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찾아낸 기회, 통일이냐 전쟁이냐

 

기회란 만들어내는 것이다. 세상에 저절로 되는 일이란 없다. 나라와 나라간, 체제와 체제가 부딪히며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한국만이 아니라 조선도 코리아의 일부이고 통일의 관점에서 보면 같은 민족이다. 그런 우리민족의 관점에서 볼 때 1990년대 이후 코리아는 세번의 통일의 기회를 찾아내었다. 

첫번째는 1994년 김일성주석과 카터전미대통령과의 평양회담이었다. 그 때도 지금처럼 일촉즉발의 상황이었고 전 세계가 숨을 죽이며 이 정치거인들의 회담을 지켜보았다. 결과는? 다 알다시피, 북이 흑연감속로발전소를 경수로발전소로 바꾸고 핵개발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이 조미외교수립, 경제봉쇄해제, 그리고 주한미군철수를 비롯한 대조선고립압살전략을 포기하는 것이다. 남북수뇌회담도 전격적으로 합의되어 온 겨레가 통일의 희망에 한껏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조선은 카터가 보여준 성의를 높이 평가하며 외국인에게는 처음으로 조선의 식물원을 ‘카터원’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운이 부족했는지 김일성주석의 급서로 인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클린턴정부는 조미기본합의서를 휴지장으로 여기며 조선이 식량난, 에너지난으로 수년 내 붕괴될 것이라 예견했다. 당시 김영삼대통령은 전군비상경계령을 내걸고 조문 가겠다는 재야인사를 감옥에 가두고 그랬다. 조선은 이 유례없는 난국을 ‘고난의 행군’이라 명명하고 독특한 선군정치로 정면돌파했다. 군사력이 곧 국력이고 여기서 체제안정, 자주통일, 세계평화의 유일방도를 찾았다.

1998년 조선은 5월에 파키스탄에서 칸박사의 지휘아래 지하핵시험을 성공한다. 그리고 8월에는 ‘광명성 1호’라는 인공위성을 탑재한 ‘백두산 1호’라는 우주발사체를 발사한다. 우주발사체란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3단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별칭에 다름 아니다. 이로써 미국본토를 핵공격할 수 있는 무장력을 가진 조선을 상대로 미국은 고립압살정책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클린턴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르윈스키스캔들 관련 기자회견문에서 ‘성관계’라는 직접적 표현 대신 50가지의 다른 간접적 표현을 만들어 내며 화제가 될 정도로. 비록 남녀관계는 그래도 그는 대북정책의 파탄으로 핵과 미사일이 동북아를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는 파국적 상황을 막을 줄 알았다. 그는 1999년 전국방장관 페리를 대북조정관으로 임명하고 유명한 ‘페리보고서’를 채택하게 한다. 대북 고립압살전략을 평화공존전략으로 전환시키는 이 보고서의 방법론을 따라 남북 간에, 조미 간에 새로운 평화적 관계가 설정된다.

2000년 6월의 남북수뇌회담과 6.15공동선언의 채택과 2000년 10월의 조미고위급정치회담과 조미공동코뮈니케의 채택은 바로 코리아민족이 두번째 통일의 기회를 찾아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을 아는 김정일국방위원장은 당시 상황을 조명록총정치국장이 백악관에 군복을 입고 들어가 사인을 받아내는 극적 형식으로 만들어내었다. 조미공동코뮈니케는 조미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모든 원칙과 방법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울브라이트국무장관의 방북이 이루어지고 클린턴미대통령의 방북이 예견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부시가 몇표 차이로 미대통령에 당선되고 희한한 9.11사건이 발생하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이미 조선은 1990년대 시련을 헤쳐나가던 시절이 아니었고 남북관계도 국제관계도 크게 변화된 상태였다. 2000년대 초반 유럽의 여러나라들과 전격적으로 수교하고 러시아와의 관계도 중국과의 관계도 충분히 회복한 조선은 부시의 이라크전쟁을 계기로 핵과 미사일 개발을 공공연히 적극화하며 자신의 무장력 수준을 한단계 발전시켰다.

부시정부는 2003년 대량살상무기보유 의혹만으로 이라크를 치고 후세인정권을 끝장냈다. 중동의 강자가 맥없이 쓰러질 때 다들 동북아를 근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정작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강경하게 발언하는 조선을 상대로는 전쟁이 아니라 대화의 방법을 선택했다. 베이징에서의 3자회담, 6자회담이 지루하지만 시작된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부시정부의 대조선 군사정책의 골간은 ‘럼스펠드독트린’, 외교정책의 골간은 ‘아미티지보고서’라고 한다. 미사일방어체제(MD)와 신속기동전략으로 무장하고 다자정치협상으로 뭔가 만들어보려 한 것인데 물론 뜻한 대로 되지 않았다. 김영삼전대통령과 비슷한 기질의 부시대통령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지연전술로 뻗대며 기회들을 날려버렸다. 

조선이 2005년 핵무장을 선언할 때만 해도 부시정부에는 기회가 있었다. 9.19공동성명을 발표하며 ‘정부간 다자안보포럼’의 공통분모를 찾을 때만 해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 성명을 ‘인권’이니 ‘위폐’니 하며 한편으로 자극하고 ‘용감한 방패’ 훈련으로 뒤집어놓을 땐 조선의 인내도 한계를 넘었다. 그 뒤로 7월의 미사일발사, 10월의 핵시험이 꽝꽝. 이 연속타격에 미국이 놀라고 세계도 놀랐다. 1000KT도 안되는 초소형 핵시험이 온 지구를 뒤흔들며 코리아와 전 세계의 군사정치지형을 바꾸어놓았다.

보도에 의하면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지금의 상황을 ‘강성대국의 여명’이 밝아온다는 말로 표현했다고 한다. 다 미사일발사, 핵시험 이전에 운을 뗀 것이고 그 극적인 상황을 역시 금강산 비로봉에서 동해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형상화해 보여주었다. 한국의 정치인들도 ‘중대 결심’을 할 때면 산에 올라간다. 북한산에도 올라가고 계룡산에도 올라가고 저 멀리 제주도 한라산에도 올라간다. 요즘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가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것 같은데 그곳엔 산이 없다. 하지만 그 정치적 무게가 다르다. 미국과의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결심을 내포한 산행은 성격도 다르고 온 세계가 숨죽이며 지켜본다.

영국의 유력언론 가디언이 밝혔듯이 조선의 핵시험은 매우 이성적이다. 조선 자체가 대단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조선은 미사일, 핵이라는 군사적 공세가 정치적, 경제적 도미노를 일으킬 것을 정확히 내다보고 있다. 조미, 조일이라는 적대관계에서는 수교를 의미하고 남북이라는 분열관계에서는 통일을 의미한다. 구체적 경로나 시기는 여러 변수를 봐야하겠지만 지금은 분명 전쟁이냐 통일이냐 하는 중대한 갈림길에 있다. 1994년과 2000년과 너무나 흡사한 상황이다. 역사는 단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어렵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민족’이라는 숭고한 말의 뜻을 깊이 새겨야 할 때다. 우리민족은 지금 세번째 통일기회를 맞고 있다.


2006.10.12
인터내셔널 기자 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