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익여사의 생애는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동지를 낳아 키운 만경대일가의 혁명투쟁사에서 특이한 자리를 차지한다. 슬하에 많은 자손들을 두신 여사께서는 그분들 모두를 혁명의 길에 내세우신 후에도 김보현선생과 함께 고향집사립문으로 쓸어 드는 비바람을 모두 막아내며 온갖 고초를 다 이겨내시었다. 할머니께서 남기신 고생의 흔적은 만주의 산야와 설원에도 점점이 찍혀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혁명하는 자손들의 뒷바라지를 평생토록 해오시다가 소문도 없이 조용히 세상을 떠나가신 할머니에 대해 아프게 추억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들려주시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중일전쟁을 시작한 이후시기부터 우리에 대한 「귀순공작」을 대대적으로 벌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공작에 학창시절의 나의 동창생들과 교사들, 「ㅌ.ㄷ」시절의 연고자들, 옥중에서 전향한자들, 친지들을 닥치는대로 끌어들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만경대에 가서 우리 할머니까지 끌어내다가 백두산일대를 휘젓고 다니며 오만가지 고생을 다 시키었습니다. 혈육들을 미끼로 하는 「귀순공작」은 그놈들의 마지막 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으로 인방나라들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민족이 예절바르고 인정이 많고 충효심이 높다는 것은 옛날 우리 나라에 와본 서방사람들도 한결같이 인정하였습니다. 구한국말기 우리 나라를 편답한 제정러시아의 학자들은 자기네 나라에 돌아간 다음 황제에게 올린 글에서 조선은 예의도덕에서 으뜸가는 나라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적들이 우리 할머니를 「귀순공작」에 끌어들인 것은 조부모님들에 대한 손자의 효성을 악용하여 우리를 좀 어째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제국주의침략자들에게는 인정사정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조선사람들의 미풍양속과 전통적인 윤리도덕까지도 다 자기들의 강도적인 전략에 악용하였습니다. 지난 세기 후반기에 양인들이 대원군을 굴복시켜 우리 나라의 문호를 개방해 보려고 그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에 달려든 것도 다 그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부대를 데리고 몽강일대에서 활동할 때 우리 할머니가 장백현 가재수마을에 끌려와 연금되어 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적들은 밤에는 할머니를 가두었다가 날이 밝기만 하면 매일같이 산으로 끌고 다니면서 『성주야, 할머니가 왔다. 이 할미를 생각해서라도 빨리 산에서 나오너라.』하고 함화를 하라고 강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재수사람들이 보내온 쪽지에는 장백의 여러 마을들에 나붙었다는 적들의 방문내용도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김일성의 할머니가 가재수에 와있다, 김일성은 지체말고 산에서 나와 할머니를 만나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적들은 빨치산의 밀영이 있을만한 대수림지대와 맞다 들릴 때마다 할머니더러 손자의 이름을 부르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따위 요구에 응할 할머니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뒤따를 것은 구박과 행패질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적들은 그 무슨 형사범이라도 다루듯이 총부리로 할머니의 등을 쿡쿡 찔러대며 위협도 하고 타일러도 보았지만 그건 다 소용 없는 짓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할머니를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촌노친이니 한두 번 발을 구르고 눈만 부라리면 겁에 질려 저들의 요구를 곰상곰상 들어주리라고 타산했겠는데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가재수의 지하조직성원들은 할머니의 정상이 말이 아니니 부대를 파하여 구출작전을 펴 달라고 하였습니다. 부대를 파할 형편이 못되면 자기네 조직원들을 동원해서라도 할머니를 구원하겠으니 양단간에 결심을 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기별을 받고 보니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몸이 떨리고 속에서 불이 일어나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빙천설지에 60고령의 노인을 끌고 다니며 고생시킨다는게 사람의 가죽을 쓰고 할 일입니까.

분한 마음 같아서는 당장 부대를 끌고 가서 적들을 요정 내고 할머니를 구원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분을 누르고 참기로 하였습니다. 더구나 그때는 「혜산사건」이 터져서 서간도와 국내에 있는 혁명조직들이 한창 시련을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수백 명 혁명가들이 철창 속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실태를 외면하고 친할머니부터 구원하려고 한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혁명을 지도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전투를 조직하면 할머니를 일단 구출할 수는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자칫 하다가는 적들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들 수도 있었습니다.

김평은 자기가 데리고 다니는 소부대를 동원해서라도 할머니를 구원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공작지로 빨리 돌아가서 박달을 비롯한 조선민족해방동맹원들을 구원할 대책이나 취하라고 설복했습니다.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떠나가던 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가 떠나간 다음 사실은 나도 울었습니다. 할머니를 지척에 두고도 참자니 정말 힘들었습니다. 지난 날에는 몇 포대의 쌀이나 몇 자루의 총을 얻으려고 싸움을 한 때도 있었고 한두 명의 애국자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서슴없이 전투를 조직하군 하였습니다. 그런데 친할머니가 별로 멀지도 않은 곳에 붙잡혀와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있다는데 그런 소식을 듣고서도 참아야 했던 내 심정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구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서도 억지로 묵새기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것이 바로 사령관으로서의 나의 남다른 고충이었습니다. 사람이 사사로운 감정을 이겨낸다는 것은 참으로 조련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온 나로서는 가재수지하조직의 통보자료를 받아본 순간부터 도무지 마음의 안정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때의 그 아픈 심정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유년시절과 소년시절에서 할머니는 어머니 못지 않게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만경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본 풍경들 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인 것의 하나는 엿장수들이 엿이 담긴 목판을 메고 『엿 사시오!』, 『엿 사시오!』하면서 동네방네를 돌아다니는 광경이었습니다. 어떤 날은 이야까에 넝마나 파고무신 같은 것을 실은 엿장수도 우리 마을에 오군 했습니다. 그들이 엿을 자르는 넙적가위를 절컥 거리면서 엿을 사라고 하면 온 동네의 조무래기들이 다 모여들군 했습니다.

그럴 때면 나도 달달한 엿 생각이 간절해서 군침을 삼키었지만 우리 집에야 돈이 있습니까, 고포가 있습니까, 헌 고무신바닥이 있습니까, 그때만해도 우리 동네에는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 없었습니다. 우리 집안 사람들도 모두 짚신을 신고 다녔지 고무신 같은 것은 신을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마을 조무래기들이 엿장수의 목판이나 이야까를 둘러싸고 떠들어댈 때에도 나만은 그 속에 끼우지 않고 뜨락에서 닭의 모이를 주든가 뒤울안의 장독대 곁에 가서 개미들이 기어 다니는 모양을 구경하는척했습니다. 우리 집안 어른들이 그러는 내 심리를 모를 이가 없었습니다.

언제인가 할머니는 귀한 쌀을 퍼가지고 나가 엿을 바꾸어온 적이 있습니다. 엿가락 몇 개를 들고 와서 내 손에 쥐여주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고마운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타개죽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집안에서 몇 가락의 엿 때문에 쌀을 퍼 들고 나간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할머니의 정이 어린 그 쌀바가지와 엿가락들이 지금도 눈에 삼삼합니다.

나는 어머니의 잔등에 업혔던 기억보다는 왜 그런지 할머니나 형실고모한테 업혀 다니던 일들이 더 기억에 생생합니다. 할머니는 친정집에 나들이를 갈 때에도 곧잘 나를 업고 가군 하였습니다.

남아의 나이 6~7살 이면 철이 좀 들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그 나이에는 부끄러움도 알아서 업혀 다니는 아이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는 봉화리에 올 때마다 우리 증손이가 그새 얼마나 컸나 보자고 하면서 내 앞에 잔등을 돌리군 하였습니다. 내가 쑥스러워하건 말건 상관이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등에 업히면 머리카락과 적삼에서 풀 냄새 비슷한 냄새가 났는데 나는 그런 냄새를 무척 좋아하였습니다. 그것은 노동 속에서 한생을 살아온 할머니들한테서만 맡아볼 수 있는 특이한 냄새였습니다.

우리가 만경대에서 살 때까지만 해도 할머니는 나를 독차지하다싶이 하였습니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할머니 곁에 있는 때가 더 많았습니다. 할머니의 투실투실한 팔은 어린 시절의 나의 베개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 팔베개를 베면 어째서 인지 잠이 잘 왔습니다. 할머니는 나를 껴안고 주무실 때마다 신기한 옛말을 들려주면서 공상을 키워주군 하였습니다. 어떤 날은 끼니때 간수해 두었던 누룽지나 대추 같은 것을 내 입에 슬그머니 넣어주기도 하였는데 그 맛이 별맛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 나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은 몇 곱절 더 강해졌습니다. 할머니는 가문의 장손인 나의 성장을 보는 데서 인생의 유일한 낙을 찾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할머니에게 낙이 있었다면 무슨 낙이 있었겠습니까. 잘 먹고 잘 입는 낙이 있었습니까, 산천유람 같은 것이나 하며 호강하는 낙이 있었습니까.

할머니가 품고 있던 소박하나 간절한 꿈은 나라의 독립이었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기다리며 그 독립을 위해 싸우는 자손들을 돌보아주고 그들의 뒷바라지를 성실하게 해주는 것이 할머니의 일이고 낙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사랑은 많은 경우 나에 대한 기대와 믿음으로 표현되었습니다. 1926년이면 우리 아버지가 세상을 하직한 해입니다. 그 해 여름 무송의 양지촌에 있는 아버지의 산소를 찾은 할머니는 묘 앞에 엎드려 슬프게 곡을 한 다음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증손아, 이제는 아버지가 메고 있던 짐을 네가 메야겠구나. 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어이 나라를 찾아야 한다. 나나 어머니에게 효도를 못해도 좋으니 조선을 독립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거라.』

나는 할머니의 그 말씀에서 큰 충동을 받았습니다. 만일 그때 할머니가 조선독립이 아니라 앞으로 부자가 되거나 출세할 생각이나 하라고 하였더라면 나는 그다지 큰 감동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할머니는 그런 것은 안중에 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할머니의 뜻이 아주 높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할머니의 그 말에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할머니가 나에게 나라의 독립과 같은 중대사를 부탁한 것은 나에 대한 믿음의 표시였습니다.

그 후 할머니는 만경대로 돌아가지 않고 한동안 무송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안도로 이사한 다음에는 거기에도 가있으면서 우리 어머니와 삼촌어머니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우리 할머니의 특징은 한마디로 강의한 늙은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머니는 그 나이의 여성들치고 보기 드문 강자였습니다. 가난하고 불행하고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그지없이 상냥하고 부드럽지만 사람같지 않은 자들에게는 추상같은 것이 우리 할머니입니다. 그 어떤 강권이나 불의 앞에서도 휘어들지 않는 것이 할머니의 성미이고 기개였습니다.

할머니가 소심하고 나약한 노인이었다면 나는 가재수지하조직이 보낸 통보를 받았을 때 그처럼 큰 충격을 이겨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나는 할머니가 내 심정을 이해할 것이며 혁명가의 할머니답게 인질로서 당하게 되는 온갖 고초와 시련을 꿋꿋이 이겨내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때 내가 할머니를 그렇게 믿은 것이 백 번 옳았습니다.

화성의숙시절의 나의 동창생인 박차석이 남패자밀영에 와서 나를 만나고 돌아간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양정우를 비롯한 1군, 2군의 간부들과 함께 중요한 회의를 할 때의 일입니다.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은 「귀순공작」을 위해서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종락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때 박차석은 자기가 진 죄를 솔직히 자백하면서 우리 할머니를 끌고 서간도땅을 돌아다니던 일을 다 털어 놓았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할머니는 내가 믿었던 그대로 적들에게 조금도 굽혀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 할머니를 인질로 끌고 다닌 것은 「귀순공작반」패거리들이었습니다. 이종락과 박차석은 그 공작반에 속해 있었습니다. 일본모략꾼들은 그들에게 우리 할머니를 「귀순공작」에 동원시키라고 강요하였습니다.

이종락과 박차석은 만경대에 나타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손자를 만나보고 싶지 않는가, 손자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있거든 있다고 말하라, 손자는 헛고생만 하다가 신세를 망치게 됐으니 그를 구원할 생각이 있거들랑 자기들이 하라는대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사람이 한번 죽으면 그만 이지 신문에 죽었다고 광고까지 난 손자가 살아있다니 웬 소린가, 그런 허튼 소린 듣기도 싫다고 하면서 등을 돌려댔습니다.

이종락이 바빠 나서 그 광고는 거짓광고다, 성주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 그런데 성공하지도 못할 독립운동을 계속하면서 험한 산속에서 공연히 헛고생만 하고 있다, 동양천지가 다 일본세상이 됐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백두산에서 소금도 없이 생쌀과 솔잎만 먹고 지내다나니 짐승처럼 온몸에 털이 나고 발은 닳고 몽드라져 그 형체가 사람같지 않게 되었다, 성주가 묘한 축지법을 써서 요리조리 피해가며 싸우기 때문에 그를 산에서 데려 내올 수 없다, 일본정부에서는 성주가 자기네 편으로 돌아서기만 하면 관동군대장자리도 좋고 조선군사령관자리도 좋고 무슨 벼슬이든 달라는대로 다 주겠다고 한다, 물론 집안식구들도 궁궐같은 집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성주를 빨리 돌려 세워야겠는 데 그 일에는 할머니가 나서는 것이 제일 상책일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뭉치돈 수백원을 내놓으며 이건 일본사람들이 보내는 초벌인사인데 이 돈으로 우선 집안살림에 요긴한 물건부터 사고 식모도 부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성이 독같이 올라 이 천하에 고현놈들, 그래 우리보고 제 손자의 목숨을 돈과 바꾸라는 거냐, 그런 개수작질은 싹 걷어치우고 당장 물러가라고 하면서 돈뭉치를 뜨락에 활 내던지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우리 성주한테 일본군대장이 아니라 그 하내비자리를 준대도 데리러 안가겠다, 내 아들 형직이와 형권이 죽은 것만 해도 가슴이 터진다, 내 눈앞에서 썩 물러들 가라고 호령했습니다.

판이 이렇게 되자 이종락과 박차석은 더 어쩌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말이나 돈으로는 우리 집안 사람들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적들은 총대로 할머니를 끌어 내여 만주로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렇게 되자 할머니는 좋다, 너희들이 억지로 날 데리고 가겠거든 가자, 그렇다고 너희들을 도와줄 줄 아느냐, 그 대신 나는 나대로 이 기회에 손자가 싸우고 있는 백두산과 만주의 산천이나 실컷 돌아보겠으니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고 하였습니다. 우리 할머니의 배짱이 정말 보통 배짱이 아니었습니다.

「귀순공작반」특무들은 1년 가까이 서간도의 산악지방으로 돌아다니며 할머니를 고생시켰습니다. 그런즉 육순이 넘은 노인의 몸으로 우리 할머니가 얼마나 고된 신역을 치르었겠습니까.

한번은 박차석이 할머니의 발이 부르튼 것을 보고 할머니, 이렇게 억울한 고생을 시켜서 죄송합니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을 하자니 사실은 우리도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니 할머니야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하고 할머니를 위로하였습니다. 박차석이 비록 전향은 하였지만 동정심만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힘들어도 내 손자가 싸우고 있는 산천을 보니 기운이 솟는다고 하였습니다.

적들이 총대로 몸을 쿡쿡 찌르며 손자의 이름을 부르라고 강요할 때마다 할머니는 매번 『나는 그런 미친 소리는 할 줄 모른다. 네 놈들이 나를 죽이고 무사할 줄 아느냐. 우리 손자의 총알을 받고 싶거든 어디 네놈들 하고 싶은대로 해봐라!』하고 맞받아 위협하군 하였습니다.

사실 「귀순공작반」패거리들도 자기네가 하는 일이 승산없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에 유격대의 습격을 받을지 몰라 벌벌 떨었습니다. 혁명군사령관의 할머니를 인질로 끌고 다니는 자기네 행각이 어떤 보복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귀순공작반」특무들은 어떻게 하나 유격대의 총알만은 면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자기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호해 줄 터이니 그 대신 열댓살되는 사내아이를 시동삼아 데리고 다니며 손자를 찾아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적들이 겁에 질려서 몸을 사리려 한다는 것을 간파한 할머니는 왜 하필 불쌍한 아이를 데리고 다닌단 말이냐, 나는 꼭 볼따귀에 살이 유들유들한 너희들과 같이 다녀야겠다, 혁명군이 겁나서 그런 생각을 한다면 너희들의 상관을 불러 사실대로 말해주겠다고 을러메었습니다. 그 바람에 특무들은 할머니에게 도리어 코를 꿰워 다니며 설설 기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할머니는 특무들에게 호령질을 해가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다하였습니다. 추우면 추워서 산에 갈수 없다고 하였고 피곤하면 피곤해서 쉬겠다고 하였습니다. 간혹 목욕탕물이 좀 미지근하거나 그 물을 일본놈들이 먼저 사용한 흔적이라도 있으면 김장군의 할미를 무얼로 알고 네 놈들이 나를 이렇게 허술히 대하는가고 하면서 호되게 꾸짖었고 특무들이 끼니때에 일본음식이나 중국음식을 내놓으면 조선음식을 가져오라고 위엄있게 분부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귀순공작」에 동원된 놈팽이들은 할머니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쩔쩔매며 바삐 돌아치군 하였습니다.

설명절 때 「귀순공작반」을 맡은 일본인독찰관은 이종락과 박차석을 불러 김장군 할머니에게서 설 인사를 받고 싶은데 그 늙은이더러 와서 세배를 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독찰관의 말을 전달받은 할머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세상에 별소릴 다 듣는구나, 버릇없는 놈! 그놈더러 와서 김장군 할미한테 세배를 하라구 해라!』하고 불호령을 내리었습니다.

독찰관은 그 말을 듣고 어찌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손에 들고 있던 술잔까지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수틀리면 흉기부터 뽑아 들고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빌 때까지 야료를 부리는 독종이었다는데 그 날만은 기가 꺾여 아무 행패질도 못하고 『과시 김일성의 할머니가 다르긴 다르다. 손자가 백두산의 호랑이라더니 그도 역시 할미호랑이가 틀림없다.』고 감탄해마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처럼 대바르고 도고하게 처신하는 우리 할머니 앞에서 박차석은 매일같이 나약한 변절자로서의 죄를 문책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솔직히 실토하였습니다.

「귀순공작반」특무들은 결국 헛물만 켜고 할머니를 만경대로 돌려보내고 말았습니다.

나는 박차석을 통하여 그가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귀순공작」정형을 들으면서 조부모님들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으로 고향의 조부모님들에게 감사를 드리었습니다. 박차석은 그때 밀영을 떠나면서 왜놈들의 강요에 못이겨 비록 전향은 하였지만 조국과 민족 앞에, 더욱이 산에서 고생하는 내 앞에 부끄러울 일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산삼 몇뿌리와 편지를 주면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가만히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해방 후 조국에 돌아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내가 산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는가고 물어보니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산삼만은 받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마 박차석을 우리 군영에 들여보냈던 일본인독찰관이 가로챘던 것 같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 남패자밀영에서 박차석을 통하여 보낸 편지를 만경대 조부모님들은 손자분이 조국광복을 이룩하고 개선할 때까지 고이 보관해두었다. 그 편지는 1946년 5월 29일부 「정로」의 지면에 실림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신문 「정로」는 「노동신문」의 전신이다.

혁명을 배신한 전향자에게 처벌이나 처형대신 밀서의 전달이라는 어려운 부탁을 하신 이 세상에 다시 없는 사실을 통해서도 우리는 우리 수령님의 하늘같은 도량과 관용을 가늠할 수 있다. 박차석도 한가닥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도량 앞에서 남 모르는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가 상전들에게 편지를 바치지 않고 고스란히 전한 것을 보면 밀영에서 한 약속을 지킨 셈이다.

조국해방위업에 대한 신념과 의리 앞에서 언제나 투철하고 낙관적이었던 혈기왕성한 20대장군의 기백과 체취가 그대로 스며있는 이 짤막한 편지가 세상에 공개되어 후손들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편지전문은 아래와 같다.

 

『할머니의 극진한 심정은 잘 알았습니다.

남아 한번 국사에 몸을 바친 이상 그 몸은 완전히 나라의 것이요 민족의 것인 것은 두말할 것 없습니다.

이제 멀지 않어 반가히 할머니 앞으로 돌아갈 날이 있사오니 안심하시고 계십시오.』

 

만경대에서 살고 있던 김일성동지의 일가분들은 그 편지를 받고 모두다 눈물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 후 이보익할머니께서는 임수산이 소속되어 있는 또 하나의 다른 「귀순공작반」놈들에게 끌려가 북간도땅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시었다.

정전 후 이보익할머니의 영구 앞에 모인 일가친척들과 친지들은 이 부분을 회고하실 때 수령님의 안광에 매우 침통한 빛이 어려있었다고 하였다.

 

할머니가 두번째로 만주땅에 끌려와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나는 안도현 처창즈부근에 있을 때 들었습니다. 그때 우리 할머니를 데리고 다닌 「귀순공작반」의 구성을 보면 일본인특무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공작반에 우리 주력부대에서 참모장을 하던 임수산도 속해있었습니다. 그가 투항하면서 일본상전들 앞에 어떻게 하나 나를 잡아보겠다고 단단히 맹세를 다졌다고 합니다.

이 공작반에서는 처음에 형록삼촌을 인질로 끌어가려고 했습니다. 할머니를 끌고 갔대야 이가 들지도 않고 소득도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형록삼촌은 우리 조부모님들 슬하에 남아있던 유일한 아들이었습니다. 놈들이 만경대에 나타나서 삼촌을 마구다지로 끌고 가려고 하자 할아버지는 주먹으로 구들장을 치며 그것만은 절대로 안된다고 하였고 할머니는 내 슬하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아들을 내세워 우리 장손을 잡겠다는 너희들도 사람새끼들이냐, 천벌을 받을 줄 알라고 되게 꾸짖었습니다. 형록삼촌 역시 집에서 죽으면 죽었지 조카를 잡는 놀음에는 나설 수 없다고 버티었습니다.

적들의 강압으로 결국은 할머니가 또 속절없는 만주걸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한테는 네 놈들이 아무리 지랄을 해도 김장군의 할미를 이길 것 같으냐 하는 뱃심이 있었습니다. 형록삼촌을 대신하여 죽을 각오까지 품고 집을 떠난 할머니는 이번에도 북간도의 험한 산천을 몇 달 동안 강제로 끌려 다녔지만 적들 앞에서는 한번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임수산이 숙소나 노상에서 저들의 지령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다몰아댈 때면 할머니는 네 놈은 내 손자를 배반했지만 나는 살아도 죽어도 내 손자편이고 조선편이다, 어디 네 명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두고 보자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 당시 할머니가 인질로 재차 끌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전투를 많이 조직하였습니다. 그것이 할머니에게 내가 건재해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최상의 방도였고 말로는 형용할 길이 없는 나의 만단심회를 담아 할머니에게 올린 인사이기도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우리가 싸움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누가 곁에서 듣건 말건 조금도 상관치 않고 『내 손자가 장하다! 어서 왜놈들을 다 잡아치우고 우리 나라 땅에서 왜놈들의 씨를 말려라!』 하고 기세를 올리었다고 합니다.

적들은 이번에도 할머니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인질로 나를 낚기 위한 놀음을 더는 벌이지 않았습니다. 결과를 보면 우리 할머니가 총 한 자루 없는 노인의 몸으로 적들을 이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고향집 사람들에 대한 군경들의 박해와 수모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가문에 애국자들이 많은데다가 내가 혁명군사령관을 하다나니 우리 집안 사람들이 수십년 동안 실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왜정말기에 형록삼촌은 간단한 어구를 마련해 가지고 놈들의 폭압을 피해 남포앞바다에 가서 고기잡이를 해가며 겨우 목숨을 이어갔습니다.

우리 가문에서 고생을 제일 많이 한 분은 할머니였습니다.

해방 후 만경대고향집에 처음으로 들어서던 날 내가 할머니를 보고 『나 때문에 할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지요.』라고 했더니 할머니는 오히려 환하게 웃으면서 『내 고생이야 네가 한 고생에 어찌 비기겠느냐. …고생으로 말하면 왜놈들이 더 많이 했지 내가 무슨 고생을 했단 말이냐. 너는 나라를 찾는 싸움을 하느라고 숱한 고생을 했구 왜놈들은 내 시중을 들어주느라고 고생했지. 네 덕에 나는 산천구경만 실컷 하다가 돌아왔다. 그거야 호강이지 어디 고생이냐.』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20년만에 고향집에 오면서도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 빈손으로 왔다고 사과하였습니다. 그 말에 할머니는 오히려 나를 타일렀습니다.

『왜 빈손이란 말이냐. 독립이 얼마나 큰 선물이냐! 네가 성한 몸으로 해방을 안고 왔으니 나는 그 이상 더 바랄게 없다. 네가 크고 해방이 크지 세상에 더 큰게 뭣이 있겠니.』

70이 다 되어 오는 촌늙은이의 말치고는 너무나도 호방하였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우리 할머니가 정말 대단한 할머니로구나 하고 탄복하였습니다.

일제의 총검통치가 절정에 달하였던 그때 할머니가 적들의 강권과 위협에 휘어들지 않고 혁명가의 어머니, 혁명가의 할머니로서의 존엄과 지조를 끝까지 지켜낸 것은 큰 승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할머니들 가운데는 우리 할머니와 같은 애국자들이 많습니다.

나는 이따금씩 이런 생각을 하군 합니다.

할머니는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직업적인 혁명가도 아니다, 학교를 다닌 적도 없고 조직적인 혁명교양을 받은 일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 글도 모르는 촌늙은이가 적들과 그처럼 당당하게 대결할 수 있었으며 매사에 처신을 그처럼 지혜롭고 대바르게 할 수 있었는가고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우리 집안 가풍이 그리고 혁명이 할머니를 그런 여걸로 만들어준 것 같습니다. 우리 집안 가풍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것은 나라와 백성이니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초개와 같이 바친다는 것, 한마디로 말하여 애국, 애민, 애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자손들한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봅니다. 아들이나 손자들이 모두 혁명을 하였기 때문에 할머니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식들이 혁명을 하는 집안에서는 부모들이 대체로 혁명을 하기 마련입니다. 혁명을 하지 못하면 혁명의 동조자, 방조자로라도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식들이 훌륭한 부모를 모시고 있으면 그 영향 밑에서 쓸모있는 인재가 된다고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모들도 똑똑한 자식들을 두게 되면 계몽되고 각성됩니다. 그리고 자식들이 하는 일에 보조를 맞추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하여 나는 가정을 혁명화하는 데서 젊은 세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늘 강조하군 합니다.

물론 선친들이 혁명을 했다고 하여 그 후손들도 저절로 혁명가가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사람이 혁명을 하자면 부모들의 영향도 중요하지만 자체의 주동적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꿈에라도 조상덕을 바라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 가문의 젊은 세대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희생된 선친들과 선열들의 뒤를 이어 사회주의건설과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언제나 앞장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할머니가 만년까지 농사일에 전념한 것도 결국은 나라를 위한 것이고 사회주의를 위한 것입니다.

할머니가 대적투쟁을 잘 할 수 있은 다른 요인의 하나는 우리의 힘이 강대했다는 데도 있었습니다. 적들이 우리에 대한 「귀순공작」을 벌일 때 조선인민혁명군은 전성기에 있었습니다.

혁명군의 위용과 명성이 할머니에게 힘을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혁명무력을 건설한 다음 적들과의 대결에서 연전연승의 전과를 쌓지 못했거나 광범한 군중을 통일전선의 깃발 밑에 묶어 세우지 못하고 현상유지나 하면서 산속에 배겨있었더라면 할머니는 그처럼 고압적으로 적들과 싸워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회주의건설에서도 이치는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세대들이 일을 많이 하고 힘을 크게 길러야 조국이 부강해지고 인민이 높은 존엄과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존엄이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당이 위대하고 수령이 위대하고 나라가 부강해야 존엄이라는 것도 생기고 자부심도 높아지는 법입니다. 젊은 세대들이 주력이 되어 당과 수령을 잘 받들고 일을 많이 해서 부강한 조국을 건설해야 합니다.

 

1946년 6월 9일 만경대마을사람들과 항일빨치산참가자들, 평양시의 당, 행정기관 일꾼들은 만경대인민학교에서 할머니의 생신 70돌을 축하하는 연회를 마련하였다. 그 연회석상에는 평양에 와있던 소련군대의 로마넨코소장도 참가하였다. 그는 항일혁명투사들과 여러 내빈들의 뒤를 이어 축사까지 하였다.

할머니의 70돌 생일연이 큰 사회적인 관심 속에서 성대히 벌어지게 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만경대에 나오시었던 김일성동지께서는 각계 대표들의 진정에 넘친 축사까지 받게 되자 할머니의 장손으로서 가족을 대표하여 답사를 하게 되시었다.

할머니의 70평생의 생애를 몇 마디의 말씀으로 집약하신 그 답사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우리 할머니는 아무 것도 모르는 촌할머니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과 조카, 손자들이 혁명사업에 나섰을 때 조금도 반대하지 않고 도리어 격려해 주었으며 그들이 혁명활동을 위해 슬하를 떠나서 혹은 원수들에게 잡혀 죽고 혹은 옥에 갇히고 혹은 행처불명이 되었지만 할머니는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놈들한테 붙들려 만주에까지 가서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도 처음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할머니가 비록 글자는 모르지만 희망을 가지고 끝까지 싸웠다는 것을 말합니다. 할머니는 무엇인가 앞을 내다보고 희망을 끝까지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할머니의 그 희망은 끝내 이루어 졌습니다. 작년 8월 15일 조선의 해방이 그것이 아닙니까.

우리 할머니는 이 날을 보기 위하여 오늘까지 살았으며 마침내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이와 같은 연회가 오늘뿐 아니라 앞으로도 여러 번 있기를 바라는 동시에 할머니도 더욱 오래 사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이보익할머니께서는 1959년 10월 83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시었다.

광복 후 14년을 제외한 이전의 근 70성상은 가난과 싸우고 불의와 싸우고 외적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던 풍랑 사나운 세월이었다. 총검의 압박하에 강행된 두 차례의 만주행은 그 무엇에도 대비할 수 없는 최악의 수난이었다. 그렇지만 할머니께서는 장장 수십년에 달하는 그 암흑의 시대를 적수공권으로 꿋꿋이 헤쳐오시어 손자분께서 안고 오신 해방의 날을 맞으시었고 이 땅에 세워진 사회주의낙원을 보시었다.

그 숨막히는 암흑의 시대를 거쳐 할머니께서 장수하실 수 있은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80여성상에 달하는 할머니의 수난 많은 생애의 증견자이며 보증자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말씀을 새겨보자.

 

우리 할머니가 장수할 수 있은 하나의 요인은 노동입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일생을 노동으로 늙어왔습니다. 자손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한 중단없는 노동, 이것이 할머니의 육체와 의지를 단련시켜 주었습니다. 육신을 부지런히 놀려 사람들의 생활에 유익한 그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창조해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오래 사는 법입니다.

할머니는 마음속 깊은 곳에 꿈을 묻어두고 살았습니다. 말하자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값있게 살았습니다. 할머니의 생애가 속절없이 흘러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의의가 있고 목표가 있었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할머니는 한평생 그 무엇을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해방 전에는 독립의 날을 기다렸고 해방 후에는 나의 귀향을 기다렸으며 나를 만난 다음에는 만민이 잘 사는 날을 기다렸고 조국이 통일되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일생을 기대와 희망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장수하는 법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시련도 잘 이겨냅니다.

나의 체험에 의하면 혁명은 꿈이 많고 이상이 높은 사람들이 합니다. 꿈이 많고 이상이 높아야 위대한 발명도 합니다. 우리 할머니는 꿈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할머니가 장수할 수 있은 것은 꿈이 많은 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상이 확고하고 신념과 의지가 강한 것, 꿈이 많은 것, 근면한 것, 이것이 우리 할머니가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할머니는 국가수반의 조모였지만 일생을 소박하고 청렴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조국에 돌아온 후 당을 꾸리고 국가건설이나 끝내면 할아버지, 할머니를 평양에 데려다가 모시고 함께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만한 연세면 손자의 부양이나 받으며 여생을 편히 쉬어도 시비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혁명열사의 유가족들을 우대하는 제도가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런 우대만 받아도 여생을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런 국록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손자의 덕으로 호강하는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수수한 평백성으로 살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나니 말년까지 농사일을 계속하였습니다.

『일거리가 없는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니라.』, 이것이 우리 할머니의 소박한 철학이었습니다.

일생을 노동으로 늙어온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다문 얼마간의 휴식이라도 시키고 싶어 나는 이따금씩 조부모님들을 우리 집에 모셔오군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조부모님들은 일감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언제인가는 깨진 바가지를 갖다 주며 그걸 기워 달라고 하였습니다. 손자며느리가 해주는 음식맛이 별맛이고 증손자, 증손녀를 안아보는 재미가 별재미라고 하면서도 할머니는 일거리가 없으니 갑갑해서 야단이고 흙을 밟지 않고 지내자니 속에서 불이 나 못견디겠다고 하면서 매번 한주일을 채우지 못하고 만경대로 돌아가군 하였습니다.

간혹 우리가 살림에 보탬을 주려고 무엇인가를 해드리려고 하면 할머니는 이 할미걱정은 안해도 되니 백성들 걱정이나 하라고 하면서 노상 그것을 사양하군 했습니다. 수상도 사람인데 나라고 왜 제 할머니를 호강시키고 싶은 욕심이 없었겠습니까. 더구나 사지판을 헤매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돌아온 할머니가 아닙니까.

한생을 홑옷을 입고 살아오신 할머니에게 두툼한 솜옷도 지어드리고 생일이 되면 소주나마 한두 병 차고 가서 할머니의 장수도 빌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런 보잘 것 없는 성의마저도 마다하였습니다.

털어놓고 말해서 내가 만일 수상이 아니고 평범한 보통공민이었더라면 할머니를 위해 무엇이든지 좀더 해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손으로 나무를 찍어 기와집도 지어드리고 극장에 모시고가서 「심청전」구경도 시키면서 여생을 편안히 보내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국사에 파묻히다보니 할머니에게 솜옷 한 벌 지어드리지 못했습니다.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증조할아버지대부터 내려오는 소박한 초가집에서 그냥 살았습니다. 나는 나라의 모든 마을들에 기와집을 지어주고 천지개벽을 일으키면서도 제 할머니한테는 새 집을 지어드리지 못했습니다.

할머니를 위해 내가 해드린 일은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돋보기를 하나 사드린 것뿐인데 그것만은 할머니도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나라일을 돌보느라고 동분서주하는 사이에 세월도 가고 할머니도 갔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를 보내고나니 후회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머니 앞에서도 그랬지만 할머니 앞에서도 나는 역시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할머니생전에 솜옷 한 벌이라도 변변히 지어드렸더라면 이다지도 가슴 아프지는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