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인을 경계하라

김현환

 

   글 제목의 "경계인"의 경계는 영어의 border 혹은 boundary로 변경이라는 뜻이고 뒤의 "경계하라"의 경계는 영어로 caution 혹 warning 즉 조심하라는 뜻이다.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경계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계급이 생겨나고 민족단위로 운명을 개척해나가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끊임없이 민족별로 자주성을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해 왔다. 다시 말하면 계급대 계급, 민족대 민족의 대립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인간의 생명인 자주성과 평화를 쟁취하기 위하여서는 어느 한 편에 서지 않고 경계인으로 서서 객관적인 구경군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 아니면 노예 소유주이다. 여기에 경계인(borderman)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만약 노예인데 노예신세를 면하려면 노예소유주들과 생사의 투쟁을 벌려야 한다. 자유, 존엄, 평화, 진리는 쟁취하여 얻는 것이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 평화, 자유, 인간의 존엄은 편드는(take a side with)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가 그 증거이다. 예수가 기독교인들이 믿듯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자. 하나님의 아들처럼 인종, 민족, 모든 가치관을 초월하여 객관성을 지닐 수 있는 완벽한 경계인이 어디 또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아들도 그 당시의 식민주의자인 로마 편을 들지 않고 시종일관 식민지 노예신세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편을 들었고, 로마의 추종세력인 헤롯왕의 편을 들지 않고 이스라엘 민중의 편을 들었으며, 유대교 지도자들의 편을 들지 않고 일반신도들의 편을 들었다. 그러다 마침내 예수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와, 헤롯왕과 종교지도자  가야바의 합작에 의하여 십자가에 처형당하였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지배자 편에 들거나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경계인으로 살았다면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었다. 부활은 십자가 다음에 오는 것이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외치는 자들을 경계하라.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면서도 정의 편에 서서 마침내 승리한 자들만이 부활의 아침을 찬란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유대교, 기독교 교인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고센땅에서 종살이하며 벽돌을 굽고 있었을 때 가장 편견이 없이 객관성을 지켜야 할 하나님 여호와가 누구의 편을 들었는가? 출애굽기 20장 2절에 다음과 같이 써 있다.

   "나는 여호와(Yahweh) 너의 하나님으로 너희를 이집트, 즉 속박의 집(house of bondage)에서 해방한 자(Liberator)니라."

   전지, 전능, 무소부재한 하나님 여호와가 지배자 이집트의 편을 들지 않고 고난받고 굶주린 이스라엘 노예들의 편을 들어 그들을 해방하였다. 여호와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경계에 머무르며 이스라엘 노예들의 울부짖음과 굶주림을 구경이나 하고 있지 않았다. 진리의 화신인 하나님도 그가 세상에 보낸 아들 예수도 억눌리고 배고픈 약자들의 편을 든 편견자였다. 진리, 평화, 자유, 인간의 존엄을 쟁취하는데는 객관적인 구경군 경계인은 존재할 수 없다.

   맑스는 1848년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각 시대의 지배적인 이념들은 그 시대의 지배층의 이념들이었다."(The ruling ideas of each age have ever been the ideas of its ruling class.)영어번역에 ever(아직도)와 have been(현재완료)을 보면 "지금까지도 역시" 각 시대의 지배논리는 지배층의 논리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쉽게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다."라는 말을 쓴다. 사실이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민중이 반드시 역사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가 들어가 있는 말이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민중"(people as they are)은 위에서 맑스가 지적했듯이 이미 민중이 살고 있는 사회의 지배층의 지배논리에 사회화(socialization)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어느 개인의 잘 못이 아니라 개인이 태어난 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이념기구(state ideological apparatus), 즉 학교, 종교, 언론, 출판, 등을 장악하고 민중을 쉽게 지배하기 위하여 거짓의식, 즉 지배논리를 주입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민중은 자기자신을 객관화하기 힘들며 중립을 지키며 경계인이 되기 힘들다. 경계인의 위선이 여기에 있다. 왜냐면 민중은 이미 지배층의 지배논리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지배층의 편을 들게 되어있다. 나서 자라면서 어른이 되어 이해관계의 충돌을 통하여 민중은 지배논리가 <거짓의식>으로 그들의 진정한 뜻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을 체험을 통하여 느끼게 된다. 그러나 상당한 사회과학적 안목이 없이는 지배논리의 허위를 들어내기가 쉽지 않다. 지배층의 대변자들(학자, 언론인, 작가, 등)이 내세우는 지배논리가 결코 만만하지가 않다. 설사 그 허위를 발견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을 들추어내어 발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지금의 조,중,동 신문들을 포함하여 여러 보수언론들의 횡포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지금은 민족주의세력들이 정권을 장악했으니 다행이지 군사정권시절에는 진리를 밝히는 일은 감옥가는 길이었다. 그때는 김지하 시인처럼 진리를 밝히는 글을 쓰거나 그러한 책을 들고 다녀도 감시의 대상이었고 잡히면 감옥을 가야 했다.

   에릭 프롬은 민중이 약한 이유는 <거짓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되면, 즉 진실을 알게 되면 민중은 역사를 바꾸는 거대한 힘으로 성장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래서 주체사상에서는 자주적인 사상의식을 앞세워 인간을 개조하는 일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민중, 자주적인 사상으로 의식화된 민중만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경계인은 언제나 기회주의자로서 자기의 이익에 부합되는 쪽을 택하기 때문에 결국은 지배층에 기생하며 살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객관적 관찰자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인으로 자처한다. 그들이 역사발전에 설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경계인이 출타한 사이에 집에 강도가 총을 들고 들어와 가족들을 위협하여 그의 부인과 딸들을 능욕하고 아들들을 때려눕히고 재산을 몰수한 후 계속 집에 머무르며 살고 있다고 가정하자. 경계인은 그것을 목격하고 단지 객관적으로 누가 옳은지를 관찰하며 구경이나 하고 있을 것인가? 우리 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36년간 식민지 생활을 했다. 우리 나라에 강도가 총칼을 들고 들어와 부녀자들을 능욕하고 젊은이들을 군대와 징용에 끌어가고 젊은 여자들을 정신대로 끌어가 군대의 노리개로 삼았으며 쌀을 비롯한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 갔다. 이때도 경계인은 일제와 우리 민족사이의 경계에 중립적으로 서서 구경이나 하는 것이 우리 민중들이 택했어야 할 자세였다고 강변할 것인가?

   지금 우리 민족은 외세에 의해 둘로 갈라져 1천만 이산가족들이 반세기나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고 서로 정전상태에서 언제 전쟁이 다시 발발할지 모르는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리고 동족끼리 총을 맞대고 무기경쟁으로 엄청난 재원을 낭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이남을 점령하고 전시 군통수권까지 장악하고 실제로 이남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계인은 휴전선(DMZ)이라는 경계에 서서 단지 중립을 지키며 구경이나 하겠다는 것인가? 경계인은 미국의 이남지배와 분단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솔직할 것이다. 좁혀서 경계인은 자기집에 강도가 들어와 자기 처와 딸들을 능욕하고 아들들을 때려눕히고 재산을 도둑질해도 자기 살 궁리나 하며 구경이나 하겠다고 솔직히 본색을 들어내는 것이 나을 것이다. 공연히 "경계인" 운운하며 우스운 짓거리를 하지 말고.

   1972년 칠레에서 처음으로 정식선거를 통하여 아이엔데 사회주의정권이 확립되었을 때 상당수의 카톨릭사제들은 사회주의이념을 위하여 싸운 것이 아니라 신앙심에서 정의를 위해 싸운 것이라고 하면서 사회주의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그럼 그들은 과연 전혀 어떤 이념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인가? 그들은 그들이 이미 생활 속에서 사회화되어 당연하게 생각되었던 <자본주의>라는 이념을 자신도 모르게 택했던 것이다. 이남의 기독교인들 중 많은 신도들이 자기들은 최고의 가치인 영생을 얻는데 관심이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포함한 어떤 이념도 선택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자본주의라는 이념을 선택하여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살고 있다. 그들이 단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자기가 익숙하여 살고 있는 자본주의는 이념이 아니고 사회주의만이 이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보다 평등하고 자주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 사회주의이다. 여기에도 경계인이 설자리는 없다. 민중의 자주성을 실현해나가는 과정으로서의 역사는 반드시 사회주의의 길로 나간다. 그것은 김정일위원장이 지적했듯이 사회주의는 과학이고 정의이고 자주이고 평화이기 때문이다. 경계인도 역사의 뒤안길에서 객관적으로 중립적으로 구경이나 하지 말고 정의의 편을 들어 투쟁하기 바란다.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당당하게 역사의 방향인 자주의 길, 민족통일의 길로 나아갈 것이다.

*필자는 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