에서 숙봐요. 뭘 얻어가지러 왔나 해서 업신여긴단 말이예요!』

자식의 심정을 비로소 알게 된 어머니는 아들을 부둥켜안은 채 길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네가 보고싶어도 내 다시는 지주집에 나타나지 않으마 하고 약속하였다.

이제순은 정규교육을 받아보지 못하였으나 독학으로 중등 정도의 지식까지 소유한 성실한 노력가였다. 14살까지 머슴을 산뒤에 몇해동안 야학방에 다니었고 형한테서 국문을 배우고 장가를 간 다음에는 옥편을 끼고 다니면서 자습하였다. 학교물을 먹어보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긴 이제순은 신흥촌에 오자 화전민의 자식들을 위해 야학을 열고 정열적인 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제순은 고향에 있을 때 소년회와 청년동맹에 망라되어 몇 해 동안 조직생활을 하였다. 형이 감옥으로 끌려간 다음부터 일제경찰들은 그에게도 감시를 붙이었다. 끊임없는 박해와 탄압 속에서 신변의 위험을 느낀 이제순은 1932년초에 처가가 있는 갑산쪽으로 이주하였다. 그 무렵이 바로 박달을 비롯한 선각자들이 이 일대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한창 벌리고 있을 때였다. 이제순은 그들과 함께 오풍동 일대에서 비밀독서회를 뭇고 새 사조를 연구하는데 달라붙었다.

비밀독서회 성원들은 수난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의로운 투쟁에 한 몸을 서슴없이 바칠 각오로 충만되어 있었으나 투쟁방략을 찾지 못해 안타깝게 모대기었다. 그들은 옳바른 투쟁진로와 명망높은 지도자를 찾으려고 방방곡곡에 줄을 놓았다. 산으로 떠돌아 다니는 농조, 노조 출신의 선각자들과 주의자들을 더러 만나기는 하였으나 그들에게는 명백한 투쟁노선이나 전술이 없었다.

이제순의 시선은 조선인민혁명군에 쏠리었다. 1934년경부터는 인민혁명군이 장백지방으로 나온다는 풍문이 국내에까지 전파되었다. 이제순은 훈춘쪽으로 가려던 본래의 계획을 버리고 장백현 20도구 천가덕으로 넘어왔다. 훗날 그 천가덕을 개척한 이주민들은 자기네 마을에 신흥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었다.

신흥촌에서 보천보까지는 직선거리로 얼마 멀지 않았다. 그 마을에서는 베개봉, 소백산, 곤장덕과 함께 백두산도 볼 수 있었다. 백두산을 바라볼 수 있는 고장에서 산다는 것, 이 한가지 사실은 이방의 서름서름한 풍토앞에서 망향의 슬픔을 금치 못하던 이제순에게 신비스러운 안도감을 주었다.

그러나 관헌들의 압제와 생활고는 그림자처럼 이주민들을 따라다니었다. 소작료와 부역, 가렴잡세로 불쌍한 화전농들은 허리를 펴고 하늘을 쳐다볼 경황도 없었다. 지주들은 명절때마다 소작농들에게 뇌물을 강요하였으며 땔나무도 전적으로 소작농들이 맡아 해오게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강건너 조선땅에 있는 가림리, 천수리의 경찰놈들까지 장백지방의 조선인주민들에게 화목을 해내라고 호통질하였다. 순사 나부랭이들은 민가를 시찰할 때마다 농민들의 닭둥우리에 손을 넣어 닭알을 꺼내먹곤 하였다. 화전농들의 식탁에는 보리밥이나 강태죽만 올랐다.

60여호를 헤아리는 신흥촌의 농가들에 소가 있는 집이 단 하나도 없었으니 농민들이 얼마나 끔찍스러운 고역을 치르었겠는가. 농민들은 모두가 인력으로 보습을 끌었다. 어떤 젊은 부부가 봄갈이를 할 때에 있은 일이라고 한다. 그들은 소도 없이 하루종일 후치질을 하였다. 처음에는 아내가 보탑을 잡고 남편이 소를 대신하여 보습을 끌었다. 그 다음에는 아내가 보습을 끌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보습은 땅에 박힌채 움쩍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답답한 나머지 그만 고향에서 소로 밭을 갈던 타성대로 『이랴!』   하고 고함을 질렀다. 남편이 자기를 부림소로 여긴다고 생각한 아내는 분을 참지 못하여 밭머리에 엎드려 오열을 터뜨리었다.

그러자 남편은 보탑을 놓고 내가 그만 실언을 했으니 용서하구려 하면서 곁에 주저앉아 이놈의 두더지같은 농꾼신세 언제면 끝장이 날까 하고 한탄하였다.

이러한 생활처지는 신흥촌 농민들을 민족적으로나 계급적으로 쉽게 각성시킬 수 있는 바탕으로 되었다.

신흥촌 주민들의 대부분은 함남북 일대에서 이주해온 영세농민들과 농조와 청년동맹을 비롯한 여러갈래의 대중단체들에서 반일운동에 관계하다가 새로운 활동무대를 찾아 이향출국의 길을 택한 망명가들이었다. 훗날 조국광복회 신흥촌 지회와 그곳 당특별지부에서 사업한 김병철도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망명해온 사람이었다.

그는 국내에 있을 때 동지들에게 늘 농조조직이 투쟁에서 성과를 거두려면 반드시 조선인민혁명군의 지도를 받을 수 있는 통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과 혁명군의 지도가 없이는 국내투쟁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완강하게 주장하였다. 물론 그 주장은 많은 동지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혁명군의 줄을 어떻게 찾겠는가고 하면서 그 주장을 시답지 않게 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라도 유격대를 찾아가기로 결심하고 자기의 친지들이 활동하고 있는 장백현 신흥촌으로 단호히 이주하였다.

그는 국내인사들 가운데서 해외의 무장투쟁과 국내정치투쟁의 불가분리성과 일원화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하고 공리공담의 울타리를 벗어나 적극적인 자세로 그것을 실현하였을 뿐 아니라 혁명군과의 연계를 성사시킨 다음에는 우리의 노선을 관철해 나가는 길에서 생명까지 바친 선각자, 투사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이주관, 이주익을 비롯한 조선의 애국자들은 1930년대 초에 장백지방에서 재만한인 적색농조를 결성하고 그에 의거하여 대중투쟁을 벌이었다. 미신, 도박, 조혼, 매혼 타파와 문맹퇴치와 같은 계몽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농조의 활동은 점차 소작쟁의나 강제부역을 반대하는 경제투쟁의 단계를 거쳐 군용도로건설을 반대하고 군사시설구축을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것과 같은 반일정치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우리가 장백땅에 조국광복회 조직을 내오기 전까지 신흥촌과 주변의 대중운동은 그 적색농조가 주관하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제순은 백지장처럼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생활경력도 비교적 단순하였다. 그것은 그가 행세식 운동자들과 파쟁분자들의 그릇된 사고와 투쟁방법에 오염당하지 않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우리는 오히려 그 단순성을 값있게 여기였다. 다른 때가 끼지 않는 순결한 머리에 이식되는 사상이나 주의주장은 흐리터분해지지 않는 법이다.

반일애국운동을 하는 과정에 이제순이 터득했다고 하는 인생철학 가운데는 흥미있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서 제일 힘든 것은 선구자,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말하여 남이 한가지를 할 때 두가지, 세가지를 하거나 남이 한걸음을 걸을 때 두걸음, 세걸음을 걷는 것이 제일 뻐근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에는 사실 심오한 진리가 있었다. 그것은 남들의 앞장에서 사회개조의 어려운 길을 개척해가는 혁명가의 고충을 반영하고 있는 진리였다.

『농사도 짓고 촌장노릇도 하고 혁명도 하느라면 고생이 막심하겠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자 이제순은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고생이 오히려 저에게는 낙으로 되고 있습니다. 이 험한 세월에 혁명을 하는 고생마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아가겠습니까.』

그는 군중공작을 제일 큰 재미라고 하였으며 동지를 얻을 때의 기쁨을 제일 큰 기쁨이라고 하였다. 군중을 쟁취하는데서 제일 어려운 대상이 무엇인가고 하였더니 노인들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제순은 큼직한 운동장과 공회당(회관)만 있으면 한 동네를 계몽시키는 것쯤은 문제없고 옹근 한 개 면이라도 다 혁명화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이제순의 군중관점과 군중공작에 대한 견해에 완전한 공감을 표시하였다. 

군중계몽과 관련된 이제순의 경험 가운데서 한가지 흥미있는 것은 「가정야학방」 의 운영이었다. 「가정야학방」이란 한가정을 단위로 하여 운영하는 야학을 말한다. 이제순의 집에서도 그런 야학을 열었는데 거기에는 남녀의 차별이 없이 가정이 다 참가하였다. 매일 밤마다 빠짐없이 온 식구가 모여 앉곤 하였는데 이제순이 팔을 걷고 나서서 자기의 아내와 동생들을 교육하였다. 「가정야학방」의 덕으로 이 집안은 문맹자가 없는 집안으로 되었다.

나는 군중공작과 관련된 이제순의 사업을 요해하다가 문득 그에게 밀영에 짐을 지고 온 다른 십가장들의 동향이 어떤가고 물었다.

이제순은 그 사람들의 동향은 다 좋은데 이동학 중대장이 데려온 천지주의 양아들이 문제라고 하였다. 그 양아들이 혁명군을 「비적」 이라고 오해하고 있으며 유격대가 자기를 죽이지 않겠는가 하는 걱정을 하면서 밀영에 도착한 첫날부터 그냥 불안해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순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동학 중대장은 경제모연을 하려고 데려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순동무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천지주의 양아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합니까?』

이제순은 마치 그런 질문이 나오리라는 것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자기의 속생각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나는 유격대가 그를 해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명색은 지주의 양아들이지만 실상은 머슴이나 다름없는 불쌍한 청년인데 별로 죄를 지은 것도 없습니다.』

통일전선의 각도에서 문제를 너그럽게 고찰하는 그의 관용과 독특한 사고방식 앞에서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천지주의 양아들에 대한 이제순의 관점은 사실 우리의 관점과 일치하였다. 이동학은 그 양아들을 여러 가지로 교양하여 우리에 대한 그의 인식을 바로잡아 주었다. 드디어 그는 자발적으로 입대를 청원하게까지 되었다. 우리는 천지주의 양아들을 본인의 소망대로 혁명군에 받아들이었다. 우리가 20도구 전투를 할 때 그 청년은 길잡이를 하였다. 이제순이 큰 믿음을 표시하여준 그는 그만 그후 전투에서 애석하게도 전사하였다.

어쨌든 이제순은 만사람이 반할만한 특색있는 성격의 사나이었다. 그는 장백을 혁명화할 수 있는 둘도 없는 적임자였다. 필요한 지식과 방법만 배워주면 이제순은 장차 훌륭한 지하조직활동가로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장백지구에 조국광복회 조직을 꾸리는 사업을 그에게 맡기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당자는 참군을 열망하였다.

이제순은 우리가 싸움을 하러간 사이 참군준비를 좀 했다고 하면서 이왕이면 입대시험을 치게 해달라고 성화를 먹이었다.

나는 입대시험이라는 말에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보따지」  동무가 동무를 시험쳐보고 데려왔으니 그것으로 입대자격증은 이미 받은 셈입니다. 동무가 정 요구하면 아무때라도 유격대에 받아 주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동무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우리 혁명에 더 큰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순은 얼떨떨해하였다.

『다른 일이란 어떤 일입니까?』

『 일개의 사격선수로 출전하기보다 큼직한 조직을 무어가지고 조선인민혁명군이 일본군을 이기라고 지원해주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조직을 뭇는다는 겁니까?』

그는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동무가 살고있는 신흥촌을 비롯한 압록강 연안의 도처에 조국광복회 조직을 꾸리는 일입니다.』

나는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을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묶어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절박하고 중요한가에 대하여 역점을 찍어 설명해주었다.

총명한 이제순은 그렇다면 지하조직활동을 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어려운 사업을 감당해낼 수 있겠는지 자신이 안간다고 말하였다.

『그건 크게 염려할 게 없습니다. 배우면 됩니다. 타고난 혁명가가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아무나 혁명할 생각을 가지고 실천투쟁 속에서 하나하나 착실히 배워가며 경험을 쌓으면 혁명가로 자라나게 됩니다. 그 사업에 필요한 지식은 우리가 주겠습니다.』

우리는 이제순을 위한 단독강습을 진행하였다.

강습의 주제는 조선혁명의 노선과 성격, 전략전술에 대한 것이었다. 이 강의는 내가 담당하였다. 조국광복회 10대강령과 창립선언, 규약에 대한 해설강의, 국제당사 강의는 이동백이 해주었다. 단 한명의 수강생을 위해서 여러명의 유능한 강사들이 번갈아 출연해가며 그처럼 알심있게 강습을 진행한 실예는 항일혁명투쟁의 전기간 그때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강습을 마치고 밀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이제순은 진정에 넘쳐 말하였다.

『저는 쌀 한말을 지고 왔다가 몇 섬이나 되는 혁명적 양식을 지고 갑니다.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저에게 사업분공을 주십시오. 지역을 하나 떼서 맡겨주면 그 지역안에 있는 조선사람들이 사는 모든 마을마다에 조국광복회 조직을 내오겠습니다.』

우리는 장백현 상강구 지역을 그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출발에 앞서 이제순은 자기에게 신임장을 한 장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나의 도장이 찍힌 신임장만 내대면 군중들을 조국광복회 조직에 많이 묶어 세울 수 있고 또 일도 상당히 쉽게 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였다.

나는 그의 요구대로 신임장을 써주고 나의 이름밑에 도장까지 찍어주었다.

이제순은 그 자그마한 증명서를 받아들자 반년안으로 상강구 지역을 우리 세상으로 만들겠다고 장담하였다. 그 장담이 허풍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 후의 그의 투쟁실적이 증명해주었다.

그날 이제순은 나에게 이런 청을 하였다.

『장군님, 제 청이 하나 있는데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다른게 아니고 밀영을 떠나기 전에 유격대의 군복을 입어보면 유한이 없겠습니다.』

『그런 청이야 못들어주겠습니까. 군복을 입어보도록 합시다.』

나는 그 청을 반갑게 받아들이었다. 참군열의가 얼마나 간절하면 그런 청까지 하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순은 지하광복전선에 모든 것을 다 바칠 결의를 다지면서도 참군열망만은 그대로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만주를 타고앉은 다음 중국본토와 나아가서는 아시아 전역을 송두리째 삼켜버릴 야망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대전을 향해 미친듯이 내달리고 있을 때 군복을 입고 항일대전에 참가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실상 애국주의의 최고표현이라고 평가할 수 있었다.

나는 이동학 중대장을 시켜 창고에서 새 군복 한벌을 가져다가 이제순에게 입히게 하였다.

이제순의 군복맵시가 참으로 좋았다. 호수를 어림짐작하고 가져온 군복이었는데 몸에 딱 들어맞았다.

『제순동무는 마치 군복을 입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같습니다. 옷맵시가 대단합니다. 군복까지 입어보았으니 이왕이면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한 것으로 합시다. 오늘부터 동무는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입니다. 제순동무, 입대를 축하합니다!』

나는 이제순에게로 다가가 그의 손을 힘있게 잡아주었다. 그의 입대를 제일 열광적으로 축하해준 것은 이동학이었다. 이동학은 군복을 입고 기뻐서 어쩔줄 모르는 촌장을 업고 내 둘레를 빙글빙글 돌아갔다.

이렇게 되어 이제순은 밀영에 쌀짐을 지고 왔다가 유격대에 입대한 셈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순을 집으로 내려보내면서 그를 위장해주기 위한 소규모의 전투를 조직하였다. 그 임무는 이동학의 소부대가 담당수행하였다.

적들을 감쪽같이 속여서 골탕먹인 이제순의 귀환담이 아주 재미있다. 그는 우리가 일러준대로 산에서 내려가자마자 자기집에도 들리지 않고 곧장 20도구 경찰분서에 찾아가 다짜고짜로 행악질부터 하였다. 나는 촌장질을 더는 못하겠다, 당신들은 촌장을 부려먹을줄이나 알지 보호해줄 줄은 모른다, 내가 붙잡혀간줄 알았겠는데 당신네들은 아무런 구원대책도 취하지 않았다, 나는 무서워서 다시 조선땅에 넘어가 살아야 할가부다, 죽음밖에 차례질 것 없는 당신네 하수인 노릇은 다른 사람들이나 실컷 하라고 하라, 이렇게 마구 들이댔다.

그러자 경찰들은 바빠나서 제발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 우리가 당신 걱정을 하지 않은게 아니다, 당신의 행처를 몰라서 미처 손을 쓰지 못했을 뿐이다, 좀 진정하고 그동안 어디에 붙잡혀 가 있었는지 또 어떻게 놓여나왔는지 그것이나 어서 알려달라고 하였다.

이제순은 유격대가 내내 자기의 눈을 싸맨체 끌고다녔기 때문에 그동안 가있는 장소는 알 수 없고 새벽에 도망친 장소만 알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느 휴식참에 자기를 감시하던 보초병이 깜빡 조는 새에 삼십육계를 놓았다고 그럴듯하게 엮어댔다.

경찰들은 유격대가 몇 명이나 되던가, 도망친 그 장소가 어디인가를 따져묻고 자기들을 그곳까지 안내해 달라고 하였다.

일은 우리가 사전에 짠 각본대로 되었다. 경찰 「토벌대」 는 이제순이 대준 골안에 들어갔다가 독안에 든 쥐신세가 되었다. 적들은 이제순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순은 적들의 신임을 능숙하게 이용해가며 그해 가을 김병철, 이주관, 이삼덕과 함께 조국광복회 신흥촌 지회를 조직하였다. 이 지회는 백두산 서남쪽 턱밑에서 생겨난 최초의 조국광복회 조직이었다.

이때부터 이제순은 촌장의 자리를 이삼덕에게 넘겨주고 권영벽과 함께 장백현 상강구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망을 확대하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였다. 우리는 장백현을 편의상 크게 세 개의 지구 즉 상강구, 중강구, 하강구로 구분하고 활동하였으며 상강구는 다시 상방면, 중방면, 하방면으로 나누고 활동하였다. 이제순은 신흥촌에서 지회를 내온데 뒷이어 주경동, 약수동, 대사동, 평강덕에도 조국광복회 지회들을 조직하였다.

지회산하에는 또한 많은 분회들을 두었으며 반일청년동맹과 부녀회, 아동단과 같은 외곽단체들을 꾸려 각계각층을 폭넓게 결속시키었다.

불과 반년도 못되는 사이에 이제순은 상강구 전지역을 조밀한 지하조직망으로 뒤덮어놓았다.

백두산 밀영을 둘러싸고 있는 거의 모든 마을들에는 조국광복회 조직들이 그물코처럼 촘촘히 들어배기었다. 조국광복회 조직은 현내의 선진적인 청년학생들과 지식인들, 종교인들 속에도 침투되었으며 지어는 만주국의 관공서들과 경찰기관들, 정안군 부대들에도 뿌리를 내리었다.

조국광복회는 그 산하에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을 망라한 대중단체들을 두었다. 조국광복회의 외곽단체들에는 수만명의 군중이 집결되었다. 조국광복회의 매개 지회는 생산유격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유사시 인민혁명군과 합세하여 거사를 치를 수 있는 강력한 밑천으로 되었다.

장백지구에서의 조국광복회 조직들의 확산이 어찌나 빠르게 진척되었던지 우리가 조국광복회 장백현 위원회를 내오고 이제순에게 총책임을 지우던 1937년초에 이르러서는 장백현의 전지역이 완전한 우리 세상으로 되었다.

장백의 거의 모든 마을들은 「우리 마을」 이 되었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사람」 이 되었다. 장백의 거의 모든 촌락의 구장, 촌장의 직책들도  「우리 사람」 들이 차지하였다. 그들은 겉으로는 적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척 하였으나 안속으로는 우리 일을 하였다.

면장 이주익도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가 백두산 진출을 앞두고 장백지방에 선발대를 파견하였을 때 그는 김주현에게 흡수된 조국광복회 특수회원이었다.

이주익은 우럭골에 약방을 차려놓고 의원일을 하는 한편 면장질을 겸하였는데 그 직함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우리 사업을 아주 실속있게 뒷받침해주었다.

이면장이 국내에서 수리조합을 반대하는 투쟁에 참가하였다가 감옥에 잡혀가던 그무렵부터 이제순은 줄곧 그를 주시해왔다고 하였다. 이주익은 이제순의 지도를 아주 허심하게 받아들이었으며 그가 하는 지시라든가 부탁을 매우 성실하게 이행하였다.

그 당시 정치공작원들이 국내로 나가든가, 압록강 연안의 중국쪽 마을들에 발을 붙이고 안전하게 활동하자면 도강증이나 거민증 같은 증명서들이 필요하였다. 거민증이 없이는 파견지에 나간다 하더라도 배겨있을 수가 없었고 도강증이 없으면 세관경찰들이 버티고 서있는 압록강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없었다.

거민증과 도강증은 면장의 보증 밑에 경찰기관에서 발급하였다. 그런 증명서들은 경찰서에서 면장이 제시하는 민적부에 등록된 사람들에 한해서만 내주었다.

이제순과 이주익은 우리 정치공작원들의 안전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기 위하여 백두산 쪽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산골인 24도구에 많은  「유령민적」 을 만들어낼 꾀를 생각해냈다. 그곳 막치기는 멀고 험악하여 경찰들도 가기를 저어하는 곳이었다.

이주익은 민적부에 장백일대와 국내에서 활동하는 우리 정치공작원들을 가명으로 등록한 다음 그 민적부를 들고 경찰서에 찾아가 수선을 떨었다.

『산골 가난뱅이들이란 하나같이 무식하다보니 통 셈판을 모르거든. 일년 열두달 내내 산골에 들어박혀서 아무데도 나다니지 않으니 도무지 세상물계도 알지 못하고 거민증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단 말이오. 그러니 어찌겠소. 그 곰같이 우둔한 것들한테 이쪽에서 갖다줘야지 별수가 있소. 다리가 늘어져도 할 수 없지. 정말 면장질 하기도 헐친 않구만.』

경찰서에서도 백성들이 무식해서 야단났다는 식으로 맞장구를 치면서 면장, 촌장들에게 수다한 「유령민적」 에 따르는 거민증을 내주었다. 이제순에게는 이주익이 마련해다 준 예비거민증이 언제나 푼푼히 장만되어 있었다. 우리의 정치공작원들은 아무때나 그것을 받아가지고 타고장에도 수월히 발을 붙일 수 있었고 국경도 쉽게 넘나들 수 있었다.

장백지구에서 조국광복회 조직망이 급속히 늘어나고 그 사업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우리는 새로 꾸려진 조직들을 공고히 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혁명운동을 국내깊이 확대하기 위하여 단꺼번에 30여명의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한 일이 있었다.

신흥촌에는 첫 여성중대장 박록금(박영희)과 2명의 소년공작원이 파견되었다. 이제순에게서 그 세사람의 거주수속을 일임받은 이주익은 그들을 가명과 변성명으로 민적부에 올리었다.

19도구 지양개에서 구장노릇을 하던 이훈도 이제순의 영향으로 조국광복회에 가입한 사람이었다. 이제순은 밀영에 와서 나를 만나고 돌아간 후 인차 이훈을 찾아가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을 소개한 다음 장군의 뜻이라고 하면서 믿을만한 청년들에게 영향을 주어 조직에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는 과업을 주었다.

이 과업을 받고 이훈이 이제순에게 소개한 맨 첫사람이 함경남도 영흥(금야)에서 농조운동에 관계했다가 19도구 덕삼촌에 와있던 안덕훈이었다. 1937년 봄에 이제순은 안덕훈을 책임자로 하는 조국광복회 19도구 지회를 조직하였다. 그 관하의 모든 부락들에는 그해 여름까지 분회들이 다 조직되었다. 분회장은 대체로 촌장이 겸하였다. 조직의 활동이 얼마나 드셌던지 이 지방들에서는 소년들이 혁명가요를 공개적으로 부르며 돌아다니었다.

나는 백두산에서 활동할 때 이훈을 몇번 만나보았다. 그때 그는 이제순에 대한 말을 많이 하였다. 나를 보고서 사람복이 있다고 하였다.

『장군님께서 사람을 면바루 고르셨습니다. 장백땅이 넓다고 하지만 제순이만큼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신혼살림의 재미도 다 뒤에 두고 늘 객지에서 혁명운동을 하느라고 바삐 돌아다니는 그를 보면 저절로 존경이 갑니다. 저두 그사람 덕으로 장군님 부하가 됐는걸요.』

우리 사령부가 장백현 19도구의 지양개 뒷산에 가있을 때 이훈은 아내와 함께 우리 일을 잘 도와주었다. 지양개 뒷산은 수림을 거쳐 곰의골까지 갈 수 있는 유리한 곳이었다. 그때 이훈의 아내는 장백현 시가지에 내려가 담배장사나 두부장사를 하는 것처럼 하면서 적들의 동태를 살피다가 이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자기 집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곤 하였는데 인민혁명군의 보초소들에서는 그 모닥불을 보고 사령부에 적정이 있다는 것을 전달하곤 하였다. 이훈은 적들의 대부대가 움직이는 것과 같은 특별한 정황이 생기면 직접 우리한테 와서 상세한 보고를 하였다.

이러한 애국적인 면장, 구장, 촌장들은 장백의 도처에 있었다.

장백이 우리 세상으로 되고 장백사람들이 우리 사람들로 된 것은 백두산 근거지 창설의 전략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이룩한 커다란 성과였다.

우리가 백두산을 타고 앉은 때로부터 반년도 되나마나한 사이에 장백과 그 주변을 완전히 우리 세상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제순과 같이 충실하고 과감하고 열정적인 혁명가들의 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순은 항일의 불바다 속에서 태어난 민중의 참된 아들, 참된 충복이었으며 민중의 해방을 위해 육탄으로 혁명의 길을 개척해온 훌륭한 조선의 애국자, 조선공산주의자의 한사람이었다.

이제순은 지하조직활동가가 지니고 있어야 할 품성과 자질을 충분하게 소유한 원숙하고 세련된 혁명가였다.

오중화와 마찬가지로 이제순도 가정혁명화를 잘하였다. 우선 자기와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부터 반일애국사상으로 무장시켜야 온 동네를 혁명화하고 나아가서는 온 나라, 온 민족을 혁명화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고 혁명활동방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고향에 있을 때부터 동생들을 혁명사업에 끌어들이었다. 그의 여동생은 오빠의 혁명사업을 잘 도와주었다.

이제순은 신흥촌에 온 다음 아내와 장모도 혁명사업에 인입하였다.

남편의 세심한 방조와 사랑 속에서 아내 최채련은 조국광복회 산하 신흥촌 부녀회 회장으로 성장하였다.

최채련은 남편의 영향밑에서 사상적으로 빨리 각성되었다. 그는 정서도 풍만하지만 정치적 감수성이 또한 대단히 예민한 여성이었다. 이런 장점은 그로 하여금 혁명하는 방법도 빨리 터득하게 하고 혁명가가 지켜야 할 준칙도 철저히 엄수하게 하였다.

이제순은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나 매우 엄하게 다루었다. 평소에는 농담도 하고 익살도 부리면서 아내를 몹시 살뜰하게 대해주었지만 일단 지하사업에 들어가면 공과 사의 계선을 명백히 긋고 관련된 문제는 한마디도 누설하지 않았다. 

한번은 이순사의 처가 최채련에게로 뛰어와서 이런 말을 하였다.

『야, 채련아, 넌 하루 세끼 익은 밥먹구 눈이 멀뚱멀뚱해서 뭘하니. 너 우리 마을 주막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구 있는지 아니?』

최채련은 영문을 몰라 순사의 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하였다.

『몰라, 나같은게 주막집 일까지 어떻게 다 알겠니.』

『넌 참 까마밤중이로구나. 네 남편이 거기서 밤마다 남의 여편네들을 끼고 재미를 보는데.』      

이순사의 처는 여기까지 말하고 살며시 자취를 감추었다.

최채련은 그날밤중으로 그 주막집을 찾아갔다. 문을 열고 살며시 안을 들여다보니 이순사의 처가 말하던대로 주막집에는 정말로 알지 못할 여인들과 남정들이 한방 가득차 있었다. 그 한복판에 이제순도 앉아있고 이순사도 끼어있었다. 그런데 이순사의 처가 말하던 그 「재미」라는 것은 있을상싶지 않았다. 최채련은 경찰들의 시선이 덜 미치는 이 너렁청한 주막집에서 남편이 주관하는 어떤 비밀회의가 진행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간파하였다. 그러고보면 이순사도 지하조직원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순사의 처는 새빠지게도 왜 재미를 본다고 말하였을까? 시샘이 지나친 나머지 비밀회합을 「재미」 로 보는 착오가 생긴 모양이었다.

최채련은 안도감에 휩싸여 주막집 문을 황황히 닫아버리었다.

그러나 그는 남편의 예리한 눈길을 모면할 수 없었다. 이제순은 온밤 아내를 무섭게 다불리었다.

최채련은 빗발처럼 쏟아져내리는 욕을 고스란히 들으면서 자기가 남의 꼬드김에 들어 엄청난 실수를 하였다는 것과 무근거한 불신이나 시샘은 가정의 화목을 깨며 나아가서는 가정자체까지도 파괴할 수 있다는 것, 부부관계의 공고화를 담보하는 첫째가는 기초는 믿음이라는데 대하여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이제순은 그날밤 아내에게 온갖 강권행사를 다하면서도 청백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자기네가 주막집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한마디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그처럼 비밀관념이 철저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혁명가 일반, 특히는 지하공작원들, 지하조직활동가들에게 필요한 행동규범들을 법적으로 성문화한 것은 없었지만 이제순에게는 자기자신이 제정하고 준수하는 마음 속의 법이 따로 있었다.

나는 장백지방에서 활동할 때 신흥촌에 있는 이제순의 집을 두 번인가 방문하였다. 어느때인가는 그 집에서 언감자국수도 먹고 자기도 하였다. 내가 갈 때마다 이제순은 정지간과 방 사이에 문발을 치고 최채련이 나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최채련은 끼니때마다 내앞에 밥상을 가져다놓으면서도 내가 김일성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훗날 박록금을 통하여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남편에게 항의하였다.

『당신은 말끝마다 사람을 믿어야 하다고 하면서도 나한테는 종시 그분이 김일성장군이라는 것을 안대주었지요. 세상에 이런 인사불성이 어디 있어요?』

『여보, 그 비밀만은 누구에게도 대줄 수 없었소. 다 그분의 신변을 위한 것이었으니 당신이 섭섭한대로 너그럽게 이해해야 하겠소.』 

이것이 바로 이제순식의 법이었다.

그가 보여준 강인한 성품과 수미일관한 원칙성은 최채련의 성격발전과 세계관 형성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이제순은 백두산 밀영에 와서 나를 만나고 돌아간 다음 아내에게 이런 부탁을 하였다.

『이제부터 우리 집에는 손님이 많이 찾아올 것 같소. 그러니 감자랑, 감분이랑, 보리쌀이랑, 된장이랑, 땔나무랑 많이 장만해두어야겠소. 당신이 앞으로 수고를 많이 해야 할 것 같소.』

최채련은 그후 유격대원들과 지하공작원들의 시중을 드느라고 참으로 많은 수고를 하였다. 그는 날마다 방아를 찧었다. 어찌나 많은 쌀을 찧어냈는지 이제순이 손수 만들어준 방아확에 구멍이 날 지경이었다.

이제순은 가정을 혁명화한 다음 마을도 혁명화하였다. 그는 권영벽과 함께 신흥촌에 당특별지부도 조직하였다. 그 지부가 조직된 후 장백지방에서는 수많은 조국광복회원들이 당대열에 들어섰다. 사람들을 조직에 결속시키고 유격대를 원호하는 데서 신흥촌은 단연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부탁이었다.

신흥촌 사람들은 유격대가 마을에 온다는 말만 들으면 기름을 짤 들깨부터 닦았다. 그들은 유격대에 보낼 원호미를 마련하기 위하여 식량절약을 이악하게 하였다. 그 마을의 주산물인 감자는 운반에도 불리하고 이용가치도 적었다. 그래서 농마로 가공하여 유격대 밀영으로 보냈다.

신흥촌의 부녀자들은 장도 생것으로 그저 보내지 않고 가공하여 보내주었다. 장에다 밀가루를 넣고 떡처럼 빚은 다음 불에 구워서 보냈는데 보관과 이용에 아주 편리하였다.

신흥촌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낸 각종 원호물자들은 수만점에 달하였다. 그 많은 물자들을 그들은 등짐으로 져서 밀영이나 유격대의 숙영지까지 날라다주었다.

신흥촌 인민들이 지도자를 잘 만났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순이 능력있는 사람인데다가 권영벽, 박록금, 황금옥이 그를 잘 도와주었다.

나는 보천보전투전에 신흥촌에 가보고 이 마을 인민들의 혁명군에 대한 열렬한 환영과 단결된 모습 앞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우리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국수분틀 4개를 가져다놓고 수백명분의 국수를 잠깐사이에 다 눌렀다. 정말 벼락같은 일솜씨였다. 그때 우리 동무들은 신흥촌을 가리켜 욕심나는 마을이라고 하였다. 정말 신흥촌 주민들은 하나같이 욕심나는 사람들이었다. 후에 알게 된데 의하면 이제순은 우리가 갈 때마다 사전에 비상회의를 열고 환영대책을 토의하였다고 한다.

이제순이 높은 조직적 수완과 임기응변의 묘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1937년 봄에 조국광복회 장백현 위원회는 신흥촌에서 5.1절 시위를 조직하였다. 대낮에 그것도 만인의 주시속에서 합법적인 시위를 벌이자면 적들이 트집을 잡을 수 없는 그럴듯한 계책이 필요하였다. 이제순은 여우잡이를 구실로 각 촌에 있는 청소년들을 제정된 장소에 모이게 하였다. 시위대열은 붉은 기를 들고 한줄로 늘어서서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압록강이 굽어보이는 산능선을 따라 20도구 남석부락까지 행진해갔다. 시위군중은 적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두간두간 다른 구호들도 불렀다.

그날 압록강 좌우 양안의 인민들은 모두 걸음을 멈추고 이 희한한 시위를 통쾌한 심정으로 구경하였다. 강건너 가림천 주재소와 국경수비대의 군경들은 혁명군이 내습한 줄로 알고 산꼭대기에서 벌어지는 소요의 진상이 무엇인지 감히 알아볼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적들은 시위가 끝나고 그 시위의 주인공들이 사민들이라는 것이 판명된 다음에야 장백땅에 건너와서 무슨 일로 숱한 사람들이 이렇게 와와 밀려다니는가고 물었다.

시위군중들은 여우잡이를 한다고 대답하였다.

『여우잡이를 하는데 붉은기는 왜 들고 다니는거야?』

경찰들이 물었다.

『여우는 붉은색을 제일 무서워하거든요. 그래서 붉은기를 들었습지요.』

시위자들은 이번에도 능청스럽게 경찰들을 속여넘기었다. 사실 붉은기는 여우잡이에도 필요했고 시위에도 필요하였다.

일제의 폭압이 절정에 치달아오르던 1937년 당시 수백명의 집단이 백주에 붉은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른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것이 반일반만시위라는 것을 일만군경들이 다같이 감촉하지 못했다는 것도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이것은 뛰어난 지략과 대담성을 가진 인물들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고안해낼 수 없는 큰 모험이었다. 우리가 보천보를 친 후 이제순은 신흥촌 부녀회 성원들을 현지에 파견하여 전투결과를 알아내고 인민들의 여론을 수집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통보해주었다. 우리는 이제순에게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창발성을 발휘하여 독자적으로 결심하고 포치한 사업이었다.

이 두가지 사실을 놓고보더라도 우리는 이제순이 혁명에 대한 자기 식의 방법론을 가진 재능있는 일꾼이며 열정적인 사색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혁명과 자기의 어깨에 지워진 시대적 사명을 두고 그 누구보다도 머리를 많이 썩인 사람이었다. 그런 진통과정이 부단히 되풀이되지 않았더라면 그가 짧은 기간에 그처럼 철저하게 장백땅을 우리의 세상으로 만드는 기적을 창조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사색이 없는 인간들한테 창발성이 있을 수 없고 창발성이 없는 곳에 창조와 혁신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다 다 알고있는 상식이다.

인간을 세계의 지배자로 만들고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해내는 힘있는 존재로 되게 한 것도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사색의 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끊임없는 사색과 사색의 누적을 통하여 자연과 사회와 자기자신을 개조해왔고 세계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군림하였다.

우리 당이 간부들과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향해 정열적인 사색가가 되라고 호소하는 것은 자연과 사회와 인간을 개조하는 데서 사색이 노는 역할을 절대적으로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제순은 사색과 실천을 원만하게 결합한 창조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법정과 옥중에서도 사색을 중단하지 않았다. 법정에서의 그의 사색은 공산주의자로서 일생을 어떻게 마치겠는가 하는데 집중되었다.

 법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나자신이 더 많은 『 죄』 를 뒤집어쓰면서라도 동지들을 구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혜산경찰서 구류장에 있을 때 내린 결심이었다. 실지로 이제순은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성공하였다. 면장 이주익이 체포되었을 때도 그는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는 김장군과 나, 당신밖에 아는 사람이 없다, 장군은 산에 있고 나는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만 버티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주익은 실제로 그렇게 해서 며칠만 고생을 하고 풀려나왔다. 이제순이 모든 『 죄상』 을 자기의 한몸에 뒤집어쓰고 나선 덕으로 신흥촌 당조직 책임자였던 김병철과 이주관도 극형을 면할 수가 있었다.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킨 거기에 공산주의자로서의 이제순의 숭고한 미덕이 있었다.

권영벽을 통하여 감옥에서 장중렬이 변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제순은 그의 변절로 해서 견실한 동지들이 더 많이 희생될 것 같아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가 적의 개로 되었다는 사실을 동지들에게 한시바삐 알려주어야 하겠는데 그에게는 꽁다리연필 하나 없었다. 그는 생각다 못해 이빨로 아래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입술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손가락 끝에 한방울 한방울 묻혀가며 천쪼박에  『장중렬 변절』 이라는 글을 써서 고문실로 나갈 때 다른 감방에 넣어주었다. 그래서 많은 동무들이 그자의 정체를 알고 옥중투쟁을 더 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순이 7년동안 감옥에서 싸운 감동적인 일화들을 이 글에서 일일이 다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럽다.

최채련이 면회를 갔을 때 본 이제순의 얼굴은 이전날 조국광복회 조직을 꾸리느라고 사방으로 뛰어다닐 때에 늘 보군 하던 그 곱살하고 탄력있던 얼굴이 아니었다. 옥중의 남편은 본래의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으로 철창밖의 아내와 면회를 하면서도 이제순은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헤어질 때에는 셈평좋게도 사식이 아니라 세계지도를 구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 유다른 주문앞에서 최채련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랐다고 한다.

이제순이 옥중에서 세계지도를 요구한 것은 2차대전 후의 새로운 세계구조, 대전의 결과로 새롭게 태어나 세계만방에 빛을 뿌리게 될 해방조국의 모습을 지도상에서 자기나름대로 그려보고 싶었던 욕망의 표시가 아니었겠는가고 생각된다. 이것은 그가 사형판결을 받은 다음에도 절망이나 비관에 빠지지 않고 조국의 찬란한 미래, 세계의 광명한 미래를 끝없이 그려보고 있었다는 뚜렷한 증거이다. 그는 현실에 있으면서도 미래에 산 사람이었고 죽음앞에서도 해방된 조국땅에 백화로 만발할 행복한 새 삶을 그려본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전향을 권고하는 법관앞에서  『공산주의는 영원한 청춘』 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였다.

1945년 초에 최채련은 막내딸과 함께 서울 서대문 형무소 면회실에 나타났다. 출생후 두달도 못되어 어머니와 함께 감옥에 갇혀 젖고생에 시달려오던 막내딸은 어느덧 8살잡이 꽃망울 소녀가 되었다. 그 애는 철창 저쪽에 나타난 수염이 검숭검숭한 사나이를 이상야릇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저이가 바로 너의 아버지이다.』

최채련은 그 사나이를 손짓해보이었다.

아버지와 딸은 철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건만 딸의 입에서는  『아버지!』 라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8살이 다되도록 아버지를 모르고 자라온 딸의 입에서 어떻게  『아버지!』  라는 부름소리가 쉽사리 터져나올 수 있겠는가. 딸은 이웃의 아버지들이 자기 자식들을 애무해주는 광경을 수없이 목격해왔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별난 아버지였다. 딸이 왔는데도 안아주지 않고 철창 너머에서 웃고만 있었다.

절그럭거리는 쇠고랑 소리와 함께 수갑을 찬 아버지의 손이 자기의 머리를 살뜰히 쓰다듬어줄 때에야 딸의 입에서는  『아버지!』 라는 부름소리가 비로소 흘러나왔다.

이제순은 뜨거운 것을 삼키며  『아버지는 인차 집으로 간다』 는 실현될래야 실현될 수 없는 『약속』 을 딸과 하였다. 생후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나는 딸에게 그런 허망한 약속밖에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제순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물론 그는 딸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1945년 3월 10일 적들은 심문장에 이제순을 불러내다가 설복하였다. 오늘은 우리 일본 황군의 육군절이다, 당신이 이제라도 전향을 하면 사형을 면제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순은 그 어떤 회유와 악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장백의 이름없는 산촌에서 야학선생과 촌장으로 있던 이제순은 항일혁명에 꽃다운 한생을 바친 열렬한 애국자, 견결한 혁명투사였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혁명가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며 생활과 투쟁 속에서 투사로, 혁명가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혁명가로 성장하는 과정은 서로 다르지만 사상이 견실하고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불타는 사람은 옳은 지도를 받게 되면 누구나 다 혁명가로 된다는 것은 혁명의 진리이며 역사의 교훈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 수행에서 사상혁명을 선차시한다. 그것은 이 사상혁명이야말로 사람들을 의식화, 조직화하여 그들을 열렬한 애국자로, 강의한 혁명투사로 키우는 요람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위업, 혁명투쟁을 힘있게 떠미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이제순이 세번째인가 네번째인가 우리 밀영에 들어왔을 때 나는 조국광복회 조직을 위해 바친 그의 노고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랬더니 그는 두손을 내흔들며 난색을 짓는 것이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건 저의 수완이나 수고덕이 아닙니다. 그 신임장이 이주익면장 같은 사람도 대번에 광복회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면장은 그 신임장을 보더니 김장군이 회장이라면 자기도 그 회원이 되게 해 달라질 않겠습니까. 장백사람들이 또한 애국열도가 높은 사람들이지요. 저는 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이제순은 그처럼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늘도 대성산 혁명열사릉에서 자그마한 반신상의 겸허한 모습으로 후대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곁에는 그와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권영벽, 이동걸, 지태환도 나란히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