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 변경 없으면 회담 성과도 없다

신뢰 구축은 대북 제재 전면 해제로부터

이석철 (2006년 11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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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실험 실시 이후 초긴장 상태에 빠졌던 한반도 정세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지난달 말 e북․미․중 3국이 베이징에서 비공개 회동을 갖고 빠른 시일 안에 6자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f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일단 안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번 6자회담은 오는 18일에 개막되는 APEC(에이팩) 정상회의가 끝난 후 다음달 중순께 열릴 전망이다. 지난 2일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g6자회담의 조기 개최를 원한다h고 직접 언급하는 등 미국이 조기 개최를 위해 서두르고 있다고 한다. 6자회담의 재개에 미국이 적극적인 만큼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5차 6자회담의 개막은 거의 확실시된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북한에 콧대 꺾인 부시 행정부

e군사적 제재 조치f까지 거론되던 긴박한 상황에서 돌연 e6자회담 재개f가 가시화되는 갑작스런 반전을 두고 그 배경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e베이징 3자 회동에서 미국이 금융 제재의 부분 해제를 약속했기 때문에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끌어낼 수 있었다f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는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알맹이가 빠진 얘기다. g금융 제재와 6자회담은 별개의 문제h라며 대화 자체를 거부하던 미국의 완강한 태도가 달라진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베이징 3자 회동이 임박한 시점에 미 국무부의 한 관계자는 g부시 행정부가 중간선거를 앞두고 대북 양자협상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h고 말했다. e3자 회동f과 e중간선거f의 관련성을 강하게 시사한 것이다. 이 발언을 통해, 북한의 핵실험 실시로 대북 적대정책이 정치적 공세의 표적이 됨에 따라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부시 행정부가 매우 곤혹스런 입장에 놓였고 3자 회동의 형식을 빌어 북미 양자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핵실험으로 확인된 북한의 강경한 자세가 부시 행정부의 고집을 꺾었다는 의미이다.
북한의 핵실험 이후 궁지에 몰린 미국의 처지는 시간이 갈수록 e대북 압박f을 외치는 목소리에서 점차 맥이 빠지고 핵무기와 핵물질의 전파를 가장 두려워하는 속마음을 드러내놓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최근 부시 미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g핵무기와 핵물질 이전은 절대 안 된다h, g북한에 대응할 목적으로 일본․한국․대만이 핵무장을 하는 것은 반대한다h는 발언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북한의 e핵 공세f는 갈수록 도수가 높아지고 있는데 북한을 압박할 수단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니 e우선 핵 확산이라도 막고 보자f는 다급한 심경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제 관심은 근 15개월 만에 재개되는 6자회담에서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에 쏠릴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금융 제재를 해제하는 문제와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는 문제가 주요 의제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가운데 금융 제재 문제의 해법과 관련해서는 비교적 자세히 보도되었다. e6자회담 내에서 실무그룹을 만들어 금융 제재 문제를 다루며, 동결된 북한의 계좌에서 합법적인 자금(50% 가량)에 대해서는 곧바로 풀어준다f는 미국의 의도가 알려진 것이다.

금융 제재 해제만으로는 안 된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대북 금융 제재 해제는 진행 과정에 있던 대화, 즉 6자회담을 중단시킨 걸림돌을 없애치운다는 의미를 가질 뿐이지 북한의 핵폐기에 대한 반대급부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4차 6자회담에서 합의된 것은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 폐기를 포함한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및 북일 관계 정상화를 비롯한 영구적 평화체제 구축이었다. 좁게 보면, 북한은 핵무기를 폐기하고, 미국 등 국제사회는 그 대가로 북한 체제를 인정하고 평화를 보장하며 에너지를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금융 제재 해제(그것도 e부분f 해제)만으로 북한의 핵포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이번에 열리는 5차 6자회담의 성과 여부는 9․19 공동성명의 이행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9․19 공동성명의 핵심은 미국이 북한을 이른바 e불량국가f, e범죄국가f로 보면서 지구상에서 소멸해 버려야 할 존재처럼 취급해온 기존의 반북 적대정책에서 벗어나 전향적 태도를 보일 때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9․19 공동성명에 흔쾌히 합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정신에 위배되는 그 어떤 e대책f이나 e조치f도 북한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없을 것이다.
급박한 상황을 대화 국면으로 돌려놓았다는 측면에서 이번 e6자회담 재개 합의f 소식이 다행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아직은 미국의 e애매한 태도f 때문에 5차 6자회담의 전망을 낙관하기 어렵다. 베이징 3자 회동이 있기 전 부시 미 대통령은 g북한이 6자회담에 다시 나오더라도 가시적인 핵폐기가 있기 전까지는 제재를 계속할 것h이라고 했으며 e6자회담 재개f 소식이 나온 직후에도 g(북한의 6자회담 복귀가) 기쁘지만 e북한 핵폐기f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유엔 제재는 계속될 것h이라고 거듭 밝혔다. 한마디로 e대화와 제재를 병행한다f는 뜻이다.
실제로 미국 주도의 대북 압박은 6자회담 재개 소식이 나온 뒤에도 중단될 조짐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유엔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안에 따라 구성된 유엔 대북제재위원회는 지난 2일 e대북 수출입 금지 품목f을 확정해 발표했다. 민감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은 목록에서 제외했지만 수백 가지 품목을 명시함으로써 북한의 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e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구상f(PSI) 훈련도 계속 확대되고 있다. 베이징 3자 회동이 있던 바로 그날 바레인 앞바다에서는 25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북한과 이란을 겨냥한 대규모 PSI 훈련이 벌어졌다. 미국은 러시아와 e핵 테러 방지 구상f도 추진하고 있다.

해결의 실마리는 미국의 태도 변경

e대화를 해도 제재는 계속된다f는 미국의 태도는 모호하고 이중적이다. 어차피 핵실험 공세에 떠밀려 금융 제재를 풀기로 한 마당에 뭉개진 자존심을 회복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인지, 일단 대화의 연막을 쳐놓고 막후에서 대결 정책을 추구하며 전쟁 준비를 다그치겠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개인들 사이에서도 대화가 소통과 합의로 이어지려면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깔려 있어야 한다. 뒤로는 칼을 갈면서 하는 e대화f가 얼마나 성실할 수 있으며 과연 상호이해로 이어질 수 있겠는가.
5차 6자회담의 목표는 9․19 공동성명의 이행으로 나아가는 실질적 조치의 첫 단계를 현실화하는 데에 두어야 한다. 이는 평화와 안정을 희구하는 한국민의 바람이며 동시에 국제 사회의 보편적 요구일 것이다. 9․19 공동성명이 말뿐이 아닌 실천으로 이어지려면 북한을 핵 보유국, 주권국가로서 존중하고 회담에 성실하게 임하는 미국의 태도 변화가 전제돼야 한다.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을 범죄시하면서 e선 핵포기f 주장을 되풀이하는 식으로는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애초에 e북한의 핵 보유f라는 현 상황이 빚어진 데에는 미국의 책임이 크다.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뒤 세계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고 북한과 이란을 공공연히 위협하며 이스라엘을 부추겨 레바논을 무참히 짓밟는 횡포한 미국을 목격해왔다. 미국의 전횡은 뭇 여성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연쇄 성폭행범 e발바리f의 범죄 행각과 유사한 점이 있다. 혼자 사는 여성들만 골라 성폭행을 저지르는 흉악한 범죄자에 대처해 가스총을 휴대한 여성을 비난할 수 없듯이 북한에게 일방적인 무장해제를 강요하는 것도 온당치 못한 일이다.
위기감을 조장시키는 미국의 거짓말도 그만둘 때가 됐다.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보유했다는 대량살상무기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북한의 e불법행위f들에 의한 구체적인 피해상이 제대로 알려진 적도 없다.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보유한 엄청난 숫자의 핵무기보다 북한의 핵무기 몇 개가 국제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는 미국의 일방적인 주장을 언제까지 경청해주어야 하는가.
미국의 입김에 휘둘리는 유엔의 편파성도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입만 열면 e국제 사회의 평화f를 앞세우는 유엔은 최근 레바논에서 저질러진 엄연한 전쟁범죄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100여 개의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이스라엘은 조금도 건드리지 않으면서 유독 북한의 핵무기만 걸고들며 미국의 행동대 노릇을 자처하고 있는 유엔은 공정한 심판일 수 없다. 편향된 대북 제재에 나서고 있는 유엔안보리는 북한의 e자위적 조치f들을 질타할 자격과 정당성을 스스로 내던졌다. 
미국은 e체제 붕괴f를 노린 반북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모든 대북 제재 조치를 해제해야 한다. 유엔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안과 제재 조치들도 즉각 철회되어야 한다. 국제 사회에 대한 공약인 9․19 공동성명은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같은 태도 변경이 없이 다가오는 5차 6자회담의 성과를 바란다는 것은 파종도 하지 않고 수확을 기대한다는 것과 다름없다. 그것은 오직 모종의 e결과f를 노린 시간 끌기 전술로만 이해될 뿐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