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 대 미국의 대결 1953년 7월 그리고 2005년

김 혁진
     

     1. 1953년 7월의 기억
     2. 세계 민중의 피로 쓰여진 미 제국의 역사
     3. 1953년 7월을 중심으로 한 한국전쟁의 기원과 결과 
     4. 2005년 조-미 대결 끝자락에 서있는 우리의 역할

 

1. 1953년 7월의 기억

냉전에서 승리한 이후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은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를 중심으로 미국은 자국의 군산복합체와 석유자본을 대변하며 무소불위의 팍스아메리카를 꿈꾸었다. 그리고 9.11사건을 (조작일 가능성) 기점으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를 차례로 점령하며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석유자본을 획득하며  블록화 되어 가는 유럽연합과 러시아 중국을 견제하면서 그들의 힘을 과시하였다. 핵과 정보 금융 독점을 기반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해 원하는 무엇이든 해나가는 그들 앞에 누구도 대항 할 수 없었고 거칠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제패전략의 가장 핵심지점인 아시아태평양지역에 눈을 돌린다. 무궁무진한 자원과 세계인구의 40%, 세계상품교역의 50%를 차지하고, 경제발전속도가 가장 빠른 지역 이 지역을 손에 넣지 않고는 그들의 꿈을 이룰 수 없기에 그들은 사활을 걸고 동북아에서 패권적 지배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동북아시아의 주도권쟁탈전에서 미국은 대양건너라는 지리적으로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었다. 따라서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한반도만 타고 앉으면 이 지역에서의 패권적 야망을 쉽게 달성할 수 있었다. 

≪워싱톤포스트≫가 ≪현대의 한반도정세가 크게 변화하고 있는 속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은 지리적 조건이다. 조선은 세계가운데서도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활동적인 지역의 하나인 동북아시아의 한복판에 자리잡고있다.≫고 평한 사실에서 미국이 정치 군사적인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조선반도의 지정학적존재를 얼마나 중시하고있는가를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해리티지재단은 오래 전에 21세기 미국의 세계전략의 성패가 조선반도정책에 달려있다는 다음과 같은 공식보고서를 작성한바 있다. ≪한반도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동북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절대적인 이익을 담보 할 수 없고 세계적 판도에서 새 국제질서수립, 미국의 주도적 지위와 역할을 담보할 수 없다.≫ 고 하였다. 

이것은 이북을 무장 해제시키고 전 조선반도를 저들의 지배권 하에 둠으로써 동북아시아지역에서의 정치 군사적 패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 이였다.

그리고 1953년 7월 첫 전쟁에서 패배 기억이 채 아물기 전 미국은 그들의 400년 역사 속에 가장 무서운 존재와 마주쳐야만 했다. 


선군 사상. 선군 정치를 중심으로 일심단결, 군민일치 된 이북은 사회주의의 보루로서, 세계 진보적 역량, 반제자주역량을 이끌어 가는 핵심으로서 세계 민중의 학살과 수탈로 세워진 제국 미국과의 총포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2005년 9월 그 전쟁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세계제패의 꿈 팍스아메리카의 희망은 또 다시 좌절을 맛보아야만 하고, 세계 민중들의 피로 세워진 패권은 이제 무너져 갈 것이다. 그 끝자락에 우리는 서있는 것이다. 

필자는 위 글에서 미 제국의 침략과수탈의 역사를 고찰하고, 1953년 7월을 중심으로 한 한국전쟁의 기원과 결과를 살펴보며, 이후 조-미 대결의 끝자락에 서있는 우리의 역할을 논하면서 맥아더 동상 철거 투쟁의 의의를 제시 할 것이다.

 

2. 세계 민중의 피로 쓰여진 미 제국의 역사

미국은 태동부터 전쟁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피를 딛고 쓰여진 역사이다. 1620년 청교도 일파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지금의 매사추세츠주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플리머스 인디언들을 학살하면서 식민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1733년까지 북아메리카 대서양 연안에 13개의 식민지를 만들었다. 수 천만명의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연방 미 제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이후 그들은 또 다른 이윤(자본의초과잉여가치창출)을 찾아 세계 도처에서 전쟁과 학살을 단행하였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략까지 그들의 역사는 전쟁과 약탈의 과정, 수천만 민중들의 피의 수탈 과정인 것이다. 최근 200년간 자행한 그들의 침략과 수탈과 전쟁 자료를 보더라도 그들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 할 수 있다.  

[북구노동자회 현장21 발췌]

○ 트리폴리 전쟁 (1801~1805), 모로코와 전쟁 (1801~1805), 
○ 스페인과 전쟁 (1803~1806), 
○ 캐나다와 플로리다를 빼앗기 위해 영국에 선전포고 (1812~1815), 
○ 스페인령 서부 플로리다 강탈 (1812~1814), 
○ 말카스제도 누크 히버섬 상륙, 침공 (1813), 알제리 전쟁 (1816~1818)
○ 옐로우스톤 원정 (1819~1829), 
○ 쿠바, 푸에토리코, 산토도밍고, 멕시코의 유가탄 반도 침공 (1819~1825), 
○ 하와이 제도 침공 (1826), 그리스 미코노스섬, 앤드로스섬 침공 (1827),
○ 포클랜드 군도 침공 (1831~1832), 수마트라섬 쿠알라토르 침공 (1832)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침공 (1833), 사모아 제도 침공 (1835), 
○ 수마트라섬 침공 (1838), 피지 군도 침공 (1840), 
○ 길버트 군도의 드래몬드 제도 침공 (1841), 리베리아 침공 (1843)
○ 멕시코와 전쟁(1847~1848), 아이티의 사마나만 점령(1847), 
○ 부에노스아이레스 침공 (1852~1853), 니카라과 침공 (1853~1854), 
○ 중국 상해, 광동 침공 (1854~1856), 피지 군도 침공 (1858)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침공 (1855~1858), 뉴 그레네이더 하나마 침공 (1858)
○ 니카라과 침공 (1857), 유이하 제도 침공 (1858), 파라과이 침공 (1858~1859)
○ 중국 상해 침공 (1857), 판 데트카 해협의 산판섬 침공 (1859), 
○ 멕시코 침공 (1859), 포르투갈령 서아프리카 키센보 침공 (1860), 
○ 일본 시모노세키 침공 (1863~1864), 콜롬비아 파나마 침공 (1865), 
○ 중국 침공 (1863~1964), 멕시코 침략(1866), 대만 침공 (1867), 
○ 조선 침공 (1867~1872), 우르과이 몬테비데오 침공 (1868),
○ 일본 침공 (1868), 콜롬비아 침공 (1868), 멕시코 침공 (1870~1873), 
○ 콜롬비아 파나마 침공 (1870), 하와이 군도 호눌룰루 침공 (1874), 
○ 멕시코 침공 (1876), 이집트 침공 (1882), 파나마 침공 (1885), 
○ 아이티 침공 (1888), 조선 상륙(1888),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상륙 (1890), 아이티 침공 (1891), 
○ 칠레 침공 (1891), 호눌룰루 상륙, 하와이 제도 점령 (1893)
○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 침공 (1894), 니카라과 상륙 (1894), 
○ 조선과 중국 상륙 (1984~1896), 콜롬비아 상륙 (1895), 
○ 니카라과 상륙 (1896), 하와이 제도 병탄 (1898), 니카라과 상륙 (1898), 
○ 미서전쟁, 쿠바, 필리핀, 괌, 푸에토리코 점령 (1898~1899)
○ 니카라과 상륙 (1899), 피지 제도 군사원정 (1899), 사모아 침공, 
○ 추추라이섬 점령 (1899), 필리핀과 전쟁 (1899~1902), 
○ 중국 의화단 진압 군사원정 (1900~1901), 
○ 파나마, 콜롬비아 상륙 (1900~1902), 
○ 사마르섬, 필리핀 레에테섬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군사작전 (1903~1904)
○ 파나마 운하 영구점령 (1903), 산토도밍고 침공 (1903~1904), 
○ 파나마 상륙 (1904), 조선 상륙 (1904), 쿠바 점령 (1906~1909), 
○ 니카라과 침공 (1910), 온두라스 침공 (1910-1911)
○ 중국 상륙, 베이징 침공 (1911~1912), 파나마 침공 (1912), 쿠바 상륙 (1912)
○ 터키 상륙 (1912), 니카라과 침공 (1912~1915), 멕시코 상륙 (1913),
○ 아이티 상륙 (1914), 멕시코 침공 (1915~1916), 
○ 산토도밍고 점령 (1916~1925), 제1차 세계대전 참전 (1917~1918), 
○ 파나마 치리키 점령 (1918~1920), 신생국 소련 침공 (1918~1920), 
○ 온두라스 상륙 (1919), 코스타리카 침공 (1919), 과테말라 침공 (1920), 
○ 파나마, 코스타리카 침공 (1921), 중국에 무력개입 (1922~1941), 
○ 온두라스 침공 (1924~1925), 파나마 침공 (1925), 
○ 니카라과 침공 (1926~1933), 온두라스 침공 (1931), 쿠바 연안 정찰 (1933),
○ 중국 양자강 연안 점령 (1937), 중국 광동, 태평양의 엔더베리 점령 (1938),
○ 그린랜드 항구 점령 (1941), 아이슬랜드 점령(1941), 
○ 코리아 전쟁 (1950~1953), 이란의 모사디그 정권 전복 (1953), 
○ 과테말라 군사개입 (1954), 중동 위기 선동 (1958), 
○ 케모이섬, 마쓰섬 주변에서 무력시위 (1958), 
○ 유-2 첩보기 소련 영공 정찰 (1960), 콩고에서 '유엔 군사작전' 선동 (1960), 피그만 침공 (1961), 베를린 위기 선동(1961), 통킹만 무력도발 (1964), 
○ 베트남 전쟁 (1964~1972), 도미니카 공화국 내정개입 (1965),
○ 엔크루마 정권 전복 (1866), 라오스, 캄보디아 무력개입 (1970), 
○ 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 (1973), 포르투갈에서 파괴활동 (1974~1975), 
○ 케냐의 무왕기 카리우기 암살 (1975),  
○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정권 전복 (1975), 콩고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1977), 
○ 이란에 대한 군사행동 (1979~1981), 카스트로 암살 기도 (1960~1981), 
○ 카다피 암살계획 (1981), 파나마의 토리호스 암살 (1981), 
○ 인디라 간디에 대한 음모 (1981), 잠비아 대통령 암살계획 (1981)
○ 폴란드 내정간섭 (1980~1984), 아프가니스탄 군사개입 (1980~1984), 
○ 엘살바도르 내전 군사개입 (1981~1983), 
○ 니카라과에서 군사도발 (1981~1983), 
○ 시드라만에서 리비아에 대한 군사도발 (1982),
○ 그레네이더 침공 (1983), 걸프전 (1990-1991), 
○ 소말리아 무력개입 (1992-1995), 1994년 6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침략기도 무산
○ 수단, 아프가니스탄 미사일 공격, 이라크 공격 (1998), 유고연방 침공 (1999)  

이윤이 있는 곳은 언제든 어떤 곳이든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침략하고 약탈하는 것이 미 제국의 본질인 것이다. 지금도 그들은 이제껏 이루지 못했던 세계지배를 꿈꾸며 팍스아메리카나를 현실로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이북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여기서 김세균 교수의 미제의 군사 개입 전략에 대해 살펴보고 넘어 갈려고 한다.  

미제의 군사 개입수단은 주로 사회주의국가나 반제 반미국가들을 전복하거나 와해시키고 사회주의운동이나 반제반미운동의 성장 등을 저지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미국의 군사적 개입방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 미국에게 있어 군사적 개입은 대외정책 수행의 중요한 수단이었지만, 미국은 자신의 정책수행에 요구되는 군사적 개입의 확장 수준과 미국화 수준을 가능하면 최대한 최소화시키는 정책을 추구해 왔다. 이를 위해 미국은 그간 수많은 자연과학자, 사회과학자, 군사전문가들을 ꡐ반란대응ꡑ(counter-insurgency)체제의 가동을 위해 동원해 왔으며, 이들의 도움을 받아 제3세계에 대한 매우 다양한 개입수단과 개입방식들을 개발해 왔다. 

미국이 그간 가장 자주 사용한 군사적 개입방식은 직접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ꡐ은폐된 간접적 개입ꡑ 방식이었다. 이 방식의 군사적 개입은 미국의 무기와 원조 및 미국의 군사력에 의해 기본적으로 뒷받침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단지 군훈련관, 지원장교나 지원 기술전문가로서만 개입하면서 일종의 ꡐ대리전ꡑ을 치르게 하는 것인데, 미국은 이런 방식의 개입을 괴멸시켜야 할 저항운동과 혁명운동이 아직 강력하게 성장하지 못하거나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에 불리한 국제정세 등이 조성되어 있을 때 선호해 왔다. 

1945년 이후의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는 미국의 그런 방식의 개입의 풍부한 실험장이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유나이트 푸르트 회사의 토지에 중세를 과하고 토지개혁을 단행한 과테말라의 아르벤츠 정권을 1954년 CIA가 육성한 데스페라도스군을 앞세워 전복했다. 그리고 1961년 케네디행정부는 유사한 방식을 채택해 혁명쿠바의 전복을 위해 CIA가 조직한 망명 쿠바인들로 하여금 피그만을 침공토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은 소수의 가시적 사례들에 불과하다. 오히려 무기공급 - 예를 들어 1950년에서 1964년 사이 미국이 무상으로 제공한 무기들의 총가격은 아프리카의 경우 1억4천6백만 달러, 근동 및 남아시아의 경우 52억7천만 달러, 극동의 경우 55억8천2백만 달러,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5억4천만 달러에 해당하며, 1950년에서 1965년 사이에 라틴아메리카는 총 16억달러에 해당하는 무기를 미국으로부터 유-무상으로 획득했다.

-  반게릴라 및 기타 군사학교에서의 장교훈련 - 이런 종류의 가장 중요한 시설은 파나마에 소재하며, 1949년에서 1965년 사이 약 2만명에서 2만5천명의 라틴아메리카 군사요원들이 이런 종류의 군사학교를 졸업했다 -, 군사자문단의 파견 등 일상적인 반란대응체계의 가동과, 광범위한 해외기지의 설치, 해병대와 전투비행기들 싣고 해양에 상주하는 함대 운용 - 특히 지중해의 제6함대와 대평양의 제7함대가 중요하다 - 등을 ꡐ예방적 반혁명ꡑ체계로서 작동시키고 있는 점이 중요하다. 미국은 그러한 체계들을 활용하여 혁명거점의 형성을 처음부터 방지하거나 최소화시키는 데에 주력해 왔는데, 이러한 기법은 쿠바혁명의 성공 이후 갈수록 세련화되는 과정을 밟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장개석정권과 디엠정권을 앞세운 예방적 반혁명의 수행은 중국과 베트남에서 실패했는데, 이는 대리전의 수행이 혁명운동이 인민에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등 아직 취약한 상태에 있을 때에만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대리전을 통한 예방적 반혁명의 수행이 한계에 부딪칠 때 미국이 행한 군사적 개입의 다른 한 종류는 ꡐ부분적인 직접개입ꡑ이다. 이러한 형태의 개입은 시간적으로 (개입기간과의 관련하여), 공간적으로 (개입의 목표물과 관련하여), 그리고 물적으로 (사용하는 무기 등과 관련하여) 제한성을 지닌 개입으로서 미국이 보호하려는 종속국 국가의 정권이나 사회구조 등이 직접적인 위협에 처하게 되었지만 단기적인 군사적 직접개입을 통해 저항세력에게 큰 타격을 가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에 미국이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의 개입의 전형적인 예로서는 1958년의 레바논 상륙과 1965년의 도미니카공화국 내정에의 군사개입 등을 들 수 있다.   

셋째, 미국은 부분적 직접개입으로서 해결하기 어려운 사태에 직면해서는 ꡐ전면적인 직접개입ꡑ을 행했는데, 그 전형적인 사례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수행이었다. 

참고로 그간 미국이 제3세계에 대해 행한 중요한 직-간접적 군사적 개입은 아래와 같다. 

한국전쟁 (1950˜1953), 
이란의 모사디그 정권 전복 (1953), 
과테말라 정권 전복 (1954), 
중동 위기 선동 및 레바논 상륙 (1958), 
케모이섬, 마쓰섬 주변에서 무력시위 (1958), 
콩고에서 '유엔 군사작전' 선동 (1960), 
피그만 침공 (1961), 
통킹만 무력도발 (1964), 
베트남 전쟁 (1964˜1972), 
도미니카 공화국 내정개입 (1965), 
엔크루마 정권 전복 (1866), 
라오스, 캄보디아 무력개입 (1970), 
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 (1973), 
포르투갈에서 파괴활동 (1974˜1975), 
케냐의 무왕기 카리우기 암살 (1975),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정권 전복 (1975), 
콩고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1977), 
이란에 대한 군사행동 (1979˜1981), 
카스트로 암살 기도 (1960˜1981), 
전두환중심의 군부세력에 의한 광주민중 학살 방조(1980) 
카다피 암살계획 (1981), 
파나마의 토리호스 암살 (1981), 
인디라 간디에 대한 음모 (1981), 
잠비아 대통령 암살계획 (1981) 
폴란드 내정간섭 (1980˜1984), 
아프가니스탄 군사개입 (1980˜1984), 
엘살바도르 내전 군사개입 (1981˜1983), 
니카라과에서 군사도발 (1981˜1983), 
시드라만에서 리비아에 대한 군사도발 (1982), 
그레나다 침공 (1983), 
파나마 침공(1989) 
걸프전 (1990-1991), 
소말리아 무력개입 (1992-1995), 
수단, 아프가니스탄 미사일 공격, 이라크 공격 (1998), 
유고연방 침공 (1999) 
대아프칸전쟁 수행(2001) 

<현장에서 미래를>제72호(2001년 12월호), 41-61쪽 발췌

 

3. 1953년 7월을 중심으로 한 한국전쟁의 기원과 결과 (자료발췌)

ꡒ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갈등과 혼란의 세기도 만약 통일된 한국이 한국인이 말하는 그런 자유를 가질 수 있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비극은 전쟁이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ꡓ (브루스커밍스)

미제의 우리민족에 대한 침략의 역사는 1945년 8․15 이후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미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려고 야망을 품을 것은 벌써 오래 전부터이다. 미제침략자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 야망을 품기 시작한 것은 1830년대부터이다. 그것을 자료와 내용으로 분석해보았다.

1834년 5월에 당시 미국무부 특사 에드먼드 로버트는 극동지역 나라들에 대한 침략가능성 여부를 조사한 후, 국무장관에게 일본과 통상조약의 길을 열게 되면 장차 조선과도 교역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후 1845년 2월 12일 미국회 하원의원 프라츠는 28차 국회 하원회의에 침략적인 ‘조선개방안’을 제출했다. 이처럼 미제는 19세기 중엽부터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책동을 감행해왔다. 

1869년대 중엽에 러시아주재 미국공사로 있던 크레이가 자기 정부에 보낸 문서에서 “장차 미국의 기초를 닦기 위해서는 미 육군과 해군이 튼튼히 의거할 수 있는 아시아 대륙에 미국의 기지를 창설해야 한다. 그러한 곳으로는 지브로올터와 같은 의의를 가지는 조선 해안 거문도를 우선 점령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미제는 1866년 셔먼호 침공으로부터 무력적 공세를 감행하였다. 특히 1871년 4월에는 다섯척의 군함과 80문의 포화, 2,230여 명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침략함대를 강화도에 침투시켰다. 그러나 신미양요로 불리우는 1871년의 침공에서 미제는 큰 참패를 당하였다.

1905년에 미제는 일제와 카쓰라-태프트 협정을 체결했다. 이것은 미제국주의자들이 일제와 짜고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고 식민지로 만드는 것을 허용하며 그 대신 미국이 필리핀을 강점하는데 대해서 일본은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 밀약이었다

그리고 미제는 1882년 조미조약 체결 이후 1945년 8․15까지 수십 년 동안 종교․문화 침투를 기본으로 하여 조선에서 숭미사대주의와 노예적 굴종사상을 전파했으며 친미주구들을 길러내고 조선침략을 위한 정탐활동을 벌였다. (미제침략사. 남녘)

▶ 한국 전쟁의 기원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우리민족은 미 제국과의 격렬하고도 잔인했던 전쟁을 치렀다. 10세기 동안이나 단일민족국가를 유지해왔던 우리민족의 분단은 이 전쟁으로 인해 비로소 고착되었고, 반도 남단은 아직도 미제의 식민지로 남아 있다. 이 엄청난 사태의 기원은 무엇이었는가?

한국 전쟁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우리 역사에 대한 왜곡이며, 6.15시대 자주통일시대에 대한 왜곡으로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전쟁에 대한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정확하다는 것은 이념에 의한 역사관이 아닌 자료와 사실을 중심에 둔 실사구시적 역사관이다. 필자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밝히면서 실재화된 자료를 중심으로 누구에게 전쟁이 필요했으며, 전쟁은 어떻게 준비되었으며, 전쟁이 어떻게 수행되었는지를 밝히려고 한다.

“1945년에 남한을 강점한 미제국주의자들은 오래 전부터 꿈꾸어 오던 우리나라에 대한 자기의 침략계획을 실현하기 시작하였다”  미제는 벌써 1945년 8월에 38선을 조작해서 민족 분열의 장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9월 8일, 남한을 무력으로 강점한 다음에 3년간 군정을 실시하였다. 이 군정통치는 곧 식민지 통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군정통치 기간동안 민중들의 반미투쟁에 봉착하자 1948년에 식민지 대리정부를 조작하고 대리정부와의 사이에 협정과 조약들을 만들어 식민지 통치를 합법화하였다. 특히 1953년 10월에 이른바 상호방위조약을 조작해서 미국 육․해․공군이 한국을 영구히 점령한다는 것을 합법화 해 놓았다. 이렇게 한국은 더욱더 미국의 완전한 식민지로 되었다.(미제침략사. 남녘)

① 누구에게 전쟁이 필요하였나?

한국전쟁은 미국에게도. 이승만에게도 필요하였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군사적 점령을 확대하여 아시아전략, 반공전략의 전초기지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리고 미국이 직면한 경제적 위기의 해결책을 한국전쟁에서 찾았다.

≪우리들은 해방군이 아니였다. 우리들은 점령하기 위하여, 조선인이 항복조건에 복종하는가 안하는가를 감시하기 위하여 왔다. 상륙 첫날부터 우리들은 조선인을 적으로 보고 행동하였다.≫
미국도서 ≪일본일기≫ 하권, 일문판, 166페지

≪미국의 계획은 리승만의 직접적인 참가와 미륙해군의 원조에 의하여 조선의 38도선 이북지역을 점령하는 것이다.≫
(미국무성 정보조사국의 극비문건 제4, 849호), 인도신문 ≪크로스 로드≫ 1950년 12월 22일

미극동총사령관 맥아더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항상 조선을 무한한 가치가 있는 군사적전초기지로 인정하였다.≫
                              ≪뉴욕타임스≫ 1957년 2월 4일

≪조선은 아세아동북해안에서의 지배적기지로 될 수 있다.≫ 
                             ≪타임≫ 1947년 5월 19일

이승만정권 국방장관 신성모는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38선은 미국의 극동반공 선이다. 평양, 원산을 점령하면 라인은 점점 북으로 올라갈 것이다.
실지회복을 위한 모든 준비는 다 되어있으며 다만 명령 하나만 기다리고 있다.≫
                                           ≪한국통신≫ 1950년 1월 24일

≪미국무성 정보 조사국의 믿을 수 있는 보고서 1949년 1월 28일부 제4, 849호에는 “조선에서 안정된 우호적인 정부를 통하여 극동에서의 부분적 안정을 확보하는 것과 조선에서의 성공에 의하여 아세아의 이르는 곳마다에서 당한 외교적 실패를 상쇄하는 것-이것들도 미국이 바라는 바이다.”라고 기록 되어있다.≫

≪동북아시아에서 조선이 차지하고 있는 지리적 위치로 하여 조선과 그 인민을 좌우하는 것은“극동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다른 어떠한 국가”에 있어서도 가치 있는 것이며 “미국이 조선을 장악하는 것은 일본에 있어서의 미국의 지위를 상당히 강화하는 것으로 될 것”이므로 “정치적으로 조선이 미국에 대하여 가지는 중요성”은 물론 의심할 바 없다.≫
                                     (미국무성 정보 조사국 극비문건 제4, 849호)

≪조선은 수 세기동안 전략적 십자로에 있었으며 중국, 러시아, 일본 특히 최근에는 미국군대까지도 조선을 손에 넣으려고 그를 유린하였다.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조선은 아시아대륙으로부터 일본에 들이댄 권총 이였으며 중국인들에게 있어서는 일본에 의한 중국침략의 역사적 교두보였으며 러시아인들에게 있어서는 블라디보스톡에 대한 위협 이였으며 미국인들에게 있어서는 공산주의의 그이상의 확장을 봉쇄 말살하는 ≪봉쇄≫의 제일 중요한 부분 이였다.≫
                                               ≪비사 조선전쟁≫ 일문판, 52페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남조선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미국이 감행한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 ≪뉴욕 포스트≫ 1949년 7월 17일

≪1950년 여름 기업간부들은 미국경제의 침체와 경기후퇴를 끝장내야 할 필요로부터 군수계약을 맺는데 열중하였다. 버지니아출신의 버드 상원의원과 같이 완고하고 경제 일면만을 보고있는 정치가는 “지금이야말로 단결해야 할 시기다. 우리는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언명하였으며 급기야 전쟁을 위하여 수 억 달러를 표결에 붙이려고 하였다.
                                                   ≪에이피통신≫ 1950년 7월 1일


이승만 의 통일관은 무력 통일 이였다. 그리고 이승만은 남한의 정치사회적 혼란 상태와 비틀거리는 정권을 수습하고, 남.북 평화통일의 기운을 막아야만 했다. 또한 1950년 5월 30일 국회의원 선거의 패배로 파멸에 직면한 이승만 정권은 전쟁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내무부장관 윤치영은 1949년 3월 9일 ≪남북 평화적 통일이란 정치적음모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남북한을 통일하는 유일한 길은 대한민국이 북한을 무력으로 장악하는 것밖에 없다.≫                                  ≪사회와 사상≫ 1990년 6월, 206페지

≪1949년 10월 31일 이승만은 미국순양함 쎈트폴호에서 “남북분단을 끝장내야겠다. 그러자면 반드시 전쟁에 의해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북한을 점령하여야 통일을 실현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승만은 1950년 1월 신년사에서 ≪새해에는 거족적으로 실지회복에 노력해야 한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비추어보아 새해에는 우리들 자신의 실력으로써 남북한을 통일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월간경향≫ 1987년 6월

                   
이승만은 1949년 11월 3일 남조선주재 미국대사 무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대한민국은 전쟁할 준비가 되어있으며 필요하다면 무력으로 나라를 통일할 용의가 있다.≫                                                                       ≪월간경향≫ 1987년 6월, 197페지

 


≪10월 투쟁, 2월투쟁, 단독선거반대투쟁들에서 거대한 혁명적 열정을 발휘한 남한 인민들은 통일과 독립을 지향하는 투쟁을 더욱 앙양시켰다. 빨찌산 투쟁은 1949년 가을에 여러 지역에서 대규모적인 농민봉기를 동반하였고 진주 등 전략적 요충지들에 대한 전면공격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단계에 들어섰으며 1950년 봄에는 한국군의 제2사단의 주력을 기동전으로 격멸 시키고 정부측의 계속되는 토벌작전을 완전봉쇄하고 한국정부의 기반을 흔들어놓는데 이르렀다
이러한 인민들의 투쟁의 대 고조와 정부의 예속정책의 실패는 같은 반동진영내부에서조차 반 이승만 세력의 대두를 가져오고 이승만은 국회에서 소수파로 되었으며 그의 통솔력은 엄중한 위기에 빠졌다.≫                        
                                    미국도서 ≪조선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 일문판, 45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한국≫의 총선거에서 이승만 일파는 참패를 당하고 그의 ≪정권≫은 크게 동요하였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 일파는 총 의 석수 210석 가운데서 다만 48석을 확보한데 불과한 반면에 ≪남북협상파≫로 불리는 사람들이 진출하였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지향한 이러한 남조선인민의 운동의 고조와 지배체제의 붕괴를 모면하기 위하여 이승만으로서는 인민의 불만을 북한측에 돌리여 북에 대한 무력침공을 감행하는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일본도서 ≪미제국주의≫, 91


② 전쟁은 어떻게 준비되었는가?

미제와 이승만 정권의 치밀한 준비 속에 전쟁체제를 수립하고 무장력을 준비하였으며, 38선일대에서 무장 도발을 자행했고, 군사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전쟁체제수립은 국가안전보장법과 후방안전을 위한 민주세력탄압을 통해 이루어 졌다. 그리고 무장력은 무력을 10:1 우위를 점하도록 하였으며,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가져왔고, 미 군사 고문단에 의해 훈련을 완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38선 일대에서 계속된 무장 도발을 자행하였다. 그리고 작전계획과 작전지도를 작성하였으며, 무력도 공격형으로 배치되었다.


≪오는 해를 일단 넘기지 말고 남북을 통일해야 할 결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세계대세 관계상 그냥 방임하였으며 자제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인끼리 여하한 방법으로든지 결판 하여 안되면 동족상쟁을 해서라도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승만-
                                                 ≪경향신문≫ 1949년 12월 31일

리승만은 1949년 10월 7일 유피통신사 부사장 죠세프 죤슨과 한 담화에서 ≪나는 우리들이 3일이내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서울신문≫ 1949년 10월 8일

신성모는 ≪우리는 십분의 실력을 가졌으나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시기를 바라고 자중하고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서울신문≫ 1950년 5월 12일

1950년 6월 19일 남조선≪국회≫에 참가한 덜레스는 ≪미국은 공산주의를 반대하여 싸우는 당신들에게 물심양면의 필요한 원조를 주기에 준비되어있다. 공산주의자들은 결국 북조선에서 지배권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라고 연설하였다.
                                             서울발 ≪유피아이통신≫ 1950년 6월 19일

≪이승만의 탄압기구의 법률적 기초는 1948년 12월에 시행된 국가안전보장법이다. 이 법률은 약 35년 간 조선사람들에게 적용한 일본의 치안유지법에 기초하고있었다. 이 국가안전보장법에 기초하여 대통령은 개인을 포함하여 그를 반대하는 어떠한 그룹, 조직 혹은 집회도 탄압할 권한을 가지고있었다. 1949년에는 이 법률에 의하여 체포된 자는 11만 8천 6백 21명 이였다. 1949년 12월 다가올 사태와 대비하여 법률은 개정되고 형벌은 더욱 엄격하여졌다. 법의 조문 및 범죄의 수는 5개조에서  18개조로 늘어났다. 비합법적 조직에 그 어떤 관계가 있는 자 혹은 고소된 자에게 동정을 표시한자도 처벌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의 평화적 통일을 요구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이미 유죄를 선고받은 자의 판결도 이 법률에 의하여 소급되었으며 최고형은 금고형으로부터 사형으로 되었다.≫
                                      미국도서 ≪조선전쟁의 역사≫ 상, 일문판, 75~76페지
≪후방상태에 극도의 불안을 느낀 미국사람들과 이승만 일파는 후방을 정비하기 위하여 민주주의운동과 그 참가자들에 대한 미증유의 가혹한 탄압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탄압은 미국대표의 직접지시에 근거하여 실시되었던 것이다.≫
                                  미국도서 ≪조선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 일문 판, 158페지

≪여수반란사건이 발생하자 육군은 즉시 특별작전을 위한 전투부대를 편성하였는데 토벌부대에 비행부대도 참가케 되었다.≫ 
                                             ≪한국전쟁사≫ 제1권, 전사편찬위원회, 608페지

≪1949년 1월 24일 제주도 폭도토벌에 엘-5형 6대가 출동하여 지상군작전에 협력하였다.≫
                                            ≪한국전쟁사≫ 제1권, 전사편찬위원회, 609페지

≪미국육군군사사절단 단장 로버트는 스스로 지휘관이 되었으며 1949년 11월, 1950년 1월, 3월에 걸쳐 대 토벌을 개시하였다. 그것은 게릴라지구로 짐작되는 지역주민들을 모두 강제 철거시키고 그 집들을 전부 불살라버리는 철저한 소탕작전이었다. 그것으로 하여 4백만 명의 조선사람들이 유랑민으로 되었으며 그중 일부는 ≪한국≫군에 입대하였다. 그것은 밥을 먹여주기 때문 이였다.
이러한 상황의 ≪한국≫과 미국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시찰한 마크 게인 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고뇌와 치욕감을 가지고 우리 국가 밑에서(자주 우리의 적극적인 장려 하에)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억압하는데서 이 세상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야만적인 경찰국가가 탄생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조선에서 우리의 정책의 근저를 이루는 것은 소련에 대한 공포심이다. 그리하여 그렇게 해서 안될 일들이 이 공포심의 이름 밑에 진행되고 있다.≫≫
                                                일본도서 ≪미국의 극동군사전략≫, 35페지

≪한 서방출판물은 1948년 10월까지 미국의 전쟁도발계획에 따라 우익청년단원으로서 군사훈련을 받은 남조선청년들의 수는 1백 25만에 달하며 그 목적은 북의 인민군무력에 대한 ≪10 대 1≫의 우위를 보장하기 위 한데 있다고 폭로하였다.≫
                                          미국도서 ≪현대조선사≫ 제1권, 일문판, 535페지

≪미국의 공식자료에 따르면 1949년 미군은 1억 1천만 달라 에 상당하는 장비를 한국군에 넘겨주었는데 이것은 ≪5만 병력을 무장시키는데 충분한 것≫으로서 그 내용을 보면 소총 10만 정에 실탄 5천 만발을 비롯하여 로켓포 2천문, 각종 차량 4만대, 다소의 경포와 박격포 및 그에 달린 포탄 7만발 등이 포함 되였다고 하며 그 후에 다시 8천 7백만 달라 이상의 군사지원의 추가로 제공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사≫ 일신사, 50페지

≪5억 달러를 들여 장비 시킨 남조선군 을 공격준비가 되어있었다.≫
                                                      ≪아메리카현대사≫ 일문판, 159페지


≪1949년 6월 5일부 뉴욕 헤럴드 지에 실린 서울특파원의 보도에 의하면 남조선주둔 미군사사절단단장 로버트 장군은 5백명 이상의 미국군사교관들을 가지고 북조선을 공격하기 위하여 남조선군을 열심히 훈련시키고있다고 하면서 미국의 세납자들은 조선에서 우리나라의 투자를 지키는 훌륭한 번견인 군대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를 울리는 힘이다.≫라고 지적하였다. 로버트는 또한 남조선군의 매개 사단에 적어도 13~14명의 미군장교들이 배속되어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로버트는 그들이 남조선 군 장교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38도선의 전선에 나가있으며 군사 작전 때나 휴식할 때나 행동하고있다.고 하였다.≫
                                                          ≪침략자는 누구인가≫ 37~38페지

≪1949년 1월부터 1950년 6월 25일까지의 사이에 국군은 북을 반대하여 2천여 차례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조선전쟁 : 대답 없는 질문≫, 41

≪1949년 10월 육군사령부에서 열린 사단장회의에서 로버트는 확실히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많은 공격은 나의 명령에 의하여 수행되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더 많은 공격이 수행될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부대는 제 마음대로 공격하고 아무러한 성과도 없이 막대한 량의 탄약을 써버렸으며 게다가 치명적인 손해를 입었다. 앞으로는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국방군의 진공은 오직 미군사 사절단의 명령에 의하여서만 수행되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일본도서 ≪미국은 패하였다≫, 14


맥아더 사령부에 의하여 ≪극동침략계획 에이≫가 작성되였다. 
≪이전 일본군 참모본부 차장 이였던 가와베(K)를 비롯하여 아리스에(A), 다나까(T), 오노(O) 등 주요 참모들로 구성된 ≪카토(KATO)≫기관과 이전 대본영육군부 작전과정 핫도리의 ≪맥아더 사령부 역사반≫등은 북벌계획을 작성 제공한 주되는 비밀단체였다. 이들은 북벌 계획 작성을 위하여 ≪한국군의 제복과 미군제복을 입고 외국인으로 출국하였다고 한다.≫이들이 만든 북벌계획은 우선 38도선에 한국군, 미군 10개 사단을 집결시켜 중부와 서부의 2개 작전지대를 만들었다. 서부전선은 곧바로 평양으로 진격하고 여기에 호응하여 평양북방에 해공군이 협동하여 상륙작전을 진행하도록 되어있다. 동부전선은 우익은 양덕, 좌익은 원산을 향해 평양과 원산을 연결하여 진격한다. 여기서도 원산북방에 해군부대의 상륙작전을 진행하도록 되어있다.≪이 작전계획이 맥아더 사령부에 바쳐진 것은 1950년 초이며 이것은 그대로 한국 측에 전달되었다.≫≫
                                     일본잡지 ≪진부쯔 오라이≫ 1964년 9월, 67페지

≪미국은 조선전쟁이 발발할 경우 취해야 할 ≪특별행동≫에 관한 ≪NSC-68≫전략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1950년 1월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지시에 따라 미국무성과 미합동참모본부 연합회의에서 작성 합의되고 4월 2일 미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비준된 조선전쟁 도발과 관련된 계획이었다.≫
                                                          ≪뉴욕타임스≫1964년 4월 13일

 

≪맥아더는 해임된 후 자기의 진술서에서 전쟁전야에 미국은 북조선을 공격하기 위하여 모든 군수물자와 무기들을 38선 지역에 총집결시켰다고 실토하였다.≫
                                                        ≪폴크스 슈팀메≫1990년 7월 16일

 

③ 전쟁은 어떻게 진행 되었는가?

미국과 도쿄에서 최후의 비밀작전회의를 하고 위장전술을 펼쳤다. 남조선은 미국밖에 있다고 선전하며, 휴가 여행 만찬회로 위장하였다. 몇일후 6월23일 남조선이 포 사격을 개시하며 전면전으로 돌입하였다. 그리고 조선인민군의 반격이 시작되었으며, 연이어 미군이 출동하였다.

≪38도선 ≪시찰≫을 끝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덜레스는 6월 18일 이승만에게 ≪북조선에게 먼저 침입했다는 역선전과 동시에 북조선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라.≫고 언명하였다.≫
                                                 일본도서 ≪미국은 패하였다≫, 16

≪6월 20일 덜레스는 리승만에게 보낸 서한에서 남조선에 부과된 역할은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르기 위한 일을 조작하는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위대한 사건 가운데서 당신의 나라가 놀아야 할 결정적인 역할에 대하여 나는 지극히 중대한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고 하였다.≫
                              미국도서 ≪조선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 일문판, 41

≪덜레스는 6월 21일 한국으로부터 일본에 갔다. 그는 22일 맥아더와 장시간 회담하였다. ≪에이피통신≫에 의하면 ≪미국은 극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 행동≫에로 나설 것을 예언하였다.≫
                                                    일본도서 ≪조선전쟁의 발발≫

≪1950년 6월 21일에 맥아더를 중심에 놓고 진행된 죤슨 국방장관, 브래들리 합동참보본부 의장, 애치슨 국무장관 대리인 덜레스 사이의 4자 회담은 ≪NSC-68전략을 구체적으로 확정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혹은 더 구체적으로 미 군부와 그 동조자였던 덜레스가 그들이 계획한 조선전쟁에 돌입하려고 진행한 최후의 비밀작전회의였다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4자 비밀회의에 대하여 보도한 기사에서 ≪미국은 바야흐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려고 하고 있다.≫고 사태의 긴박성을 지적하였다.≫≫
                                            일본도서 ≪조선전쟁≫ 호라 도미오, 56

≪한국과 대만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밖에 놓여있었다. 애치슨의 이 방위선*은 미국의 군부지도자들에 의해서 지지되여 온 전략적 구상을 확인하였고 미국 트루먼 행정부의 태평양방어선을 명백히 했던 것이다.≫ 
                                              ≪정경연구≫ 1977년 6월, 180~181

≪미국이 중국문제에서 손을 떼였을 때 세계의 눈에는 미국이 한국도 포기한 것으로 비쳤다. 때문에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이 ≪예상을 뒤엎고≫ 재빨리 참전을 결정한 데 대하여 자유진영에서도 이를 하나의 놀라움으로 받아들였다.≫
                                                 ≪정경연구≫ 1982년 6월, 134

≪지금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침략자로 선전하여 온 것은 6월 25일에 조선인민군이 반격성명을 낸 사실을 역이용한 것이었다. 전쟁개시에 대한 최초의 뉴스는 ≪AFP≫ 특별전문으로 6월 24일에 보도되었다. 조선중앙통신사의 평양방송에 의하면 남조선 괴뢰군은 23일 밤부터 38도선을 넘어 북조선군의 진지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고 있다. 남조선괴뢰군은 23일 밤10시 불의에 북조선측의 옹진반도의 거점에 폭격을 개시하여 24일 오전 4시까지 105미리포와 81미리포로 204발을 쏘았다. 이 기사는 ≪아사히신문≫의 구석에 작게 실렸다.≫
                                            일본도서 ≪미국의 극동군사전략≫, 16

≪1950년 6월 26일부 ≪아사히신문≫에 다음과 같은 보도가 게재되었다. 한국군은 23일 밤10시 돌연히 북조선 군 진지에 맹렬한 포 사격을 시작하여 24일 오전 4시까지 105미리포와 81미리포 204발을 발사하였다. 계속하여 24일 오후 12시 25분부터 6시 30분까지 300발을 쏘았으며 세 번째는 25일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사이에 200발을 북조선 군 진지에 쏘았다.≫
                                           일본도서 ≪조선전쟁≫ 호라 도미오, 16

≪조선전쟁은 사실상 남으로부터의 도발로써 시작되였다.≫
                                                   ≪교도통신≫ 1975년 8월 25일
≪남한이 옹진반도를 먼저 공격하고 북한이 반격할 때 일부러 계속 밀려 국제여론을 환기시킨 다음 만주지역까지 점령하려는 것이 미국의 주장이라는 여론도 나온다.≫
                                                   ≪중앙일보≫ 1989년 6월 23일

≪북조선군이 ≪한국≫군으로부터 불의에 공격을 받고 38도선 전선에서 2~3키로미터 후퇴하였다가 반격으로 넘어갔다.≫
                                      미국도서 ≪아메리카 현대사≫ 일문판, 160

≪미 공군은 6월 26일 이른 아침부터 조선에 대한 폭격을 개시하였다.≫
                                                  ≪뉴욕타임스≫ 1950년 7월 2일

≪트루먼은 6월 26일부터 27일 사이의 밤, 미국시간으로 10시 17분 맥아더에게 비밀지령을 보내어 조선에서 미국 해, 공군이 전투에 참가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동란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공식적인 것으로 되었다.≫
                                                일본도서 ≪일본재등장≫, 48~49

≪워싱턴 시간으로 6월 26일 오후 10시 17분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미국공군과 해군을 조선에 출동시키도록 비밀명령을 내렸다.≫
                                                   ≪뉴욕타임스≫ 1950년 7월 2일

 

▶ 1953년 7월 27일 그리고 한국 전쟁의 결과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6.25 전쟁은 미국의 모략에 의해 이승만 친미도당을 이용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단순히 현상적으로 나타난 것은 남.북 내전에 유엔이라는 국제 기구를 통해 미국이 참전 한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본질을 살펴보면 철저히 미국에 의해 사전 모의되고 꾸며진 전쟁이다. 동북아시아에대한 전략적 중요성과 당시 미국 경제의 돌파구를 형성하기위해 그들에게는 2차세계대전과 유사한 새로운 대전이 필요했었고, 그 시발점이 6.25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승만군에 의하여 도발된 6.25전쟁은 미국이 ≪제3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에 불을 지르기 위한 전쟁이었다. 미국무성의 모략 가들과 군부의 전쟁광신자들이 ≪제3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을 만들게 되였는데 그것이 바로 ≪2계단전쟁론≫이였다.

≪2계단전쟁론≫이란 바로 주구들을 사촉하여 동족상쟁을 일으키게 한 다음 유엔에 상정시켜 유엔안보리사회에서 ≪침략자≫를 규정하고 그를 ≪징벌≫하기 위하여 미군이 유엔군의 모자를 쓰고 전쟁에 개입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되면 침략전쟁을 감행하면서도 유엔의 이름으로 의무화,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6.25조선전쟁은 미국의 이러한 모략에 따라 ≪제3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에 불을 지르기 위해 조작한 것이다. 한국전쟁을 ≪제3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에 불을 지르기 위한 전쟁으로 만들려고 앞장서 나선 것은 당시 미국무성 고문 이였던 덜레스와 국무장관이었던 애치슨, 남조선주재 미국     대사 무쵸 그리고 맥아더였다.

맥아더는 조선전쟁이 개시되자 미7함대에 명령하여 대만해협을 봉쇄하게 하였으며 미 극동군 공군사령관 스트라이트마이어에게 공화국북반부지역과 중국과 국경에 접하고있는 지역에 대한 정찰과 폭격을 감행 할 데 대한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리고 1950년 8월 27일 조선전선에 있던 미국비행기들이 중국 영공에 침입하여 정찰과 폭격, 기총 사격을 가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그는 1950년 7월 30일 조선전선에 장개석 군대를 투입하기 위하여 대표단을 이끌고 대만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는 어느 때든 핵을 사용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무산되고, 전체 조선인민과 인민군대는 세계제패를 실현하려던 미국의 전쟁책동을 저지 파탄시킴으로써 ≪제3차 세계대전≫을 막아내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인민군대는 군민일치가되어 유격전술과 갱도진지를 구축하여 미국의 공중공격을 무력화시키고, 전선의 인민군대는 적들과 바싹 접근하여 항상 어울려 돌아갔기 때문에 적들이 원자탄을 쓰면 저들의 군대도 죽게 되었다. 따라서 맥아더가 원자탄을 추켜들고 투하할 기회만 노렸으나 종내 투하하지 못하고 패전의 책임을 지고 목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군대와 인민이 갱도를 파고 땅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원자탄을 투하해도 역량을 소멸 할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공장은 물론 학교와 병원까지도 분산 배치하여 원자탄 을 투하 할 수 있는 대상들을 찾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3년간 조선전쟁기간 미국은 10여 차례나 원자탄을 쓰려고 하였지만 인민군대와 조선인민의 반원자전전략에 걸려들어 도저히 쓸 수가 없게 되였다.

인민군대와 조선인민이 3년이라는 오랜 기간 미국과 전쟁을 하면서 미국이 정신을 차릴수 없게 골탕먹이는 귀중한 시간을 이용하여 소련은 원자탄을 생산하는데 전심전력하여 핵 억제력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는 미국의 전면핵전쟁을 방지하는 데 하나의 전환 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후부터 미국은 소련의 핵 보복타격이 두려워 세계제패를 실현하기 위한 전면핵전쟁을 도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까지도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문에 서명한 미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이였던 클라크는 다음과 같이 실토하였다. ≪나는 정부의 지시를 수행함으로써 역사상 승리하지 못하고 정전협정에 조인한 최초의 미군사령관이라는 영예롭지 못한 이름을 띠게 되었다. 승리 없는 전쟁, 이것은 미국역사에는 없는 술어이다. 그러나 한국전선에서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승리 없는 휴전에 조인하였다. 역사는 이것을 어떻게 기록 할 것인가. 내 개인 적인 심정을 말한다면 그것은 아쉽고 통탄할 일이었다.≫
당시 클라크의 모습에서는 종전의 그 ≪당당한 기개≫도 ≪위풍≫도 ≪위신≫도 간곳없이 사라지고 그의 얼굴에는 두 줄기의 눈물만이 흘러내렸다. 이것이 1953년 7월 미국의 모습이었다.


4. 2005년 조-미 대결 끝자락에 서있는 우리의 역할

미국은 100여 년 전부터 조선에 대한 침략책동을 계속했으며 오늘은 어떻게 하든지 ≪핵문제≫를 구실로 이북을 침략하며 세계제패야망을 실현해보려고 발악하고 있다. 제국주의의 침략적.약탈적 본성은 변할 수 없다. 침략적이 아닌 제국주의가 있다면 그 것은 벌써 제국주의가 아니다. 

오늘 미제는 유일초대국으로 자처하면서 원조의 미끼와 핵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세계도처 에서 정세를 긴장시키고 민족간, 지역간의 대립과 분쟁, 종교적 대립을 조장시키며 거기에 개입하여 어부지리를 얻으려 하고있다. 이전 유고슬라비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전쟁이 이것을 실증 해주고있다.

특히 미제는 이전 소련과 동유럽사회주의의 붕괴 후 사회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라와 민족의 자주성을 고수하는 나라들을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고립 압살시키려 하며 어떻게 하든지 새로운 ≪핵전쟁≫을 도발하려고 기회만 노리고있다.

하지만 선군정치에 의해 군사진지가 철옹성같이 다져진 이북은 미국과의 총포성없는 전쟁에서 연전 연승 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4차 6자 회담은 우리민족 대 미국의 대결장이며 민족공조대 한미공조의 대결장이기도 하다. 4차 6자회담은 다자간 회담이라는 형식을 띠고 조-미 양자가 직접 대결하고 있다. 이 대결장에서 우리민족은 민족공조의 기치아래 하나가되어 승리할 것이다. 핵무기 폐기에 상응한 한반도평화체제구축과 북미   국교정상화가 기본의제 이며, 내용의 본질은 한반도 비핵화와 군축으로 이어져 미군철수와 민족 자주권 회복으로 이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6.15 공동선언을 중심으로 남.북.해외동포를 하나로 포괄하는 6.15공동위가 구축되었으며, 6.17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동영 통일부장관 면담을 통해 민족공조가 더 한층 높아져 가고 있다. 그리고 8.15 통일 대축전을 통해 민족자주, 민족 대 단결 의식이  대중 속에 넓고 깊게 확산되고 있다. 이것은 조국통일의 전환적 국면이 열리고 있음을 나타내며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미제는 한국전쟁을 통해 꿈꾸던 세계제패의 야망을 1953년 7월 눈물을 흘리며 접어야 했다. 그리고 2005년 10월 미제는 우리민족과의 대결에서 심대한 타격을 입고 그들이 바라던 세계제패의 꿈을 접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 제3세계 국가와 러시아 중국까지 포괄 한 반제반미전선 확대, 유럽연합, 일본 등 제국주의 내 갈등의 심화 미국 내 경제적 어려움은 그들을 제국 로마의 길로 인도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분명하다.

  우리는 허구적이고 예속적인 한미동맹, 식민사대주의, 분단시대의 낡은 잔재, 전쟁과 파괴의 20세기, 굴욕적 현대사와 단호하게 결별해야 한다. 60년이란 긴 시간동안 미제에 의해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갔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제를 “해방자” “구원자” 라고 생각하며 허위 의식 속에 왜곡 당하고 고통 당하였던가. 이제 이런 식민과 예속의 20세기를 청산하고 자주와 통일, 번영의 21세기를 향한 작지만 의미 있는 첫걸음을 과감히 내딛어야 한다. 

  그 첫걸음이 바로 민족 분단의 원흉, 미군정의 야만적인 범죄행위의 기획자, 집행관이었던 맥아더 동상 철거에 있다. 물론 상징성을 띤 투쟁이지만 그 속엔 본질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미군강점 60년의 비극적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미군 없는 새 세상을 열어가 가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앞으로 주한미군 철수 투쟁이 대중화되는 시발    점이 될 것이다. 자주와 통일, 민족번영의 새 시대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되어 이 땅에서 주한미군을 몰아내고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어 갈때 일구어지는 것이다. 그 시발점이 9.11 맥아더 동상 철거투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