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진과 같은 이름있는 종교인을 혁명의 동반자로 삼는데서 천도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입장은 아주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만일 우리가 천도교가 어떤 종교인지 전혀 모르는 문외한들이었거나 편견과 적의를 가지고 이 종교를 대하는 사람들이었더라면 우리는 애당초 박인진과의 협상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며 수백만에 달하는 전국의 천도교인들을 조국광복회의 기치 밑에 묶어세우기 위한 통이 큰 작전도 벌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말이 난 김에 천도교에 대한 우리의 견해와 입장을 여기서 좀더 밝혀보고 싶다. 동학의 이념이라든가 그 발전역사와 관련해서는 나도 하고싶은 말이 많다.

인간이 어떤 주의주장이나 교리를 파악하는데는 여러 가지 경로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처음으로 안내한 것이 책이었다면 기독교를 안내한 것은 예배당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따라 예배당에 자주 다니었다는데 대하여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나는 그 예배당에서 종교의식을 처음으로 보았고 기독교의 교리를 선전하는 목사의 설교도 처음으로 들었다. 숭실중학교 출신인 아버지와 칠골교회의 장로이며 교육자인 외할아버지는 예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창덕학교를 다닐 때 칠골사람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 강양욱 선생도 기독교 신자였다.

손정도, 오동진, 장철호, 김사헌, 김시우를 비롯하여 아버지의 친지들 가운데도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린 시절에 나는 예수를 숭상하는 신도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예수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소학교 시절의 나의 동창생들 중에도 많았다. 그 당시는 항간에 기독교를 선전하는 책들도 많이 나돌았다. 그런 주위환경은 나에게 기독교를 파악할 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었다.

이슬람교(회교)를 파악하게 된 경로는 이와 좀 달랐다. 그 경로는 웃음을 머금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재미나는 사연과 결부되어 있었다. 나에게 이슬람교의 맛을 처음으로 보여준 사람은 길림육문중학교 시절의 나의 동창생 마금두였다. 마금두는 이슬람교도였다. 식성이 좋은 그는 교의 계율을 어기고 자주 식당에 가서 술과 돼지고기 안주를 청해다 먹었다. 그는 늘 남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먹으면서도 연송 불안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군 하였다. 술과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남들에게 알려지면 이슬람교도로서의 체면도 세울 수 없고 교단에서 엄한 추궁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금두와 함께 몇번 식당에 드나들면서 이슬람교도들 속에서는 술과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되어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 시절에 알게 된 이슬람교에 대한 상식은 마금두와 함께 생활하면서 보고들은 것이다.

내가 천도교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갑오농민전쟁이 낳은 녹두장군 전봉준에 대해서 알게 된 때부터였다.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선열들의 이름이 열거될 때마다 녹두장군의 이름은 홍경래, 이준, 안중근, 홍범도 등의 이름과 함께 나란히 놓이군 하였다. 그러나 그때의 전봉준에 대한 지식은 그가 갑오농민전쟁의 주인공이며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은 용감무쌍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뿐이었다. 내가 어린 때여서 아버지는 그 이상의 지식은 주지 않았다.

나에게 녹두장군의 생애와 갑오농민전쟁의 전모를 처음으로 상세하게 소개하여준 사람은 강양욱 선생이었다. 선생은 독실한 기독교도였지만 천도교에 대해서도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의 조리있는 강의를 들은 다음부터 나는 갑오농민전쟁과 천도교를 결부시켜 보게 되었다. 동학당란의 처참한 종말과 녹두장군의 비극적인 최후는 나로 하여금 조선의 국정을 도탄속에 몰아넣은 봉건조정의 사대주의와 무능력을 두고, 일청 양국의 야심과 내정간섭을 두고 치솟는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나는 동학당란이야말로 근대 우리 나라 반침략반봉건투쟁의 역사를 빛나게 장식한 큰 사변이며 이 전쟁이 배출한 용사들이야말로 근대조선민족의 정치생활과 정신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수리개들이라고 생각하였다. 갑오풍운의 총아 전봉준은 내 가슴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한점의 불꽃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천도교에 대한 나의 인식은 화성의숙 시절에 와서 더 깊어졌다. 의숙에는 천도교 신자들이 많았다. 숙장 최동오 선생이 천도교 3세교조 손병희의 제자였다는 것은 그의 자제인 최덕신도 이미 회상하였다. 숙감 강제하와 그의 아들 강병선 역시 독실한 천도교도들이었다. 화성의숙에는 「동경대전」 이나 「용담유사」 와 같은 동학경전들을 뜬금으로 줄줄 외우면서 유식을 뽐내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고 천도교 중앙이 발간하는 월간잡지 「개벽」 을 가지고 다니면서 동학의 시점에서 본 조선농촌이 어떻소, 이돈화의 문장이 어떻소 하고 역설하는 열성독자들도 있었다.

최동오는 학생들이 「공산당선언」 을 읽는 것은 경계하면서도 「동경대전」 이나 「개벽」 을 열독하는 것은 장려하였다. 역사선생이 결근할 때마다 숙장은 이따금씩 우리앞에 나타나 대리강의를 하곤 하였는데 그런 경우의 역사수업은 예외없이 동학사강의로 전환되고는 하였다. 선생은 우리 나라 근대역사에 존재하였던 충격적인 모든 사변들과 사실들을 항상 동학과 관련시켜 분석하고 평가하였다. 최동오는 천도교 교리로부터 출발하여 국본, 민본, 인본의 삼민주의를 많이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손문이 내놓은 삼민주의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천도교와 관련하여 선생이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가운데서 가장 이채로운 것은 이 교의 창시자이며 1세 교조인 수운 최제우에 대한 소개였다. 선생이 최제우의 경력과 동학의 창시경위를 소개하고나서 우리에게 특별히 역점을 찍어 강조하던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는 동학을 창제한 최제우 선생을 모두 수운대신사라고 경칭한다. 그런즉 학생들도 최제우 , 최제우 하지 말고 수운대신사라는 존칭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최동오의 말에 의하면 9세기 우리 나라의 이름있는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이 최제우의 먼 조상이었다고 한다.

최제우의 부친 최옥도 시재가 특출한 사람이었다. 그가 내놓은 「근암문집」은 당대의 유명한 시집으로 알려져있다.

6살 때에 어머니를 잃고 16살 때에 아버지를 여읜 최제우는 스무해 가까이 전국을 방랑하면서 악정, 악폐로 가득차있는 나라와 백성을 구원해낼 길을 모색하던 끝에 1860년 4월 마침내 우리 나라 근대역사발전의 흐름에 큰 영향을 준 천도교의 교리를 발표하고 동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최제우가 천도교를 동학이라고 한 것은 「서학」인 천주교에 대치시켜 동방에서 사는 조선사람들의 신앙철학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최제우가 활동하던 시기는 세도정치와 당쟁으로 그 피페가 말세에 이르고 국력이 극도로 쇠잔해지던 때였다. 봉건적 학정을 반대하는 농민폭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는데다가 기근과 홍수까지 겹쳐 사회정치적 혼란은 문자그대로 절정에 이르렀다. 양반과 상민 사이의 신분적, 계급적 대립도 극한점에 도달하였다. 수백년을 내려오면서 이왕조의 존립을 제도적으로 받들어온 봉건적인 신분관계는 나라의 중흥과 사회발전을 억제하는 저주로운 질곡으로 되었다. 탐관오리들의 학정과 핍박으로 하여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허울조차 없는 민권은 통곡하였다.

수백년을 두고 쇄국을 지켜오고 있는 동방의 조선은 끝없는 치부와 영토팽창에 환장한 열강들이 침을 흘리는 야망의 대상이 되었다. 천주교를 길잡이로 한 구미열강의 촉수는 시시각각으로 조선반도를 노리고 있었다.

「시일야방성대곡」 의 전주곡은 사실상 벌써 그 무렵부터 마련된 셈이었다. 그런 때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시대의 선각자들이 새로운 사상과 이념을 찾게 되는 것은 응당한 일이었다. 최제우는 바로 그 선각자들의 앞장에서 「인내천」 , 「보국안민」 을 기본적인 이념으로 삼는 동학을 창시하고 그 교리를 만방에 전도하기 위한 정열적인 포교활동을 벌리었다.

『제군들, 동학을 알려거든 「보국안민」 의 구호부터 보라!』

최동오는 천도교에 대한 선전을 할 때마다 매번 이런 표제를 프랑카드처럼 내들었다.

『밖으로는 외래침략에 대처해서 나라를 지킨다는 것이 「보국」이고 안으로는 악정에 대처해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안민」인즉 이거야말로 얼마나 훌륭한 천 도인가. 성주, 자넨 「보국안민」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언제인가 숙장은 나에게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하였다.

『좋은 구호라고 생각합니다. 「보국안민」 을 제창한 것이 천도교라면 나는 그 교를 지지하겠습니다.』

그것은 나의 진심이었다. 공산주의이념이 벌써 우리의 생활에서 주요한 사상적 지주로 되고있던 때었으나 나는 동학에 대한 지지를 서슴없이 표시하였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의 편안을 도모하는 것은 지각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다 다 절실하게 바라는 것이었다.

최동오는 입가에 미소를 담고 흐뭇이 나를 바라보았다.

『「보국안민」 을 반대하면야 조선사람이 아니지. 공산당이 부르짖는 세계혁명의 구호도 좋겠지만 이 「보국안민」 이야말로 우리 나라와 배달민족을 위해서 얼마나 절실한 구호인가. 확실히 수운대신사님은 영험한 분이시야.』

천도교에 대한 화성의숙 시절의 나의 지식은 실천과 결부되지 못한 협소하고 생경한 것이었으며 아직 범속하고 단편적인 것이었다.

내가 동학을 실천과 결부시키면서 주의깊이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길림시절부터였다. 조선혁명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과정은 이미 역사에 의해 부정된 주의주장이나 해석을 대체로 멀리하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는 과거의 이념이나 운동 그 자체를 허무주의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기성이론이나 남의 경험을 맹목적으로 이식하는 것은 반대하면서도 거기에서 좋은 것은 허심하게 섭취하였다.

카륜회의를 전후한 시기 우리의 혁명실천에서는 통일전선문제가 주요한 전략적 과제로 상정되었다. 어떤 세력을 포섭하고 어떤 세력을 배척하여 어떤 세력을 고립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도처에서 제기되어 무시로 복잡한 논란을 불러일으키었다. 통일전선대상이 논의될 때마다 종교문제는 민족자본가 문제와 함께 매번 무시할 수 없는 중심화제를 이루곤 하였다.

천도교는 기독교와 함께 내가 가장 중시해온 종교의 하나였다. 천도교가 우리의 주시대상이 되고 그 교도들의 활동이 우리의 관심사로 된 것은 그것이 조선의 민족종교로서 이념이나 실천활동에서 시종일관 애국애민을 지향해왔다는 것과 포교의 범위가 대단히 방대하며 침투력이 매우 강하다는 사정과 관련되어 있었다.

「자본론」 과 마찬가지로 「동경대전」 도 파고들 재미는 있지만 독파하기가 힘든 난해한 글이었다. 우주자연현상과 사물현상을 신비하고 오묘하게 서술한 최제우의 글에는 알듯하면서도 잘 알 수 없거나 보일듯하면서도 잘 보이지 않는 아리숭한 데가 있었다. 해방 후 천도교 중앙에서 간부로 활동한 김달현도 수운대신사의 글이 난해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김달현은 그 글이 유린석의 격문만치만 헐해도 동학은 자기의 울타리 안에 수십만의 교도들을 더 끌어들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천도교를 이해하는데서 우리의 안내자로 된 것은 잡지 「개벽」 이었다. 「개벽」 이라는 제명은 천도교의 주요교리인 후천「개벽」 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개벽」 은 창간으로부터 시작하여 수십호를 발행하는 전기간 종합적인 정치시사잡지로서의 체모를 잃지 않고 민족의 계몽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하였다.

민족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잡지였지만 사회주의 이념을 소개하는 글도 실었다. 당시로서는 독자들의 인기를 많이 끈 참신하고 혁신적인 대중잡지였다.

천도교 청년당조직이 조선의 북부지역과 함께 멀리 동만, 남만과 북만의 할빈일대에까지 그 지부를 늘이고 있는 때여서 「개벽」 은 만주영내에도 많은 독자들을 두고 있었다.

나는 「개벽」 에서 길림시절에 내가 잘 알고있던 논적인 신일용의 글도 보았다. 그는 1920년대 중기의 농촌문제에 완전히 심취되어 있었다. 신일용이 잡지에 발표한 「농촌문제의 연구」라는 논문은 이론적 깊이가 있는 글이었다.

「개벽」 에는 세계각국의 문물을 소개하는 글들도 많이 실리었다. 그런 글들 중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것은 고유수인가 오가자인가에 있을 때 본 「남만주행」 이라는 기행문이다. 「남만주행」 은 이돈화가 쓴 글인데 만주지방의 자연풍경과 중국사람들의 생활풍습, 무순탄광 노동자들의 참혹한 생활처지와 우리 나라 독립운동자들의 활동형편 등이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그 기행문에 의하면 남만주 지방 사람들에게는 사람이 죽으면 관에 넣어 땅에 묻지 않고 밖에 놓아두며 나이가 7살이 못된 어린이가 죽으면 거적에 싸서 나무에 매달아놓는 별스러운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개벽」 에 실린 여러 가지 종류의 기사들 중에서 독자들의 구미를 제일 강하게 자극한 것은 애국주의를 고취하는 내용의 글들이었다. 잡지에는 「조선민족만이 가진 우월성」, 「고구려 국민의 기상과 노력」, 「천혜가 특다한 조선의 지리」등 조선의 역사와 지리, 자연경개와 지방별 특성이며 물산을 자랑하는 글들이 자주 실리었다. 「8도대표의 8도자랑」도 바로 그런 글들 중의 하나였다.

「8도대표의 8도자랑」이란 조선 8도의 대표들이 저마다 나와서 자기 도의 자랑을 하는 것을 엮은 것이었는데 그 골자는 어느 실학사상가가 평하였던 8도 사람들의 기질평가에서 취하고 있다. 거기에서는 평안도 사람들의 기질을 「맹호출림」이라고 규정하였다. 기상은 「수풀에서 나오는 범」같으나 뒤가 조금도 없는 평안도 사람이 나와서 자기고장 자랑을 하는가 하면 「이전투구」, 다시말하여 「진창에서 싸우는 개」처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성미를 가진 함경도의 「조얄개」라는 사람이 조종의 산 백두산이 바로 함경도에 있다는 것으로 운을 슬쩍 떼고는 입에 침이 마르게 자기 도의 자랑을 늘어놓는 등 8도 사람들의 특징을 어찌나도 방불하게 그려냈던지 글을 읽으면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 8도자랑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엮어져 있었다.

해당 부문 일꾼들을 통하여 알아본데 의하면 8도대표의 8도자랑 은 1925년 7월호에 게재된 것이라고 한다. 최근에 그 잡지를 구해다가 새로운 감회를 가지고 다시 읽어보았다. 반세기 이전에도 느낀 바이지만 역시 재미나게 쓴 글이었다.

「개벽」 에 실린 인기기사들 가운데는 외국인이 본 조선의 인상 이라는 글도 있다. 그 글은 독일, 프랑스,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 사람들의 조선에 대한 인상은 「재예는 세계 제일」, 「3대 감탄」, 「예의가 천하제일」, 「조선의 4대미」, 「조선에 대한 7대 신조」, 「자연미 인정미」, 「조선인의 인상」과 같은 식으로 짤막짤막하게 기록하였다. 외국인의 시점에서 본 조선을 조선사람의 시점에서 다시 음미해보는 것은 참으로 흐뭇하고 유쾌한 일이었다.

「개벽」 잡지는 조선인이 본 조선의 자랑을 두고 「순량성은 천하제일」, 「건강상으로 우월점」, 「윤리도덕 무비류」, 「장래세계모범민」, 「잔인포악이 없는 조선인」이라고 지적하였다.

조선의 동학당과 중국의 국민당 이라는 글도 독자대중의 흥미를 끌었다. 필자는 동양천지에서 사회를 혁신할 대의를 품고 분투하는 집단으로는 중국의 국민당과 조선의 동학당만이라고 주장하면서 최제우가 손중산보다 40여년전에 벌써 동학을 창제한데 대하여 긍지를 가지고 자랑하였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개벽」 의 필자들 중에서 글을 그중 많이 쓴 사람은 천도교 중앙의 편집과 주임이며 「개벽」 의 편집인인 이돈화였다고 생각된다. 이돈화의 호는 야뢰였다. 그는 동학의 교리를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철학적으로 해석하는데서 주동적 역할을 한 재능있는 이론가였다. 「인내천 요의」 , 「신인철학」 , 「수운심법강의」, 「천도교 창건사」등의 저서들을 통하여 그가 포교활동에서 이룩한 공적인 천도교 역사에서 응당한 페지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개벽」 의 독자가 된 다음부터 이돈화에 대하여 은근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에게 야뢰선생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한 소개를 해준 사람은 박인진이었다. 그도 야뢰에 대해서는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박인진은 심지어 나에게 이돈화와의 회견까지 권고하였다. 그러나 산에서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고있던 나로서는 서울에 있는 그를 만나본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해방 후 그가 양덕에 살면서 천도교에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짬을 내지 못하여 종시 그를 만나볼 수 없었다. 다만 천도교 청우당위원장인 김달현을 통하여 이따금씩 그의 활동과 관련된 토막소식을 들었을 뿐이었다.

이돈화의 최후에 대해서는 김달현도 잘 모르고 있었다.

해당 부문 일꾼들이 후에 통보해온데 의하면 그는 1950년 가을에 북상하는 인민군대를 따라 자강도 지역까지 후퇴해 갔으며 거기에서 얼마간 지내다가 미국비행기폭격에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돈화와 같은 재사를 잃은 것은 그를 아껴온 「개벽」 의 옛 독자들과 천도교들에게 있어서 애석하고 가슴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돈화는 정치적 견해로 볼 때 소장파 혁신세력에 속하지 않는 보수적인 온건파였던 것 같다. 그러나 민족성의 고수, 민족적인 체면의 유지, 도덕적인 자아완성을 주장한 그의 글들로 보아 그는 조국과 민족을 열렬히 사랑한 깨끗하고 양심적인 지식인, 종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강병선과 함께 「개벽」 에 실린 글들을 읽고 독후감을 자주 나누었으며 동학의 지위와 교리에 대한 문제를 걸고 논쟁도 하군 하였다. 강병선은 「ㅌ.ㄷ」성원들 가운데서 천도교에 제일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공산주의를 열렬히 신봉하면서도 자기가 숭상하던 동학사상과 천도교 조직에 상당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강병선의 고향인 창성과 의주, 벽동, 삭주 지방에는 천도교도들이 많았다. 강제하, 최동오, 공영 등은 모두 그 평북도지방의 천도교 사회에서 주역을 담당한 애국지사들이었다. 강병선은 천도교줄을 타고 1930년대 후반기 평안북도 지방에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을 많이 늘이었다.

천도교 소장파 혁신세력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그도 처음에는 동학당란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나라의 반침략반봉건투쟁에서 천도교가 논 역할을 거의 절대시하면서 민족의 운명개척에서 제기되는 모든 대소사가 천도교를 통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였다. 천도교 문제를 놓고 우리들 사이에 벌어진 주되는 논쟁점은 이것이 기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봉건을 반대하고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 나라의 근대화를 실현하고 사회적 진보를 이룩하기 위한 투쟁에서 동학이 쌓은 공로는 충분히 인정하고 있었다. 동학의 민족성과 애국애민성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동학에 의거해야만 만사를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과 태도에 대해서는 동조하지 않았다.

강병선 자신도 그 후 실천투쟁을 통하여 천도교 만능의 관점을 극복하였다. 1930년대 전반기 장울화와 함께 무송에서 지하활동에 헌신하던 그는 1930년대 후반기 북만에서 우리의 정치공작원으로 활약하다가 경찰에 피검되어 감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었다.

동학도들이 주장한 「인내천」 의 사상은 사람을 하늘에 비기며 존중했다는 측면에서는 비교적 진보적이었다고 볼 수 있으나 그것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사람 자체를 신적 존재로 보는 것으로 하여 이론적 불합리를 면치 못하고 있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나 그것을 계승한 2세, 3세 교조들은 천도교가 유교, 불교, 선교의 3교 종합, 다시말하면 여러 종교를 유기적으로 합일한 최후의 진리이며 따라서 그것은 절대로 천주교와 같은 이단적인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천도교의 이론가들은 그 후 선배들이 주장한 단순한 3교 종합설을 한걸음 전진시켜 민족종교로서 동학이 가지고있는 고유한 특성과 독창성을 자랑하였다.

천도교의 어느 한 혁신파 이론가는 천도교 교리의 독창성을 주장하면서 과거의 모든 종교들의 이러저러한 교리, 예컨대 불교의 적멸설, 선교의 현묘설, 기독교의 천당설, 유교의 천명설과 기타 여러 가지 미신과 우상적 가면을 모두 부인하고 사람이 곧 부처이고 선이고 신이고 하늘이다, 따라서 사람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신인일체」」, 「인내천」 을 설파하였다.

「신인일체」 , 「인내천」 , 곧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이것이 바로 동학의 기본사상이다.

천도교에서는 「한울」즉 우주전체가 「지기」라고 하는 그 어떤 특수한 기운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지만 물질적인 것인 동시에 정신적인 것으로서 자연도 사람도 신도 모두 「지기」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지기」를 세계의 시원이며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동학의 「 지기설」은 모든 물체에 영혼이 있다고 보는 영혼설의 일종으로서 범심론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그 「지기설」에 기초하여 천도교에서는 인간도 살았거나 죽었거나 「한울」처럼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즉 사람은 세상만물 중 가장 으뜸가는 영혼을 지닌 특수체라는 것이다.

영혼설을 인정하게 되면 인간은 자기의 의식과 의사에 따라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지배밑에 그 어떤 숙명적인 삶의 궤도를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영혼설은 불가불 숙명론에 떨어진다. 숙명론으로부터는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지론이 나올 수 없으며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자신에게 있다는 진리도 도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학이 제시한 미래사회의 전망도 사회발전법칙에 부합되는 과학적인 목표로는 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비폭력적인 투쟁으로 온 세상에 덕을 펴나가느라면 모든 인간이 신선처럼 되는 때가 올 것이며 그때가 되면 마침내 지상천국이 이루어지리라고 하였다. 인간의 신선화는 사람마다 일상적으로 주문을 외우면서 반성과 자각을 거듭하여 양심화를 도모하는 것으로 달성될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인내천」 의 사상은 유물론에 기초하지 못하고 유신론에 기초한 사상이었다.

천도교는 그 계급적 제한성과 이론적, 실천적 미숙성으로 하여 반일민족해방투쟁에서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지는 못하였다. 바로 이것이 동학만능을 우리가 지지하지 않는 주되는 논거였다.

우리는 천도교를 이러한 관점으로 대하면서도 좋은 측면을 보다 중시하였으며 천도교가 이념상에서나 실천상에서나 통일전선의 대로에서 우리와 손을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천도교는 지상천국건설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다. 과거의 종교가 이 세상을 괴로운 것으로 보고 건질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해왔다면 천도교는 이 세상을 「개벽」하여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로 이런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천도교는 「후천개벽」 을 교의 중요한 사명의 하나로 간주하고 「 정신개벽」 , 「민족개벽」 , 「사회개벽」 으로 불리우는 3대「개벽」의 실천운동을 전개하였다.

천도교는 순수 신앙으로부터 내세의 행복, 사후천국을 목적으로 하는 기독교와 윤리적 수양과 지식의 섭취를 교화의 기본으로 삼고 현세적 실천도덕을 중시하면서 정교일치를 주장하는 유교와도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사람이 다 부처로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서 자비를 기본종지로 보는 불교와도 구별된다고 동학의 이론가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정적인 불교에 비해 기독교가 보다 동적이라고 한다면 천도교는 기독교보다 훨씬 동적인 종교이며 불교가 이성적 경향이 많고 기독교가 감성적 측면이 많다면 천도교는 이 두 측면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교리에서 하늘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것을 반대하고 사람자체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점과 다른 종교들에서처럼 하늘이나 신의 초자연성과 초인간성을 운운하면서 봉건사회제도나 봉건적 신분제도를 하늘이 정한 질서라고 설교하지 않고 있는 사실을 놓고 천도교가 인간의 존중과 평등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종교로 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보았다.

물론 나는 우리 혁명의 주체적인 노선을 세워나가면서 기성의 이러저러한 이론과 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가운데 민족종교로서의 천도교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긍정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철저히 우리 나라 역사발전의 특수성과 우리 혁명이 처하여있는 환경, 선행운동에 대한 역사적 분석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리고 우리의 민족적인 전통과 계급역량관계를 충분히 타산한 과학적 기초 위에서 주체학설을 세우고 우리 혁명의 진로를 탐색하였으며 그에 부합되는 전략전술을 작성하였다.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어떤 하늘의 도움이나 천명에 따라 혁명한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우리 인민자신의 힘을 믿고 그에 의거하여 싸워야 한다는 이론적 대와 신념을 가지고 투쟁의 길에 나섰다.

천도교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보다 많은 논의를 한 것은 조국광복회가 창립된 이후시기였다. 특히 박인진도정의 우리 밀영방문을 전후로 하여 우리 부대의 지휘관들 속에서는 동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우리는 그때 박인진이 밀영에 다녀간 후 천도교도들과의 통일전선방침을 더욱 확신성있게 밀고나가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천도교는 자기의 종교적 이념으로부터 출발하여 외세를 배격하고 나라의 독립과 국민주권의 확립으로 민생의 안전을 기하는 「보국안민」 을 이루는 동시에 나아가서 세계적인 「포덕천하」, 「광제창생」으로 평화로운 세계, 지상천국을 이룩하기 위한 실천투쟁에 떨쳐나섰다.

동학은 그 주의주장의 애국애민성과 강한 저항정신으로 하여 광범한 천민대중과 몰락양반들의 지지를 받았다. 일체 귀천의 차별을 철폐할 것을 주장한 동학사상의 전파확산은 귀천의 차별을 절대화한 봉건유교사상의 지배적 지위에 대한 커다란 위협이었고 봉건적 특권층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이 때문에 동학의 창시자인 1세 교조 최제우는 1864년 3월 좌도란정(도를 어기고 정치를 문란케 하다)의 죄를 쓰고 대구에서 처형되었으며 이조봉건정부의 혹심한 탄압과 추적 속에서도 비밀리에 동학의 보급과 조직의 확대에 진력하였고 갑오농민전쟁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활약하였던 2세 교조 최시형도 서울에서 사형당하였다.

동학을 창시자의 본의대로 천도교로 명명하였으며 3.1 운동 때에는 그 발기자의 한사람으로 되었던 3세 교조 손병희도 일제교형리들로부터 심한 탄압과 박해를 받았다. 역대 교조들의 생애가 잘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천도교는 시발은 물론, 발전과정도 철저히 애국적이고 애민적이었다.

천도교 사회에서 동학 제1혁명이라고 부르는 갑오농민전쟁은 19세기 후반기 우리 인민의 반침략반봉건투쟁에서 그 규모에 있어서나 격렬성에 있어서 최고봉을 이룬 농민전쟁이었다.

갑오농민전쟁은 천도교 상층에 의하여 계획되거나 그의 지령에 따라 발발된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부패무능한 봉건특권층의 전횡, 야수적인 수탈에 분노한 농민들의 폭동이었고 반정부농민전쟁이었다. 제폭구민 , 척양척왜 , 「보국안민」 의 기치밑에 일어났던 갑오농민전쟁은 동학 상층부와는 무관계하게 전봉준을 위시한 농민폭동 지도자들에 의하여 개시되었다. 폭동 지도자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동학조직을 이용하여 각 지방의 동학포조직과의 연계밑에 고부농민폭동(고부민란)을 전면적인 농민전쟁으로 확대발전시켰다.

갑오농민전쟁은 19세기 아시아 반제민족해방투쟁의 새벽종을 울린 하나의 역사적 사변으로서 중국의 태평천국 농민전쟁, 인도의 시파이폭동과 더불어 아시아 3대항전으로 특기할만한 것이었다.

갑오농민전쟁은 일청 양군의 개입으로 인하여 비록 실패하였으나 각지로 흩어진 농민군은 그 후 반일의병운동의 주력으로 되어 구국항전을 계속하였다.

갑오농민전쟁은 우리 나라 역사발전에 큰 흔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동양과 세계정치정세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동학혁명의 의의를 세계적인 판도에서 고찰한 우리 나라의 한 역사가는 20세기에 이르러 세계를 대동란속에 몰아넣은 모든 세계사적 사변의 시발이 바로 조선땅에서 일어났던 동학혁명에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쓰기를 조선동학당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청일 양군간의 전쟁은 없었을 것이며 청일전쟁에서 만약 청나라가 승리하였더라면 러시아의 만주침입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을 것이며 러시아의 만주침입이 없었더라면 러일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러일전쟁에서의 러시아의 패배가 없었더라면 오홍제국이 발칸반도에로 날개를 펼 수 없었을 것이며 오홍제국의 보스니아와 헤르쩨고비나 병합이 없었더라면 오지리와 쎄르비아 사이의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며 오지리와 쎄르비아 사이의 전쟁이 없었더라면 제1차 세계대전이 없었을 것이며 또 세계대전의 기회가 없었더라면 러시아의 로바노브 황제의 전복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적색 러시아의 출산을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 동학당이여, 너는 간접적으로 세계대전의 도화선으로 되며 노농러시아의 산모이다라고 하였다.

동학사상을 찬미하는 사람들은 동방근대화의 첫걸음을 이렇게 동학으로부터 보아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3.1 운동 때에도 천도교 세력은 큰 역할을 하였다. 3.1 인민봉기의 주력군은 물론 광범한 노농대중과 청년학생, 지식인 계층이었다. 하지만 그 봉기를 발단시켰던 민족대표들 가운데 기독교도, 불교도들과 함께 천도교인이 들어가 있었으며 당초의 발기를 천도교 측에서 하였다는 사실과 300만이나 되는 전국 천도교도들의 과반수가 시위투쟁에 떨쳐나섰던 사실들은 그 반일투쟁에서 천도교측의 역할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천도교의 투철한 저항정신은 우리가 그와의 통일전선을 중시하게 한 주되는 요인의 하나였다.

천도교는 조선의 토착종교로서 그 이념과 주장이 참신하고 저항정신이 강한 것과 함께 교의 예의법식이 단순하며 운영방법이 매우 소박한 평민성을 가지고 있었다.

공화국 내각의 초대체신상이었던 김정주는 동학이 소박한 민족종교라는데 대해서 늘 자랑하였다. 우리가 항일유격대를 조직할 무렵에 입도하여 왕년에 천도교청년당 중앙집행위원으로까지 발탁되었던 그는 자기 교의 교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김정주는 풍채가 좋은 천도교인이었는데 나를 만날 때마다 우스개소리를 잘하였다.

『수상님, 하루종일 집무를 보시느라고 머리도 아프시겠는데 이제는 저의 고담이나 들으시면서 피곤을 푸십시오』.

내 집무실에 나타나서는 이렇게 꼭지를 떼고 한참씩 고담을 늘어놓았다. 그가 한 번은 명절날에 나한테 왔다가 천도교 자랑을 한바탕하였다.

『우리 천도교에서는 구수한 토장국 냄새가 나지요.』

내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토장국 냄새라고 하는가고 물었더니 그는 「청수봉전」한가지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청수봉전」을 할 때 앉음새를 통제하지 않는데 올방자를 틀어도 좋고 두무릎을 곤두세워도 좋고 두정갱이를 모로 눕혀도 좋다고 하는 자유는 다른 교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나는 김달현과도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그는 왜정시대에 천도교 조직에서 활동할 때 체험한 일화들을 자주 회상하였다. 상담회수가 잦아짐에 따라 나와 그 사이에는 수상과 천도교 청우당 당수라는 실무적 개념을 떠난 인간적 유대가 생기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일상생활에서 제기되는 애로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고백하였다.

한 번은 그가 밤 12시가 지나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청사로 찾아와 나와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내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사업하고 있을 때였으니 아마 1946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자정도 넘은 심야에 그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을 보고 나는 어지간히 놀랐다. 혹시 나한테 알리지 않으면 안될 어떤 비상사건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조차 들었다.

그런데 김달현은 뜻밖에도 공식적인 사업문제와는 인연이 먼 기상천외한 청탁으로써 나를 더욱 놀라게 하였다.

『이 늙은 것이 체신머리없다고 나무람 마십시오. 이거 너무 외람된 부탁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산삼이나 녹용 같은 보약을 좀 구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는 집무실에 들어온 다음에도 용건을 선뜻 꺼내지 못하고 쭈밋쭈밋하다가 용기를 가다듬고 불쑥 이런 말을 하였다. 그리고나서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내 얼굴을 면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었다. 이 위원장 노인이 왜 이럴까 하고 유심히 바라보니 귀뿌리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선생이 늘 건강자랑을 하시더니 오늘은 어떻게 되어 보약을 갑자기 찾으십니까?』

나는 그에게 의자를 권하면서 친절하게 물었다.

『사실은 여편네를 휘어잡지 못해서 그럽니다. 얼마전에 젊은 여자를 골라 재취하였는데 여간 천대가 심하지 않습니다. 장군님,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도와줍시다. 부인이 선생을 함부로 업신여기지 못하게 합시다.』

김달현은 그 말을 듣고 희색이 만면해서 나의 집무실을 나갔다.

나는 산삼과 녹용을 구해서 그에게 보내주었다.

한해가 지나서 김달현은 다시 나를 찾아왔다.

『장군님덕으로 70나이에 제 생남을 했습니다. 글쎄 처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 애의 백날잔치에 장군님을 초대하는 바입니다.』

『그것 참 대단한 경사입니다. 세월이 좋으니 그런 경사도 생기지 않습니까. 초청을 쾌히 수락합니다. 부인에게 생남을 축하한다는 저의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김달현은 이번에도 싱글벙글하면서 집무실을 나섰다.

나는 약속대로 백날잔치에 김달현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의 부인이 맛있는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려가지고 들어와서 장군님 덕분에 우리 집안에는 꽃이 폈습니다 하고 절을 하였다. 그 여자는 그 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온밤 싱글벙글하면서 손님대접을 하였다.

전쟁 때 나는 김달현을 자강도 별오에서 만났다. 우리는 국수를 먹으면서 천도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달현은 이날 성미는 천도교만이 가지고 있는 훌륭한 법도라고 하면서 성미가 바로 교를 운영하는 중요한 재정적 원천으로 된다고 하였다.

사실 최린 등 몇몇 인물들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역대 천도교 지도자들은 모두 사리나 공명과는 담을 쌓고 살았으며 생활도 검박하게 하였다. 그들은 늘 재원의 부족으로 고충을 겪었다. 생활비를 받지 않고 교를 운영해나간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천도교에서는 교를 운영하는 교직자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남조선의 천도교도들은 한때 「개벽」사의 인쇄공장 자리에 극장을 꾸리고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교의 재정을 충당했다고 한다. 중앙대교당에 설치한 두 개의 결혼식장도 재정을 보충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되었는데 그 결혼식장에서는 시간당으로 계산하여 사용비를 받았다고 한다. 좀 궁색한 노릇이긴 하지만 재정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천도교인들과의 통일전선을 중시하게 된 보다 주요한 이유는 그 상층의 우유부단이나 기회주의와는 관계없이 절대다수의 교인들이 반일적이며 애국적이라는 측면과 계급구성에서 빈천자들, 가난한 농민들이 기본으로 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원래 천도교는 농민을 기본으로 하는 농민운동으로 시작되었고 그 이념도 농민적인 것이었다. 자본주의적인 발달이 미미한 단계에 있었고 현대적 노동계급의 부대가 전혀 없었던 당시의 우리 나라 실정에서 동학운동이 농민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되게 된 것은 당연하고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러나 동학운동은 농민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시빈민들과 소상인들을 포함한 모든 빈천자들의 지향과 이해관계를 대변한 광폭적인 대중운동이었으며 외래침략자들을 철저히 반대배격하고 나라의 근대화를 강렬하게 지향한 거족적인 반침략애국운동이었다.

3.1 운동에서 실패한 후 천도교 상층은 투쟁정신을 상실하고 민족성을 고수하기 위한 미미한 포교활동과 이론활동을 벌리는데 머물렀으며 그 일부 상층들, 예컨대 최린 같은 사람은 3년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온 다음부터 친일파로 전락되었다.

그러나 상층의 변절에도 불구하고 하층은 일제강점하의 엄혹한 조건에서도 천도교의 애국적 전통을 이어나가기에 모든 힘을 다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천도교와의 통일전선을 중시하고 그 실현의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게 된 기초였다.

천도교의 운동을 나라의 다른 혁명역량과 연결시키며 국제혁명과의 제휴를 모색하여 동분서주하던 이 운동의 혁신적 지도자들은 천도교를 「빈천민중의 충복 」, 「이규모 동질성의 공산당」이라고 표현하면서 국제당과의 연계를 희망하였다.

1925년 10월말에 조선농민사 이사회의 명의로 이돈화가 적색농민인터나쇼날에 가맹청원을 낸 사실은 그에 대한 하나의 예증으로 된다고 생각한다.

조선농민사라는 것은 1925년 10월 서울에서 창립된 천도교 청년당 산하의 농민조직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말과 러시아에서의 노농정권의 수립 그리고 3.1 인민봉기에 뒤따르는 내외정세의 발전속에서 1919년 9월 천도교 교리의 연구, 선전과 조선신문화의 향상발전을 목적으로 천도교 청년들인 이돈화, 정도준, 박내홍 등은 천도교 청년교리강연부를 창립하여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운동적 색채를 띤 청년단체를 발족시켰다. 이 단체는 얼마 후 천도교 청년회로 개칭되었다. 청년회는 자기산하에 언론기관으로 「개벽」사를 설립하여 1920년부터 정치시사잡지 「개벽」 을 발간하기 시작하였으며 소년부를 조직하고 조선어린이들의 정서를 높이고 윤리적 대우와 사회적 지위를 「인내천」 주의에 맞게 향상시키기 위한 사업을 활발히 벌리었다.

이 천도교 청년회는 1923년 천도교 청년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후천개벽」 하여 지상천국을 건설함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하는 천도교의 전위조직으로 되었다.

이 당은 중앙에 본부를 두고 부와 군에 지방부, 면과 동에 접이라는 말단조직을 꾸리는 등 정연한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그리고 당세확장 3개년계획을 내걸고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벌리어 짧은 기간에 많은 빈천자 청년들로 대열을 확대하였다. 천도교 청년당은 특히 동학당란의 피해를 받지 않은 예성강 이북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교파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935년도에 간행된 천도교 청년당사에 의하면 그 당시 당지방부는 국내외를 합하여 100여개소나 있었다고 한다. 그중 북선지역이 70프로라는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평안도가 40개소로서 제일 많았다. 사실상 그때 지금의 자강도와 평양시, 남포시까지를 포괄하는 어제날의 평안도 지역에는 그 어느 군이나 할 것 없이 천도교 청년당지방부가 없는 곳이 거의 없었다.

천도교 세력의 압도적 다수가 북선지방에 분포되어 있었던 당시의 상황은 우리가 천도교와의 통일전선을 중시하게 된 또 하나의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천도교 혁신세력도 3.1운동이후 세계대세를 타고 교파세력을 확장하며 반일애국투쟁을 보다 적극적으로 벌리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다.

천도교 3세 교조 손병희가 서거한 다음 1922년 7월 천도교의 소장파 혁신세력은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천도교역량의 재수습, 재편성에 노력하면서 연해주와 만주를 중심으로 한 해외와 국내에서의 활동을 적극화해나갔다. 고려혁명위원회는 그 후 비밀지하혁명조직인 천도교 비상혁명최고위원회로 재조직되었다.

천도교 비상혁명최고위원회의 활동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쏘베트러시아정부와 국제당을 상대로 천도교 혁명활동에 대한 정치적 지지와 함께 비교적 규모가 큰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이다. 그들은 씨비리의 치따부근에 있는 3개의 금광구역을 이용하여 역부를 채용하는 형식으로 2년안에 1,000명 정도의 군사를 키우며 나아가서는 15개 혼성여단의 고려국민혁명군을 창설하려고 계획하였다고 한다.

천도교의 비밀조직은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노농쏘베트정부가 적극적인 지원을 줄 것을 호소하였다.

천도교 혁신세력이 1924년초 원동의 울라지보스또끄에서 쏘베트러시아와 국제당 인물들을 상대로 벌린 외교활동의 일단을 보여주는 고문서들이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다.

그때 최동희는 가다야마 센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제당이 조선혁명, 조선에서의 사태발전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묻고 조선혁명을 편견없이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천도교는 조선에서의 혁명발발시에 동으로는 일본의 사회혁명세력, 북으로는 소베트러시아 및 국제공산당의 깊고 밀접한 연계를 취하여 조선, 일본, 러시아가 삼각형으로 연쇄적 활동을 취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천도교 혁신세력은 수구파의 저해와 증오를 받으면서도 국제혁명과의 제휴 속에 무력항쟁을 벌여보려고 여러모로 애를 썼다.

천도교 혁신세력은 동학운동으로부터 시작된 그 애국애민의 열정과 울분을 그대로 반일투쟁에 바쳐보려고 어지간히 모대기었으나 실은 이렇다할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게다가 3.1 운동 실패 후 천도교 내부에서 급진파와 온건파간의 심한 대립과 분열이 있었고 또 일제가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조건에서 급진파가 분열을 방지한다는 명분밑에 타협한 것으로 해서 천도교 혁신세력은 거세되고 반일운동은 모종의 개량운동으로 점차 퇴화한 것 같다. 상층이 민족개량주의에로 굴러떨어지고 노골적인 친일에로 기울어지는 조건에서 천도교는 혁명성과 시운을 점차 잃게 되었다.

그러나 천도교의 지방조직과 그에 속해있는 절대다수의 교도들과 청년당원들은 이러저러한 합법, 비합법 조직들을 뭇고 일제식민지통치를 반대하는 여러 갈래의 투쟁을 벌렸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에게 똑똑한 투쟁방략이 없었고 그들의 투쟁을 통일적으로 이끌어줄만한 지도역량이 없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우리가 백두산으로 나왔고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을 발표하였다.

수백만 천도교도들은 우리의 10대 강령을 열렬히 지지하였다. 그들은 오매불망 바라던 새날의 계명성이 바로 백두산에서부터 울려온다는 확신을 가지고 조국광복회의 기치밑에 굳게 단합하였다. 이렇듯 천도교가 우리와의 통일전선에 응해나서고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에 광범히 망라되게 된 것은 천도교에 대한 공명정대한 평가와 폭넓은 이해에 기초한 우리자체의 주동적이며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인 동시에 애국애족, 반외세를 이념으로 삼는 천도교조직 자체발전의 역사적 필연이며 합법칙적인 귀결이었다.

이념과 종지, 주의주장에서 물론 일정한 차이가 있고 운동의 출발에서도 서로 다른 점이 없지 않았지만 우리는 한민족, 한핏줄이라는 대의에서 서로 손을 억세게 틀어잡았다. 나는 그때 민족을 떠난 공산주의운동이란 있을 수 없으며 계급적 이익과 함께 언제나 민족적 이익을 중시하여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었다.

바로 이러한 공통성으로 하여 우리는 지난날 반공일선에 서있었던 최덕신과도 손쉽게 화해할 수 있었다.

나와 최덕신은 70살이 지나서 서로 만났지만 지난날의 숙적이라는 관념은 조금도 없이 최동오 선생 슬하에서 애국의 넋을 키우던 그런 심정으로 해후도 감격적으로 하였고 공산주의와 천도교라는 이념차이를 훨씬 초월하여 한민족, 한혈육으로서 대화도 친밀하고 따뜻하게 나누었다.

얼마전에 나는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을 공포하였다. 우리가 백두산 지구에 나와서 박인진과의 제휴를 성사시키던 1930년대에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조국광복이 지상의 대과제였다면 20세기가 다 저물어가는 오늘은 분단조국을 통일조국으로 만드는 것이 절대의 종지로, 이상으로 되고 있다. 외세를 박멸하고 민족의 자주권을 되찾으려는 우리의 투쟁이 일찍이 「보국안민」 , 「척양척왜」의 구호를 들었던 동학도 천도교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있는 것은 너무나도 응당한 것이다.

분단으로 하여 우리 민족은 벌써 반세기 가까이 갖은 수난을 다 겪고 있다. 이것이 민족자체의 잘못에 의한 자율의 비극이 아니고 외세의 강요로 인한 타율적인 수난이라고 할 때 우리가 어찌 외세를 반대하고 민족통일과 민족자강, 민족대단결을 부르짖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기에 지금 조선의 북과 남, 해외에 있는 애국적인 천도교도, 기독교도, 불교도들이 하나같이 외세에 의한 분단의 비극을 끝장내고 통일조국의 새날을 앞당겨나가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우리가 20여성상 만주광야와 백두대지에서 무장항일을 해온 것도 결국은 일신의 안일이나 영달, 어느 한 계급이나 계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민족을 일제의 식민지통치에서 해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족위에 신이 없고 민족위에 어떤 계급이나 당파적 이익이 있을 수 없으며 민족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심연도 장벽도 뛰어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은 오늘 북과 남, 해외의 모든 조선사람들의 한결같은 종지이며 날과 더불어 더욱더 절감하는 현실이다.

나는 지금도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을 위해 한생을 바쳐 싸운 그 목적과 이상이 실현되고 7천만 겨레가 통일된 조국강토에서 세세년년 복락한다면 그것이 바로 동학열사들이 바라던 그런 세상, 그런 지상천국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한다.

민족의 얼이 맥맥히 살아 숨쉬는 동학이념, 천도교의 이념을 가지고있다는 것은 민족의 자랑이다. 애국과 애족, 애민에 바쳐진 천도교 선열들의 애국충정은 민족사에 길이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