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의 필치로 엮어온 집필활동 10년

- 통일학연구소 설립 10주년 기념강연 원고 -

이 글은 2005년 4월 2일 뉴욕 플러싱에서 열린 통일학연구소 설립 10주년 기념식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원고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1994년 4월 서울에서 겪은 경험
2. 연구소를 세우려고 뛰어다니던 나날에
3. 격려와 모략이 엇갈리던 시절의 기억
4. '고난의 행군' 시기에 벌인 집필전투
5. 1998년 9월 4일 조선중앙방송 발표에서 받은 충격
6. 1998년 정세전환의 정치·군사적 의미를 찾아서
7. 조·미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세우다
8.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 속에서 우리 민족끼리 세우는 민족통일전선
9. 민주노동당 창당과 남(한국) 민족민주전선 형성
10. 자주적 민주정부와 자주적 통일정부를 향하여

 

1. 1994년 4월 서울에서 겪은 경험

1994년 4월 어느 날, 나는 서울에서 열린 '핵문제'에 관한 토론회에 발표자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다. 그 무렵 '핵문제'를 둘러싸고 조·미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어 있었고,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그 토론회 참석은 나에게는 꼭 10년만에 조국을 다시 찾아간 소중한 기회였다. 발표자들은 제 각기 자기의 견해를 내놓았는데, 지금은 오래 된 일이라 자세한 내용까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두 가지 견해를 내놓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조·미 사이에서 충돌위기가 심각해졌으나,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과 미국의 국가정보기관들은 북(조선)의 핵개발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 견해를 내놓을 때마다, 바로 옆자리에 발표자로 앉아 계시던 어떤 분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내 견해에 동조하셨다. 그 분이 지난 1월에 노환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신 고 김남식 선생이다. 나는 그 날 선생을 처음 만나 뵈었다. 그 뒤로 나는 서울에 갈 때 몇 차례 고 김남식 선생을 찾아뵈었고, 선생이 잔잔한 목소리로 풀어 가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선생이 1960년대에 잠시 미국에 다녀가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으며, 미국 국무부에서 코리아에 관한 정보를 분석하는 존 메릴이 서울에 갈 때 선생을 찾아 뵙고 자문을 구하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선생이 펴내신 책들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통일학연구를 진척시킬 수 있었음을 오늘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오늘 내가 기념강연을 하는 이 자리에서 강연을 해주시기로 한 분은 원래 김남식 선생이었다. 지난해 말에 우리 통일학연구소에서는 설립 10주년 기념강연에 출연해주시기를 정중히 청하였고 선생께서도 우리의 청을 받으셨는데, 참으로 애석하게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고 김남식 선생이 통일학 부문에서 이룩하신 연구업적을 능가할만한 연구자가 없고, 선생을 대신해서 이 자리에 서실만한 다른 분을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오늘 나는 통일학 부문의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기념강연이 아니라, 통일학연구소가 걸어온 10년을 돌이켜보는 회고강연으로 대신하려 한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고 김남식 선생의 명복을 빈다.

통일학연구소 설립 10주년을 축하하는 이 자리에서 현 시기 조국통일운동에 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협찬강연은 서울에 있는 21세기코리아연구소의 조덕원 소장이 맡아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 조덕원 소장과 연구소 일꾼 여러분들에게 감사인사를 드린다. 그리고 통일학연구소 설립 10주년을 축하해주신 해내외 사회단체들과 일꾼 여러분들에게 감사인사를 드린다.

나의 회고강연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1994년 당시 나는 한(조선)반도 정세의 본질적 측면을 파헤치는 민족주체적 관점을 아직 세우지 못하였고, 정세흐름을 읽어내는 폭넓은 정보와 지식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공식적인 토론회에서 조·미 사이에서 충돌위기가 심각해졌으나,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의 국가정보기관들이 북(조선)의 핵개발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무지가 용감성을 낳는다는 말은 이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일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나는 그러한 주장을 객관적으로 입증할만한 자료근거를 하나도 내놓지 못했다. 내 발표에 대해 참석자들이 물음을 던졌을 때, 나는 똑똑하게 답변하지 못하고 입증되지 않은 주장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체험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나는 1993년부터 한(조선)반도 문제를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을 조금씩 행동에 옮기고 있었는데, 그런 경험을 통해서 내 결심은 더욱 굳어졌고 내 행동에는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2. 연구소를 세우려고 뛰어다니던 나날에

1994년 12월 4일 현재 통일학연구소가 있는 자리에서 연구기관을 세우기 위한 첫 준비회의가 열렸다. 재미동포 민족민주운동 사상 처음으로 연구기관을 세우려는 뜻을 안고 그 자리에 모인 사람은 꼭 10명이었다. 그 10명 가운데 지금까지 운동대오에 남아있는 사람은 이행우 회장, 조동설 회장, 최관호 의장, 서혁교 동지, 그리고 나 자신이다.

1995년 1월 나는 연구소 설립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월간 정세동향』이라는 활자매체를 펴냈는데, 정세동향을 날짜순으로 정리하고 간단한 분석자료를 달아놓은 것이었다. 그 활자매체를 복사하여 관계자들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월간 정세동향』은 1995년 1월부터 3월까지 발간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월간 정세동향』을 받아본 분들의 반응이 매우 좋아서 두 번째 준비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그 준비회의는 원래 1995년 2월 4일로 예정되었는데, 마침 큰 눈이 내려 길이 막히는 바람에 2월 18일로 미루어졌다.

화가 복으로 바뀐다고 했던가, 두 번째 준비회의가 예기치 못하게 뒤로 미뤄지니까 준비회의에 참가하였던 사람들 사이에서 2월 18일 준비회의를 아예 창립이사회로 열자는 합의를 보았다.

1995년 2월 18일 현재 통일학연구소가 있는 자리에서 창립이사회가 열렸다. 창립이사회에는 16명의 창립이사들이 참가하였다. 창립이사회를 마친 뒤 약 한 달 동안 준비과정을 거친 뒤에 드디어 1995년 3월 11일 현재 통일학연구소가 있는 자리에서 설립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연구소의 이름은 미주평화통일연구소로 정했다. 연구소 설립식 초청장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올해 칠천만 겨레의 통일염원이 전에 없이 드높아지고 있습니다. 조·미 관계개선을 따라 한(조선)반도를 둘러싼 국제환경도 유리하게 바뀌고 있습니다. 통일원년을 맞은 해내외 통일운동단체들의 손길도 바빠졌습니다. 한(조선)반도의 평화문제, 자주문제, 통일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연구단체가 미주에도 하나쯤 있어야겠다는 아쉬움이 설립준비로 이어지기까지 오랜 기간이 지나야 했습니다. 통일전망의 청사진을 그리려는 사람들이 일하는 마당을 펼치는 뜻깊은 자리에 오셔서 기쁨과 보람을 함께 나누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995년 2월 28일 미주평화통일연구소"

설립식에서는 이행우 선생을 이사장으로, 나를 소장으로 선출하였다. 광복군 제3지대 지하공작원 출신의 독립유공자이신 윤영무 선생의 축사가 있었고, 재미동포 민족민주운동의 원로로서 고 윤이상 선생의 뒤를 이어 범민련 해외본부 의장직을 맡으신 직후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나신 고 임창영 선생의 축하문이 낭독되었고, 재미동포사회단체들이 펴낸 미주이민 100년사를 빛낸 재미동포로 선정되신 이승만 목사의 축하문이 낭독되었다. 지금까지 10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이사회 성원으로 일해오는 사람은 이행우 이사장, 최미경 총무, 최관호 의장, 그리고 나 자신이다.

연구소를 세웠으나 우리에게는 경험도 없었고 전망도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없었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의 결심과 열정만이 있었다.

3. 격려와 모략이 엇갈리던 시절의 기억

나는 연구소를 세우자마자 집필에 몰두하였고, 이전부터 펴내던 『월간 정세동향』을 한층 발전시켜 정세분석논문을 담은 『통일논의』라는 제목으로 된 활자매체를 펴내기 시작했다. 『통일논의』가 처음 나온 때는 1995년 4월이었다.

통일학연구소는 1996년부터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하였는데, 『통일논의』라는 활자매체 발간과 인터넷 사업을 병행하였다.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드는 활자매체 발간을 그만두고 인터넷을 이용하자는 이사회의 결정이 내려지면서 『통일논의』는 1997년 11월에 나온 제19호를 끝으로 자진 폐간되었다.

연구소를 세운지 1년이 지났으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1996년의 일이었다. 외롭고 힘든 집필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나에게 편지 두 장이 날아들었다. 한 장은 당시 오랫동안 옥고를 치르시던 한 통일운동가의 따님이 나에게 쓴 편지였다. 그 따님은 우리가 펴내는 『통일논의』를 감옥에 계신 자신의 아버지에게 꼬박꼬박 전해드린다고 하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서 감옥에 계신 다른 장기수 선생들께서도 『통일논의』를 읽으신다고 적었다.

옥중에 계시는 통일운동가와 장기수 선생들에게 『통일논의』가 전달된다는 소식에 정신이 버쩍 들었다. 허전한 생각과 외로움이 가시고 힘과 용기가 솟구쳤다.

또 다른 편지에는 우리 연구소의 활동을 격려하는 따뜻한 마음과 함께 1백 달러 지폐 한 장이 들어있었다. 국내에서 활동하시는 통일운동가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우리 연구소에 격려편지와 격려금을 보내주신 그 분은 박순경 선생이었다.

통일학연구가 노중선 선생은 우리 나라 통일운동사를 편년체로 적은 자신의 책에 우리 연구소 설립을 실어주셨다.

그 시절의 기억 속에는 우리 연구소에 대한 비열한 모략사건에 대한 기억도 들어있다. 막 일어서기 시작한 우리 연구소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가장 먼저 퍼부었던 곳은 극우반동세력의 추악한 나팔수로 악명이 높은 『월간 조선』이었다. 『월간 조선』 1997년 11월호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모략기사가 실렸다. "추적: 인터넷을 통한 북한 정보공작의 실상, 북한은 인터넷 통해 우리 안보망 뒤흔들고 있다." 그 모략기사는 우리 연구소 사이트, 재미동포가 운영하는 킴소프트, 미국인 버나드 크리셔가 운영하는 북(조선)식량돕기운동 사이트를 비난하면서, 북(조선) 정보공작이라고 왜곡하였다. 또한 그 모략기사는 서울지방검찰 공안1부에서 접속차단방안을 논의하고 있으며, 접속자에 대한 검찰당국의 내사가 시작되었다는 내용도 덧붙임으로써 공포감을 느끼도록 조작하였다. 통일학연구소를 비롯한 이른바 해외친북사이트들과 북(조선)에서 직접 운영하는 사이트들에 대한 접속차단만행은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04년 11월에 저질러졌다.

4. '고난의 행군' 시기에 벌인 집필전투

통일학연구소가 활동을 시작한 1995년부터 1998년까지 4년 동안은 한(조선)민족에게 매우 힘들었던 시기였다. 제국주의 광풍이 미친 듯이 휘몰아치며 한(조선)반도 정세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불빛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제국주의 광풍에 맞서 싸우는 한(조선)민족의 장래에 대해서 낙관하는 사람은 없었다.

제국주의 미국의 정치·군사적 공세에 홀로 맞서 싸우는 북(조선)은 '고난의 행군'을 헤쳐가며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사회주의 최대의 시련기로 역사에 기록된 1990년대 후반기는 그야말로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연료와 식량이 떨어지면서 공장의 기계가 멎었고, 철도가 움직임을 멈추었으며, 기업소의 불빛이 꺼졌고, 협동농장의 트랙터가 움직이지 않았다. 북녘동포들은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는 투쟁구호를 들고 역경의 폭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그 한 마디 구호 속에 '고난의 행군' 시기 북녘동포들이 자기들의 붉은 기를 지키기 위하여 겪어야 했던 눈물겨운 투쟁과 꺾이지 않는 의지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평양에서 저녁밥을 먹는 중에 전기가 갑자기 끊기면서 사위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을 때마다 고생하는 북녘동포들 생각에 밥이 넘어가지 않았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뿐 아니라 그 무렵에는 웬일인지 해마다 큰물이 나서 피해가 더욱 컸으니 북녘동포들이 겪은 고생은 말할 수 없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린 어느 해 여름날, 길바닥으로 쏟아져 내린 흙더미와 돌무더기를 치우며 비를 맞는 북(조선) 동포들 곁을 지나며 가슴을 태우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심정을 가지고 나는 1995년 11월에 「북(조선) 경제의 이해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대담기록을 발표하였다.

그 무렵 워싱턴, 서울, 도쿄에서는 이른바 '북한 붕괴설'이 하나의 공인된 인식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북(조선)이 무너지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라는 저들의 주장에 대해서 누구도 논박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고난의 행군'을 헤쳐 가는 북녘동포들의 가슴팍에 흉악한 핵탄두 미사일을 겨누며 날뛰는 제국주의지배세력이 조작해낸 '북한 붕괴설'에 나는 경멸과 분노를 느꼈다. 1996년 11월에 내가 발표한 「붕괴설-연착륙설 논리구도의 분석」이라는 글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집필된 것이다.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대오 여기저기에서는 불안과 동요가 출렁이고 있었고, 극우반동세력은 불안한 정세를 틈타 민족민주운동을 짓눌러버리려는 파상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힘겨운 싸움이 이어졌다. 고난과 역경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차츰 대오에서 멀어져갔다. 1996년 9월 강릉 앞바다에서 '잠수함 사건'이 터지고, 1997년 2월에는 '황장엽 사건'이 터지면서 민족민주운동대오의 불안과 동요는 더욱 심해졌다. 1996년 11월에 발표한 「'잠수한 사건'에 얽힌 이야기 세 켤레」, 그리고 1997년 3월에 발표한 「황장엽 사건에 대한 분석적 이해」 등은 당시 한(조선)반도 정세에 몰아친 거친 파도를 타고 넘으려는 내 집필전투를 적은 기록인 셈이다.  

5. 1998년 9월 4일 조선중앙방송 발표에서 받은 충격

늦더위가 아직 가시지 않았던 1998년 9월 4일.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는 컴퓨터 자판을 열심히 두들기며 집필에 몰두하고 있었다. 평소에 하던 버릇처럼 나는 컴퓨터 자판에서 잠시 눈을 떼고 정오보도를 들으려고 낮 12시 정각에 뉴욕에서 나오는 우리말 라디오방송을 들었다. 보도내용을 전하는 방송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방송원은 지난 8월 31일에 북(조선)이 발사한 것은 미사일이 아니라 인공위성이라는 조선중앙방송의 공식발표를 전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충격과 흥분에 휩싸인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방안을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그때부터 나는 광명성 1호 발사가 한(조선)반도 정세에 주는 정치·군사적 의미를 이론적으로 밝히는 일에 달라붙었다. 나의 이론구성은 두 방향에서 진전되었다.

1) 1999년 한 해 동안 나는 광명성 1호 발사가 한(조선)반도 정세에 주는 군사적 의미를 밝혀내는 일에 달라붙었다. 광명성 1호 발사가 한(조선)반도 정세에 주는 군사적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광명성 1호 발사와 핵무기 개발의 상관성을 밝혀내는 것으로 진척되었다. 영문과 우리말로 된 많은 자료를 찾아내고 분석한 끝에 써냈던 2부작으로 된 긴 글은 「세기말의 조·미 관계, 세기초의 한(조선)반도 통일정세」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것인데, 제1부는 「미국의 핵전쟁위협과 북(조선)의 대응핵전략」(2000년 1월)이었고, 제2부는 「북(조선)이 보유한 익명의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조·미·일 삼각전략균형의 형성」(2000년 3월)이었다. 이 글에서 나는 처음으로 북(조선)이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였음을 논증하였다.

북(조선)이 핵무기를 개발·보유하였다는 내 견해는 2004년 3월에 발표한 글, 곧 「핵문제와 탄핵문제로 본 한(조선)반도 현 정세」, 그리고 「제2차 6자회담에서 어떤 가능성을 찾을 것인가」에서 1998년 5월에 북(조선)이 어떻게 지하핵폭발실험을 성공적으로 실시하였는지를 밝힘으로써 완결되었다.

남(한국) 인터넷신문 『통일뉴스』의 김치관 기자가 워싱턴을 방문한 길에 미국의 군사문제 전문가 존 파이크를 만나 그의 견해를 정리한 2005년 3월 18일자 대담기록을 읽어보니, 존 파이크도 역시 1998년 5월에 북(조선)이 지하핵폭발실험을 실시하였음을 인정하였다.

2) 북(조선)의 광명성 1호 발사가 한(조선)반도 정세에 주는 정치적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혀내기까지에는 그로부터 몇 해 동안 긴 연구기간이 흘러야 했지만, 그 광명성 1호 발사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아, 바로 이것이 사회주의 조선 대 제국주의 미국의 대결이구나' 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내 집필활동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한(조선)반도 정책을 분석·비판하고 그 실패의 불가피성을 논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1998년 10월에 발표한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은 바뀌고 있는가」, 1999년 1월에 발표한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세기말의 한반도」, 3월에 발표한 「실패한 미국의 대북정책, 그 원인·경과·전망에 대하여」, 7월에 발표한 「남·북·미 삼각갈등과 한(조선)반도 정세의 변화」, 10월에 발표한 「미국의 한(조선)반도 전략은 북(조선)의 공세에 밀려 흔들리고 있다」와 「베를린 회담이 예고한 조·미 관계 정상화와 한(조선)반도 통일」 등이 그러한 정세인식을 정리한 글들이었다.  

6. 1998년 정세전환의 정치·군사적 의미를 찾아서

광명성 1호 발사가 한(조선)반도 정세에 주는 정치적 의미를 밝혀내기 위해서 나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을 분석·비판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두 갈래로 생각을 밀고 나갔다.

1) 나는 광명성 1호 발사가 가지는 정치적 의미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에서 찾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북(조선)에서 말하는 대로, 선군정치란 반제군사노선과 사회주의정치의 결합이므로, 광명성 1호 발사에서 나타난 반제군사노선은 사회주의정치노선과 결합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에는 북(조선)에서 아직 선군정치라는 개념이 정식화되기 이전이었으므로, 나는 선군혁명영도라는 개념을 분석하였다. 그러한 나의 생각은 광명성 1호 발사의 정치적 의미를 선군정치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로 나타났는데, 그런 시각에서 쓴 글이 1999년 6월에 발표한 「'선군혁명령도'와 '제2의 천리마대진군': 1990년대 북(조선) 정세인식의 초점」이다. 이 글은 그로부터 이태 전인 1997년 7월에 발표한 「최근 북(조선)의 정세관과 정세대응에 관한 담론분석: 1997년 상반기 『로동신문』 분석을 중심으로」에서 정리한 생각을 1998년 8월의 광명성 1호 발사를 계기로 하여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2) 나는 광명성 1호 발사가 가지는 정치적 의미를 조·미 대결구도에서 찾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핵문제'를 둘러싸고 형성된 조·미 관계의 기본성격은 정치·군사적 대결이므로, 광명성 1호 발사의 정치적 의미는 제국주의 미국에 맞서 정치·군사적 대결을 벌이는 북(조선)의 시각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북(조선)이 1998년 5월에 실시한 지하핵폭발실험과 8월에 실시한 광명성 1호 발사는 불과 석 달 사이에 연속적으로 제국주의 미국에게 경악과 두려움을 안겨준 대사변이었다. 북(조선)이 의도했던 대로, 그 대사변이 조·미 대결구도를 전면적으로 바꾸어놓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98년의 대사변을 겪으면서 충격에 빠진 미국은 북(조선)의 요구대로 조·미 관계를 개선하는 정치회담에 끌려나오게 되었다. 1999년에 이르러 이른바 '페리보고서'가 작성되고, 2000년에는 미국 국무장관의 평양방문이 성사되고, 조명록 차수의 워싱턴방문으로 조·미 공동선언이 채택·발표되기에 이르렀으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클린턴의 평양방문이 논의되는 단계에까지 진전되었던 것이다.   

7. 조·미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세우다

조·미 대결구도가 관계개선으로 돌아서기 시작한 뒤에 나는 조·미 관계의 기본성격을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로 보는 시각을 정리한 글을 내놓았다. 그 글은 2001년 10월에 발표한 「조·미 관계 10년을 통해 본 한(조선)반도의 통일정세」였다.

또한 나는 2002년 10월에 발표한 「'핵의혹' 공방전, 핵확산금지체제의 존망문제, 조·미 관계의 근본문제」라는 글에서 북(조선)이 조·미 사이의 정치·군사적 대결에서 미국에게 내놓은 정치적 요구, 곧 조·미 관계를 개선하는 3대 원칙을 밝혀냈다. 그 원칙은 1993년 6월 뉴욕에서 채택된 조·미 공동성명에 밝혀져 있는 세 가지 원칙, 곧 적대정책 포기의 원칙, 자주권 존중과 내정불간섭의 원칙, 평화통일을 지지하는 원칙이다.

북(조선)이 조·미 대결을 통해서 제국주의 미국에게 강하게 요구하고 관철시키려는 세 가지 원칙을 옳게 인식함으로써 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사회주의 최대의 시련기에 인민경제에 돌려야 할 엄청난 자금과 기술과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왜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였는가 하는, 참으로 일반상식으로는 풀 수 없는 의문을 마침내 풀게 되었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원칙을 한 마디로 줄인다면, 자주와 통일을 실현하는 원칙이다. 따라서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단순한 대량파괴무기가 아니라 자주와 통일의 실현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개발된 군사적 수단이라는 것이 내가 도달한 결론이다.

위의 세 가지 원칙 가운데서 내가 눈여겨본 것은 북(조선)이 적대정책 포기의 원칙과 자주권 존중과 내정불간섭의 원칙을 동시에, 포괄적으로, 그리고 강하게 제국주의 미국에게 요구한다는 점이다. 적대정책 포기는 곧 자주권 완성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나는 생각하였다. 미국이 한(조선)민족에 대한 제국주의적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한(조선)민족의 자주권을 존중한다는 말은 미국이 한(조선)반도에 점령군으로 배치해둔 자기 군대를 철군하는 뜻으로 나는 해석하였다. 주한미국군을 철군하지 않고 적대정책을 포기하였다고 말할 수 없으며 한(조선)민족의 자주성이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주한미국군 철군은 1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조·미 대결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것이다. 철군문제를 비껴가면서 조·미 사이의 '핵문제'를 풀 수 있는 길은 없다.

이런 견지에서 나는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분석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 2000년 3월에 발표한 「주한미군 철수론과 철수운동의 당위성, 그리고 한(조선)반도 전략균형의 변동에 따른 주한미군철수의 불가피성」, 같은 해 8월에 발표한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전략은 무엇인가」, 2002년 8월에 발표한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과 주한미군철수」, 2004년 6월에 발표한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본 주한미군 감축의 전략적 의미」, 같은 해 9월에 발표한 「주한미국군 감군조치의 배경과 한(조선)반도를 비핵화하는 문제, 미국군 철군운동의 의의」 같은 글들이 그러한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8.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 속에서 우리 민족끼리 세우는 민족통일전선

내 이론구성에서는 주한미국군을 몰아내는 투쟁이 조·미 사이에서 벌어진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남(한국) 민족민주운동 대 제국주의 미국의 대결을 통해서도 일어난다고 보는 더 넓은 전민족적 관점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관점을 이론적으로 구성한 글이 2002년 3월에 발표한 「부시행정부를 곤경에 빠뜨리고 있는 한(조선)민족의 반제자주역량」이라는 글이다. 이 글에서 나는 처음으로 조·미 대결구도를 한(조선)민족 대 제국주의 미국의 대결구도로 더 넓혀서 바라보기 시작하였으며, 한(조선)반도 정세의 본질을 한(조선)민족 대 제국주의 미국의 대결구도에서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생각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내가 강조하는 민족주체적 관점이라는 개념이다.

한(조선)민족 대 제국주의 미국의 대결구도를 논할 때, 한(조선)민족은 일상적인 뜻으로 말하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아니다. 제국주의 미국과 맞서 싸우는 한(조선)민족은 민족주체적 관점을 세울 때 비로소 보이는 자주민족이다. 민족주체적 관점을 세울 때, 한(조선)민족은 남, 북, 해외에 흩어진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을 하나의 공동목적을 추구하는 전민족적 공조관계로 차츰 결집시켜 나가는 자주민족으로 보이게 된다.

한(조선)민족이 전민족적으로 합의하고 추구하는 민족공동의 목적을 밝혀준 것이 6.15 공동선언이며, 6.15 공동선언을 실천하는 전민족적 공조관계가 조직화, 역량화된 것이 민족통일전선(national unified front)이다. 그러므로 21세기 한(조선)민족의 통일전선은 6.15 공동선언을 실천하기 위해서 앞장에서 투쟁하는 통일세력과 그 선언을 지지·찬동하는 중간세력이 손잡고 세우고 함께 떠밀고 나아가는 가장 폭넓고 가장 강한 민족자주역량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눈여겨보는 것은, 지금 한(조선)민족이 자기의 힘으로 세우고 있는 민족통일전선이 한(조선)민족 대 제국주의 미국의 대결구도 속에서 일어서는 통일전선이라는 점이다.

민족통일전선을 세우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전민족적으로 합의하고 추구하는 민족공동의 목적을 내와야 한다. 60년 동안이나 분산과 분열의 질곡에 빠져있던 한(조선)민족에게 6.15 공동선언이 제시된 역사적 사변의 의의는, 그 선언이 전민족적으로 합의하고 추구하는 민족공동의 목적을 밝혀주었다는 데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6.15 공동선언을 채택하여 7천만 민족 앞에 조국통일의 이정표를 세우던 2000년 6월 15일, 7천만 민족성원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나 역시 텔레비전화면으로 방영되는 역사적인 장면을 물기어린 눈으로 지켜보면서 밤을 새우다시피 하여 연속적으로 글을 발표하였다. 그때 쓴 글들 가운데는 2000년 6월에 발표한 「평양회담 이야기」 제1부와 제2부, 7월에 발표한 「평양회담을 보는 새로운 시각」과 「칠천만 민족에게 통일의 신심을 안겨준 평양회담」, 8월에 발표한 「'근본문제' 해결의 길을 열어놓은 평양회담」, 9월에 발표한 「다섯 단계 통일계획과 평양회담 이후 통일정세의 특징」, 12월에 발표한 「자주시대, 통일시대가 칠천만 민족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이듬해인 2001년 5월에 발표한 「6.15 공동선언 이후의 한(조선)반도 정세와 조국통일운동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6월에 발표한 「6.15 공동선언을 다시 읽는다」, 그리고 2002년 7월에 발표한 「6.15 공동선언 이후의 통일정세와 조국통일실현의 전망」 등이 있다.

6.15 공동선언을 전면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전민족적으로 합의하고 추구하는 민족공동의 목적인 조국통일을 실현하는 것이다. 21세기 민족통일전선이 6.15 공동선언 실천운동을 통해서 실현하려는 것은 사상, 체제, 이념, 정견의 차이를 뒤에 두고 먼저 실현하는 조국통일이다. 사상, 체제, 이념, 정견의 차이를 뒤에 두고 먼저 실현하는 조국통일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이다. 한(조선)민족의 통일전선이 제국주의 미국과 맞선 대결에서 승리하여 연방제 방식으로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울 때, 조국통일위업을 완수될 것이다.

9. 민주노동당 창당과 남(한국) 민족민주전선 형성

그런데 문제는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기까지 민족통일전선을 어떻게 세우고 강화·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데 있다.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민족통일전선을 강화·발전시키려면 남(한국)에서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을 하나의 운동력으로 아우르고 모아내는 통일전선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남(한국)이라는 지역적 범위에서 일으켜 세우는 통일전선을 흔히 민족민주전선(national democratic front)이라고 부르는데, 남(한국)의 민족민주전선에 관한 내 생각은 2001년 10월에 발표한 「민족민주전선이 수행하는 전략적 과업의 성격, 동력, 실현경로에 대하여」라는 글과 2003년 10월에 발표한 「주체적 관점의 통일전선이론과 통일정세 분석」이라는 글에 나타나있다.

그 뒤로 나는 진보적 대중정당으로 일어선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하여 남(한국) 민족민주전선을 세워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정치과업에 관한 내 생각은 2004년에 들어오면서 한층 집중적으로 펼쳐졌는데, 2004년 4월에 발표한 「민주노동당 중심의 통일전선이 전개한 총선투쟁의 의의와 한계」, 5월에 발표한 「민주노동당의 국회진출과 조국통일운동의 발전」, 9월에 발표한 「국가보안법 존폐문제와 민족민주세력의 인식과 실천」이 그러한 생각을 담고 있는 글들이다.

남(한국)에서 진보적 대중정당인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민족민주전선을 일으켜 세우는 목적은 진보적 민주주의(progressive democracy)를 실현하기 위함이다. 민주노동당은 민족민주전선이 추구하는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실천하는 통일전선적 정당이다.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이란 한(조선)민족이 일제 식민지 강점에서 해방되었던 시기에 세우려고 하였던 새로운 사회정치체제를 규정해준 강령이었다. 눈여겨보는 것은, 그 강령이 식민지민족의 해방과 더불어 내왔던 정치강령이라는 점이다.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은 60년 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차츰 무너지고 있었던 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와 봉건적 사회제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새로운 민주주의혁명의 앞길을 밝혀준 강령이었다.

60년 전 일제의 식민지 강점에서 해방된 한(조선)민족이 세우려고 하였던 새로운 사회정치체제가 진보적 민주주의체제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오늘 남(한국)에 세워야 할 새로운 사회정치체제를 왜 진보적 민주주의라고 불러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자주적 민주주의라고도 부르는데, 그 강령은 세계 정치사에 등장한 여러 종류의 정치강령들, 곧 사회주의 강령, 사회민주주의 강령, 민주사회주의 강령과 구별되는 민족민주전선의 강령이다. 사회주의 강령이란 자본주의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극복하는 급진적 강령이고, 사회민주주의 강령이란 독점단계에 올라선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을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개조하는 개량적 강령이며, 민주사회주의 강령은 사회주의체제를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개조하는 반동적 강령이다.

민족민주전선이 추구하는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은 독점단계에 올라선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지배세력이 수탈하는 예속적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정치적 목적을 제시한다. 그에 비해서 사회민주주의 강령은, 제국주의적 지배와 예속에 대한 투쟁을 외면하며,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역사적 전망을 부인한다. 그런 점에서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과 사회민주주의 강령은 그 논리형식은 같으나 그 발생기원과 발전전망은 서로 다르다.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은 남(한국) 민중 자신의 사회정치적 요구를 담은 정치강령이다. 남(한국) 민중의 사회정치적 요구를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으로 정리하여 민중에게 되돌려주어 민중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오늘날 민주노동당과 남(한국) 민족민주전선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임무다. 따라서 민주노동당과 남(한국) 민족민주전선은 남(한국) 민중에게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해설·선전하고, 그 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투쟁들을 민중 자신의 투쟁으로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10. 자주적 민주정부와 자주적 통일정부를 향하여

남(한국)에서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추구하는 대중정당, 곧 진보적 대중정당이 집권하여 세우는 정부를 자주적 민주정부라고 부른다. 남(한국)에서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우는 것은 민주노동당과 남(한국) 민족민주전선이 직접적으로 담당하고 수행해야 할 당대 최고의 역사적 임무다.

남(한국)의 사회역사발전단계를 내다보면, 남(한국)에 자주적 민주정부가 세워져야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완전히 실현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은 자주적 민주정부가 세워지기 이전에도 민주노동당과 민족민주전선의 투쟁에 의해서 부분적으로나마 실현될 수 있고, 또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워 가는 과정 그 자체가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정이지만, 그 강령은 자주적 민주정부가 실시하는 민주개혁에 의해서만 완전히 실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노동당과 남(한국) 민족민주전선은 흩어진 힘을 모으고 모은 힘을 기울여서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에 동의하는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을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싸움에 불러일으켜야 하며, 그 싸움의 최종 목표가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우는 것임을 뚜렷이 밝혀야 한다. 자주적 민주정부가 역대 '민주정부'들과 어떠한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지를 밝혀야 하며, 자주적 민주정부가 완수할 사회역사발전의 과학적 이론과 구체적 전망을 내와야 한다.

60년 전 일제 식민지 강점에서 해방된 한(조선)민족이 자기 힘으로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우고 사회역사를 발전시키려는 싸움에 나섰을 때, 그러한 혁명적 상황에서 벌어진 사회정치운동을 민주주의혁명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혁명적 상황이 아닌 시기에 벌어지는 사회정치운동은 민주개혁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민주개혁과 민주주의혁명은 상황의 상이성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게 보이는 것일 뿐, 서로 떼어놓을 수 있는 두 갈래의 과정이 아니다.

60년 전 일제 식민지 강점에서 해방된 한(조선)민족이 자기 힘으로 세우려고 하였던 자주적 민주정부는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에 한정된 '남조선단독정부'가 아니라 한(조선)반도 전역에 자주권을 행사하는 통일정부였다. 나는 그것을 자주적 통일정부라고 부른다. 당시 자주적 민주정부와 자주적 통일정부는 하나의 정치적 실체를 가리키는 동의어였다.

민주정부와 통일정부라는 개념 앞에 언제나 반드시 자주적이라는 말을 붙여야 하는 까닭은, 그 두 정부가 반제자주노선을 추구하는 통일전선에 의하여, 그리고 반미자주화운동의 승리 위에 세워지는 새로운 정부이기 때문이다.

1945년 8월부터 1948년 8월까지 3년 동안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그토록 열망하며 싸웠던 민족주체역량은 제국주의 미국이 집요하게 추진한 분할강점정책을 막아내지 못하고 분단체제 속으로 밀려들어가 두 개로 나눠지고 말았다.  

민족주체역량이 제국주의적 분할강점에 의해 조작된 분단체제에서 두 개로 나눠진 가운데, 어언 60년이 흘렀다. 두 개로 나눠져 60년 동안 지내온 민족주체역량에게는 1945년 8월부터 1948년 8월까지의 상황에서 나선 문제들보다 더욱 복잡한 문제들이 나서게 되었다. 분단체제가 장기화된 현실에서 한(조선)민족은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우는 문제와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는 문제를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우는 주체역량 및 실현경로와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는 주체역량 및 실현경로는 그 양자를 역동적 상관관계로 파악하는 과학적인 인식을 요구하였다. 민족통일전선과 지역통일전선에 관한 개념은 바로 그러한 요구를 이론적으로 풀어내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그 노력은 2003년 10월에 발표한 「주체적 관점의 통일전선이론과 통일정세 분석」이라는 글에 담겨있다.

2004년에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진출하면서 한층 강화되고 발전한 것은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우는 지역통일전선이 일어서고 있음을 현실로 입증한 역사적 사변이었고, 2005년에 6.15 공동선언을 실천하기 위한 전민족적 통일기구가 세워진 것은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는 민족통일전선이 일어서고 있음을 현실로 입증한 역사적 사변이었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분단1세대가 해방, 분단, 예속이 겹쳐지고 뒤엉키는 20세기의 전환기에 살며 싸웠다면, 오늘 우리는 그에 못지 않은 역사적 사변들이 일어나는 21세기의 전환기에 살며 싸우고 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모여 통일학연구소 설립 10주년을 축하하고 있지만, 나는 통일학연구소 20주년 기념식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이 앞으로 10년 안에 자주적 민주정부와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게 될 것으로 내다보기 때문이다. 한(조선)민족이 일제 식민지 강점에서 해방된 8월 15일을 해마다 민족적 명절로 축하해오는 것처럼, 앞으로 10년 뒤에는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운 날을 해마다 민족적 명절로 축하하게 될 것이다. (2004년 4월 1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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