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시대의 화두이다

 

1. 변화는 시대의 화두이다

한반도는 지금 전쟁 일보직전까지 다가갔던 상반기의 긴장된 정세를 벗어나고 있다. 6자회담의 중간결산인 ‘9.19 베이징 공동성명’은 한반도 주변 국제관계의 장밋빛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 공동성명은 올해 6.15와 8.15대축전을 거치면서 형성된 민족화해, 남북공조의 흐름을 본격화, 가속화하는 의미가 있다. 

6개국 공동성명에 대한 반응은 네오콘, 조중동 등 뒤떨어진 일부세력을 제하고는 대체로 환영일색으로 보인다. 진보진영은 특히 향후 정세를 낙관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다. 그러나 일각에는 우려와 경계의 목소리도 있다. 리영희 선생같은 이는 평화통일연구소 주최의 토론회 기조강연에서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안된다. 미국은 국제조약을 한 번도 제대로 지킨 적이 없는 나라라는 사실을 상기하라.”

6개국 공동성명은 아직 경수로, 평화체제 경로, 핵검증절차 등과 관련한 첨예한 정치군사적 쟁점을 내포하고 있다. 쟁점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의제가 압축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직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 당연히 우리는 긴장을 풀 것이 아니라 반전평화, 반미자주, 분단해소를 위한 투쟁의 기본선을 더욱 강화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한반도와 한국사회 안팎의 정세가 급변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변화를 도외시하고 기존에 해오던 실천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시대에 뒤떨어질 것이다. 정확한 실천과제는 현실변화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에서부터 나온다. 변화의 의의와 성격, 실체와 경향성을 평가하고 향후 대안을 정립하는 것은 실천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민주노동당의 시급한 과제이다. 

낡은 시대가 가고 새시대가 오는 시대변화가 오늘의 대세이다. 새시대는 615통일시대이자 민주개혁의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 

‘615통일시대’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을 마치 남북정부간의 담합의 산물로 이해하는 편협한 견해는 차치하더라도 공동선언 이후 지난 5년간 남북관계가 부분적인 교류확대를 제하고는 거의 답보상태에 머문 것으로 인해 통일문제에 대한 패배적.소극적 사고가 현실에서 확산된 탓이다. 올해 정세는 이런 패배적.소극적 경향을 일거에 날려버렸다. 

또한 ‘민주개혁시대’라면 노무현식 개혁을 연상하고 거부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소아적인 생각이다. 개혁이 왜 노무현의 전유물이어야 하는가? 노무현정권은 개혁과 아무 인연없는 세력이라는 것이 이미 분명해졌다. 이제는 민주노동당이야말로 진정한 개혁세력이라는 진실을 만천하에 뚜렷이 밝혀야 할 때이다. 

일각에서는 개혁이 아니라 근본변혁을 강조하기도 한다. 분단과 외세지배, 자본지배의 고통을 겪는 한국사회에 근본변혁과제가 상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 과제를 해결하고자 민주노동당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근본변혁’을 유의미한 사회적 의제로 제출할만큼 민주노동당과 민중의 정치역량이 성숙하지 못했다. 굳이 말하자면, 지금은 '혁명적 개혁‘과 ’개량적 개혁‘을 구분할 시기쯤 될 것이다. 

오늘날 시대변화의 근저에는 1987년 6월항쟁에서 출발하는 장기간의 한국사회 변화과정이 놓여있다. 이 과정의 성격을 필자는 ‘거대하고 점진적인 민주변혁의 과정’이라고 이해한다. 최장집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사회 민주변혁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혁명은 전진하고 있다. 6월항쟁이 민중주도의 전면적인 사회개조프로그램으로 발전해가지 못한 조건에서 혁명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마치 지하수가 흐르듯이 사회 저변에서 서서히 점진적으로 확산해가고 있는 것이다. 여중생 촛불시위, 부르주아 개혁정권의 등장, 탄핵반대 촛불시위는 이 혁명의 폭과 깊이가 갈수록 확대되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현상들이다. 그런 견지에서 한국사회는 고전적인 의미의 민주주의혁명단계에 있다. 

‘민주주의혁명의 시대는 지났다’고 과감하게 규정하고 사회주의의 전면실현을 당의 당면과제로 제기하는 입장도 일각에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역사발전은 주관적인 욕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민주주의혁명의 과제가 완수되지 않은 조건에서 사회주의로 건너뛰는 발전경험이 역사 속에 존재하는가? 사회주의를 당장 실현할 수 있는 현실가능한 경로는 없이 구호만 요란한 격이다. ‘공공성 강화’나 ‘평등’의 구호를 사회주의의 의제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은 실상 사회주의가 아니라 일반민주주의의 의제에 속하는 민주변혁의 과제이다. 현시기를 사회주의 실현단계로 이해하는 것은 현실과 유리된 망상이나 집착의 혐의가 짙다. 

민주노동당이 내거는 ‘자주와 평등’의 과제, 그것은 민주변혁 단계에서 민주주의의 일반가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민중의 숙원인 자주, 민주, 통일을 실현하는 과제이다. 한국사회는 몇 차례의 혁명적 봉기와 장기간의 점진적 개혁을 통해 민주주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그러한 시대변화 추세에 따라 민주변혁의 과제를 앞당겨 완성해내는 것이 바로 민주노동당의 당면한 정치적 임무라고 할 수 있다. 

시대변화의 근본동력은 민중의 힘이다. 민중의 의식정도, 조직정도, 투쟁능력이 발전하면서 한국사회 전반이 변화하고 있고, 남북관계와 통일정세도 변화하고 있다. 노무현정권의 등장은 그런 변화의 상징적 표현이었지만 노무현정권은 주어진 시대적 여망을 대변하지 못하고 파산직전에 이르렀다. 이제 민중은 새로운 대안을 요구하고 있다. 

6개국공동성명이 예고하는 북미관계와 한반도 주변 국제관계 변화는 한국에서 민주주의혁명의 과정을 더욱 가속화하는 중요계기가 될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문제, 통일경로 문제, 주한미군철수 문제, 새로운 남북관계에 조응하는 실질적인 민주개혁 문제가 현실적인 사회정치적 의제로 전면에 대두되고 있다. 민주주의혁명의 전면화, 그것이 바로 오늘날 시대변화의 근본성격이다. 

2. 통일은 언제 이루어질까

615통일시대는 소극적 태세를 벗고 통일과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해야할 시기이다.

통일이 금방 될 것이라는 사람도 있고 어렵다는 사람도 있다. 평생을 목이 빠지게 통일을 고대하다가 실망과 환멸에 빠졌다는 사람도 있다. 이제 새롭게 통일에 대한 기대가 고조되는 정세가 도래했다. 그러나 객관정세가 좋다고 해서 통일이 저절로 되지 않는다. 통일을 이루는 결정적 변수는 객관조건이 아니라 주체역량에 있다. 통일을 실현하고자 하는 주체역량의 성숙 정도가 통일 시기의 늦고 빠름을 결정할 것이다. 

아직 민중운동은 통일을 맞이할 준비가 안되어 있다. 통일시대 대안정당이라는 민주노동당만 하더라도 통일에 대한 비전과 정책이 빈약하기 짝이 없다. 당내에 심지어 ‘통일은 필요없다’ ‘통일은 민중과 무관하다’는 식의 몰상식하고 천박한 견해도 존재한다. 이런 현상은 그간 통일운동의 무능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당내 좌파편향의 결과이기도 하다. 필자도 스스로 넓은 의미의 좌파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만, 당내 좌파는 너무 협소하다. 분단극복과 통일에 대한 비전이 없이 무슨 좌파가 있는가?

일각의 통일지상주의도 통일정세의 전진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통일의 주체는 민중인데, 민중을 의식화.조직화하는 전망이 없이, 민중의 현안과 무관하게 통일구호를 내미는 것으로는 통일운동이 발전할 수 없다. 

남북공조가 가시화되고 6개국공동성명이 합의된 지금 시기가 통일실현에 가장 좋은 정세인 것은 분명하다. 이런 좋은 정세를 맞이하여 통일을 ‘소원’이 아닌 현실로 바꾸어내자면 여러 가지 과제가 선결되어야 한다. 남북간, 북미간의 적대적 정치군사대결체제가 해소되고 평화체제가 구축되어야 하며, 어떤 의미든 진정한 통일지향세력이 정권의 칼자루를 쥐어야 한다. 한미동맹의 재조정, 주한미군철수와 평화군축 실현은 통일실현의 전제조건이다. 국가보안법과 그것으로 상징되는 냉전대결구조도 청산되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이루어내는데서 민주노동당이 주동에 서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통일정책과 통일경로의 청사진을 분명히 세우고 민중 앞에 통일지향의 집권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의 실현을 위해 민중과 함께 전당적인 투쟁에 나서야 한다. 그렇게 해야 615통일시대의 대안정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역량이 준비되면 통일은 금방이라도 될 수 있다. 교류협력 위주의 통일운동은 한계가 있다. 이제는 남측 민중을 전면 조직하고 발동하는 통일운동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통일시대 국민운동 프로그램’같은 총체적 운동방안을 가지고 주한미군 문제와 평화체제 문제, 국가보안법 문제 등을 민족통일의 의제로 선점해 들어가야 한다. 반통일세력의 준동과 역공세를 대중운동으로 제압해야 한다.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투쟁, 패트리어트미사일배치반대투쟁같은 반미투쟁 현안들을 전민족적인 통일운동의 과제로 전환시켜내야 한다. 통일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정책과제를 가지고 통일대축전, 통일문화제, 통일캠프, 통일한마당, 통일대행진 등 그간의 대중운동 노하우를 집중하여 통일시대의 구체상을 민중들에게 제시하는 큰 판의 통일운동을 통해 축제와도 같은 통일실현 분위기를 고조시켜나가야 한다. 통일을 위한 가시적 조치를 촉구하는 대중운동을 폭넓게 조직하고 그 중심에 민주노동당이 있어야 한다. 

3. 집권은 언제 가능할까

615통일시대이자 민주개혁시대는 민주노동당의 집권과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해야할 시기이다. 

시대변화는 민주노동당의 성공의 기회이다. 615통일시대이자 민주개혁시대는 그 완성을 위해 민주노동당의 집권을 요구한다. 민주노동당의 성공과 집권이 없이는 어떠한 시대변화의 예측과 전망도 덧없는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필자는 당의 정치적 무능력과 준비부족을 통탄한다. 민주노동당은 ‘새가슴’을 벗어던져야 한다. 의회활동에 좋은 성적을 거두고 무상의료.무상교육 등의 사회적 의제를 전면화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구체적인 정치활동을 통한 구체적인 득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민주노동당이 통일시대 대안세력으로 자리잡기에는 함량미달이다. 그 이상의 비전과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지나치게 소의제에 매몰되어, 큰 전망을 놓치고 있다. 615, 815, 6자회담 등 중요한 정치적 계기에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만이 할 수 있는 과감하고 혁명적인 대안의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작년 당직선거에서 ‘집권전략’ 공약이 유행처럼 등장했다. 그 이후 집권전략에 진전한 것이 무엇인가? 당대표 공약 차원의 집권전략위원회(소위 2012년위원회)를 형식적으로 구성한 것 이외에 집권전략의 발끝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집권전략을 세우자면 집권의 주체역량을 구축하는데 대한 계획과 더불어 대안정치, 대안경제의 전략을 완비해야 한다. 그런 것들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전술적 과제를 정립하고 그 과제를 실현하는 선상에서 당정책과 투쟁을 배치하고 집행해야 한다. 2012년이든 언제든 민주노동당이 집권해야 한다는 것은 당원들의 열망이며 민중들의 숙원이다. ‘2012년 집권은 황당개그’라는 식의 쓴소리도 일면 타당하지만 집권열망의 진실성을 그렇게 조롱만 하고 넘기는 것은 옳지 않다. 집권하자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구체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언제 집권할 것인가의 해답은 통일이 언제 될 것인가에 대한 해답과 유사하다. 집권은 객관정세의 유리함 이전에 우리 힘으로, 민중의 힘으로 하는 것이다. 민중의 힘이 준비되지 않으면 아무리 기성정치세력들이 파탄이 나도 진보정당의 집권은 불가능하다. 

민중의 집권을 위한 조건은 대안정치세력의 존재, 60% 이상의 압도적 대중이 기성세력에 환멸을 느끼고 새로운 세력을 지지하는 사회분위기, 기득권세력이 지리멸렬하여 새세력의 등장을 효과적으로 봉쇄하지 못하는 조건들이다. 

민주노동당은 지금이야말로 집권을 위한 프로그램을 정립하고 가동할 때이다. 다수 당원들은 표면적인 집권의 경로를 대선시기 약진, 원내교섭단체, 대안세력 부상, 선거승리 등으로 암암리에 생각하는 것같다. 현시기 당활동에서 구체적인 득점이 강조되는 것은 아직은 집권이라는 거창한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때가 아니라는 것을 다수 민중들이 느끼기 때문이다. 그 점은 중요하다. 민중의 눈높이에 맞게 정책을 가져가야 한다. 그러나 그와 별도로 당의 지도부가 ‘집권의 청사진’이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며 변명할 수 없는 문제이다. 

‘통일시대 민주노동당 집권프로그램’을 세워야 한다. 51대 49의 민주개혁 대 수구보수 구도를 60대 40 이상의 구도로 재편하고 민주노동당이 민주개혁세력의 확고한 정치대안으로 자리잡는 것이 당집권의 과정이다. 그러기 위해 당조직과 체질을 강화하고 대중기반을 확대하는 문제, 정책능력과 정치적 대응능력을 높이고 대안프로그램을 의제화하는 문제, 상층의 기성정치 독점구도를 효과적으로 파탄내는 문제, 한국사회 각계각층 속에 폭넓은 지지기반을 구축하고 민주노동당의 대안을 중심으로 각계각층을 진보진영의 단일한 국민전선으로 모아내는 문제 등에 시급하게 해답을 내야 한다. 

지금의 당은 왠지 적응하고 살아남기에 급급하는 인상이다. 원내진출 초기에 ‘제3당의 격에 맞게’ 운운하던 해프닝의 여파를 아직 당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민주노동당은 이제 제3당도 아니다. 그렇다고 제3당 탈환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가?

615통일시대의 진두에서 민주노동당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주한미군철수의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정치사회경제문화 전반에 대한 민주개혁의 청사진을 확립하고 그 절박성과 진정성을 대중들이 느끼게 해야 한다.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진보적 인텔리, 여성, 종교인, 중소상공인, 사회적 소수자 등 광범위한 각계각층 민중들을 새시대 변화의 주역으로 조직해낼 대안을 제기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노동당의 할 일이다. 

2005년 10월 13일  한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