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의 지지를 떠난 군대가 결코 강군으로 될 수 없으며 싸움에서 승자로 될 수 없다는 것은 항일혁명의 전 기간 우리가 뼈에 사무치게 체험한 진리이다. 우리는 항일무장투쟁의 나날에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유격대가 인민을 떠나서 살 수 없다. 』는 것을 시종일관하게 주장해 왔다. 그것을 한마디로 압축한 구호가 바로 「옹군애민」이었다. 「옹군애민」이란 인민은 군대를 옹호하고 군대는 인민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백두산에서 싸울 때 인민들의 지지성원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헌신적이었던가 하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다.

동서고금의 유격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그 옹군열의와 원군기풍은 어디서부터 생겨난 것인가? 무엇이 우리 인민들로 하여금 옹군의 주체가 되고 원군의 담당자가 되어 시종일관 인민혁명군을 결사적으로 지지성원하게 하였는가?

그 비결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군대의 인민적 성격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인민의 아들딸들로 조직된 군대, 인민의 자유해방을 위해 싸우는 군대,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는 군대이니 그런 군대를 인민이 따르고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성과 사명이 인민적이라고 하여 인민이 모든 군대를 다 결사적으로 옹호하고 후원하는 것은 아니다. 간판에 「인민」자가 있어도 행실이 좋지 않고 군풍이 문란하면 인민은 그런 군대를 곱게 보지 않는다. 인민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대하며 인민의 이익을 진정으로 옹호보위하고 인민의 생명재산을 진정으로 지켜주는 군대만이 인민들로부터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인민혁명군은 이 모든 자질을 다 갖추고 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군풍에서 핵을 이룬 것은 철저한 애민성이었다. 인민혁명군의 매개 지휘관들과 대원들은 자기들의 존재가치를 인민에게서 찾았다. 그들은 인민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기들도 존재하고 인민이 행복해야 자기들도 행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민의 기쁨이 곧 자기들의 기쁨으로 되고 인민의 슬픔이 곧 자기들의 슬픔으로 되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인민을 떠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존재자체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이었다. 인민을 떠나서는 우리 유격대가 그 존재를 유지해나갈수도 없었다.

우리는 유격전쟁을 개시한 첫날부터 인민의 품을 우리 삶의 보금자리로 여겨왔고 인민의 지지성원을 우리 삶의 젖줄기로 여겨왔다.

워낙 우리 유격대의 모체자체가 인민이다. 우리들의 부모도 다름 아닌 인민이었으며 우리 혁명의 보호자도 다름 아닌 인민이었다.

그러므로 군민일치는 우리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사활적인 문제로 되어있었다.

군대가 인민을 사랑하며 또 인민의 지지를 받는 것은 싸워서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승패문제이기 전에 살아남느냐 아니면 없어지느냐 하는 존망문제였다. 우리가 만일 이 점을 중시하지 않았더라면 적들이 곧잘 묘사하던 「창해일속」과 같이 미미한 존재가 되어 이리저리 밀리다가 지리멸렬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유격전쟁을 하는 과정에 군민관계나 관병관계, 부대의 일상생활에서 혁명군대의 규범과 행동준칙으로 될 수 있는 사상을 새롭게 성문화해야 할 필요를 느끼었다. 그래서 작성공포한 것이 바로 조선인민혁명군 잠행조례였다.

조례작성의 기본목적은 우리 혁명군의 인민적 성격을 강화하고 애민성을 법화하며 그것을 튼튼히 유지하려는데 있었다.

인민혁명군은 물론 정규군은 아니었으나 그에 못지 않은 무력과 정연한 군사편제를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대원들을 지휘관들의 명령, 지시나 관습의 힘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는 없었다.

1930년대 중기는 적들이 서간도에서 집단부락건설을 다그치고 인민혁명군의 영향력을 막기 위한 「비민분리」에 총력을 기울이던 때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유격대와 인민사이에 쐐기를 박고 유격대의 생명선으로 되고 있는 원군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인민혁명군의 영상에 먹칠을 할 수 있는 일, 혁명군을 군사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지 다하였다.

우리 군대가 비적의 행실을 할 수 없는 진정한 인민의 군대이고 자기네 군대하고는 대비조차 할 수 없는 도덕적인 군대라는 것에 대해서는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 혁명군을 가리켜 「비적」이라고 헐뜯는 거기에 바로 적들의 간교성이 있었고 우리 군대의 정치도덕적 권위를 허물어버리려는 그들의 본심이 있었다.

우리가 군민일치를 생명선으로 여기고 있었다면 적들은 「비민분리」를 집요하게 꾀하였다.

일제는 마적단이 저지른 죄행까지도 우리한테 넘겨 씌우면서 우리 인민혁명군의 인민적 성격을 깎아 내리려고 하였다. 적들의 악선전으로 인해 전도된 혁명군의 영상을 원상대로 회복하고 그것을 최상의 높이에로 끌어올리자면 우리 군대의 고유한 인민성을 보다 더 발양시킬 필요가 있었다. 인민성을 고도로 발양시키자면 그에 대한 우리의 요구를 성문화하여 고착시켜야 하였다.

지난날 만주 각지에 할거하던 독립군 단체들은 군민관계에서 좋은 인상도 주었지만 좋지 못한 인상도 또한 적지 않게 남기었다. 인민들이 의병이나 독립군에 대하여 더러 좋지 못한 인상을 가지게 된 기본원인은 그들이 군민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리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인민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지나치게 많이 끼친데 있었다. 어떤 독립군 지휘관들은 정의부의 어느 중대장처럼 인민들한테서 군자금이나 독립운동 기부금이라는 명목으로 막대한 금품을 모아가지고 개인의 향락을 위해 서슴없이 사취하였다.

일제는 이런 유의 비행까지도 우리 인민혁명군을 비방하고 모독하는데 이용하였다. 독립깃발을 들고 돌아다니는 자들은 다 인민들의 재물을 약탈하여 사취하는 강도무리라고 독립군과 인민혁명군을 한 광주리에 담아서 비난하였다. 적들이 억지로 뒤집어씌운 그런 때를 벗기 위해서도 우리는 우리 군대의 인민적 성격을 더욱더 뚜렷이 밝혀야 하였다.

우리가 잠행조례를 내오게 된 다른 하나의 목적은 군대 안에 신입대원이 급격히 늘어난 사정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인민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전투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적들은 이것을 알고 전투에서 수세에 빠지게 되면 부락에 들어가 주민가옥의 담벽이나 울타리에 의지해서 저항하곤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불리한 조건에서도 부락이나 주민가옥에 의지하여 싸울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았다.

1934년 초여름에 우리 군대가 라자구 전투에 앞서 삼도하자 마을에 들어갔을 때에도 그렇게 했다. 적들은 라자구로 진출하는 우리 부대의 행동을 저지시키기 위해 수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해왔다. 그때에도 나는 적들을 우정 삼도하자 밖에 있는 벌판에 끌어내서 치게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을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그러는 바람에 적의 유생역량 가운데서 절반가량은 놓치고 말았다. 우리는 그와 비슷한 경우를 한두번만 겪은 것이 아니었다.

인민혁명군은 주민부락에 잠깐 들렀다 가는 경우에도 인민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군대라는 것을 등대고 절대로 재세를 하지 않았다. 배낭을 벗어놓기 바쁘게 물도 긷고 불도 때고 마당도 쓸고 장작도 패주었다. 그런 일에서는 사령관도 예외로 되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지휘관들 자신이 대원들의 거울이 되어 실천적 모범으로 그들을 가르치도록 교양하였다.

이처럼 인민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것을 유격대 초창기부터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의 첫째가는 본분으로, 계율로 삼아왔다.

그런데 우리가 백두산 지구로 나온 첫 시기에는 일부 신입대원들 속에서 군민관계를 손상시키는 불미스러운 일들이 종종 생기군는 하였다.

우리 부대의 신입대원들 가운데는 농촌청년들도 있었고 지난날의 반일부대 출신들도 있었으며 위만군에서 넘어온 반변사병들도 있었다. 초보적인 훈련단계도 미처 거치지 못한 그 각이한 출신의 신입대원들 속에서는 혁명군의 전통적인 규율과는 상치되는 행위들이 이따금씩 나타나 부대의 위신을 떨구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 부대가 19도구 육철포동에 사는 이노인네 집에 잠깐 머물러있을 때였다. 이노인은 그때 자기 집 가을걷이를 도우러 왔다는 조카벌되는 애된 청년을 우리에게 인사시키었다. 신발과 각반까지 새것으로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을걷이 차비를 착실히 해가지고 온 것이 분명하였다. 그 청년과의 담화가 아주 흥미진진하였다. 무슨 대상이든지 입만 벌리면 한두마디로 특징을 꼬집어서 방불하게 그려내고는 하였는데 말재주가 대단하였다.

청년이 밖에 잠깐 나갔다가 들어온 것을 보니 새 각반과 신발이 헌 것으로 바뀌어졌는데 기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고 물었으나 청년은 우물쭈물하면서 대답을 피하였다.

나는 김정필 소대장에게 각반과 신발이 바뀐 사연을 구체적으로 조사해보라고 지시하였다. 김정필은 사연을 알아보고 돌아와서 한 위만군 반변사병이 청년을 강박하여 각반과 신발을 바꾸었다는 것과 그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비행을 저지르고 나서도 소대장의 비판을 대수롭지 않게 대하더라는 것을 격분에 차서 보고하였다.

『그가 변명하는 말이 군대가 산에서 백성들을 위해 고생하는데 백성들이 군대를 섬기는거야 응당하지 않는가, 위만군에서는 이런 일이 여반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소대장의 보고는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지난날 남의 나라를 강점한 침략군 우두머리들이 점령지역에서 살인, 강도, 강간, 약탈과 같은 범죄행위들을 합법화하고 자기 부하들에게 그것을 허용한 실례는 수두룩하다. 일본군은 중일전쟁 시기와 태평양전쟁 시기 전쟁판에 종군위안부들까지 데리고 다니었다. 군민관계를 너절하게 가지는 데서는 위만군도 일본군에 짝지지 않았다.

살인, 방화, 약탈을 전업으로 삼는 군대에서 비행에 인이 박힐대로 박힌 병사고 보면 각반이나 신발 같은 물건따위를 바꿈질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인민혁명군에서는 그런 것이 결코 그냥 스치고 지나쳐버릴 수 있는 실수로 될 수 없었다. 애민을 철칙으로 삼고 있는 우리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엄중한 위법행위였다.

나는 이노인에게 혁명군을 대표하여 사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님, 우리가 교양을 잘하지 못해서 그런 일이 생겼으니 노엽더라도 불민한 친자식의 실수로 여기고 용서해주십시오.』

이노인은 펄쩍 뛰면서 내 말을 막았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 오히려 내가 더 송구스럽쉐다. 노상 산에서 싸우는 군대가 신발을 바꿔신으면 바꿔신는 것이지 용서는 무슨 용서입니까.』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우리와 노인 사이에는 더 깊은 친교가 맺어졌다. 우리는 19도구에 갈 때마다 꼭꼭 육철포동에 들려 이노인을 만나서 문안인사를 하곤 하였다.

우리 대원들이 그 마을에 가서 후방물자공작을 많이 하였다. 한번은 그곳에서 닭까지 구해가지고 왔다. 나는 그 닭으로 병약한 위증민에게 닭곰을 해주게 하였다. 그때 그는 병이 도져서 우리 부대에 와있었다. 그런데 닭을 구해가지고 온 대원은 임자가 돈을 받지 않아서 값을 치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누구네 닭인가를 알아보았더니 또 그 이노인 이었다. 후방공작경험이 많은 대원이었는데 처사를 썩 잘하지 못하였다.

나는 후방부대에 있는 그 대원의 소대장을 데리고 이노인을 찾아갔다.

마당질을 하고 있는 노인의  일손을 돕다가 소대장을 시켜 『닭값을 제대로 치르지 못해 미안합니다.』하면서 돈 10원을 내놓게 하였다. 그 당시 닭 한 마리의 시장가격이 1원 50전쯤 되었다. 두 마리의 값이 3원이었지만 노인의 살림에 보탬을 주고 싶어 값을 후히 치르게 하였더니 이것이 도리어 이노인의 노여움을 샀다.

『내가 이 돈을 받으면 조선사람이 아닙니다. 족제비도 낯짝이 있다는데 이 늙은 것 한테두 체면이 있지 않습니까.』

『노인님, 받아두십시오. 씨암탉인줄 알았더라면 되돌려 드렸겠는데 그만 알지 못하고 써버렸습니다. 봄날에 병아리를 깨울 종자닭을 썼으니 우리가 밑천을 다 거덜낸 셈이 아닙니까.』

우리는 끝내 그의 손에 돈을 쥐어주었다.

노인은 소매끝으로 눈굽을 훔치며 이태전에 당했다는 강탈사건에 대하여 말하였다.

어느날 그는 사냥을 나갔다가 사슴 한마리를 잡았다. 그 사슴을 어떤 부자한테 팔았는데 군대들이 소문을 듣고 우르르 쓸어와서 무작정 총대를 내대며 돈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당장 쏴 죽이겠다는 바람에 사슴값을 다 털리우고 말았다. 그후부터는 군대라는 말만 들어도 아예 도리질을 하였는데 우리 동무들이 백성을 중히 여기는 것을 보고 이런 군대라면야 무엇인들 아낄 게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마침 우리 동무들이 검정닭을 수소문한다는 말이 돌아가서 이런 때 약소하지만 성의를 보여주자고 생각하고 종자닭을 주었다면서 일껏 성의를 표시하느라고 한 것인데 도리어 닭값의 세배도 넘는 돈을 받고 보니 백성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는 자책감이 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늙은이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우리가 노인의 성의를 너무나 몰라주지 않느냐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하지만 인민의 성의를 어김없이 보상하는 혁명군의 전통적인 규범을 어기고 노인의 지성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일부 신입대원들은 혁명군에 대한 인민들의 사심없는 지지성원을 응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처지와 생활형편에 대한 심중한 고려가 없이 원군물자들을 경솔하게 처분하였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1936년 가을에 있은 약수동 소 사건이었다.

우리 부대는 그 당시 장백현 19도구 지양개치기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모두 식량부족으로 심한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약수동쪽에 시래기를 주으러 나갔던 신입대원 두 동무가 황소 한 마리를 끌고 희색이 만면해서 돌아왔다. 사연을 알아본 즉 그 소는 유격대원들이 시래기국으로 끼니를 에우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약수동 농민들이 보내준 것이었다.

처음에 두 대원은 소를 받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농민들이 자기들의 정성이니 제발 받아 달라며 억지로 소고삐를 쥐어주는 바람에 하는 수없이 끌고 왔다고 하였다.

한쪽에서는 벌써 더운물이 설설 끓고 있었다. 여러 날 낟알 구경을 못한 터여서 신입대원들은 물론, 구대원들과 지휘성원들까지도 오래간만에 소고기국을 푸짐히 먹어보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나 역시 대원들이 시래기국을 한 공기씩 마시고 저녁을 굼때게 될 것을 생각하면 어서 소를 잡으라고 이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하늘을 향해 슬프게 영각하는 둥글황소의 치장품들을 살펴보며 결심을 달리하였다. 알뜰하게 만든 코뚜레며 붉은 천을 모양있게 감은 소굴레며 누런 퉁방울과 엽전들, 그 모든 것에는 소임자의 극진한 정성이 슴배어 있었다. 나는 소를 잡아 한각씩 떠서 당장 가마에 넣을 기세로 신나게 돌아가는 대원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다음 조용히 말하였다.

『소를 임자에게 돌려보냅시다.』

소를 끌어온 대원들은 아연하여 나를 쳐다보았다. 다른 신입대원들도 미소를 지우고 낙심천만한 표정이 되었다. 며칠째 시장기와 싸워온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너무도 뜻밖의 명령이었을 것이다. 나는 한숨을 짓고 있는 신입대원들에게 타일렀다.

우리가 소를 왜 임자에게 돌려주자고 하는가, 그것은 이 소가 농민의 귀중한 재산이기 때문이다, 소임자가 자기 소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가를 보라! 이 퉁방울은 아마도 그 집에서 몇대를 두고 소중히 간직해 내려오던 것이 틀림없다, 엽전은 모름지기 그 집 할머니가 시집 올 때 속주머니끈에 달아가지고 와서 평생 아끼던 것일 수도 있다, 우리 어머니들은 그렇게 하는 것으로 소에 대한 애착을 표시하는 것이다, 소를 돌려주어야 할 다른 하나의 이유는 약수동 농민들의 농사문제도 이 소에 많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인민들의 지성이라고 하여 소를 잡아먹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소임자와 소의 신세를 지곤 하던 이웃농민들이 당장 내일부터는 소가 하여야 할 일을 대신하여야 할 것이다, 소가 날라야 할 짐을 등짐으로 져나르고 소가 갈던 밭을 괭이나 호미로 쪼아 뚜지느라고 얼마나 고생하게 되겠는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이 소를 잡아먹고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동무들도 거의 모두 가난한 농민들의 자식이니 땀흘리며 고생하시는 부모님들을 생각해보라고 하였다.

내 말에 가책을 받았는지 소를 끌고 온 대원들은 눈물이 글썽해서 자기들이 잘못하였다고 하면서 처벌해 달라고 제기하였다. 우리는 처벌대신 그들을 약수동에 다시 보내어 소를 돌려주게 하였다.

나는 그 당시 신입대원들을 받으면 얼마간 숙식을 같이하였다. 그들과 같이 지내면서 일정하게 단련을 시킨 다음에야 중대나 연대로 내려 보내고는 하였다. 수십명씩 받아들일 때에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지만 서너명 정도의 적은 인원을 받아들일 때에는 다문 며칠동안이라도 같이 데리고 다녔다. 그렇게 하면 신대원들의 집안형편과 준비정도, 성격, 취미들을 요해할 수 있었고 적합한 교양대책도 세울 수 있었다.

1936년 10월경에 10여명의 목재소 노동자들이 단꺼번에 우리 부대에 들어온 적이 있다. 나는 그 신입대원들 가운데서 나이가 어린 3명의 대원들을 첫날부터 데리고 있었다.

하루는 그들이 보초를 서고 돌아오는 길에 한 농민의 밭에서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강냉이를 오사리채 한배낭씩 따가지고 왔다. 부대의 식량사정이 어려워 나까지도 맹물로 끼니를 에우기에 강냉이라도 따다가 푸짐히 대접하고 싶었노라고 하였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인민의 재산에 손을 대는 위법행위를 하고서도 오히려 사령관을 위해서 부하의 도리를 지킨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점이었다.

나는 사령관을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이 이해되었으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동무들의 성의는 고맙소. 그러나 동무들은 오늘 인민의 이익을 엄중하게 침해하였소.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강냉이를 세 배낭씩이나 따왔으니 이런 무법천지가 어디 있소!』

『우리야 조선독립을 위해 고생하는 군대인데 강냉이 세 배낭이 무어겠습니까. 그전에 우리 마을에선 독립군들을 위해 금붙이까지 다 바쳤습니다. 강냉이 몇 이삭 때문에 의견을 가지는 농민이 있다면 그건 친일파나 다름없습니다.』

여무지게 생긴 꼬마대원이 일동을 대표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겨끔내기로 제 생각을 한마디씩 내비치는데 그 태도가 조금도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이 아니었다.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우는 재세를 하면서 인민의 이익을 침해하는 그들의 그릇된 관점을 바로 세워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떤 변고나 폐단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한시간 이상이나 품을 들여 그들을 설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설복이 끝난 다음에는 세 신입대원에게 명령하여 따온 강냉이를 전부 농민의 밭머리에 고스란히 가져다 놓게 하였다. 중대장 한사람이 현장까지 그들을 따라갔다.

일행은 몇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생긴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다가 전령병을 앞세우고 강냉이밭으로 찾아갔더니 세 대원이 강냉이 이삭들을 밭머리에 놓고 앉아있었다.

나는 중대장에게 왜 이러고 있는 가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주인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벌겋게 짓물려있었다. 그때 나는 팔도구에서 소학교를 다니던 시기에 읽은 「삼자경」의 첫 구절 「인지초 성본선」이 생각났다. 사람의 본성은 원래 선하다는 뜻이다. 그 구절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본바탕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숙영지로 돌아오면서 세 대원들에게 다시금 강조하였다. 오늘의 일을 교훈으로 삼고 앞으로 인민을 더욱 사랑하라, 우리가 인민을 허술히 대하면 인민이 우리를 외면한다, 인민의 버림을 받는 것 보다 더 무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혁명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비극은 인민의 사랑을 잃는 것이다, 우리가 인민의 사랑과 지지를 잃어버리게 되면 도대체 어디에 의지해서 싸우겠는가.

그들은 그날밤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말 한마디하지 않았다. 나는 제일 어린 대원의 손을 잡아쥐고 왜 그렇게 말이 없는가, 혹시 오늘 일이 가슴에서 내려가지 않아서 그러는가고 물었다.

『그런게 아닙니다. 정말 우리 군대가 좋은 군대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럽니다. 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울면서 기어이 인민의 사랑을 받는 훌륭한 유격대원이 되겠노라고 맹세를 다지었다.

혁명군의 체모에 손상을 주는 편향은 비단 군민관계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연대장급 이상의 지휘관들 속에서는 병력이 많아지게 되자 지도를 아래에 접근시키지 않고 일반적인 지시나 떨구면서 병사대중과 잘 어울려 지내지 않는 경향들이 나타났다. 심지어 어떤 지휘관들은 이제는 식솔도 수백명으로 늘어났는데 상하가 직급에 따라 복장도 다르게 하고 침식도 따로 해야지 자칫하다가는 극단적 군사민주주의가 조장되어 대오를 통솔할 수 없게 될 것 같다는 말까지 하였다.

새로 제발된 일부 초급지휘관들 속에서는 큰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우쭐렁거리는 경향이 종종 나타났다.

1936년 가을 장백지방에서 활동하던 우리 부대가 14도구 부근을 출발하여 밀영 방향으로 야간행군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출발에 앞서 나는 척후대를 임명하고 행군할 때 참고해야 할 문제들을 알려주었다. 특히 담배를 피우지 말데 대하여 강조하였다. 야간행군중에 담배를 피우는 것은 적들에게 스스로 자기를 노출시키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행군대오가 어떤 산굽이를 돌아가고 있을 때 대열 앞코숭이를 차지한 중대쪽에서 갑자기 담배연기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2중대가 굽인들이를 돌면서 대열후위에 있는 사령부가 보이지 않는 순간에 누군가 날쌔게 담배대를 꼬나문 것이 틀림없었다.

다음날 아침 중대장들을 불러 조사해보니 놀랍게도 대원들이 아니라 중대장들인 이두수와 김택환이 자기들이 간밤에 금연지시를 위반한 장본인들이라고 솔직히 자백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을 시작하면 담배부터 말아 무는 것이 그 두 중대장의 습성이었다.

나는 그들을 엄하게 타일렀다.

『나는 오늘 여기서 동무들에게 금연의 필요성을 두고 장황하게 연설하지 않겠다. 만일 적들이 간밤에 동무들이 피운 담배불빛을 보았거나 담배연기냄새를 맡고 우리에게 불의의 타격을 들이댔더라면 부대는 어쩔뻔 했는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항일전쟁은 의지와 규율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항일전쟁은 자기 조국을 해방하려는 혁명적 의지와 남의 나라에 대한 강점을 합법화하고 그것을 영원한 것으로 공고화하려는 침략적 야망과의 심각한 대결이다. 우리가 지금 이 대결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의지와 규율이 적들의 의지와 규율보다 강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정치도덕적으로 적들보다 비할 바 없이 우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대열내에 동무들과 같은 의지박약자들이 자꾸 나타나면 어떤 후과가 빚어지겠는가? 규율이 해이되고 의지가 약한 군사집단은 적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패하기 마련이다.

동무들은 자신들을 특별한 애연가라고 자처하고 있지만 그런 정도의 담배애호가들은 평대원들 속에도 얼마든지 있다. 동무들이 담배를 피울 때에는 그들도 담배를 피우고 싶어한다. 그런데 평대원들 중에는 어제 밤에 행군을 하면서 담배를 피운 사람이 한명도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여 주는가? 동무들이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율을 엄수하는 데서는 특수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동무들은 특수로 행세하였다. 이런 행실을 용납한다면 그것은 지휘관들의 특권을 허용하는 것으로 될 것이다. 우리는 특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인정하면 하급이 상급을 믿지 않게 된다. 손해를 보는 것은 관병일치, 옹간애병이다. 동무들의 잘못이 엄중한가 엄중하지 않은가?』

이두수와 김택환은 엄중하기 때문에 어떤 처벌이든지 다 받겠다고 하였다.

『물론 동무들을 처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방법이다. 나는 동무들이 같은 결함을 두번다시 반복하지 말 것을 진심으로 경고한다. 이 경고를 처벌로 생각하라.』

나는 그날 이두수에게 「금연단」단장 의 임무를 주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연대정치위원 김평의 전령병이 또다시 극단적이고도 무규율적인 상하평등을 주장해 나섬으로써 대오내의 공기를 흐리게 하였다. 허범준이라는 그 전령병은 나이도 좀 들고 무장투쟁에도 비교적 일찍이 참가한 구대원이었다. 원래는 나의 전령병이었었는데 동작이 너무 굼떠 사령부의 전령병으로는 적합치 못하다고 하면서 김평이 자기 연대로 데려갔다. 김평은 허범준의 후임으로 자기의 전령병인 이권행을 사령부에 보내주었다.

허범준은 김평의 산하로 간 다음부터 이따금씩 지휘관들에게 대답질을 하면서 말썽을 일으켰다. 연대지휘관들이 연락을 보내면 고분고분하지 못하고 불손하게 구는 때도 있다고 하였다. 지휘관들은 참다 못하여 허범준의 문제를 위에 제기하였다. 이런 문제를 그대로 덮어두면 상하간의 우애에 금이 갈 수 있었고 옹간기풍이 사라져버릴 수 있었다.

우리는 이상에서 언급한 몇가지 이유와 우리 인민혁명군 안에 조성된 새로운 환경을 충분히 참작한 기초위에서 조선인민혁명군 잠행조례를 작성공포하였다. 그때가 김주현이 백두산에 나와 처음 맞는 설인데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뛰어다닐 때였으니 아마도 1936년말경이었다고 생각된다. 김평이 초안을 만들어왔는데 잠행조례로서의 맛이 덜 났다. 그래서 15개 조항으로 된 조례초안을 다시 만들었다. 앞으로 보충완성할 것을 전제로 잠행조례라고 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 잠행조례에는 우리 혁명군의 성격과 사명, 지휘관, 병사들이 일상생활에서 준수하여야 할 규범들과 행동준칙들이 자세히 밝혀져 있었다.

우리가 이 조례에서 특별히 주의를 돌린 것은 군민관계와 관병관계에 관한 문제였다. 그것은 잠행조례의 모든 조항에서 우리 혁명군의 인민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본군은 일본제국주의와 그 주구들을 반대하여, 조국의 광복과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이다.

이것은 조례의 첫 조항이었다.

우리 인민혁명군의 조직원칙을 규제한 조례의 두번째 조항에서도 본군은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로서 조직된 진정한 조선인민의 혁명군대라고 밝히었다.

군민관계에 대해서는 이렇게 명시하였다.

-본군은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고 인민의 생명재산을 옹호보위하며 인민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조국의 광복과 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한다.

관병일치에 대한 조항을 아래와 같았다.

-본군의 지휘성원들과 대원들은 옹간애병, 관병일치의 정신에서 군기와 풍기를 자각적으로 준수한다.

잠행조례에는 일제와 그 주구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항일전쟁경비로 충당하며 그 일부로는 빈곤한 인민을 구제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또한 조례에는 조선인민혁명군과 협동작전을 하려는 부대들과 본군을 동정하려는 나라와 인민들과의 공동전선을 도모한다는 조항도 밝혀져 있었다.

이밖에도 잠행조례에는 인민혁명군의 군사편제와 각급 지휘관의 임면에 관한 사령부의 권한이 밝혀있었고 입대자격과 입대 및 탈대 절차, 처벌대상에 관한 범위가 규정되어있었다.

잠행조례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의 깃발과 휘장, 군모의 별도 규정되어있었다.

잠행조례가 지향하고 있는 목적은 명백하였다. 그것은 인민의 이익을 조금도 침해하지 않고 군민이 하나로 되고 관병이 하나가 되어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을 발휘함으로써 인민이 학수고대하는 조국광복의 역사적 위업을 기어이 우리 힘으로 이룩하자는 것이다.

잠행조례를 관통하고 있는 기본정신은 사랑이었다. 다시말하여 인민에 대한 사랑, 병사들에 대한 사랑, 지휘관들에 대한 사랑을 철칙으로 삼으라는 것이었다.

나의 체험에 의하면 군민일치나 관병일치는 규정과 원칙만 가지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상감정의 일치성이다. 그것이 이루어지자면 군대와 인민, 지휘관과 병사, 상급과 하급 사이에 서로 아끼고 위해주는 인간적인 정이 동시에 통해야 한다. 마음속으로 서로 사랑하고 친근하고 귀중하게 여기는 인간적인 정이야말로 사상을 공고하게 결합시켜주는 강력한 접착제로 된다.

그러고 보면 조선인민혁명군 잠행조례는 그 누구를 통제하고 단속하기 위한 규칙이나 법문서가 아니라 군대와 인민, 지휘관과 병사들 사이를 뜨거운 정으로 이어주는 사랑의 법전, 사랑의 헌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조선인민혁명군 잠행조례를 작성하여 공포한 후 모든 지휘관들과 병사들이 그것을 철저히 준수하도록 하였다. 잠행조례가 공포된 후부터 군민관계, 관병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고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뜨거운 혈연적 관계로 더욱더 튼튼히 밀착되었다.

우리 지휘관들과 대원들은 아사, 동사의 위협을 당하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인민의 재물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다. 간혹 부득이 한 사정으로 주민들에게 양해를 구할 수 없는 정황에서 감자 몇알이라도 파갈 때에는 사과의 편지와 함께 본값의 몇배에 해당되는 돈을 밭머리나 감자움에 남기곤 하였다.

일단 주민부락에 들어가면 인민들을 도와줄 궁리부터 하였지 대접받을 생각은 애당초 하지도 않았다.

우리 부대가 장백현 20도구의 어느 마을에 체류하고 있을 때의 일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때도 나는 동네에서 제일 가난해 보이는 자그마한 초가집에 숙소를 정하였다. 그 집에서는 육순이 지난 노인내외가 어린 손자 하나를 애지중지 키우며 살고 있었다. 아들은 떼를 몰다가 비명에 죽고 며느리는 장질부사를 앓다가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장정노력이 없는 그 집의 초가이영은 다 고삭아서 천정으로는 비가 새들고 토방은 무너져서 사람사는 집 같지 않게 어수선하였다. 나는 첫날 전령병들과 같이 마을 뒷산에서 새초를 여라문단 베어다가 이영도 갈아주고 토방도 고쳐 쌓아주었다.

그날 밤이 퍼그나 깊었을 때였다. 나는 갑자기 닭이 홰를 치는 소리를 듣고 혹시 족제비가 닭을 물어가지 않는가 해서 밖을 내다보았다. 주인집 노인이 광솔불을 켜 들고 있는 노친의 도움을 받으며 닭장안에서 닭을 붙잡아내고 있었다. 내가 노인더러 이 밤중에 닭을 왜 끄집어 내는 가고 하자 노인은 요긴하게 쓸 데가 있어서 그런다고 하였다. 그 집 닭장에는 닭이 세마리밖에 없었는데 노인은 그중에서 두마리를 꺼내었다. 한마리는 수탉이었고 한마리는 살찐 암탉이었다. 우리는 이날 낮에 그 암탉이 알을 낳고 둥우리에서 내려와 한참 꼬꼬댁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주인집 노인은 노끈으로 닭의 두 다리를 동여매더니 암탉은 부엌에 집어 넣고 수탉은 옆구리에 끼고 사립문밖으로 나갔다. 무엇 때문인지 안노인도 그를 따라 나갔다. 그렇게 나간 다음에는 두 세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토방에 나앉아 집주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노인내외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나타났는데 옆에 끼고 나갔던 수탉을 그대로 가지고 아주 낙심한 기색으로 돌아왔다.

『노인님, 어디 가셨다가 인제야 오십니까?』

『말말게. 온 동네 쉬나문집을 다 돌고 오는 길일세.』

영감이 수탉을 토방에 내려놓으며 하는 소리였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무슨 일이 생겼기에 내외분이 밤중에 그런 수고를 하는가고 물었다.

『임자네 대장의 성함이 김일성이란 말을 들었네. 그래 이때까지 그분이 숙식하는 집을 찾다가 종시 못찾고 돌아오는 길일세.』

『그 집은 왜 찾자고 하십니까?』

『임자네들의 기특한 소행을 대장께 여쭈고 우리 영감노친이 큰절을 올리자고 했네. 임자네들의 신세를 지구 우리가 가만 앉아있어서야 되겠나. 약소한대루 대장께 닭이라도 한마리 대접하자구 했더니 글쎄…』

노인이 맨처음으로 찾은 집은 웃마을에 있는 지주네 집이었다. 대장이라면 응당 동네에서 제일 덩지가 큰 집에 들었으리라고 짐작했다는 것이다.

노인은 동네에서 두번째로 큰 마름네 집에도 가보았다. 그 다음은 동네의 쉬나문집을 빼놓지 않고 차례로 다 돌아보았다. 노인은 이런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의지가지없이 가난하게 사는 늙은이라고 온 동네가 자기네를 괄세한다고 하였다.

『하기는 이 늙은 것들이 이런 꼴을 하고 어떻게 대장앞에 나서겠나. 하지만 좀 너무해. 글쎄 제 집에 그분을 모시구두 여기 와서 찾으면 어쩌우 하고 놀려대는 사람들도 있지 않겠나. 이보라구. 자네네 대장이 정말 어느 집에 드셨나?』

주인집 노인은 온 동네를 다 돌아보고 와서도 제 집에 자기가 찾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데 대해서는 상상조차 못해본 것이 틀림없었다. 주인노인이 하도 궁금해하기에 나는 사실대로 신분을 밝히었다. 노인은 내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난날 독립군이 마을에 드나들 때에도 중대장만 되어도 제일 큰집에 틀고 앉아 소를 잡고 술추렴을 하기가 일쑤였는데 대장이 어떻게 이 누추한 집에 들 수 있는가고 하였다. 더구나 대장어른이 어떻게 이영을 갈아주고 토방을 쌓아줄 수 있으며 수수죽을 달게 자실 수 있겠는가, 자네도 역시 우리를 업수이 여기고 그분의 행처를 숨기고 있는게 분명하다고 하면서 몹시 노여워하였다. 이튿날 전령병의 말을 듣고서야 노인은 비로소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때 닭을 잡아 대접하겠다는 노인내외를 겨우 만류하고 마을을 떠났다. 이러루한 일들은 한두번만 있은 것이 아니다.

조선인민혁명군 잠행조례는 군민일치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데서 참으로 거대한 생활력을 발휘하였다.

만일 우리가 대오 안에 인민에 대한 사랑과 철저한 복무정신을 확립하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인민혁명군의 운명과 우리 자신의 생존을 부단히 위협하던 그 준엄한 시련의 나날들에 중첩되는 난관을 이겨내지 못하고 혁명을 중도반단하였을 수도 있다.

조선인민혁명군 잠행조례가 나온 후 우리 혁명군은 관병일치에서도 새로운 전환을 가져왔다.

우리 지휘관들은 대원들과 고락을 같이하는데 습관되어있었다. 대원들이 죽을 먹으면 지휘관들로 같이 죽을 먹었고 대원들이 눈 위에 나뭇잎을 깔고 잘 때면 지휘관들도 눈 위에 나뭇잎을 깔고 잤다.

조선인민혁명군 지휘성원들은 사령관으로부터 소대장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철저히 「작은 가마」를 경계하고 반대하였다.

「큰 가마」, 「작은 가마」라는 말은 원래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에서 생겨난 것이다. 국민당 군대에서는 장교만 되면 일반 병사들이 끓여 먹는 큰 가마와는 별도로 작은 가마에 별식을 해 먹는 것을 응당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상하를 엄격히 구분하여 상을 절대적으로 우대하고 하를 절대적으로 박대하는 면에서는 일본군대가 아주 지독하였다. 일본군에서는 오장정도만 되어도 하급병사들더러 발바닥이나 구두바닥을 핥게 하는 야만적인 기합과 처벌을 마음 내키는대로 자행하였다.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에서는 「작은 가마」를 절대로 허용치 않았다. 「작은 가마」가 있게 되면 별식의 특혜를 받는 특수층이 생기게 되고 어차피 그런 특수층과 큰 가마의 대중음식을 먹게 되는 광범한 대원들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기 마련이다. 말로는 만민평등을 곧잘 외우면서 먹는 데서부터 구별을 두고 불평등을 조장하게 되면 그런 위선자들을 어느 누가 받들고 따르겠는가.

우리는 모든 지휘성원들이 직위고하에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 어떤 정황에 처하여있건 평대원들과 꼭같이 한가마밥을 먹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전체가 한가마밥을 먹는 것은 절대로 어길 수 없는 인민혁명군의 군율로, 식사윤리로 되어있었다.

먹는것도 입는것도 잠자리도 모두가 꼭같이 하였기 때문에 대원들을 돌볼 의무를 지닌 지휘성원들은 사실상 대원들보다 오히려 적게 먹고 헐게 입고 못한 잠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도 우리는 「작은 가마」를 반대하고 있다. 오래전 일이지만 한때 수도와 지방의 적지 않은 식당들에서는 뒷골방을 따로 차려놓고 간부들이 오면 별식을 대접하였다. 뒷골방을 꾸리지 말라는 중앙의 신호가 여러번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봉사부문의 사람들은 집요하게 「작은 가마」를 운영하였다. 이것은 결국 인민성이 없는 일꾼들 속에서 특수화를 조장시키는 결과를 빚어냈다.

어떤 일꾼들은 아래사람들이 자기를 뒷골방이나 귀빈실로 안내하면 그것을 응당한 것으로 여기면서 특대를 받으려고 하였다.

우리는 「작은 가마」를 찬성하지 않는다. 「작은 가마」를 둬두면 온갖 「잡귀신」들이 다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가마」에서는 자본주의 사상밖에 나올 것이 없다. 이런 「작은 가마」를 그대로 둬두면 당과 대중사이에 금이 가게 되고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이 허물어질 수 있다. 우리 식 사회주의가 튼튼히 건재하고 있는 것은 당이 관료화되지 않았고 우리가 「작은 가마」를 허용하지 않는 것과도 주요하게 관련되어있다.

조선노동당이 작성하고 시행하는 모든 정책의 기초에는 반드시 인민성이 놓여있다. 인민성은 우리 당과 군대와 국가의 성격을 지배하는 기본인자이다. 우리는 체험을 통하여 인민성을 기본적인 생존방식으로 삼고 있는 당과 군대는 필승불패한다는 진리를 확증하였다. 극소수의 특권층을 위해서만 봉사하고 복무하는 것은 인도주의가 아닐 뿐 아니라 반인민성의 노골적인 표현이다.

자본주의 군대에서는 참다운 군민관계, 동지관계, 상하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또 존재할 수도 없다. 거기에는 오직 강압, 기만, 갈등, 대결, 맹종, 맹신이 있을 뿐이다. 슬픈 사실은 제국주의 국가의 군대에서는 병사호상간에도 서로 위해주고 아껴주는 인간본연의 아름다운 세계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먼저 먹어라. 내가 너를 먹지 않으면 네가 나를 먹는다!』

이것은 자본주의 나라 군대 안에서 장교들이 주입시키고 있는 인생철학이다. 이 철학에 의하면 「나」밖의 존재는 모두 적으로 되고 포식대상으로 된다. 2차 세계대전 말기 뉴기니아전선에 있던 일본군대 병사들은 식량이 떨어지게 되자 사람들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오늘도 자본주의 나라 군대들에서는 군인들 속에서 「너 아니면 나」라는 야수적인 생존방식을 배양하고 있다.

조선인민혁명군 잠행조례를 시행하는 과정에 보다 공고하게 다져진 군민일치와 관병일치의 전통은 오늘 우리 당의 올바른 영도밑에 더욱 전면적으로 계승발전되고 있다.

우리의 인민군 군인들은 인민들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것을 최대의 기쁨으로 여기고 있다. 군대가 인민을 돕고 인민이 군대를 돕는 것은 오늘 우리 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통일로 되어있다.

신문과 텔레비전 화면에서도 자주 보게 되는 바와 같이 우리 나라 처녀들은 조국보위초소에서 부상당한 영예군인들에게 스스로 찾아가 그들의 눈이 되고 팔다리가 되어준다.

날과 더불어 활짝 피어나는 군민일치의 모습을 보는데서 나는 무상의 행복을 느낀다.

인민군대 안에서는 관병일치의 전통도 더욱 공고히 다져지고 있다.

오늘 우리 인민군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자기의 자식이나 친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해주고 있다. 자신의 생명까지 바쳐가며 대원들을 구원한 영웅지휘관들도 많다. 전사들은 중대장을 맏형이라고 부르고 중대정치지도원을 맏누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 인민군대의 기본전투단위로 되고 있는 중대안에서의 상하관계는 바로 이런 혈연적 관계이다.

우리 나라는 세상에 대고 당당히 자랑할만한 위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군민일치, 관병일치이다.

그런 위력한 무기는 그 어떤 군사 과학이나 기술로써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참다운 사랑만이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