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글을 시작하며
2. 남(한국)이 실시한 비밀핵물질실험의 진상
3. 1998년부터 2000년까지의 한(조선)반도 정세와 2000년 1-2월의 비밀핵물질실험
4. 정보유출 여론공작은 누가 무슨 목적으로 추진하였을까?
5. 글을 맺으며

 

1. 글을 시작하며

1백37개 나라들이 회원국으로 가입해 있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무총장 무하맷 엘바라데이(Muhamad el-Baradei)는, 핵무장을 공식선언한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다섯 나라 이외에 현재 40여개 이상의 나라들이 핵무기 생산기술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2004년 9월 20일자) 5대 핵무장국 이외에도 일본,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스웨덴, 스위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네덜란드, 벨기에 같은 나라는 핵무기 개발기술만이 아니라 고농축 우라늄과 플루토늄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원자력기구가 핵무기 개발기술을 갖고 있는 40여개 이상의 나라들이 비밀핵무기개발을 추진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떤 나라가 비밀핵무기개발을 추진하지 못하도록 감독·사찰하는 것은 국제원자력기구의 몫이지만, 어떤 나라가 추진하는 비밀핵무기개발에 관한 정보를 캐내어 국제사회에 폭로하고 국제원자력기구에 제공함으로써 국제원자력기구로부터 특별사찰 또는 강제사찰을 받도록 통제하는 것은 미국이 자의적으로 맡은 몫이다. 그 어떤 나라 또는 국제기구도 미국에게 그러한 통제권을 위임한 적이 없고, 그 어떤 국제협약도 미국에게 그러한 통제권을 부여하지 않았지만, 미국은 제국주의국가답게 자기 마음대로 전세계 나라들의 핵무기 개발을 통제하는 권한을 불법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미국이 그러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전세계 모든 나라를 대상으로 하여 핵무기 개발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방대한 첩보망을 가동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만일 미국에게 그러한 첩보망이 없었다면 핵무기 개발기술을 가진 40여개 나라들이 비밀하게 핵무기를 개발하더라도 그것을 밝혀낼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므로 어떤 나라가 국제원자력기구의 특별사찰대상 또는 강제사찰대상에 오르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국제원자력기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미국이 결정하게 된다. 주목하는 것은, 미국이 어떤 나라를 국제원자력기구의 특별사찰대상 또는 강제사찰대상으로 지목하는 과정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자의적으로 그리고 음모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이다.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문제를 미국이 자기 마음대로 좌우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일본의 경우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스라엘은 일찍이 1950년대에 이스라엘 남부 네가브 사막(Negav Desert)의 디모나(Dimona)에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원자로를 가동하는 네가브 핵연구소(Negav Nuclear Research Center)를 세워놓고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으며, 지금은 약 3백기나 되는 핵탄두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이스라엘은 국제원자력기구에 가입하지 않은 채, 제 마음대로 핵무기를 대량 생산하여 실전에 배치해왔는데도, 그리고 이미 1986년에 네가브 핵연구소의 기술자였던 모르데차이 바누누(Mordechai Vanunu)가 영국 일간지 『썬데이 타임스(Sunday Times)』에 이스라엘이 제조한 핵탄두를 촬영한 사진과 관련정보를 공개하여 핵무기 보유사실을 입증·폭로하였는데도,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받기는커녕 미국의 물질·기술적 지원과 정치·군사적 비호를 받으면서 계속하여 핵전력을 증강해오고 있다.

다른 한편, 핵발전소 52개를 가동하고 있는 일본은 미국의 비호와 국제원자력기구의 지원·방조를 받으면서 제 마음대로 우라늄을 농축하고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다. 이바라키현(茨城縣) 도카이무라(東海村)에서는 우라늄 농축시설이 가동중이며, 1985년에 아오모리현(靑森縣) 로카쇼무라(六個所村)에서 착공된 거대한 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은 곧 완공될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면 당장이라도 핵탄두 수백기를 만들 수 있는 엄청난 양의 무기급 핵물질을 가지고 있는데도, 1977년부터 2002년까지 플루토늄을 2백6kg이나 '분실'하였다고 신고하였는데도, 국제원자력기구로부터 특별사찰을 받기는커녕 기존의 정기사찰마저도 제대로 받지 않게 되었다. 최근 일본 문부과학성의 발표에 따르면, 2004년 9월 15일부터 일본에 있는 1백7개의 핵시설과 5천여개의 관련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의 정기사찰 횟수를 절반 이하로 줄이는 '통합보장조치'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일본에게 적용된다고 한다. (『연합뉴스』 2004년 9월 15일자)

중동평화를 짓밟는 깡패국가 이스라엘과 아시아 침략무력을 증강하는 전범국가 일본에게 그처럼 상식에도 어긋나는 불법적인 특혜와 특권이 주어지는 것은, 전적으로 미국의 묵인과 방조에 의해서 가능한 일이다.

반면에, 미국은 핵무기는 고사하고 재래식 무장도 변변하게 갖추지 못한 이라크를 국제원자력기구의 강제사찰대상으로 올려놓고 사찰을 명분으로 자주권을 짓밟았고, 자주권 침해에 저항하는 사담 후세인 정권에 대해서 기다렸다는 듯이 무력공격을 가하여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라크를 강제로 점령한 바 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횡포와 압박을 견디다 못한 리비아는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미국에게 굴복하여 국제원자력기구의 특별사찰을 받아들였다. 이라크를 침략하고 리비아를 굴복시킨 미국이 그 다음으로 노리는 대상은 이라크와 숙명적 대결관계에 있는 인접국 이란이다. 지금 미국은 이란을 국제원자력기구의 강제사찰대상에 올려놓으려는 정치음모를 꾸미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미국이 국제원자력기구를 앞세워 반미성향의 아랍국가들에게 핵사찰 광풍을 몰아치는 가운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동방에서 터졌으니, 그것이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이 국제사회에 폭로된 사건이다. 예상치 못한 지역에서 예상치 못한 시기에 일어난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 폭로사건은 한(조선)반도 정세에는 물론 국제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국제사회의 의혹에 찬 눈초리는 노무현 정부에게 집중되었으며, 조·미관계와 남북관계, 그리고 6자회담 추진문제는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두 가지 문제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남(한국)이 실시한 비밀핵물질실험의 진상을 파악하는 문제, 그리고 누가 무슨 목적으로 비밀핵물질실험을 국제사회에 폭로했는지를 추적하는 문제다.  

2. 남(한국)이 실시한 비밀핵물질실험의 진상

내외언론의 보도내용을 종합하면, 남(한국)은 1982년 4-5월과 2000년 1-2월에 각각 비밀핵물질실험을 실시하였다. 18년 시간격차를 두고 실시되었던 두 종류의 핵물질실험이 2004년 9월초에 누군가에 의해서 한꺼번에 폭로되었다. 내외언론의 보도내용을 종합하여 재구성한 핵물질실험의 진상은 다음과 같다.

먼저, 1982년에 실시된 비밀핵물질실험은 전두환 정부의 지시에 따라 실시되었으며, 그 실험에서 추출된 플루토늄의 양과 순도는 비밀로 취급되었다. (『아사히신붕(朝日新聞)』 2004년 9월 9일자) 전두환 군사독재정부의 승인 또는 지시에 따라 1982년 4-5월에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었던 한국원자력연구소(Korea Atomic Energy Research Institute)에서 실시된 플루토늄 추출실험은 트리가(TRIGA)라는 이름이 붙은 연구용 원자로에서 나온 폐연료봉에서 적은 양의 플루토늄을 추출한 것이었다. 그 연구용 원자로는 1995년에 수명이 다해 가동을 중단하였고, 해체작업이 거의 완료된 상태에 있다. 해체과정에서 나온 핵물질과 해체된 시설은 미국으로 거의 옮겨졌다. 그 연구소 시설은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대상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정기사찰을 받아왔다.

노무현 정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1982년 4-5월에 실시된 플루토늄 추출실험은 1983년에 국제원자력기구에 신고되었는데, 신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작성담당자가 실수로 사용후 핵연료를 새로운 핵연료라고 잘못 적어 넣었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는 1982년에 실시하였던 플루토늄 추출실험에 관한 자료와 추출된 플루토늄이 남아있지 않으며, 당시 추출된 플루토늄은 밀리그램 단위의 극소량이라고 밝혔다. (『뉴욕타임스』 2004년 9월 9일자)

사찰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지난 시기에는 정기사찰을 실시했어도 플루토늄 추출실험을 실시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다가, 환경견본추출조사(environmental sampling test)라는 새로운 기법이 개발되어 정기사찰에 도입된 뒤에 정기사찰을 실시하게 되니까 22년 전에 실시되었던 플루토늄 추출실험이 적발된 것이다.

국제원자력기구가 한국원자력연구소 시설에 대한 정기사찰에 환경표본조사기법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던 때는 1997년이었는데, 그 조사에서 플루토늄 추출실험이 실시되었다는 단서를 발견하고 1998년에 김대중 정부에 사실확인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그 추출실험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없다고 밝혔다. 국제원자력기구는 2003년에 다시 환경표본조사를 실시하고, 노무현 정부에게 사실확인을 요청하였으나, 노무현 정부는 극소량의 플루토늄이 추출되었음이 밝혀졌다고 답변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2004년 3월 플루토늄 추출실험에 관한 보고서를 국제원자력기구에 제출하였고, 국제원자력기구는 2004년 8월 29일부터 9월 4일에 세 번째로 7명으로 구성된 사찰단을 남(한국)에 파견하여 환경표본조사를 실시하였다. (『연합뉴스』 2004년 9월 9일자, 『뉴욕타임스』 2004년 9월 9일자) 국제원자력기구는 2004년 9월 19일부터 26일까지 네 번째 사찰을 실시하였으며,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2004년 11월말에 열리는 국제원자력기구 이사회에 제출할 것이다.

주목하는 것은, 1982년에 전두환의 지시로 실시되었던 비밀핵물질실험이 이전에 박정희의 지시로 추진되었던 핵무기 개발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1970년대 초 미국은 핵무기 개발사업을 비밀히 추진하기 시작한 박정희에게 압력을 가해 1975년에 핵확산금지조약을 비준하도록 강제하였고, 1976년 1월 22일 서울에 급파된 국무부 관리들은 박정희가 미국의 뜻과 어긋나게 핵무기 개발을 계속 추진할 경우, 남(한국)의 핵발전소에 대한 핵연료 공급을 중단하고 주한미국군의 핵무기를 철수하겠다고 협박하였다. (『프레시안』 2004년 9월 3일자) 그러나 박정희는 핵무기 개발사업을 계속 밀고 나갔고, 결국 핵물질 생산시설 설계가 완성된 시기인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쏜 총탄에 살해되었다.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의 배후에서 미국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물적 증거는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으나, 핵물질 생산시설 설계를 완성한 시점과 박정희가 살해된 시점이 일치하는 것은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저지하려고 하였던 미국이 살해사건에 개입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박정희 피살 직후에 군사정변을 일으켜 집권한 전두환 군사독재정부가 처한 매우 불안정한 정세는 박정희 군사독재정부가 처했던 정세보다 더 악화되었으면 악화되었지 나아진 것이 없었다. 위기상황에 빠져있던 전두환은 미국이 해체·폐기하라고 압력을 가했던 핵무기 개발사업을 3년 동안 그대로 붙들고 있었다. 1980년 12월 전두환은 서울에 있는 한국원자력연구소를 대전의 대덕단지로 옮기고, 1976년 12월에 설립된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을 그 연구소에 흡수·통합시킨 뒤에 한국에너지연구소라는 위장간판을 달아놓았으며, 1982년 4-5월에 플루토늄 추출실험을 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

1980년대 전반기에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일했던 미국 정부관리의 말을 인용한 『아사히신붕』 2004년 9월 9일자 보도에 따르면, 당시 레이건 정부는 전두환의 지시로 플루토늄 추출실험이 실시되었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즉시 중지하라고 요구했으며, 전두환은 1983년 11월 남(한국)을 방문한 레이건에게 플루토늄 추출실험을 중지하겠다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다음으로, 2000년에 실시된 비밀핵물질실험의 진상은 다음과 같다. 『뉴욕타임스』 2004년 9월 9일자 보도에 따르면, 우라늄을 농축하기 위하여 동위원소(isotope)를 분리하는 핵물질실험은 2000년 1-2월에 실시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우라늄을 농축하기 위해서 동위원소를 분리한 핵물질실험이었으며, 대덕단지에 있는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실시되었다. 이것은 종전과는 다른 종류의, 첨단기술을 동원한 비밀핵물질실험이 김대중 정부 시기에 실시되었음을 말해준다.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원자력연구소에서 플루토늄 추출실험이 실시되었던 1982년에 다른 나라에서 수입한 인광석에서 추출된 천연우라늄이 원자력연구소에 공급되었는데, 원자력연구소는 그 천연우라늄을 변환하여 1백50kg의 금속우라늄을 만들었다. 2000년 1-2월에 실시된 비밀핵물질실험은 원자력연구소가 18년 동안이나 보관해오던 금속우라늄 가운데서 3.5kg을 분리실험에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 남아있는 금속우라늄은 1백34kg밖에 되지 않으므로, 12.5kg은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행방이 묘연한 12.5kg의 금속우라늄이 분실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비밀핵물질실험에 사용된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1982년의 비밀핵물질실험이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실시되었던 것과 달리, 노무현 정부는 2000년에 실시된 비밀핵물질실험이 핵과학자들의 학문적 호기심이 발동하여 진행한 연구활동이었으며, 김대중 정부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2000년에 실시된 비밀핵물질실험이 노무현 정부가 주장한 것처럼, 과연 김대중 정부와 무관한 것일까? 비밀핵물질실험을 핵과학자들의 단순한 연구활동으로 보느냐 아니면 남(한국) 정부당국의 지시 또는 승인에 의하여 추진된 정책적 연구활동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사건의 본질은 완전히 달라진다.

2000년 1-2월에 실시된 비밀핵물질실험과 관련하여 내외언론들이 보도한 내용을 종합·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1) 노무현 정부는 남(한국)을 방문한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에게 이전에 밝히지 않았던, 레이저를 사용한 핵연료 농축프로그램(nuclear fuel enrichment program)에 관한 정보를 넘겨주었다. (『넬슨 리포트(Nelson Report)』 2004년 9월 1일자)

2) 레이저를 사용한 핵연료 농축프로그램이란, 전문용어로 말하면, 원자핵 증발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atomic vapor laser isotope separation)를 이용한 기술을 뜻한다. 이 기술의 원형은 원래 핵무기 제조기술을 개발하는 미국의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Lawrence Livermore National Laboratory)에서 개발된 것인데, 나중에 미국 농축회사(U.S. Enrichment Corporation)로 이전되었다. 이 회사는 원자핵 증발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기술을 2004년까지 상용화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개발사업을 추진했으나, 1999년 6월에 경제성이 없다고 판명되어 기술개발을 중단한다고 발표하였다. 그 기술을 개발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17억 달러 이상을 투자한 미국 동력자원부(Department of Energy)는 핵무기 개발을 위해 그 기술을 사용할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 그 기술은 프랑스, 일본, 러시아에서도 연구되어왔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원자핵 증발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는 설비와 공정을 은폐하기 쉬울 뿐 아니라, 경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고 고도의 정교한 기술을 요구하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에, 민수산업에는 적합하지 않고 정부가 추진하는 핵무기 개발사업에 포함된다. (『뉴욕타임스』 2004년 9월 3일자)

3) 국제원자력기구 외교관들은 2004년 9월 둘째 주간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언론대담에서 남(한국)의 핵과학자들이 얻어낸 우라늄 농축도가 이란이 얻어낸 우라늄 농축도보다 네 배나 높은 것이었다고 밝혔다. 2002년에 이란의 핵과학자들은 우라늄을 약 15%로 농축하였던 것에 비해서, 2000년에 남(한국)의 핵과학자들은 우라늄을 77%로 농축하였는데, 그것은 핵폭발에 요구되는 수준의 고농축에 성공한 것이었다. (『워싱턴포스트』 2004년 9월 12일자) 그러나 남(한국) 정부당국은 우라늄을 고농축하였다는 것을 부인하였다. 과학기술부 원자력국장 조청원은 2004년 9월 2일 공식발표에서 우라늄 농축도를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4년 9월 3일자)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은 우라늄 농축도가 평균 10%밖에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남(한국) 정부당국은 추출한 농축우라늄이 겨우 0.2g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으나, 문제는 얼마나 많은 양을 추출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핵폭발에 요구되는 수준의 고농축 기술개발에 성공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4) 국제원자력기구 외교관들은 이란이 우라늄농축실험을 실시하기 2년 전에 남(한국)이 핵확산금지조약을 위반하면서 그러한 핵물질실험을 실시하였으며, 이란의 우라늄농축실험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 2년 동안 그런 실험을 실시하였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워싱턴포스트』 2004년 9월 12일자)

5) 남(한국) 정부당국은 핵물질실험을 은폐하고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방해하였다. 국제원자력기구 외교관들은 국제원자력기구가 1998년 이후 지난 6년 동안 남(한국)이 핵확산금지조약을 위반하였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고 밝혔다. 국제원자력기구는 2003년 12월에 남(한국) 정부당국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남(한국) 정부당국은 2000년에 비밀핵물질실험을 실시한 뒤에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공식적으로, 반복적으로(officially and repeatedly) 방해하였을 뿐 아니라 국제원자력기구에게 허위사실을 신고하였다. (『워싱턴포스트』 2004년 9월 12일자) 국제원자력기구가 2001년에 한국원자력원구소에 대해 사찰을 실시하려 하자 김대중 정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남(한국) 정부당국은 2001년부터 2년 동안 적어도 두 차례나 국제원자력기구의 정기사찰을 거부하였다. 남(한국)은 2004년 2월 국제원자력기구 안전조치 추가의정서를 비준하였고, 그에 따라 지난 시기에 실시한 핵물질실험에 관하여 솔직하게 보고하였다. 2004년 8월 29일부터 9월 4일까지 국제원자력기구가 사찰을 실시하는 동안, 노무현 정부는 이전에 핵물질실험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 2004년 9월 12일자) 이러한 남(한국) 정부당국의 태도는, 남(한국) 정부당국이 국제원자력기구에게 자발적으로 협조하였다고 칭송하였던 미국 정부관리들의 말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2004년 9월 12일자)

일련의 사건에서 드러난 의혹은 다음과 같다.

1) 1999년 6월에 미국 농축회사가 원자핵 증발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기술을 상용화하는 것을 포기하고 기술개발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때로부터 여섯 달 뒤인 2000년 1-2월에 남(한국)의 핵과학자들이 그 기술을 사용하여 비밀핵물질실험을 실시하였다. 남(한국)의 핵과학자들은 국제정보에 어두워서 미국에서 여섯 달 전에 개발사업이 중단된 것도 모르고 핵물질실험을 실시하였을까?

2) 원자핵 증발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에는 많은 경비가 들어가고 고도의 정교한 기술이 요구된다. 그런데 남(한국)의 핵과학자들은 왜 그처럼 힘든 실험을, 그것도 미국이 개발을 중단한다고 발표한 뒤에 실시하였을까? 학문적 호기심이 발동하였기 때문이었을까?

3) 우라늄 농축실험은 국제사회에 매우 민감한 정치문제를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미국을 심히 자극하여 한·미 관계에 심각한 파장을 일으킨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도 알만한 상식인데, 남(한국)의 핵과학자들은 그런 상식도 모르고 핵물질실험을 실시했을까? 아니면 남(한국)의 핵과학자들은 그런 상식쯤은 무시하고 만용을 부렸던 것일까?  

4) 만일 2000년의 비밀핵물질실험이 핵과학자들의 단순한 연구활동이었다면, 남(한국) 정부당국은 왜 그 연구활동을 감추려고 하였을까? 남(한국) 정부당국이 국제원자력기구의 정기사찰을 거부하면서까지 연구활동을 감추려고 하였다는 사실은, 그것이 단순한 연구활동이 아니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5) 원자핵 증발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기술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고, 미국을 비롯한 몇몇 기술선진국들에서 개발 중인 것이다. 그 기술을 개발하는 데는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공정이 요구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남(한국)의 핵과학자들이 어떻게 그러한 고도의 기술을 사용하여 핵물질실험을 실시할 수 있었을까? 한국원자력연구소는 미국의 관련 연구기관으로부터 지원과 방조를 받지 않고 그러한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핵물질실험을 실시할 수 있었을까?

미국 정부관리들의 말에 따르면, 미국 정부당국은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참가한 핵과학자들이 미국의 핵시설에서 훈련을 받았는지, 그리고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사용된 기술이 미국으로부터 도입된 것인지를 별도로 조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워싱턴포스트』 2004년 9월 3일자)

다른 나라의 경험을 보더라도 핵물질실험은 몇몇 핵과학자들의 호기심이 발동하여 추진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과 극소수의 최고위급 관리들 몇 사람이 극비의 정치적 결정으로 추진된다. 남(한국)도 예외가 아닐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2000년의 비밀핵물질실험을 사전에 승인하였는지 또는 그 실험결과에 관한 사후보고를 받았는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의혹에 쌓여있는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원자력기구에게는 김대중 정부가 그 핵물질실험에 개입하였는지를 조사할 권한이 없다.

내외언론들은 국제원자력기구가 몇 해 전에 새로 도입한 환경표본조사에 의해서 1982년 4-5월에 실시된 플루토늄추출실험이 처음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하였지만, 미국 국가정보기관은 당시에 그 비밀실험에 관한 정보를 파악하였고 전두환에게 압력을 넣어 실험을 중단시킨 바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2000년 1-2월에 실시된 우라늄분리실험이 국제원자력기구의 환경표본조사로도 밝혀낼 수 없는 것이고, 미국 국가정보기관만이 파악하고 있다는 데 있다. 미국 국가정보기관은 2000년의 우라늄분리실험에 관한 정보를 오래 전에 파악하였으면서도 최근에 미국 국방부 고위관리의 여론공작에 의해서 그 정보가 언론에 폭로되기 전까지 묵인해왔다. 극비의 흑막 뒤에 감추어져 있는 남(한국)의 핵물질실험에 관련된 정보는 미국의 여론공작에 의해서 때로 한 귀퉁이를 드러내곤 하는 것이다.

3. 1998년부터 2000년까지의 한(조선)반도 정세와 2000년 1-2월의 비밀핵물질실험

지난 시기의 경험은, 남(한국) 정부가 위기상황에 처할 때마다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였음을 말해준다. 세상에 알려진 대로, 1970년대 초 위기상황에 처한 박정희 군사독재정부는 핵무기개발을 시도하였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닉슨 정부가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중국과 수교를 전제로 한 정치회담을 시작하면서 주한미국군을 일방적으로 감군하였던 급격한 정세변화 속에서 박정희 군사독재정부는 심각한 위기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주한미국군 감군조치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하였던 박정희 군사독재정부는 1972년에 남북대화를 추진하면서 막후에서는 비밀핵무기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국무부 정보분석국 관리는 1972년 7월 7일자 보고에서 주한미국군 감군은 남(한국)의 대북(조선) 입지를 완전히 침식해버릴 것이므로 주한미국군의 규모에 어떤 변동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부분적인 감축도 박정희의 대북(조선) 협상력과 정치적 지위를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므로 결국 미국 정부와 의회 모두 주한미국군의 추가감군을 추진하기는 극히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미 국무부 비밀문서로 밝혀진 7.4 남북공동성명 내막-박정희 권력욕, 미 압박이 대북협상 물꼬 텄다」, 『신동아』 2004년 1월호) 당시 박정희가 주한미군 감군조치에 대해 얼마나 심하게 반발하였는지는 그가 1971년 9월 20일 닉슨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있다.

1972년에 박정희 군사독재정부가 처했던 상황이 총체적인 위기상황이었던 것처럼, 2000년에 김대중 정부가 처했던 상황도 그에 못하지 않은 위기상황이었다. 2000년 전후의 한(조선)반도 정세의 겉모양만 훑어보아서는 당시 김대중 정부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의 기간에 김대중 정부에게 발생하였던 정치, 군사, 경제적 위기는 다음과 같다.

1) 당시 김대중 정부는 군사적 위기에 빠지고 있었다. 그 위기감은 북(조선)과 미국에 의해서 각각 조성된 것이다. 북(조선)은 1998년 5월 파키스탄에서 지하핵폭발실험을 성공적으로 실시하고, 같은 해 8월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탑재한 우주발사체 백두산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였다.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와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가 현실로 입증된 1998년은 북(조선)의 군사력이 남(한국)의 군사력에 비해 전략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이 드러난 시기였다.

다른 한편, 미국 국방부의 최종평가실(Office of Net Assessment) 책임자인 노회한 군사전략가 앤드류 마샬(Andrew W. Marshall)의 지휘 아래 학자, 전직 정부관리, 현직 국방부 관리들로 구성된 전략연구집단이 작성한 군사전략보고서 「아시아 2025(Asia 2025)」가 1999년 여름에 발표되었다. 그 보고서는 주한미국군과 주일미국군의 철군을 예견하면서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첫째, 코리아의 통일이 실현되는 것과 더불어 민족주의적 감정이 휘몰아치면, 통일된 코리아는 미국을 몰아낼 것(expel)이다. 둘째, 일본은 자국의 안보와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과 협상을 추진하면서 주일미국군 철군에 동의할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2000년 3월 17일자) 주한미국군 철군을 예견하는 전략보고서가 작성된 것이야말로 김대중 정부에게 커다란 심리적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2) 당시 김대중 정부는 정치적 위기에 빠지고 있었다. 북(조선)은 제2차 인공위성 발사를 준비하면서 클린턴 정부를 강하게 압박하였다. 결국 클린턴 정부는 1999년 5월 하순 대통령 특사 윌리엄 페리(William J. Perry)를 평양에 급파하였고, 같은 해 9월 초 베를린에서 열린 조·미 정치회담에 나왔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조·미 관계개선을 목표로 하는 이른바 '페리보고서'를 연방의회에 제출하였다. 이것은 북(조선)의 강한 압박공세로 궁지에 몰린 클린턴 정부가 김대중 정부를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조·미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한(조선)반도의 정치·군사문제를 해결하는 협상과정에서 완전히 소외당하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의 시각에는 그러한 정치·군사적 정세변화가 한·미 동맹체제의 동요로 비쳤을 것이다.

3) 당시 김대중 정부는 경제적 위기에 빠져 있었다. 남(한국) 경제는 1997년 말에 발생한 외환위기로 치명타를 입었으며, 1998년에는 국제통화기금(IMF)에게 경제주권을 넘겨주는 비극적인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파산상태에 빠져 들어간 남(한국) 경제는 회복 가능성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주목하는 것은, 김대중 정부의 대통령과 고위관리들이 1999년부터 주한미국군 주둔문제를 집중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남(한국) 정치사에서 김대중 정부는 주한미국군 문제를 공개적으로 가장 심각하게 검토한 최초의 정부였다.

한(조선)반도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는 경우, 비무장지대에 유엔평화유지군을 주둔시키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으로 작성한 외교통상부 내부문건이 언론에 유출된 것은 1998년 12월의 일이었다.

1999년 4월 1일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임동원은 기자들에게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하면서 "북한이 큰 소리를 내고 있으나 주한미군 철수 주장은 주민통제를 위한 레토릭(수사)이다. 사실 북한은 남한이 북침할 것을 우려해 미군이 남북 간의 안전판 역할을 해주길 바라고 있다. 다만 현재 북한과 미국이 적대관계에 있기 때문에 문제다. 북한은 미군이 적군이 아닌 평화유지군으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주한미군의 지위변경 문제는 4자회담에서 논의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4월 6일에도 비슷한 내용을 되풀이하면서 "미국은 이를 비밀로 하려고 한다. 노출되면 협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협상하려는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한편, 1999년 4월 6일 김대중은 청와대에서 육군, 공군 장성들로부터 진급 및 보직신고를 받는 자리에서 "북한은 미군이 평화군이라면 (한국에) 주둔해도 좋다며 미군의 존재를 인정하는 말을 했다.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고 있지는 않지만 북한이 처음으로 이러한 의사를 표시했다. 북한도 그 동안 미군철수를 주장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중·일 간의 극한 대립이나 동북아의 세력균형 붕괴를 우려, 이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의 침략을 막는 것뿐 아니라 동북아의 세력균형과 현상유지를 위해 통일 후까지도 미군이 주둔해야 한다. 미군이 없을 때 중국과 일본의 군비경쟁이 심해지며 그 경우 우리가 가장 큰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동북아, 한반도, 우리 민족을 위해서도 미군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1999년 4월 8일자)

그로부터 이틀 뒤인 4월 8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47차 국가안보회의 상임위원회는 주한미국군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밝히는 보도자료를 배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주한미군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주둔하는 것으로, 이는 전적으로 한·미 간의 문제이며 남북 간에나 미북 간에 논의될 사안이 아니다. 한반도에 침략의 위험이 있는 한 주한미군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2) 평화체제 구축문제에 실질적인 진전이 이루어질 때 한반도의 모든 군대의 구조나 배치문제 논의가 가능하다. 이때에는 남북한의 군사력과 주한미군을 함께 논의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4자회담에 임하는 한·미 공동의 입장이다.

3)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구축되고 통일이 이루어진 후에도 미군이 동북아지역의 안정자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한반도에 주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김대중 정부의 대통령과 고위관리들이 주한미국군 문제에 관하여 그처럼 횡설수설 쏟아내었던 말들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을 쏟아낸 것은, 1998년에 북(조선)의 지하핵폭발실험과 우주발사체 발사가 성공한 이후, 조·미 관계가 북(조선)의 전략에 따라 변화되어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주한미국군이 철군하지나 않을까 하는 안보불안을 반영한 행동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주한미국군의 영구주둔에 매달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당시의 정세는 김대중 정부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2000년 1-2월에 실시된 비밀핵물질실험이 김대중 정부가 심각한 위기상황에 빠져 있었던 가운데 실시되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2000년 3월 9일에 독일을 방문하고 있던 김대중이 남북경제협력을 위한 남북당국자회담을 개최하자는 '베를린 선언'을 발표하였고, 같은 날 싱가포르에서 조선아세아평화위원회와 국가정보원이 각각 파견한 인사들이 극비회동을 진행하였던 원인과 배경을 따져보면, 김대중 정부에게 그 동안 없었던 조국통일에 대한 의지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1998년 이후 심화되어온 총체적 위기상황을 남북대화로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이었다.  

명백하게도, 남(한국)은 레이저기술을 이용한 비밀핵물질실험을 통하여 무기급 우라늄을 농축하는 기술을 첨단기술을 개발하였다. 30년 전 박정희 군사독재정부 시기의 핵물질생산기술과 비교해서, 김대중 정부 시기의 핵물질생산기술은 훨씬 앞선 것이었다. 남(한국)은 그 동안 미국의 비호와 지원 아래 핵물질생산기술을 축적해왔던 것이다. 이것은 남(한국) 정부당국이 언제든지 정치적 결정을 내리기만 하면 자체의 기술로 무기급 핵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높은 기술수준에 도달하였음을 뜻한다.

물론 무기급 핵물질을 생산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무기급 핵물질을 개발하는 것과 더불어 정교한 기폭장치도 개발해야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 남(한국)의 군사과학기술수준으로 보아서, 정교한 기폭장치를 개발하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만일 남(한국) 정부당국이 미국의 감시를 피할 수만 있다면, 자체의 기술로 비밀하게 핵무기를 제조할 가능성이 있음을 뜻한다. 원자핵 증발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기법은 비교적 손쉽게 은폐할 수 있는 것이므로, 남(한국) 정부당국이 미국의 감시를 따돌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미국이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대해서 크게 우려하면서 남(한국)의 핵공학 연구활동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의 통제를 더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2004년 9월 27일 국제원자력기구의 외교소식통들이 전한 바에 따르면, 국제원자력기구는 2000년 1-2월에 실시된 비밀핵물질실험이 지난 1970년대에 추진하다 미국의 압력으로 중단된 핵무기 개발사업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국제원자력기구는 김대중 정부가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 과거 정부가 추진한 핵무기 개발사업에서 얻은 기술을 유지하기 위해 비밀연구활동을 계속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연합뉴스』 2004년 9월 28일자)

4. 정보유출 여론공작은 누가 무슨 목적으로 추진하였을까?

세상에 알려진 대로,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국제사회에 폭로한 것은 미국이다. 미국이 전세계에 있는 모든 핵시설과 전세계 핵과학자들의 핵공학 연구활동을 감시하는 방대한 첩보망을 가동하고 있으므로,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정보도 그 첩보망에 포착되었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미국이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국제사회에 폭로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모호한 표현이다. 누가 어떤 경로로, 무슨 목적으로 폭로하였는지를 밝혀야 하는데, 그 폭로사건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조금 낯선 이름의 전자언론매체는 『넬슨 리포트(Nelson Report)』다.

인터넷매체 『토킹 포인츠 메모(Talking Points Memo)』의 편집자인 조쉬 마샬(Josh M. Marshall)이 미국 연방의회 소식지인 『힐(The Hill)』 2003년 2월 12일자에서 묘사한 대로, 『넬슨 리포트』는 "워싱턴 디씨에서 아시아정책을 다루는 사람들 사이에서 경전으로 통하는 일간소식지(a daily newsletter that is the bible of D.C.'s Asia Policy hands)"다. 전자우편(email)을 통해서 전달되는 『넬슨 리포트』의 편집자 크리스토퍼 넬슨(Christopher Nelson)은 현재 쌔뮤얼스 인터내셔널(Samuels International)이라는 기업의 수석부사장이다. 그는 38년 전인 1966년부터 워싱턴 정가에서 연방의회 외교문제 분석가로, 전문언론인으로 일해오고 있으며, 카터 정부시기에 연방상원 다수당 대표의 수석고문으로, 연방상원 민주당 정책위원회와 연방하원 아시아 외교소위원회에서 중·미 관계 정상화 정책에 관여한 경력을 가졌다.

『넬슨 리포트』라는 특수한 정보전달매체에 주목하는 까닭은, 그 매체가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정보만이 아니라 북(조선)의 우라늄농축에 관한 '정보'도 공개하였기 때문이다. 그 매체는 2003년 1월 7일자 보도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클린턴 정부관리들이 업무인수에 나선 부시 정부관리들에게 북(조선)의 우라늄농축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였고, 동시에 『넬슨 리포트』 편집장 크리스토퍼 넬슨에게 그 '정보'를 넘겨주어 보도하도록 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넬슨 리포트』가 북(조선)의 우라늄농축에 관한 '정보'를 보도한 때로부터 일주일 뒤에 클린턴 정부의 또 다른 고위관리가 조쉬 마샬에게도 그 '정보'의 핵심부분을 확인해주었다고 한다. (Josh Marshall, "Big Talk and Little Stick: Our North Korean Folly", The Hill, 2004년 2월 12일자)

2004년 9월 1일 『넬슨 리포트』는 '비밀핵프로그램'이라는 매우 자극적인 표현이 들어간 「남(한국), 국제원자력기구에게 비밀핵프로그램을 밝히다(S. Korea Discloses Secret Nuclear Program to IAEA)」라는 제목으로 작성된 기사를 내보냈다. 그 기사에서 주목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노무현 정부가 국제원자력기구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2000년에 실시한 비밀핵물질실험은 정부가 운영하는 실험실에서, 정부의 재정지원이나 허락을 받지 않고 진행된 '일탈프로그램(rogue program)'이었다고 한다.

2) 미국의 전문가들은 2000년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보도를 접하고 당황(consternation)과 놀라움을 표시하였으며, 현재 노무현 대통령이나 이전의 김대중 대통령이 비밀핵물질실험을 인지하였거나 승인하였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3) 『넬슨 리포트』는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정보를 부시 정부의 최고위급 관리 소식통들(the highest official sources)로부터 확인(confirm)할 수 있었다.

4) 관련 소식통들 가운데 한 소식통은, 이란의 핵문제가 매우 민감해진 상황에서, 그리고 북(조선)의 핵문제를 위한 6자회담을 진행하는 조건에서 드러난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은 "거대한 지정학적 파장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정치적 돌발사건(political bombshell)"이라고 묘사하였다.

『넬슨 리포트』가 남(한국)의 우라늄농축실험에 관한 사실을 보도한 때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2004년 9월 8일 부시 정부의 고위관리는 남(한국)이 20여년 전에 플루토늄 추출실험을 비밀히 실시하였다는 정보를 『합동통신(Associated Press)』에 흘려주어 보도하게 하였다.

이러한 정보유출이 부시 정부의 고위관리들이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진행한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들이 추진한 것은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정치문제로 부각시키려는 여론공작이었다. 그 이후의 사태는 그들의 의도대로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은 매우 민감한 정치문제로 떠오르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부시 정부의 고위관리가 『합동통신』에게 남(한국)이 20여년 전에 플루토늄 추출실험을 비밀하게 실시하였다는 정보를 흘려주어 보도하였던 날, 『로이터통신(Reuters)』은 부시 정부 고위관리의 말을 인용하여 "남(한국)이 4년 전에 실시했던 우라늄 농축실험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다루어질 것 같다. 그 문제를 유엔안보리에 회부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그것은 남(한국)에 제재를 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비확산에 대한 일관된 접근태도를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하였다. 『워싱턴포스트』 2004년 9월 10일자 기사도 국제원자력기구가 유엔안보리에 보고될 수 있는, 남(한국)이 위반한 6가지 사항을 파악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군비통제협회(Arms Control Association) 사무총장 대릴 킴벌(Daryl G. Kimball)은 남(한국)이 1975년에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하였다고 할지라도, 핵선택권(nuclear option)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는 의혹을 받았다고 지적하였다. (『뉴욕타임스』 2004년 9월 8일자)

국제원자력기구 사찰관 출신으로 현재 워싱턴의 과학 및 국제안보연구소(Institute for Science and International Security) 대표인 데이빗 올브라이트(David Albright)는 "남(한국)이 우라늄 농축프로그램을 보고하지 않고 유지하였을 뿐 아니라, 무기급에 근접한 핵물질을 실제로 제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핵무기 제조능력을 개발하기를 원했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하고, 남(한국)의 플루토늄 추출실험에 대한 의혹이 명백하게 해소되지 않는다면 남(한국)은 '작은 이란'이 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워싱턴포스트』 2004년 9월 3일자, 『연합뉴스』 2004년 9월 10일자)

사태가 매우 심각하게, 그리고 자기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직감한 노무현 정부는 2004년 9월 9일 1982년 4-5월에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었던 한국원자력연구소(현재는 대전으로 이전되었음)에서 플루토늄 추출실험이 실시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2004년 9월 18일 노무현 정부는 '핵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4원칙'을 발표하여, 핵무기 개발의사가 없음을 확인하였다. 그것은 비밀핵물질실험이 폭로되어 궁지에 몰린 노무현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그렇다면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미국 언론에 흘려준 여론공작은 누가 추진한 것일까? 다른 나라의 핵물질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다루는 것은 미국 정부의 아무 단위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극비정보를 다룰 수 있는 단위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DIA), 미국 국무부 산하 정보조사국(BIR, Bureau of Intelligence and Research)이다. 여론공작을 추진한 대상에 대한 혐의는 중앙정보국, 국방정보국, 정보조사국으로 좁혀진다.

그런데 미국 정부 당국자의 말을 인용한 『아사히신붕』 2004년 9월 7일자 워싱턴발 보도에 따르면, 일단 정보조사국은 그 혐의대상들 가운데서 제외되는 것으로 보인다. 『아사히신붕』은 노무현 정부가 2004년 8월말 외교통상부 관리를 극비리에 워싱턴으로 급파하여 우라늄 분리실험문제에 관하여 미국 국무부에 해명하였으며, 또 다른 당국자는 우라늄 분리실험문제에 관한 해명이 남(한국) 정부당국의 요청으로 국무부 이외에 다른 정부부처에는 전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가 2004년 8월말에 정부관리를 파견하여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해서 해명하였다면,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문제는 『넬슨 리포트』에 보도되기 이전에 이미 미국 정부당국이 그 문제를 노무현 정부에게 제기하였던 것이 분명하며, 또한 노무현 정부가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해서 미국 국무부에게만 해명하였다는 사실은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 정부당국이 국무부라는 점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이 폭로된 직후 미국 국무부가 보여준 반응을 살펴보면, 국무부가 이미 노무현 정부로부터 해명을 받았으므로 그 문제를 더 이상 정치문제로 삼지 않으려고 한 것이 드러난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 리처드 바우처(Richard A. Boucher)는 "남(한국)이 과거에 행한 것은 행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것은 제거되어야 할 행동이었다."고 지적하면서도, "우리는 남(한국)이 투명한 방식으로 그 문제를 처리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만족하게 생각한다."고 말함으로써(『뉴욕타임스』 2004년 9월 8일자),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정치문제로 삼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또한 미국 국무부의 한 당국자는 플루토늄 추출실험이 핵무기 개발계획이었다는 증거는 없다고 지적하면서 미국 정부는 당시 남(한국)에는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요구되는 장비, 기술, 물질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2000년에 실시된 우라늄 분리실험도 1982년에 실시된 플루토늄 추출실험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4년 9월 10일자) 그의 발언에서는 파문을 일으킨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수습하려는 인상마저 풍겼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2004년 9월 1일 『넬슨 리포트』에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정보를 흘려준 "미국 정부의 최고위급 관리 소식통들"은 정보조사국으로부터 관련정보를 얻는 국무부 관리가 아니라 국방부정보국으로부터 관련정보를 얻는 국방부 관리 또는 자체의 정보망을 가동하는 중앙정보국 관리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의 판단으로는, 남(한국)의 핵물질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미국 언론에 흘려준 여론공작은 국방정보국으로부터 극비정보를 얻은 국방부 고위관리의 소행으로 보인다. 그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미국 중앙정보국의 고위관리는 미국 언론에 자기의 신원을 노출하면서 극비정보를 폭로하는 식의 저급한 여론공작은 하지 않는다. 중앙정보국은 언론에 전혀 노출되지 않는 고급한 첩보공작이나 정치공작을 전문으로 하는 국가정보기관이다. 중앙정보국이 여론공작을 추진하는 경우, 언론에 자기의 신원을 전혀 노출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전문공작에서 지켜지는 철칙이다. 자기의 신원을 노출하면서 추진되는 정보유출 여론공작은 국무부나 국방부 고위관리들이 관행처럼 되풀이하는 저급한 수준의 공작이다.

2) 미국 국방부와 국무부가 치열한 경쟁관계, 갈등관계에 있다는 것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는 그 두 부처가 서로 경쟁·갈등관계에 있음을 알면서도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해서 국무부에게만 해명하였다. 이것을 국방부 고위관리들이 모를 리 없다. 국방부 고위관리들은 노무현 정부가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해 해명하면서 자기들을 배제한 행동이 자기들의 권위를 무시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더욱이 미국 국방부 고위관리들은 자기들이 추진하는 주한미국군 감군조치에 대해서 노무현 정부가 은근히 반대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최근 미국 국방부와 노무현 정부 사이에서 어긋난 정황을 보면, 국방부 고위관리가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폭로하여 노무현 정부를 궁지에 빠뜨린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각된다.

3) 국제원자력기구와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부처는 국방부가 아니라 국무부다.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폭로한 여론공작의 결과는, 국무부와 국제원자력기구에게 그 실험의 진상을 파악하고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 정치적, 실무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국무부에게는 자기에게 엄청난 정치적, 실무적 부담만 안겨줄 비밀핵물질실험을 폭로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4) 국무부가 주도하는 6자회담에 대해서 회의적 또는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국방부는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이 폭로되어 6자회담 추진에 장애가 조성되는 것에 대해서 개의치 않는다. 반면에, 파월-아미티지-켈리로 이어지는 국무부 인맥은 6자회담 이외에는 대안이 없으므로 그 회담의 지속적인 추진에 매달려 있다. 그러한 국무부가 6자회담의 지속적인 추진에 장애를 조성하게 될 여론공작을 추진하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

5) 2002년 10월 3-5일 평양에서 조·미 정치회담이 열린 직후, 그 회담에 미국 정부대표로 참석하였던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제임스 켈리(James A. Kelly)의 보고를 받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근 10일 동안이나 내부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시사주간지 『뉴 리퍼블릭(New Republic)』 2002년 11월 4일자 보도에 따르면, 부시 정부의 고위관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켈리의 보고내용을 일간지 『유에스에이 투데이(USA Today)』의 북(조선) 담당 전문기자 바버라 슬레이빈(Barbara Slavin)에게, 그리고 『넬슨 리포트』의 크리스토퍼 넬슨에게 각각 넘겨주었다. 슬레이빈은 2002년 10월 16일 오전에 "부시 정부의 대북(조선)정책을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그 정보를 얻었다고 밝혔다. 켈리의 보고내용에 관련된 정보가 미국 언론에 흘러나가자, 조·미 정치회담 대신에 '핵소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미 정치회담을 반대하는 국방부 고위관리들이 저지른 전형적인 정보유출 여론공작이었다. 2002년의 정보유출 여론공작과 2004년의 정보유출 여론공작은 동일한 국방부 고위관리의 소행이었다.

6) 미국 국방부에서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취급하는 고위관리라면, 국방장관이나 국방차관일 것이다. 그런데 정보유출 여론공작에 국방장관이 직접 나서는 경우는 없으므로,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가지고 미국 언론을 상대로 저급한 여론공작을 추진한 고위관리는 국방차관 폴 월포위츠(Paul D. Wolfowitz)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보유출 여론공작 추진자는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오래 전부터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가 22년 전에 있었던 플루토늄 추출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오늘에 와서 언론에 흘려준 것으로도 입증된다.

정보유출 여론공작은 집요하게 추진되었다. 먼저 우라늄 분리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언론에 흘려주고, 뒤이어 플루토늄 추출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언론에 흘려주는 방법으로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폭로하였다. 불과 일주일 간격을 두고 이어진 그의 폭로행위에 공작추진자의 의도가 들어있는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정보유출 여론공작 추진자는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왜 이제 와서 폭로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을 폭로한 여론공작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언론유출 여론공작이 국제사회에 일으킨 파문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된다.

1) 정보유출 여론공작은 북(조선)에게 6자회담을 거부할 명분을 줌으로써 6자회담 추진일정을 교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004년 9월 27일 최수헌 외무성 부상은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한국의 비밀스러운 핵관련 실험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는 심각한 상황에서 우리는 핵무기 프로그램을 논의하기 위한 대화에 참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4년 9월 28일자)

2) 정보유출 여론공작은 미국이 이란의 우라늄농축실험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면서 이란을 압박해 들어가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3) 정보유출 여론공작은 그렇지 않아도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는 노무현 정부를 궁지에 빠뜨렸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여론공작이 6자회담 추진일정을 교란하고 이란에 대한 압박책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여론공작은 결과적으로 '핵문제'를 가지고 북(조선)과 이란을 압박하는 미국의 대외정책 추진에 정치적 손실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부시 정부의 어떤 고위관리가 미국의 대외정책에 손실을 끼치고, 노무현 정부를 궁지에 빠뜨리면서 여론공작을 추진한 것은, 상식적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여론공작에는 6자회담을 추진하고 이란을 압박하는 대외정책을 추진하는 것만큼 중요한 또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자회담을 추진하고 이란을 압박하는 대외정책 추진하는 것만큼 중요한 또 다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주목하는 것은, 정보유출 여론공작이 노무현 정부를 궁지에 빠뜨림으로써 노무현 정부가 비밀핵물질실험을 재개할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봉쇄한 것이다. 여론공작 추진자는 국제사회로 하여금 노무현 정부에게 강한 여론압박을 가하게 만들어 노무현 정부가 핵물질실험을 재개할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로 하여금 남(한국)의 핵물질연구활동에 대한 감시와 사찰을 이전보다 더 엄격하게 받도록 통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물음은, 여론공작 추진자는 왜 2004년 9월이라는 특정한 시점에 이르러 노무현 정부에 대한 통제를 더 강화하여야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 까닭은, 그가 혹시 노무현 정부가 국제원자력기구의 감시를 따돌리고 비밀핵물질실험을 실시하지나 않을까 우려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러한 우려는 공작추진자의 개인적 우려가 아니라 그가 속해있는 미국 국방부의 고위관리들이 내린 정책적 판단에서 비롯된 우려였을 것이다.

미국 국방부가 그러한 정책적 판단을 내린 까닭은, 지금 노무현 정부가 1999년에 김대중 정부가 겪었던 것보다 더 심각한 총체적 안보불안에 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겪고 있는 총체적 안보불안이란 주한미국군 감군으로 한·미 동맹체제가 동요하고, 경제파탄위기가 심화되는 것을 주된 원인으로 하여 발생한 것이다. 주한미국군 감군과 경제파탄위기 심화가 노무현 정부에게 얼마나 심각한 사태를 몰고 오는지에 관해서는 2004년 8월 15일자로 작성한 나의 글 「남(한국)의 경제위기와 주한미군 철군, 그리고 연방통일국의 경제건설」에서 논하였으므로 재론을 생략한다.

주한미국군이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감군되면서 한·미 동맹체제가 동요하고, 국제독점체들에 대한 예속이 심화되면서 남(한국)의 경제가 파탄위기에 밀려가는 것이 노무현 정부가 겪고 있는 총체적 안보불안의 주된 원인이라면,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에 대한 중산층 지지기반이 붕괴되고, 민족민주세력과 기층민중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중운동의 투쟁역량이 강화되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기반이 확대되는 것은 노무현 정부가 겪고 있는 총체적 안보불안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들이다. 또한 6자회담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북(조선)의 대미압박공세가 가중되고 그에 따라 조·미 관계의 대결국면이 더욱 날카로워지는 국면에서 노무현 정부가 느끼는 불안은 심각하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의 기간에 김대중 정부는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 남북대화를 추진하였고, 북(조선)은 김대중 정부의 남북대화 추진을 남북최고위급회담으로 격상시켜 조국통일의 새로운 전환을 이룩하였으나, 지금 노무현 정부에게는 남북대화 추진이라는 마지막 남은 돌파구마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가 겪었던 것보다 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으므로, 비밀핵물질실험을 추진할 가능성도 그만큼 더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은 노무현 정부가 심화되는 정치·군사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재래식 무력을 증강하게 될 것이지만 비밀핵물질실험은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견해는 두 가지 고정관념 위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첫째, 친미예속정부는 미국의 핵확산금지체제에 자발적으로 순응하기 때문에 영원히 비핵정부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이다. 둘째, 총체적 위기상황에서 미국의 감시망을 피해 비밀핵물질실험을 실시하는 핵무기 개발추진은 지난 시기 군사독재정부 시기에나 발생하였던 특수현상이라는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그런 고정관념은, 박정희-전두환 친미예속정부가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였다는 사실에 의해서, 그리고 파키스탄과 인도의 핵무기 개발이 군사독재정부 시기에 추진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의해서 부정된다.

노무현 정부에게도 핵물질실험을 추진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은 명백하다. 워싱턴의 여론공작 추진자가 간파한 것은 바로 그러한 가능성이었고, 그는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 그 가능성이 현실화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사전에 차단·봉쇄해야 했다. 그가 6자회담 추진과 이란에 대한 압박공세에 장애를 조성하면서까지 추진하였던 여론공작의 목적은, 위기상황에 빠진 노무현 정부가 재개할지도 모르는 핵물질연구활동을 사전에 완전히 차단·봉쇄하는 것이었다.

5. 글을 맺으며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남(한국)의 비밀핵물질실험에 관한 극비정보를 언론에 흘려준 여론공작은 노무현 정부가 재개할지도 모르는 핵물질연구활동을 재개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봉쇄한 것이었지만, 민족민주세력의 주체적 관점에서 그 사건을 바라보면, 그런 여론공작을 추진해야 할 정도로 노무현 정부의 위기상황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이 드러난다.

1970년대에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였던 박정희와 1980년대에 플루토늄 추출실험을 실시한 전두환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동원하여 민족민주세력과 보수야당세력을 탄압하였고, 우라늄 분리실험이 실시된 2000년에 김대중은 국가보안법을 존치한 상태에서 남북대화를 추진하였으나, 오늘 노무현은 국가보안법을 붙들기도 힘들게 되었고, 남북대화의 길도 찾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현 정부가 더 심각한 위기상황에 빠졌다고 보는 것이다.

위기는 정체하지 않는다. 위기상황은 정상화가 아니면 악화를 택한다. 위기상황을 반전시키는 정상화는 힘들고, 위기상황을 악화시키는 속도는 훨씬 빠르다.

노무현 정부가 위기상황을 반전시킬만한 정상화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미국 국방부 고위관리들은 노무현 정부의 위기상황이 핵무기 개발욕구를 자극할 소지가 있음을 간파하고 여론공작을 벌었으나, 그 공작은 원래 목적과 상관없이 노무현 정부의 위기상황을 악화시키는 결과만 가져왔다.

강한 압박을 받은 노무현 정부는 2004년 9월 18일 발표한 '핵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4원칙'에서 "핵의 평화적 이용범위를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노무현 정부의 고위당국자가 지적한 대로, "핵주권을 확보해 핵의 모범적 이용국가를 지향"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연합뉴스』 2004년 9월 19일자) '핵의 평화적 이용'과 '핵주권 확보'를 추구하는 것은, 핵무기는 개발하지 않으면서 핵공학기술을 발전시킨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핵공학기술의 발전은 핵무기 개발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 남(한국)의 핵활동에 대한 미국의 감시와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이 강화된다고 해도 '불씨'는 남아있는 것이다.

만일 주한미국군이 전면적으로 철군하고 한·미 동맹체제가 와해되는 경우, 미국의 제국주의적 군사력에 의존해온 친미예속정부는 주한미국군 철군에 의해서 발생한 전력공백을 메운다는 명분을 내걸고 핵무기 개발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남(한국)의 핵무장은 그것이 동족인 북(조선)을 적대하고 분단체제를 지키려는 전략적 무력증강이라는 점에서, 민족 내부의 군사적 대치상태를 더욱 날카롭게 만들고 분단체제를 고착시킬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주한미국군 철군은 주한미국군 철군운동을 전개해온 정치세력이 집권하는 정권교체와 연계되어야 한다. 그 정권교체가 자주적 민주주의정부 수립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자주적 민주주의정부는 주한미국군이 완전히 철군한 조건에서 비핵화 원칙을 지키면서 분단체제를 허물고 조국통일위업을 수행하는 통일정부다. 자주적 민주주의정부가 비핵화 원칙을 지킨다는 말은, 그 정부의 자주권을 지키는데는 핵무장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주적 민주주의정부는 남(한국) 근로대중의 힘으로 자기의 자주권을 지킬 것이며, 북(조선)의 사회주의정부와 손잡고 분단체제를 허물고 연방통일국을 세움으로써 한(조선)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할 것이다.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는 길은 연방통일국 건설밖에 없다. (2004년 10월 5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