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일야방성대곡」으로 몸부림치던 망국조선의 역사무대에 무력항쟁의 깃발을 들고 등장한 독립군은 의병투쟁과 애국문화계몽운동을 비롯하여 합법, 비합법, 폭력, 비폭력의 각이 한 투쟁을 통하여 국권수복의 뜻을 이루려고 필사적으로 싸워온 이 나라 애국지사들의 피끓는 독립열망과 눈물겨운 노고의 열매였다. 비록 시대에 뒤떨어지고 민중적 지반이 박약한 것으로 하여 조락의 길을 걷기는 하였지만 독립군은 민족운동진영의 유일한 반일무장력이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청원이나 구걸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총검으로써 일제를 타승하려 한 독립군의 지향을 귀중하게 여기시고 항일혁명의 봉화를 추켜드신 첫 날부터 그들과의 사업에 시종 많은 힘을 기울이시었다.

일찍이 남만의 양사령을 찾아가시던 그때로부터 항일일선에서 독립군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게 되기를 갈망하시던 수령님의 그 숭고한 경륜과 투철한 애국의지는 여러 해가 지나서야 드디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독립군과의 합작제휴노선을 받들고 독립군부대들 앞에 반공으로부터 연공에로의 길을 열어주고 그들을 조선인민혁명군측으로 의거시키는 데서 크게 역할한 사람은 최춘국과 최윤구였다.

그렇다면 최윤구는 어떤 사람인가.

1975년 10월 대성산 혁명열사릉을 찾으신 경애하는 수령님께서는 최윤구의 반신상 앞에서 오래도록 걸음을 멈추시고 그에 대한 귀중한 회상교시를 하시었다. 최윤구의 인간상과 그가 방향전환을 하게 된 과정은 그때에 더욱 상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에 옮겨놓는 글은 그 날 수령님께서 당역사연구소 일꾼들과 혁명열사릉 일꾼들에게 하신 말씀, 그 밖의 여러 기회를 통하여 항일혁명투쟁사 연구자들과 작가들, 혁명사적부문 일꾼들에게 하신 말씀을 추려서 묶은 것이다.

 

최윤구는 평안북도 의주사람입니다. 오동진, 양세봉, 장철호, 이관린, 김시우, 최동오, 공영을 비롯하여 평안북도의 압록강유역일대에는 명망높은 독립운동자들이 많았습니다.

1925년에 우리가 무송으로 갔을 때 아버지를 모시고 대영까지 마중 나온 사람들 가운데는 최윤구도 있었습니다. 그가 독립군말기에는 부사령, 사령으로 활약하였지만 우리가 무송에 갔을 때만 해도 아직은 낮은 직급에 있었습니다.

내가 무송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 그 고장 사람들은 최윤구를 가리켜 『최참사』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렇게 불렀고 그의 직속상관들인 장철호, 오동진, 양세봉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참사」란 최윤구에게 붙어있는 군사칭호였습니다. 그가 소대장이 된 후에도 나는 그를 『참사아저씨』라고 불렀고 부대를 데리고 우리한테로 의거해온 후에도 우리 둘만 있을 때에는 소년시절의 버릇 그대로 『참사아저씨』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참사아저씨』라고 하면 최윤구도 좋아했습니다. 우리가 그를 보고 『소대장님』이라고 불렀다면 그는 오히려 서먹서먹해하였을 것입니다.

최윤구는 지지하게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대신 가슴속에 많은 말을 안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입이 무겁고 속이 깊고 통이 크고 배짱이 센 그는 전형적인 무관형의 인물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가 어려서부터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니며 스스로 무술훈련을 한 사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어려서 무술훈련을 시작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일찍부터 뜻을 크게 가지고 산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압록강반에 의병과 독립군이 자주 나타났으니 소년시절부터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최윤구의 아버지는 야장간일을 하였습니다. 최윤구도 서당공부를 좀 하고 나서는 10살을 넘기기 바쁘게 아버지를 도와 야장간에서 일하였다고 합니다. 한번은 그가 추운 겨울에 윗동을 벗어 내치고 냉수마찰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격술선수들처럼 온몸에 힘살이 울퉁불퉁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 사람이 사나이구실을 하려면 체통이 저쯤 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최윤구는 17살인가 18살 때 독립군을 따라 임강현 모아산에 갔습니다. 모아산은 백산무사단의 본거지였습니다.

언제인가 오동진영감은 우리 아버지와 마주 앉아 최윤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를 대장감이라고 하였는데 그때 나는 그 말을 듣고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체력뿐 아니라 인품과 성미를 보아도 최윤구는 대장감이라는 말을 들을만 하였습니다. 그는 전투도 많이 해본 사람입니다. 독립군시절에 최윤구의 밑에서 복무한 김명준은 그가 부사령으로 승급한 다음에도 싸움마당에만 나서면 앞장에 서서 돌격하였다고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무송시절에 최윤구를 독립운동의 큰 인물로 존경하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를 친동생처럼 극진하게 사랑해 주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병상에 계실 때 최윤구는 장철호와 함께 매일같이 문병을 오군 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자기 부하들을 다 데리고 와서 조상을 하였습니다. 그도 베감투를 쓰고 몹시 울었습니다. 그때 그는 나에게 고무적인 말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그가 나를 따뜻이 위로해준데 대하여 나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최윤구가 정의부시절에 무슨 주의주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연공이냐 반공이냐 하는 기준을 가지고 그의 이념을 해부한다면 그는 반공보다 연공에 더 가까웠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최윤구는 공영이나 박진영과 같이 공산주의운동에로 일찍이 방향전환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주변에는 새 사조를 동경하고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깃발을 바꾸어 들고 공산주의자들의 진영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 당시 남만과 중부만주 지방에서 새 사조를 지향하던 사람들은 민족주의자들에게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이 일대에서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더라면 우리는 왕청문에 갔을 때 국민부의 반동적인 상층인물들한테서 테러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동만지방에서는 공산주의사상이 민족주의사상보다 우세하였습니다. 공산주의사상은 침투되자마자 민족주의사상이 반기를 들 사이도 없이 이 지역을 흽쓴 지배적인 사상으로 되었습니다. 동만에서는 남만이나 중부만주에서 보는 것과 같은 두 사조의 심각한 대립이 조성되지 않았습니다.

최현, 윤창범, 박동근, 김일룡, 박두경 등의 경우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 일대에서는 적지 않은 독립군출신들이 특별한 곡절을 거치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하고 영솔하는 혁명군대오에 들어섰습니다. 이곳에서는 신구사조의 교체가 유혈이나 사생결단의 사상전을 동반하지 않았습니다. 이 지방의 인민대중은 공산주의사상에 접하게 되자 그것을 자기 계급의 지도사상으로 받아들이었으며 조선민족해방투쟁이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을 하는데 대하여 역사발전법칙에 부합되는 응당한 움직임이라고 보았습니다.

1932년 여름에 나는 통화에서 최윤구를 잠깐 만나보았습니다. 양세봉과 합작문제를 의논하느라고 그때 그와는 별로 긴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남만에 가서 양세봉과 합작문제를 토론하던 그 당시까지만 해도 독립군의 사상동향에서는 연공의식보다 반공의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독립군상층의 반공의식과 적들의 이간책동때문에 우리가 목적했던 합작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통화를 떠난 뒤 최윤구는 몹시 서운해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남만에 가서 큰 소득이 없이 돌아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립운동자들과의 합작을 포기하거나 단념한 것은 아닙니다. 민족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그런 문제도 아니고 힘이 약할 때에는 하고 강할 때에는 하지 않는 문제도 아니며 주권을 잡기 전에만 하고 주권을 잡은 다음에는 하지 않는 그런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민족의 완전한 화합과 통일단결을 실현할 때까지 항구적으로 틀어쥐고 나가야 할 전략이고 노선이었습니다.

동무들, 생각해 보시오. 나라가 해방된 때로부터 수십 년이 되는 지금에 와서도 우리는 여전히 민족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을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혁명활동초기부터 민족통일전선문제를 민족의 완전한 대단결이 실현될 때까지 시종일관하게 틀어쥐고 나가야 할 항구적인 전략문제로 본 것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비록 양세봉과의 담판에서 실패했지만 어느 때든지 독립군과의 연합이 실현될 날이 오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으며 그 날을 앞당기기 위해 열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처럼 완고한 중국인반일부대들과도 공동전선을 맺었는데 같은 피를 나눈 동족끼리 공동전선을 성사시키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실현하지 못한다는 것은 털어놓고 말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 앞에서도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제2차 북만원정을 끝내고 서간도에 진출한 후 나는 여러 갈래의 경로를 통하여 남만에 있는 독립군의 소식을 계통적으로 입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과의 제휴를 실현하기 위한 사업을 밀고 나갔습니다. 우선 통신원을 파견하여 조국광복회 창립선언과 10대강령을 보내주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독립군과의 합작공작을 남만의 항일연군부대들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동지들이 맡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동광은 조국광복회 남만대표자격을 가지고 독립군과의 사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독립군측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양세봉이 희생된 다음 독립군사령자리는 김활석이라는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는 아주 완고한 반공분자였습니다. 물론 독립군내부에는 새 사조를 동경하고 연공을 지향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국민부시절부터 고이허나 현묵관과 같은 지독한 반공광신자들을 추종해 오던 우익계층들이 만만치 않은 세력을 이루고 있어 그들과의 합작공작이 잘 진척될 수가 없었습니다. 양세봉이 살아있을 때 양정우부대와의 공동행동을 한 일이 있었지만 모처럼 싹텄던 그 연공대사가 김활석사령의 대에 와서 줄기차게 이어지지 못한 것은 군상층에 틀고 앉아있던 반공분자들의 탓이었습니다.

김활석을 연공의 길로 돌려 세우는 것은 그의 수하에 있는 수백 명 부하들의 운명과 관련된 문제로서 한시도 지체시킬 수 없는 중대사였습니다.

털어놓고 말해서 우리가 그 당시 독립군과의 합작에 그처럼 큰 의의를 부여한 것은 그들의 덕이나 보자고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1936년이면 조선인민혁명군이 역량상으로나 군사기술적으로나 대단히 강성한 때였습니다. 우리는 독립군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독자적으로 잘 싸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독립군은 그 당시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때인 것만큼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대오가 자꾸 줄어들고 무기도 모자라서 더러는 창이나 몽둥이를 들고 다니는 형편이었습니다. 세력이 몹시 약해진 독립군은 적들과 별로 싸우지 않고 슬슬 피해 다니기만 하다보니 무기와 탄약을 보충할 도리도 없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도 나올 데가 없었습니다.

 

항일혁명투사 김명준은 김활석의 수하에 있다가 조선인민혁명군에 편입한 최윤구의 동행자였다.

김명준은 1960년에 쓴 자기의 수기에서 독립군에 입대하던 시기와 그 이후시기에 군이 처하였던 형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1932년 가을에 우리는… 연통산근처에 주둔하고 있은 독립군부대를 찾아갔다. 마을에서는 독립군환영잔치준비가 한창이었다. 나와 짝패는 우선 돼지를 잡는 곳에 나타나 이것저것 시중을 들어주는 것으로 군인들의 환심을 사기에 노력하였다. 그 다음에는 보초의 잔심부름을 들어주었다. 그렇지만 독립군지휘관들은 애숭이라는 이유로 우리들의 입대청원을 부결하였다.

그 날밤 우리는 강심을 먹고 이동하는 부대의 뒤꽁무니를 바싹 뒤쫓아갔다. 나와 짝패는 독립군이 가닿는 마을마다에서 그들의 시중을 열성스럽게 들어주었다. 우리의 끈덕진 시중과 참군열의에 감동된 중대장은 마침내 입대를 승인하였다. 그때의 기쁨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입대 후 우리는 얼마 안가서 독립군이 우리가 꿈꾸던 그런 군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실망하였다. 우리가 그렇게도 동경하던 독립군에는 무기가 없어 몽둥이를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입대하면 곧 총을 받을 줄 알았는데 나 역시 처음에는 총이 없다보니 보초근무에 나갈 때마다 매번 선배군인의 토퉁을 빌리군 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에 편입한 김명준은 소부대활동시기 원동의 훈련기지에 있을 때 위대한 수령님의 몸 가까이에서 몇 해 동안 생활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김명준을 통하여 김활석사령이 이끌던 독립군의 생활을 이모저모로 깊이 요해하시었다. 그분께서는 독립군이 최윤구를 따라 조선인민혁명군에 편입한 것은 우리 나라 민족주의운동발전의 하나의 필연적인 귀결로 된다고 말씀하시었다.

 

독립군은 무기를 인민들한테서 징수한 모연금으로 해결한 것처럼 먹고 입고 쓰는 문제도 인민들을 통하여 해결하였습니다. 관할구역의 주민들에게 「연조」라는 이름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그것을 의무적으로 납부하게 하였습니다.

징수를 맡은 사람들은 대장을 펼쳐놓고 세대별로 주민들을 불러다가 한 사람 한 사람씩 납부정형을 따지었습니다. 지정된 납부액을 바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욕설을 하든가 볼기를 쳤습니다.

과거에 정의부가 그랬던 것처럼 국민부의 군대도 남만에 틀고 앉아 한 개 독립국가와 맞먹는 행세를 하였습니다.

김명준의 말에 의하면 독립군은 1930년대 중기부터 본래의 사명을 저버리고 점차 토비처럼 되어 갔다고 합니다.

독립군의 한 소부대는 식량사정이 곤난해지게 되자 압록강가에 나가 뗏목꾼들의 식량까지 털어냈습니다. 토비로 가장한 다음 물목을 지키다가 공포를 몇 방 쏘아 뗏목을 강제로 기슭에 끌어다 붙이게 하고 막무가내로 식량을 빼앗아내군 했는데 이거야 어디 독립군이 할 짓입니까. 아무리 궁여지책이라 해도 분수가 있지 않습니까.

인민의 보호자, 구원자가 되어야 할 독립군이 이 지경으로 타락하고 부패변질되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독립군내부에서는 점차 군기가 문란해지고 도주자가 연달아 생기었습니다. 김명준네 소대장도 지휘부의 궤짝 속에서 사령의 도장과 총, 돈 등을 훔쳐낸 다음 직일병과 보초병을 데리고 도주하였다고 합니다. 산림대도 독립군을 만나면 무턱대고 무장해제를 하였습니다. 독립군의 처지는 문자그대로 사면초가였습니다.

우리는 독립군이 자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괴멸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독립군이 망하게 되면 일본제국주의자들이나 좋아했지 우리에게 이로울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적지 않은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의 길에서 물러서거나 적들의 노복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을 때 그래도 독립군이 창군 당시의 초지를 버리지 않고 하나의 군사역량으로서 존재를 유지해 간다는 것은 민족을 위해서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존재를 유지해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독립군은 민중의 지지와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마지막무렵에는 별로 맥을 추지 못하였지만 활동 초기와 중기에는 싸움도 많이 하고 전과도 많이 거두었습니다.

그 당시 독립군지휘관들은 일만군경들의 거듭되는 「토벌」과 내부의 사상적 혼란으로 하여 생긴 군의 붕괴를 막아보려고 애를 태웠습니다. 독립군의 사상적 변질에서 제일 문제로 되는 것은 패배주의였습니다. 패배주의사상은 적들에게 투항하는 것으로도 표현되었고 대오에서 도주하는 것으로도 표현되었으며 애국군대로서의 체면을 버리고 토비행세를 하는 것으로도 표현되었습니다.

김활석을 비롯한 군의 일부 상층인물들과 부분적인 장병들은 장개석군대의 원조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민당에 대해 환상을 품고 그들의 지원을 받는 방법으로 군을 유지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사대주의란 별것이 아닙니다. 힘이 약할 때 남을 쳐다보거나 남들의 덕으로 살아갈 구멍수를 찾게 되면 스스로 사대주의가 생기는 법입니다. 사대주의라는 병은 선천적인 것도 아니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힘을 믿지 않거나 그것을 과소평가하게 되면 아무리 애국심이 강하던 사람도 사대주의자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독립군이 가지고 있던 가장 치명적인 사상적 제한성이 바로 자기자신과 자기 인민의 힘을 믿지 않는데 있었습니다. 자기자신과 자기 인민의 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닿게 되는 종착점이 바로 사대주의이며 이 사대주의가 안내하는 길이 매국과 반역입니다.

사대주의자들치고 조국과 민족을 깔보지 않는 자가 없으며 자기 조국과 민족을 깔보는 사람들치고 매국과 반역에로 가지 않는 자가 없다는 것은 지난 날의 역사가 충분히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독립군의 모든 병사, 지휘관들이 다 국민당의 돈과 무기에 기대를 걸고 있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령은 장개석을 「하느님」처럼 쳐다보고 있었지만 적지 않은 지휘관들은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국민당군대와의 연합보다도 조선인민혁명군과의 연합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립군의 병사, 지휘관들은 소문을 통해서만 우리 부대의 면모를 파악한 것이 아니라 실지체험을 통하여 인민혁명군이 어떤 군대라는 것을 똑똑히 이해하였습니다.

김명준이 원동의 훈련기지에 있을 때 들려주던 말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어느 해인가 김명준이 소속되어 있던 독립군의 소부대는 즙안현의 어느 산간부락에서 우연히 인민혁명군의 한 소부대를 만난적이 있다고 합니다. 깊은 밤중에 마을을 찾은 독립군소부대는 잠자리를 마련해 보려고 어떤 집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집을 인민혁명군의 소부대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인민혁명군대원들은 독립군의 소부대가 숙소를 마련하지 못해 이집저집 돌아다니던 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자진해서 자기들이 들었던 집을 선뜻 내주었습니다. 식량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쌀도 덜어주었습니다.

밤중에 소변을 보려고 밖에 나간 독립군대원들은 놀라운 정경을 목격하였습니다. 인민혁명군대원들이 꺼져가는 우등불두리에 따바리모양으로 빙 둘러 누워 서로 껴안고 노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포단도 없고 이불도 없었습니다. 그저 강낭짚을 깔고 자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광경을 보고서야 어느 누가 감동되지 않겠습니까.

다음날아침 독립군대원들은 인민혁명군 병사, 지휘관들이 우등불두리의 강낭짚을 거두고 물을 긷는다, 나무를 팬다, 마당을 쓴다 하면서 주인집 늙은이들의 일손을 돕느라고 분주히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더 감동되었습니다. 집주인인 중국인노인도 항일유격대원들의 소행에 감동되어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잡고 내 평생 이런 군대는 처음 봅니다, 당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인민의 군대, 우리의 군대입니다 하고 치하했습니다.

이 사실은 김명준네 소부대성원들의 입을 통하여 독립군의 상하층이 다 아는 유명한 화제거리가 되었습니다. 최윤구도 그 일화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독립군병사들의 마음이 인민혁명군편으로 쏠리는 것은 막을 수 없는 흐름으로 되었습니다.

독립군이 살아나는 길은 인민혁명군과의 연합밖에 없었습니다. 연공만이 살길이요, 합작만이 유일한 출로였습니다. 우리가 바란 것은 독립군이 강성해서 독자적으로 투쟁을 계속하든가 인민혁명군과 힘을 합쳐가지고 공동항일을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독립군측의 형편으로 볼 때 인민혁명군과의 합작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였습니다. 문제는 반공을 휘두르면서 장개석에게 기대를 걸고 있은 김활석사령과 그 추종자들을 어떤 방법으로 돌려 세우는가 하는데 있었습니다. 우리의 공작원들과 남만동무들이 보내준 통보에 의하면 최윤구는 조국광복회 창립선언과 10대강령을 읽고 아주 만족해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독립군과의 합작을 결정적으로 실현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조국광복회를 창립한 후였고 그 결심을 행동에 옮기기 시작한 것은 백두산지구와 서간도에 진출한 후였습니다.

그전에도 인민혁명군측에서는 독립군지휘부와 주동적으로 몇 차례 접촉하였습니다. 독립군측에서는 민족반일역량이 서로 합작할 데 대한 우리의 사상에 반대는 하지 않으면서도 조선인민혁명군과 독립군과의 연합과 관련된 우리의 제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우리는 남만으로 떠나가는 최춘국에게 독립군과의 합작을 추진시킬 데 대한 과업을 주었습니다.

남만에 도착한 최춘국은 먼저 최윤구에게 나의 편지를 전달한 다음 두 군의 합동에 대한 문제를 내걸고 그와 비밀리에 담판을 진행하였습니다. 최춘국이 공동항일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자 최윤구는 두 부대를 합치는데 대해 대뜸 지지하였습니다. 그는 나하고 연고관계도 깊었지만 독립군 안에서 반일의지가 제일 견결하고 확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부대는 허울만 있지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 다 파먹은 김칫독이요. 내 개인의 심정을 말한다면 부대를 데리고 당장 김성주대장한테로 찾아가고 싶소. 사령영감이 정 고집을 부리면 나 혼자서라도 혁명군을 찾아갈 작정이요.』

그때 최윤구는 최춘국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최춘국은 우리는 독립군의 분열을 바라지 않는다, 부사령선생이 자기 지지자들을 데리고 백두산으로 오는 것도 좋지만 어떻게 하나 사령영감을 잘 이해시켜 조선인민혁명군과 연합을 하게 해보라고 최윤구를 설복하였습니다.

최윤구는 사령을 구슬릴 자신이 없다고 하면서도 공동항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있는 힘을 다 바치겠노라고 약속하였습니다. 공동전선을 해야 살길이 열린다는 것은 그가 다년간 독립군에서 민족운동의 부패변질과정을 직접 목격하면서 얻은 교훈이었습니다.

김활석은 부대를 세 개로 쪼개어 분산활동을 하는 방법으로 독립군의 손실을 덜려고 했지만 그것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민중 속에 뿌리를 튼튼히 내리지 못한 독립군은 역량을 보충할만한 후비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최윤구는 어찌하여 독립군은 쇠퇴해 가는데 인민혁명군은 번성해 가는가, 어찌하여 독립군은 군기가 문란해져 수습하기 어려운데 인민혁명군은 군기가 점점 더 강해져 적들조차 아우성을 치게 되는가, 어찌하여 독립군은 백성을 노략질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하는데 인민혁명군은 백성의 재물을 침해하지 않고서도 먹고 입고 쓰고 사는가, 어찌하여 독립군은 일본군만 만나면 연전연패하는데 인민혁명군은 연전연승하는가, 어찌하여 독립군은 인민혁명군을 쓴외보듯 하는데 인민혁명군은 독립군을 우군으로 보는가 하는 고민에 잠기었습니다.

최윤구는 그 원인을 민중적 기초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독립군이 광범한 인민대중의 적극적인 지지성원을 받지 못하고 고군분투하는 것도 민중적 기초가 약한데 있고 부패변질과정을 멈춰 세우지 못하는 것도 민중적 기초가 견실하지 못한데 있다고 보는 것이 그의 견해였습니다. 최윤구는 민중을 떠나서 민중위에 군림하고 있은 독립군의 전망은 암담하지만 민중 속에서 태어나 민중과 운명을 같이하는 인민혁명군의 앞길은 무한히 창창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독립군의 민중적 기초가 약한 것은 달리는 될래야 될 수 없는 필연적 현상이었습니다. 독립군의 활동과 지향은 민중중심의 사상과는 인연이 먼 부르조아민족주의사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 사상의 특징은 근로대중을 혁명의 주인으로 보지 않는데 있었으며 그로부터 각계각층의 광범한 반일애국역량과의 통일을 달가워하지 않고 공산주의를 배척하는데 있었습니다.

최윤구는 독립군이 쇠퇴, 고립, 붕괴되어 가는 근본원인을 바로 여기에서 찾고 인민혁명군과의 연합을 실현한 다음 공산주의자들이 구축해 놓은 민중적 지반위에서 활동할 때만이 민족 앞에 지닌 본연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하지만 김활석은 인민혁명군과 연합하면 이득은 공산주의자들이 얻고 독립군은 자기 존재를 끝마치게 된다고 하면서 합작제의를 무시해 버렸습니다. 독립군이 설사 명이 모자라서 망하게 되더라도 공산주의자들과는 한 가마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 김활석의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속지 말라, 그 사람들은 계급투쟁밖에 모르는 인간들이다, 그들이 통일전선을 한다는 건 일시적인 속임수이다, 안팎이 다른 사람들이니 그들과는 등을 돌리고 지내는게 상책이다라고 하면서 반공입장에서 한발자국도 드티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령과 부사령의 담판이 공회전을 거듭하고 있은 사이에 부대의 형세는 몹시 악화되었습니다. 식량과 피복이 떨어진데다가 적들의 포위 속에 빠져들어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엎친데 덮치는 격으로 도주하는 사람, 귀순하는 사람, 굶어죽는 사람들이 연방 생겨나는 바람에 장병들의 사기는 형편없이 떨어졌습니다.

최윤구는 마지막결판을 낼 작정으로 사령과 최종담판을 하였습니다. 당신이 만일 나의 제의에 응해 나서지 않는다면 할 수 없다, 대오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연합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당신 곁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이이상 더 여기에 앉아 뭉개다가는 우리가 전멸당하고 만다, 장개석을 찾아가든지 김일성을 찾아가든지 각자가 소망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라고 들이댔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빠진 김활석은 그 제의에 동의해 나섰습니다. 그의 지령에 따라 독립군의 전체 병사, 지휘관들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사령은 부대가 겪고 있은 어려운 처지에 대하여 비장하게 설명하고 나서 『당신들 중에서 김일성부대를 찾아갈 의향이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서라.』고 말했습니다.

부하들은 처음에 그런 말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령의 속심을 알지 못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혹시 연공분자들을 색출해 가지고 어떻게 하자는 건지 어찌 알겠습니까.

맨 처음으로 대열앞에 나선 것은 김명준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뒤를 이어 수많은 대원들이 대열앞으로 나섰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선구자가 있으면 꼭 풀리는 법입니다. 김명준은 그야말로 선구자였습니다. 내 그래서 그 사람이 인민혁명군에 편입한 다음 몹시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때 내 결심을 부채질 해준 분은 최윤구부사령이었습니다. 그분은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우리를 격려해주고 결심대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먼 훗날 김활석사령의 수하에서 떨어져 나가던 때를 회상하여 김명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되어 부대는 두 쪽으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갈라지고 나서는 다들 울었다고 합니다. 김활석사령도 울고 최윤구부사령도 울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한 몸이 둘로 갈라진 셈이니 그 아픔과 고통이야 오죽했겠습니까.

독립군은 두 패로 나뉘어 조선이 독립되는 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는 각각 다른 방향으로 떠났습니다. 한 대오는 최윤구의 인솔하에 조선인민혁명군을 찾아 떠났고 몇십 명밖에 안되는 다른 한 대오는 김활석의 지휘하에 봉황성부근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남만지방에 유일하게 남아서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저항하던 국민부의 군대는 이렇게 해체되었습니다.

『나는 먼길을 에돌아서 이렇게 성주대장의 곁으로 찾아왔소. 곧바로 올 수도 있는 길이었는데… 우리가 너무도 우유부단했거든.』

이것은 최윤구가 남패자에서 우리에게 한 말입니다.

나는 그의 의거를 진심으로 찬양하였습니다.

최윤구가 단행한 거사는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사와 민족통일전선역사에 대서특필할만한 의의를 가진 경이적인 사변으로 됩니다. 그것은 항일무장투쟁초기부터 우리가 시종일관하게 실시해온 통일전선정책의 승리였으며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쌓아올린 또 하나의 탑이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과 독립군의 연합은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반드시 따라 배우고 참고로 삼아야 할 하나의 선구적인 본보기로 되었습니다.

그 본보기를 창조한 공로자들인 최춘국과 최윤구의 업적은 우리 나라 민족통일전선운동역사와 민족대단결역사의 한 페이지를 당당히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최윤구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윤구는 연공의 선구자이며 그 실천자라고 말할 수 있는 도량이 큰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을 보더라도 항일무장투쟁사를 전문하는 역사가들은 민족통일전선운동사를 서술할 때 반드시 최윤구의 업적을 큼직이 써넣어야 할 것입니다.

최윤구의 의거로 말미암아 우리의 혁명운동선상에서는 아버지세대와 아들세대의 동맹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윤구는 사조로 볼 때 우리 아버지의 세대에 속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네 세대가 대부분 민족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면 우리네 세대는 대체로 공산주의를 지향하였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수화상극이라고 보던 두 세대의 애국자들이 결국은 이념의 차이를 뛰어넘어 공동항일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최윤구의 거사는 이념이 다르고 신앙과 정견이 서로 다른 사람들도 나라와 민족을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얼마든지 단결하고 화합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줍니다.

최윤구는 인민혁명군에 넘어온 후 공산당에도 입당하였습니다. 그는 참모일꾼의 요직에서 항일혁명의 승리를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1938년말에 화전현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전우였던 동시에 나의 혁명동지였던 그를 나는 슬픈 마음으로 추모하였습니다. 그가 연공의 길을 개척해 놓고 해방의 날을 보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도 가슴 아팠습니다.

최윤구와는 다르게 김활석은 장개석을 만나러 가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어 독립군사령으로서의 사명을 더는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김활석이 장개석에게 환상을 가지고 그에게 붙으려 한다는 눈치를 채고 계교를 꾸몄습니다. 장개석의 특사로 가장한 특무를 보내어 김활석을 꾀어냈습니다. 특무는 장개석이 보냈다는 위조신임장을 내보이면서 장총통이 김활석사령과의 회견을 고대하고 있으니 어서 가자고 하였습니다. 장개석에 대한 기대로 눈이 어두워진 김활석은 상대방의 신분을 충분히 알아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특무를 따라 나섰습니다. 특무는 그를 곧장 헌병대사령부로 유인해 갔습니다.

김활석의 운명을 망친 것은 결국 반공병과 사대주의병이었습니다.

우리의 민족사가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사대주의자들과 반공분자들은 예외없이 매국과 반역, 배신의 길로 굴러 떨어지는 법입니다.

손중산은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의 지도자이지만 연공을 하였기 때문에 광범한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혁명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김구는 인생말년에 반공으로부터 연공애국에로 새 출발을 하였기 때문에 민족사의 한 페이지를 자랑스럽게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김활석도 그들처럼 연공을 하였더라면 일본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고 인민의 사랑을 받는 애국자로 삶을 마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그래서 반공병에 걸려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반공은 자신을 망칠 뿐 아니라 민족과 인민을 등지는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군 합니다. 인민의 편에 서있는 공산주의자들을 반대한다는 것은 곧 인민을 등지는 것과 같다고 보아야 합니다. 연공이 애국, 애족, 애민으로 될 때 반공이 나라를 등지고 민족을 등지고 인민을 등지는 길로 되는 이유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최윤구를 따라 인민혁명군으로 넘어왔던 김명준도 일생동안 혁명을 충실히 해오고 있습니다. 해방 후에는 오랫동안 나의 부관으로 사업하였습니다. 그는 고지식하고 순박한 사람인데 늘 우리 가까이에 있으면서 나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김정일동무는 김명준이 독립군에 있던 마지막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를 내세우고 잘 돌봐주고 있습니다.

홍춘수도 독립군에 있다가 인민혁명군에 편입하였습니다.

조국광복을 위한 투쟁의 나날 독립군부대가 조선인민혁명군에 합류하여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싸운 역사적 경험은 오늘 북과 남, 해외의 모든 민족 애국역량이 사상과 이념, 정견을 뛰어넘어 하나로 단합하여 외세와 공동으로 싸워야 하며 또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웅변으로 실증해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