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영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서거하신후 여러 달이 지난 어느날 일꾼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었다.

『금수산의사당에는 수령님께서 애용하시던 금고가 있었습니다.

수령님께서 그 금고안에 무엇을 보관하시었는가 하는 것은 부관들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수령님께서 서거하신 다음 그 금고를 열어보려고 하였으나 열쇠를 찾지 못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며칠전에 그 열쇠를 찾아 금고를 열어보니 그 안에 수령님께서 … 김책동지와 함께 찍으신 사진이 있었습니다.…

원래 수령님께서는 사진들을 다 당역사 연구소에 보관하시었습니다. 그런데 수령님께서 김책동지와 함께 찍으신 사진만은 직접 금고에 따로 보관하여 두시었습니다.

이것은 수령님께서 전우인 김책동지를 얼마나 못잊어 하시었는가 하는 것을 잘 말하여 줍니다.』

수령의 추억 속에서의 영생, 그것은 인간이 한생을 통해 지닐 수 있는 영광가운데서도 가장 큰 영광이며 혁명가가 한생을 바쳐 도달할 수 있는 행복가운데서도 가장 큰 행복이다. 김책동지는 그 영광과 행복의 상상봉에 있는 충신중의 충신이다.

그는 어떻게 되어 수령의 추억속에 영생하는 인간으로 되었는가.

내가 김책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하바롭스크에서 국제당이 소집한 회의를 할 때입니다. 거기서 최용건도 만나보았습니다. 내가 그래서 하바롭스크를 잊지 못합니다. 그때 김책은 북만성위와 동북항일련군 3로군 대표로 회의에 참가하였습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여러달 하바롭스크에 머물다보니 나와 김책은 서로 내왕을 자주 하였습니다. 내가 들어있는 숙소에서 안길이와 서철이도 숙식을 하였는데 거기에 김책이 와서는 한두시간씩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군 했습니다.

그때 김책을 만나보고 받은 인상이 얼마나 강했던지 지금도 첫 상봉을 하던 때의 광경이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나이 40이 채 되기도 전에 앞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한 그의 침착한 모습을 보니 첫눈에 마음이 끌리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초면인 김책이 자꾸만 구면처럼 생각되는 것이었습니다. 소문을 많이 듣고 또 마음속으로 그리던 사람이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통성을 한 다음 첫 대면인데 구면 같다고 했더니 김책은 자기도 김일성이 초면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나와 김책이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상대를 그만큼 마음속으로 서로 생각하고 그리워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김책이나 최용건을 얼마나 만나고 싶었으면 부대를 데리고 북만에까지 갔다왔겠습니까. 김책이 나를 얼마나 만나고 싶었으면 벌써 1930년에 길림부터 찾았겠습니까. 그리고 또 최용건이 나와의 공동투쟁을 얼마나 열망했으면 간도에 연락원을 네번이나 보냈겠습니까.

투쟁무대가 북만이건 동만이건 우리는 그때 모두가 다 조선혁명을 생각하였고 자기가 조선사람이며 조선의 혁명가라는 것, 단체의 소속이나 지역에 관계없이 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몸 바쳐야 할 조선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런 공통성이 동만과 북만의 조선혁명가들로 하여금 오래전부터 서로 그리워하고 동경하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책이나 최용건이 왜 더구나 동만을 자꾸 넘겨다보았는가. 조선사람들이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동만의 2군이 조선인부대라면 그들이 소속되어있던 3군이나 7군은 다 중국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부대들이었습니다. 언어와 풍습이 판이한 중국사람들 속에서 지내다나니 늘 조선사람들이 수십만이나 와글와글하는 동만을 부러워했고 조선사람들이 대다수를 이룬 우리 부대들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사령을 만나는 길이 왜 이다지도 멀었는지.』

초면인사가 끝난 다음 김책이 혼자소리처럼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내 가슴을 파내리었습니다.

김책은 통성이 끝난 다음에도 오래도록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얼굴을 쳐다보니 눈에 눈물이 글썽했습니다. 간도의 조선사람들이 얼마나 그립고 조선인부대들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그 과묵한 사람이 눈물까지 보였겠습니까.

그날은 나도 눈물을 흘리었습니다.

김책의 선친은 나라가 망하자 인차 가족을 데리고 간도로 들어갔습니다. 간도가 땅도 많고 살기도 좋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땅으로 말하면 학성도 옥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향땅에서는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가난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고향이 좋은줄이야 누가 모릅니까. 밥술이라도 얻어먹으려니까 줄레줄레 북행길에 오른 것입니다.

김책이네 부모들은 간도에만 가면 살길이 트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을 셋이나 둔 부모들이니 노력걱정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큰 기대를 걸었던 세 아들은 집안일은 뒷전으로 밀어놓고 혁명, 혁명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 집안에 혁명바람을 끌어들인 것은 김책의 형 김홍선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3.1인민봉기 때 거리에 나가 독립만세도 부르고 독립군부대를 따라다니면서 청산리전투에도 참가하고 공산주의운동에도 뛰어 들었습니다. 그가 교편을 잡고있던 룡정 동흥중학교에 러시아에서 건너온 학생들이 적지 않았는데 아마 그들과 접촉하면서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였던 모양입니다. 김홍선은 녕안현 일대에서 공산당구위로 일하다가 모해에 걸려 억울하게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김책의 동생도 쟁쟁한 혁명가였습니다. 김책은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자기 동생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다는 기사를 읽은 일이 있는데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김책은 농사일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야학에 다니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혁명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관계한 조직이 동만청총이었습니다. 그후 그는 공산당에도 입당하였습니다. 김책이 소속된 세포는 화요파의 영향 밑에 있던 조직이었습니다.

1925년에 창건된 조선공산당이 파쟁놀음 때문에 해산된 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자기가 한때 이 당산하의 어느 한 세포에서 생활했다는 것을 다 밝히었습니다.

그 당시 만주 땅에는 두개의 만주총국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화요파가 장악하고 있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에 대항하여 엠엘파가 만들어낸 만주총국이었습니다.

김책은 영도권쟁탈로 일관된 파쟁의 내막을 알고는 권력다툼을 일삼는 공산당상층 인물들에게 환멸을 느끼었습니다. 그 나날에 감옥에도 잡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파쟁 속에서 조락해가는 공산주의 운동실태를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국제당이 조선공산당을 해산시켰다는 놀라운 소식이 감방안에 까지 날아왔습니다. 파쟁으로 피투성이가 된 당이었지만 그 당마저 해산되었다고 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이제부터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김책은 감옥안에서도 감옥밖에 나와서도 이 한가지 생각만 했다고 합니다. 기성세대에 의거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겠고 그렇다고 기성세대를 부정하자니 그것을 대신할만한 세력이 없는 것 같고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야 출로는 막연한데 감옥문을 나섰다고는 하나 수중에 돈 한푼 없으니 이 몸을 어디다 어떻게 건사하겠는가. 이렇게 막막한 생각을 하다가 은인에게 인사라도 한마디 하고 가는 것이 도리라고 찾아간 곳이 허헌선생네 집이었습니다.

김책이 재판을 받을 때 변호를 서준 사람이 바로 허헌선생이었습니다. 김책은 원래 변호사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를 붙일만한 돈도 없었고 또 변호를 받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허헌선생이 자청해서 무료로 그의 변호를 담당하였습니다. 그는 재판정에서 많은 혁명가들과 독립운동자들의 변호를 맡아가지고 형량을 덜게 하거나 무죄가 되게 하였습니다.

김책은 허헌선생네 집에서 며칠동안 보양을 하였습니다. 그가 서울을 떠날 때 허헌선생은 두루마기도 한벌 입혀주고 손에 노자도 쥐어주었습니다. 그때 돈으로 3원인가 4원인가 주었다는데 그 돈으로 김책은 차표도 끊고 도중식사도 했다고 하였습니다.

김책과 허헌선생은 이렇게 인연을 맺었습니다. 허헌선생이 김책의 변호를 서준 것은 순수한 애국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조선의 애국자들이 조선사람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하고도 벌을 받는 것이 가슴아프고 억울해서 무료변호를 서준 것입니다. 동정심, 연대감, 애국선배로서의 의리… 이런 것들이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허헌선생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해방후 김책이 내각에서 부수상 겸 산업상으로 일할 때 허헌선생은 최고인민회의 초대의장으로 사업하였습니다. 지난날 피고석에 앉아있던 사람과 그의 변호를 담당했던 사람이 국가의 고위간부가 되어 일하게 되었으니 이거야말로 얼마나 기이한 인연입니까.

김책은 부수상으로 임명된 날 허헌선생앞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옛날에는 선생님이 나를 변호해 주셨는데 이제부터는 비판을 해주셔야겠습니다. 내가 부수상으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잘못하는 것이 있다면 사정없이 종아리를 쳐주십시오.』

허헌선생은 호인이지만 대가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김책이 일을 잘못한다면 정말로 종아리를 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허헌선생에게는 그런 기회가 한번도 차례지지 않았습니다. 김책이 부수상으로서나 인간으로서나 비판감이 될만한 일을 한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대신 박헌영은 부수상을 하면서 늘 허헌선생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허헌선생이 무슨 낌새를 챘던지 나보고 노상 박헌영을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김책이 서거했다는 말을 듣고 목놓아 울던 허헌선생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수상님한테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오른팔이었는데 너무도 일찍이 갔다고 하면서 못내 애석해하였습니다.

김책은 허헌선생네 집에 있을 때 창피한 생각이 들어 끼마다 차려주는 더운 음식도 살에 가지 않더라고 하였습니다. 민족을 위해서 해놓은 일은 별로 없이 파쟁꾼들한테 농락만 당하다가 감옥살이를 했는데 자기를 대단한 혁명가처럼 돌봐주니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백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인민의 기대에 보답하자! 이것이 김책이 허헌선생네 집을 떠나 간도로 들어갈 때 다진 맹세였다고 합니다.

김책은 간도 땅에 들어서자 그동안 아버지와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기막힌 소식을 들었습니다. 집에는 철도 채 들지 않은 두 아들만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책은 사사일을 생각할 경황이 없었습니다. 일제의 특무들이 자기를 잡아가려고 출동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얼마나 교활했는가. 혁명가들을 붙잡아다가 한바탕씩 두들겨 패고 나서는 큰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앞문으로 석방하고는 다시 뒷문으로 잡아들이군 했습니다. 그들의 잔꾀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김책은 두 아들을 처남네 집에 맡기고 마을을 떠났습니다. 헌 삿갓을 쓴 농부의 차림으로 처남네 소를 앞세우고 동구밖으로 나갔습니다. 고개마루에 올라서자 그 소가 외양간에 떼두고 온 새끼소를 찾느라고 계속 울었습니다. 외양간의 새끼소도 어미소를 부르느라고 구슬프게 울었습니다.

위장도 중요했지만 김책은 어미소를 더 끌고 갈수가 없었습니다. 엄지와 새끼가 서로 울음으로 화답하는 소리를 들으니 처남 집에 맡기고 온 자식들 생각에 눈물이 저절로 쏟아지고 송아지도 아이들도 다 불쌍한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미소를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그후 그는 16년동안이나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김책과 같은 혁명가가 아니고서는 체험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김책에게 아이들이 그후 어떻게 지내는지 아는 가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처남이 살아있으면 입에 풀칠은 할 것이다, 그러나 처남네가 잘못되었으면 거지가 되었을 것이다, 거지가 되어 남의 집 대문 밖에서 동냥질을 하더라도 죽지만 말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어느때든지 해방의 날도 보고 이 못난 애비도 볼게 아닌 가고 하였습니다.

김책이 우리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녕안에 갔을 때였습니다. 아들들과 헤여 져서 곧추 찾아간 곳이 녕안현인데 거기에 있는 동만청총시절의 동료들과 만주총국시절의 친지들이 길림방면에 기성세대들과는 전혀 다른 새 세력이 등장했다는 것, 그 지도자가 김성주라는 것, 나이는 많지 않지만 인망이 있고 친화력이 강하다는 것, 군벌감옥에 갇혀 고생하다가 석방됐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동만청총에 길림선이 닿아있었으니까 그들이 우리의 활동내막을 알 수 있었습니다. 녕안현일대에 길림에 가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김책은 동료들한테서 그런 말을 듣기 바쁘게 나를 찾아 떠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이미 길림을 떠난 뒤였습니다. 그대신 여관에서 그는 우연히 우리 동무들을 만났습니다. 아마 그들이 김책을 미행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동무들은 김책의 신분을 확인하고 그가 길림에 오게 된 사유까지 듣고 나서 김성주는 길림에 없다, 길림이 초행인 것 같은데 여기서 어물 어물하지 말고 몸을 피하라, 지금 『적색5월』의 여파로 군벌들이 혁명가들을 잡아내느라고 혈안이 되어있다, 김성주는 훗날에도 만날 수 있으니 경찰들의 손이 뻗치기 전에 길림성안을 빠져나가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노자까지 주어서 바래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책은 그길로 북만쪽에 갔다가 국민당군대에 붙잡혀 또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9.18사변이 일어났습니다.

김책은 그후 감옥문을 나서기 바쁘게 또다시 군벌경찰한테 붙잡혀 미결수로 있게 되었습니다. 약식재판에서는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간판은 공산주의자이지만 아직 운동다운 운동은 별로 해보지도 못하고 군벌들의 손가락 하나 다친적 없는 사람에게 사형이라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형벌이었습니다. 당시의 만주땅이라는곳은 말그대로 무법천지였습니다.

김책은 사형장까지 끌려 나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어떤 장교가 와서 쏘지 말라고 호통치더라는 것입니다. 반일사상이 강한 진보적인 장교였던 것 같았습니다.

김책은 그때 사형장을 떠나면서 세상이 영 무심하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곡절을 겪는 과정에 그가 어떤 교훈을 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가 젊어서부터 혁명을 하느라고 했지만 태반은 감옥이나 로상에서 보내면서 큰일은 치지 못하고 쫓겨다니기만 하다가 무장을 잡은 다음부터야 비로소 주동에 서서 적들을 쳤다고 하였습니다.

『적들은 맨주먹으로 싸우는 혁명가들을 허재비로 압니다.』

김책은 웃으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무장을 하지 못하면 무장한 강도들앞에서 허수아비처럼 무력한 존재가 되고 자기자신마저 지켜낼수 없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의 교훈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김책의 그 말을 듣고 그가 옳은 교훈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김책의 반생이 도달한 교훈이기도 했지만 혁명투쟁의 일반적합법칙성이라고도 말할수 있습니다.

혁명은 총대를 가지고 해야 하며 민족적독립이나 사회적해방을 위한 모든 투쟁의 결말은 대체로 무장투쟁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우리가 항일혁명에서 승리할수 있었던 기본요인도 자체의 독자적인 혁명무력을 가지고있은데 있습니다.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무대에 김구네 세력, 이승만이네 세력, 여운형이네 세력을 비롯하여 각이한 세력들이 있었지만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제일 무서운 적수로 본것은 우리의 조선인민혁명군 이었습니다. 왜 우리를 제일 무서운 적수로 보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가 청원이나 파업이나 붓이나 말로써가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의 최고형태인 무장투쟁의 방법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완강하게 싸웠기때문입니다.

항일혁명의 승리는 혁명은 총대를 가지고 해야 한다는 진리의 정당성을 확증해주었으며 해방후 우리로 하여금 새조국건설과 사회주의위업을 수행하기 위한 투쟁의 전행정에서 혁명적군건설노선 을 확고히 틀어쥐고 강유력한 혁명무력을 건설하는데 모든 힘을 다 바치게 하였습니다.

국력도 총대에서 나오고 민족적자부심도 총대에서 나옵니다. 군대가 강해야 민족이 부흥하고 나라도 융성번영합니다. 총대를 떠난 자주성이란 있을수 없습니다. 총대에 녹이 쓸면 인민이 노예가 됩니다.

오늘 김정일동무가 혁명무력의 수위에 서서 인민군대를 무적필승의 강군으로 키우고 군건설에서 경이적인 성과를 이룩하고 있는 것은 백두산에서 개척된 주체의 혁명위업을 계승완성해나가는데서 이룩한 가장 빛나는 역사적업적으로 됩니다.

김책은 종파의 해독성에 대해서도 많은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별로 한 일도 없이 감옥으로 끌려간 것은 종파의 탓이라고 하였습니다.

김책은 그때 자기는 감옥밥을 먹고 나서야 공산주의운동을 재래식으로 해서는 안되겠다는 것과 종파를 없애지 않고서는 민족해방이나 계급해방은 고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통감하였다고 하면서 자기가 나를 만나려고 한 것은 길림에 나타난 새 세력이 조선공산당산하도 아니며 종파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참신한 새 세대들의 집단이라는 말을 듣고 그런 세력이라면 서슴없이 손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행로에서 인생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다면 주하에서 유격대를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시작한 다음부터라고 하였습니다. 그전의 생활은 방황과 모색과정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주하에서 유격대를 조직한 때로부터 그는 북만당과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의 주요직책에서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을 위해 눈부신 활약을 하였습니다. 북만의 조중혁명가들과 인민들은 한결같이 김책을 로숙하고 세련된 혁명가로 존경하고 사랑하였습니다.

『나는 일찍부터 김사령을 주시해왔습니다. 우리 북만의 조선혁명가들이 사령을 얼마나 만나고 싶어했는지 압니까. 우리는 늘 김사령부대가 있는 백두산쪽을 쳐다보며 싸웠습니다. 그때 길림에서 김사령을 만났더라면 내 그동안 마음고생도 그렇게는 안하는건데.…』

김책은 계속하여 우리가 조국진군을 단행하여 보천보를 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제일 간절한 소원은 나의 손을 잡아보고 싶은 생각이었으며 북만의 조선혁명가들을 대표해서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고 하였습니다.

엄한 사람으로만 알려져 있던 김책은 뜻밖에도 다감한 사람으로 내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내가 북만에 파견한 사람들한테서 동만소식도 듣고 서간도소식도 많이 들었다고 하면서 자기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활동에서 제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것은 관병일치, 상하일치, 군민일치의 기풍이며 사상과 넋에서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남의 나라 땅에서 곁방살이를 하면서도 조국해방을 주되는 투쟁강령으로 내들고 조선사람은 조선의 해방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정정당당하게 주장해온 자주정신이라고 하였습니다.

김책은 우리의 투쟁행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내가 한 대원의 총가목을 수리해준 사실까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자기는 혁명투쟁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우리를 거울로 삼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책은 그처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김책은 우리를 거울로 삼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가 혁명가의 표본이었습니다.

그는 범같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었으나 사실상 그 누구보다도 대원들을 사랑하는 정치일꾼이었습니다. 그가 총가목에 대한 일화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그와 비슷한 상하관계상의 일화들은 그에게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혁명군대의 전투력은 무엇인가, 동지애이다, 혁명동지를 아끼고 사랑하라, 사랑하되 자기의 심장처럼 사랑하라, 혁명동지보다 더 귀중한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 하는 것이 김책이 대원들에게 강조한 사상이었습니다.

한번은 어느 지대의 한 대원이 문건을 가지고 그를 찾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김책은 그 대원을 병실에서 재우고 문건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밤이 되자 바느실을 준비해가지고 그 대원이 자고있는 병실에 찾아가 그의 해진 옷과 내의를 기워주었습니다. 낮에 문건을 넘겨받을 때 김책은 벌써 그 통신원의 옷이 해진 것을 보고 기워줄 궁리를 했던 것입니다. 자기 부대의 대원도 아니고 딴 부대의 대원이었는데 친형이나 친아버지처럼 그 사람을 돌봐주었단 말입니다.

김책은 싸움을 한번씩 하고 나서는 대원들을 만나 그들의 전투성과를 축하해주군 했습니다. 대원들을 한데 모아놓고 축하해준 것이 아니라 한사람한사람 찾아다니면서 동무가 성문을 돌파할 때 잘한 것은 무엇이고 위만군 병실들을 들이칠 때 잘한 것은 무엇인가, 함화공작에서는 무엇이 잘되고 무엇이 부족했는가 하는 식으로 전투성과를 구체적으로 평가해주군 했습니다. 북만부대들에서 싸운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대원들이 그런 총화를 받고난 다음이면 싸움을 더 잘했다고 합니다.

김책은 비판을 받은 사람이나 책벌을 받은 사람들과의 사업도 아주 노숙하게 했습니다. 만일 어떤 대원이 지휘관한테서 충고를 받으면 꼭 그 대원을 만나 자기 잘못을 뉘우쳤는가를 알아보고 잘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이해할 때까지 꾸준하게 설복하였습니다.

김대홍이 소대장으로 공작할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한번은 그가 입대한지 얼마 되지 않은 기관총부사수를 되게 욕질한적이 있습니다. 싸움에서 단련되지 못한 그 대원은 적탄이 우박처럼 날아오자 총을 공중에 대고 쏘았습니다. 김대홍은 그 광경을 보다 못해 『비겁한놈, 목숨이 그렇게 아까우면 총을 놓고 부모들곁으로 썩 사라져!』라고 하였습니다.

싸움이 끝난 다음 김책은 김대홍을 불러 동무, 대원들을 그렇게 대하면 안돼, 그 사람이야 신 대원이 아닌가, 싸움을 처음해보는 사람한테 그게 무슨 욕설인가, 동무는 그 대원에게 욕부터 할 것이 아니라 솔선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김책의 충고를 받은 김대홍은 그후부터 절대로 대원들에게 욕설을 퍼붓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김책을 부하들을 어루만지기만 한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경우에 따라 설복할 것은 설복하고 추궁할것은 추궁하고 처벌할것은 처벌하는 원칙성이 강한 지휘관이었습니다. 과오가 엄중하면 무섭게 다불이기도 하였습니다.

김책이 서거한후 장상룡이 그를 회고하면서 한 이야기인데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1942년 겨울, 그러니까 김책이 하바롭스크회의에 참가했다가 다시 만주에 돌아가 소부대활동을 할 때였습니다. 그때 그들의 소부대는 식량부족으로 고생을 몹시 하였습니다.

어느날 장상룡은 사냥을 하려고 진종일 밖에 나가 돌아다니었습니다. 곰 한 마리 와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았는데 숙영지로 돌아가려고 하니 이미 날이 저물었습니다. 잡은 짐승들을 감추어놓고 바삐 걸었지만 맥이 빠진데다가 길도 험해서 숙영지로 돌아갈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밀영에서 멀지 않은곳에 있는 사냥군들의 숙소에 들어가 하루밤 자고 다음날아침 숙영지로 돌아왔습니다. 그 숙소는 김책이 특무들이 이용할수 있는 거처라고 하면서 사용금지령을 내린 집이었습니다.

장상룡이 사용하지 않기로 된 집에서 하루밤 자고왔다는것을 알게 된 김책은 전창철을 불러 장상룡은 우리 대오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되게 문제를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전창철은 지금까지 혁명을 위해 충실히 싸워온 동무인데 한번만 용서해주자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책은 용서할수 없다, 우선 밖에 내다가 3시간동안 세워놓으라고 하였습니다.

전창철은 그의 명령대로 장상룡을 밖에 데리고 나갔습니다. 2시간도 되기전에 장상룡은 벌써 몸이 꽁꽁 얼어 들었습니다.

전창철은 보다 못해 김책에게 그만하면 장동무가 자기 과오를 충분히 반성하였겠는데 이제는 불러들이자고 제기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책은 과오를 범한자의 처벌을 덜어주려고 하는 것도 똑같은 규율위반이라고 하면서 전령병에게 전창철도 밖에 내다가 벌을 세우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는 3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장상룡을 천막안으로 불러들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시장할 터이니 우선 식사부터 하라고 하였습니다.

장상룡은 밥상에 마주 앉았으나 밥술을 들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자기 잘못을 뼈아프게 뉘우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야 김책은 장상룡을 가까이에 불러앉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동무는 자기의 과오가 별로 크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러면 안된다, 내가 왜 그걸 그렇게 엄중시하는가, 동무 한사람의 잘못으로 해서 우리 소부대의 위치를 노출시킬수 있고 결과적으로는 우리 모두의 생명은 물론, 혁명임무까지 몽땅 말아 먹을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 막을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동무는 자기 상급이 그런 지시를 했다는걸 알면서도 그걸 무시하고 하룻밤 모험을 하였다, 거기에 특무들이 있었다면 어쩔번 했는 가고 하였습니다.

장상룡은 그때 그 한마디한마디를 뼈에 새겼다고 하였습니다.

김책은 말수더구가 적은 사람이었지만 그대신 그의 말 한마디한마디에는 법조항과 같이 드틸수 없는 무게가 담겨있었습니다.

적들이 한때 북만에서 항일유격대원들의 사기를 꺾어보려고 김책이 체포되었다, 박길송이 투항했다, 어느 지대가 귀순했다, 허형식이 어떻게 됐다 하고 엉터리없는 유언비어를 돌린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완전한 날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격대 지휘관들과 병사들은 격분하였습니다. 그런 유언비어에 신물이 난 2지대의 지대장은 좋다, 너희들을 혼내주마 하고 적들을 골탕먹일 계책을 꾸미었습니다. 그는 부대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특무를 한놈 유인해다가 그에게 빨치산이 투항하려고 하니 당신이 산에서 내려가 헌병대와 교섭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헌병대는 특무를 통하여 접선장소와 접선시간을 알려주고 지대장에게 후한 표창을 하겠다는 약속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귀순자대열을 인수하기 위하여 약속된 접선시간에 특무를 앞세우고 지정된 장소에 나타났습니다. 적들은 수림속에 정렬한 2지대의 대오를 보자 벌쭉벌쭉 웃으면서 그들에게 손까지 흔들어 보였습니다.

이때 2지대의 대원들은 일제히 총을 내들면서 『꼼짝말라!』고 고함쳤습니다. 지대장은 적들에게 이 어리석은 놈들아, 우리는 투항하러 온것이 아니라 네놈들을 잡아가러 왔다, 손을 들라고 호통쳤습니다.

그러자 적의 우두머리는 공산군은 거짓을 모르는 군대라던데 이렇게 약속을 어기는 법이 어디 있는가, 군대란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항의하였습니다.

지대장이 그 말을 듣고 이 뻔뻔스러운 놈들아, 네놈들이 눈만 째지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거짓말을 일삼으면서 신의는 무슨 신의란 말이냐, 네놈들이 하도 대포를 불기때문에 우리도 대포를 불어본거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2지대는 적들을 몽땅 생포해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지대장이 큰 공을 세웠다고 칭찬들이 대단했습니다. 성공한 작전이라고 추어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박득범이 식량을 해결하려고 『투항』을 광고했다가 되게 비판을 받은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었습니다.

김책은 2지대의 지휘관들을 불러놓고 적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유격대도 거짓말을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사고방식인가, 아무리 가짜귀순놀음이라 해도 어떻게 유격대와 투항이라는 말을 결부시킬수 있는가, 혁명군대의 지휘관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무섭게 다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지대장을 철직시키고 나머지 지휘관들도 다 강직시켰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혹시 김책을 책벌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그는 처벌을 망탕 주는 그런 무지막지한 지휘관이 아니었습니다.

실례를 하나 더 들어봅시다.

한 대원이 전투에 참가했다가 덤벼치던 나머지 척탄통알이 들어있는 배낭을 전장에 두고 척탄통만 가지고 퇴각한 일이 있었습니다.

부대에서는 모임을 열고 그 대원을 비판하였습니다. 무기를 잃은 대원을 비판하거나 처벌하는 것은 혁명군부대들에서 간혹 보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비판무대에 오른 대원은 전우들이 주는 충고를 응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시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초급정치일꾼이 과오를 범한 대원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제기하는 바람에 회의분위기가 살벌해졌습니다.

김책은 과오를 범한 대원의 입대년도를 요해해 보고 그가 신대원이라는것을 알게 되자 책임은 그를 잘 교양하지 못한 지휘관들에게 있으니 책벌이 아니라 방조를 주어야 한다고 결론한 다음 초급정치일꾼의 제의를 기각해버리었습니다.

문제가 이렇게 끝났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텐데 처단을 주장하던 그 초급정치일꾼이 계속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바람에 사건은 확대되었습니다.

과오를 범한 신입대원은 자기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몰라 하루종일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 못하다가 그날밤으로 도주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순조롭게 매듭을 지을수 있었던 문제가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심각하게 번져갔습니다. 책벌을 주장하던 초급정치일꾼은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모두들 인정사정없는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그를 반혁명분자라고 규탄하는 사람, 처벌해야 할 사람이라고 기염을 토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김책은 이런 사태를 보고받고서 책임은 다른데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 대원들의 정치적생명을 귀중히 여길줄 모르는 정치일꾼이 있다는것은 정치주임인 내가 일을 쓰게 못한 탓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그 초급정치일꾼을 자신의 호위반에 편입시키고 가까이 끼고있으면서 개별교양을 하였습니다.

김책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휘관들과 대원들에게 군민관계와 상하관계를 잘 가지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김책은 우리가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하면서 조선혁명의 기치를 든데 대하여 자주성과 결부시켜 높이 평가하였지만 사실은 그자신도 조선인대원들에게 우리는 중국인부대에서 싸우지만 항상 조선혁명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선혁명은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조선사람자신이 해야 한다, 우리는 늘 자기 조국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혁명에 대한 견해, 인민에 대한 관점, 자주성에 대한 입장으로부터 시작하여 당건설과 국가건설, 군건설은 물론, 사업방법과 사업작풍에 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면에서 나와 김책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책이 내가 자기의 생활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다 알고 있는 것이 놀랍다고 하기에 나는 그에게 나도 처음부터 김책을 주시해왔다고 하였습니다.

김책은 그 말을 듣자 웃으면서 『얼굴도 모르고 만나도 못본 사람들끼리 서로 주시하고 그리워했다면 그거야 연분이지.』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말에 동감이라고 하였습니다.

김책이 나를 만나려고 길림에 찾아온것이 1930년 여름이니 우리의 우정은 벌써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북만부대에서 높은 직급을 가지고 있던 김책은 나이로 보나 혁명투쟁경력으로 보나 만주빨치산의 조선인군정간부들중에서 좌상대접을 받을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또 나로 말하면 그때에는 아직 국가수반도 아니고 당 총비서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김책은 소련사람들앞에서나 중국사람들앞에서나 나를 조선혁명의 대표자로, 지도자로 내세웠습니다.

어떻게 되어 그가 자기보다 9살이나 아래인 나를 그처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내세웠겠습니까.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설명할수 있을 것입니다. 김책이한테는 혁명을 하자면 영도 중심이 있어야 하고 그 영도 중심의 두리에 모두가 하나로 튼튼히 뭉쳐야 한다는 사상이 온몸에 꽉 차있었습니다. 영도 중심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이 결국은 나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애정으로 표현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김책은 나를 만난 다음부터 가장 가까운 동지가 되어 시종일관 변함없이 나를 따르고 받들어주었습니다.

그는 시국이 어떻게 변하건 상관치 않고 나에게 모든것을 의탁하고 성실하게 일을 해왔습니다.

해방후 조국에 돌아와서도 김책은 사방으로 뛰어다니면서 당건설도 하고 군건설도 하고 국가건설도 하고 산업건설도 하느라 편히 지낸 날이 없었습니다.

전쟁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김책이 소갈데 말갈데를 다 갔습니다. 전선사령관으로 있을 때는 충청도에까지 나가있었습니다. 자기는 최전선에 나가있으면서도 내가 전선에 시찰을 나가면 나의 수원들을 보고 여기가 어딘데 최고사령관동지를 모시고 오는가, 동무들이 도대체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인가고 생야단을 했습니다. 나와 함께 수안보에 갔던 사람들이 그때 김책이한테서 욕을 단단히 들었습니다.

길림시절에 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이 나를 영도의 중심으로 내세웠다면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에는 김책을 비롯한 항일혁명투사들이 나를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내세우고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나를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내세우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 나라 혁명에서는 영도 중심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영도중심을 꾸리는데서 김책은 특출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투쟁역사에서 김책이 차지하는 몫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때 원동의 기지에는 북만에서 싸우던 사람들도 와있었고 남만출신들도 와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곳에서 나서자란 조선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서로가 자기 부대를 내세우고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게 된다면 혁명대오가 단합되지 못하고 중심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동의 기지에 모인 조선공산주의자들속에서는 지방주의라든가 영도권쟁탈과 같은 놀음이 한번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순결한 사람들이어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다가 김책, 최용건과 같은 노장들이 처음부터 나를 내세우다 나니 영도중심이 확고했습니다.

김책이 나를 어느 정도로 따르고 신뢰했는가 하는 실례를 말해주겠습니다.

김책은 하바롭스크회의에 참가한후 1942년과 1943년의 대부분을 만주에서 보냈습니다. 그가 만주에 나간것은 북만에서 활동하는 소부대들을 지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소부대들에 대한 지도가 끝난 다음에도 기지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북만부대의 지휘관들인 허형식과 박길송이 전사한후였습니다.

김책은 전우들의 피가 스며있는 땅을 떠나고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국제연합군을 조직하면서 지휘부에서는 여러번 무전을 쳐서 그가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그는 매번 할 일을 다하고야 돌아간다는 답전을 보내왔습니다. 그때 김책이네 소부대에는 무전기가 있었습니다. 국제연합군의 지휘성원들은 무전을 받을 때마다 그의 처사를 두고 매우 못마땅해하였습니다.

나는 김책이 변화된 정세의 요구로부터 우리가 국제연합군을 편성하고 항일혁명의 최후승리를 앞당겨 나가고 있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직접 나의 이름으로 무전을 쳤습니다.

김책은 내가 무전으로 들어오라고 권고해서야 기지로 돌아왔습니다. 국제연합군지휘부에서 들어오라고 해도 꿈쩍하지 않던 사람이 왜 내 연락을 받고는 그달음으로 들어왔는가. 그것은 그가 나를 그만큼 따르고 신임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 동지가 나를 들어오라고 했으면 내가 들어가는 것이 옳은 처사이다, 그러니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는 식으로 내 말이나 요구를 절대화하였기 때문입니다.

김책은 원동의 기지에 있을 때부터 진심으로 나를 내세우고 보호해주었습니다.

1941년 봄에 내가 소부대를 데리고 나갈 때에도 나와 동행하게 될 호위성원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마음을 썼습니다.

우리가 일본군에 대한 최후공격작전준비를 하고있을 때에는 김책이 나도 모르게 국제연합군의 조선지휘관들만 따로 모아놓고 회의를 하였습니다. 나의 신변호위와 관련된 회의였습니다. 각자가 경각성을 높여 김일성동지의 신변호위를 잘해야겠다, 김일성동지는 조선인민과 조선혁명가들을 대표하는 영도자이니 목숨으로 옹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이 조국에 개선하자마자 김책은 나의 호위와 관련된 모임을 또 열었습니다. 조국에 와보니 듣던 것 보다 정세가 훨씬 더 복잡하다, 테로분자들의 준동이 여간 심하지 않다, 정신을 차이지 않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평안남도당의 책임비서 현준혁이도 테로분자들한테 피살당했다, 김일성장군이 개선했다는 말을 절대로 입밖에 내지 말라, 공개할 때가 있으니 함부로 누설해서는 안된다, 모두가 경위대원이 된 심정으로 김장군의 호위를 각별히 잘해야겠다고 호소하였습니다.

후에는 그가 주동이 되어 경위대도 조직하였습니다.

김책이 나에게 얼마나 충실했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자면 하루종일 해도 못 다할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해방직후에도 나는 사람들과의 사업에 큰 힘을 넣었습니다. 인민들과의 사업, 남조선혁명가들과의 사업, 외국인들과의 사업으로 정말 눈코뜰새가 없었습니다. 노사까 산조도 해방직후 우리 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해방직후에는 귀한 손님들이 와도 그들을 접대할 수 있는 봉사체계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손님들을 먹이고 재울 수 있는 초대소조차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우리 집에 데려다가 접대하였습니다. 우리 집이라야 밥 한그릇에 국 한사발이 고작이었습니다.

해방이 갓 되었으니까 별수 없지 하고 다들 심상하게 여기였지만 김책이만은 이런 실태를 두고 상당한 정도로 마음을 썼습니다. 그는 우리 집에서 차린 식탁에 좋은 술을 내놓지 못하는데 대해 은근히 걱정하였습니다.

그는 나라사정이 딱한 것도 사실이고 우리 수중에 돈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장군님댁에 손님이 올 때마다 어떻게 노상 되병을 들고 장마당출입을 하겠는가, 이제 공화국이 창건되면 우리 장군님한테로 손님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겠는데 술공장을 하나 꾸려가지고 우리 손으로 접대용술을 만들자, 장군님의 신변안전을 위해서도 술은 우리 자체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하면서 나도 모르게 전국적으로 제일 유명한 술은 무엇이고 그 술을 만들어내는 양주전문가가 누구인가 하는걸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해방직후 우리 나라에서 제일 좋다고 소문이 난 술은 룡강에서 만드는 술이었습니다. 그 술을 한 양주업자가 딸과 함께 만들어냈는데 해방전에 일본인 고관들과 부자들이 즐겨 마셨다고 합니다.

김책은 그들을 찾아 룡강으로 내려갔습니다.

김책의 말에서 큰 충동을 받은 양주업자는 나라에 양주기술자가 필요하다면 내 딸을 데리고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딸의 이름이 강정숙이 었습니다. 강정숙은 그때부터 한편으로는 김책의 밥을 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술을 고았습니다.

그가 양주작업장을 꾸리기 시작하자 김책은 한 일꾼을 데리고 장마당에 가서 쌀을 사왔습니다. 김책의 숙소는 미구에 양주장으로 변하였습니다.

며칠후 김책은 처음으로 뽑은 술을 병에 넣어가지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장군님, 강정숙이 뽑은 첫 룡강술입니다.』

김책은 이렇게 말하며 잔에 술을 찰랑찰랑 부었습니다.

룡강술이 최고라고 하던 항간의 소문이 뜬소문이 아니였습니다.

내가 술맛이 좋다고 하자 김책은 『그렇다면 됐습니다.』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강정숙이 제조하는 룡강술은 국가연회용술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연줄로 되어 그들은 부부가 되었습니다.

김책이 수령의 권위를 어느 정도로 절대화했는가 하는 것은 그가 내 전화를 받을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단추를 채운 다음에야 통화를 시작하군한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습니다. 그는 병석에 있을 때에도 나한테서 오는 전화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받군했습니다. 옆에 사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노상 그렇게 했습니다. 수령을 진심으로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김책은 내가 없으면 자기도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제일 준엄했던 때가 후퇴때었습니다. 일시적후퇴다, 전략적후퇴다 하고 선포했지만 신념이 약한 사람들은 공화국의 운명이 끝장나는가 보다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적들이 사이원을 돌파하자 전선사령관인 김책은 중화, 상원, 강동 일대에 평양방위선을 구축해놓고 나에게 전선정황을 보고하면서 자기는 후퇴해들어오는 부대들로 방위역량을 보강하고 끝까지 견지하겠으니 장군님만은 최고사령부성원들을 데리고 평양을 떠나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며칠후 김책은 또다시 전화로 최고사령부의 위치를 옮겨 달라는 건의를 하였습니다.

나는 동무들도 적들의 공격을 그만큼 지체시켰으면 되었으니 이제는 후퇴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책은 후퇴하지 않고 당원증만 보내왔습니다. 결사전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나는 전화로 김책을 찾아 동무가 들어오지 않으면 나도 평양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에야 김책은 방어부대들을 데리고 평양으로 들어왔습니다. 인민군대가 재진격을 시작했을 때에야 그는 당원증을 찾아갔습니다.

김책을 매우 엄하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일꾼들도 있었지만 사실 그가 무섭게 구는것은 건달꾼들과 아첨쟁이들, 불평분자들, 이기주의자들, 탐위분자들과 종파쟁이들 앞에서였지 아래일꾼들과 인민들 앞에서는 무한히 인자하고 겸손하였습니다. 김책이 딴꿈을 꾸는자들을 몹시 증오했기때문에 박헌영도 그앞에서만은 처신을 조심스럽게 하였습니다. 김두봉도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했지만 김책이만 보면 슬슬 피해다니였습니다.

김책은 가식과 위선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해방직후 그의 아들이 만주에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아버지를 찾아왔는데 단추 2개가 달린 베적삼에 짚신바람이었습니다. 김책이 아들을 나한테 인사시키려고 했지만 그는 짚신바람으로 어떻게 장군님을 만나겠는 가고 하였습니다. 그런 때 어지간한 부모들 같으면 상점에 가서 옷도 사입히고 신발도 사신긴 다음 자식을 내 방으로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김책은 처신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짚신바람이라고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네가 김일성장군님이 어떤 분이라는 걸 잘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걱정말고 어서 들어가자, 지금까지 내처 발을 벗고 살아오다가 갑자기 부자집자식들 흉내야 낼수 없지 않느냐, 장군님께서는 네가 짚신에 이렇게 입고 온것을 더 좋아하신다, 네가 만약 좋은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찾아왔다면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를 데리고 내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16년만에 짚신바람으로 찾아온 아들을 데리고 김책이 내 방에 나타났을 때 나는 눈물이 나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날은 김책이보다 내가 더 울었습니다. 김책자신도 속으로야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그가 오래동안 헤어졌던 자식들과 눈물나는 해후를 했지만 그들과는 네해 남짓하게밖에 생활하지 못했습니다.

김책이 우리의 곁을 떠난 것은 과로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안고 있는 부담이 너무나 컸습니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1951년 1월 30일입니다. 1951년 1월말이면 최고사령부가 건지리에 있을 때입니다. 그날 저녁 김책이 불쑥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지난달 24일이 김정숙동무의 생일이었는데 수상동지가 적적해 하시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이 바빠서 오지 못했습니다,  이달도 다 가는데 아무리 생각해보아야 처신이 잘된것 같지 않고 또 그냥 있을 수도 없고 해서 찾아왔습니다라고 하면서 걸음이 늦어진 것을 두고 사과하였습니다.

그가 그런 말을 하길래 나는 지난해 12월이야 북반부땅에 쳐들어온 미국놈들을 몰아내느라고 눈에서 불이 일던 때인데 언제 찾아다닐 경황이 있었는가, 너무 마음을 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김책은 왜 그런지 기분상태가 김책이답지 않게 감상적이었습니다.

그가 나보고 산보를 하자고 하기에 우리는 산보를 했습니다. 김책은 나에게 전쟁전에는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 줄 모르고 다니지 못하였는데 전쟁이 끝나면 여기에 휴양소를 하나 잘 짓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사실 해방후 우리는 새 조국 건설로 몹시 바삐 보내다나니 어디에 휴식에 적합한 골짜기가 있고 명소가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는 휴식이라고 해야 장수원다이밑이나 맥전나루터 같은데 가서 발이나 씻고 돌아오는 정도였습니다.

그가 그날 내앞에서 뒤축이 꿰진 양말을 감추느라고 애쓰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나는 김책에게 일만 일이라 하지 말고 몸을 좀 돌보시오, 이 엄동설한에 살이 보이는 양말을 신고 다녀서야 어떻게 견디겠소, 나를 생각해서라도 몸을 조심해주시오라고 하면서 새 양말을 꺼내 신기였습니다.

김책은 그날저녁 나와 함께 식사를 하고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허가이가 갑자기 내앞에 나타나 당사업정형에 대해 보고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나에게 외교를 하느라고 오래동안 이런말저런말을 하며 흐지부지하다나니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그래서 김책은 식사도 못하고 건지이를 떠나갔습니다.

그는 최고사령부를 떠나면서 나를 보고 『장군님, 미국놈들과의 싸움은 저희들이 하겠으니 장군님께서는 너무 과로하지 마시고 건강에 유의하여 주십시오.』하고 권고하였습니다. 그것이 그가 나에게 한 마지막부탁이었습니다. 그런 부탁을 받고보니 왜 그런지 그날따라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날밤도 김책은 집무실에서 철야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군의국장을 겸하고 있던 이병남보건상이 그가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할 때 나는 그 사실을 조금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몇시간전까지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간 사람이 그렇게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호위성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낮에 자동차를 달려 내각이 자리잡고 있던곳에 가보고서야 나는 이병남의 보고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전날밤 그를 내곁에서 재워보내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그가 내곁에서 자고 갔으면 밤을 새우지 않았을 것이고 심장마비에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후회한 것이 한가지 더 있습니다. 김책이 나를 찾아온날 밤 식사를 나누지 못하고 돌려보낸 것이었습니다. 밥 한그릇을 먹여 보냈다고 해서 내 슬픔이 덜어질리는 없겠지만 어쩐지 그게 지금까지도 속에 얹혀서 내려가지 않습니다.

김책과 영결하던 날의 일들은 거의나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만 한가지 똑똑하게 기억되는 것은 영구를 발인하기 전에 김책의 손을 마지막으로 잡아보던 일입니다. 10년전에 하바롭스크에서 처음으로 잡고 오래 놓지 못하던 손이었습니다. 10년전에 잡아보고 그 따뜻한 온기를 평생 잊지 못했는데 그를 영결하던 그날은 얼음처럼 차거웠습니다. 지방에 현지지도를 갔다가 돌아오면 제일 선참으로 뛰어나와 내손을 부둥켜 잡던 김책의 손이었습니다.

김책은 한생을 나의 충직한 전우로 살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내 그래서 그 사람을 더 잊지 못합니다. 김책이 돌아간 다음 나는 그의 자식들을 친부모처럼 돌보아주었습니다. 외국에 유학도 보내고 잔치도 차려주고 손녀가 태어났을 때는 축하도 해주고 우리 집에 종종 불러다가 음식도 같이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김책을 위해 무엇인가 더해주지 못한 것만 같아 노상 허전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혁명이 시련에 부닥치거나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할 때면 김책생각이 정말 간절해집니다.

내가 그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김책의 묘앞까지 차를 타고가지 못합니다. 그의 묘지를 찾을 때는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죄스러워 대성산밑에서 내려 걸어서 올라가군 했습니다.

김책이 저세상사람이라고 해서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내 마음이야 변할 수 없지 않습니까.

나는 혁명을 하면서 많은 것을 체험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가슴깊이 새긴 것 중의 하나가 동지에 대한 체험입니다.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결사의 각오를 품고 혁명의 길에 나선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귀중한 것이 바로 동지이고 동지애입니다. 진실한 동지는 제2의 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충직하고 의리깊은 동지들이 뭉치면 하늘도 이길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동지를 얻으면 천하를 얻고 동지를 잃으면 천하를 잃는다고 말하군 합니다.

동지라는 말은 뜻을 같이한다는 말인데 뜻이란 곧 사상입니다. 일시적인 이해관계나 타산에 의하여 맺어진 동지관계는 공고할 수 없으며 때에 따라 쉽게 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사상의지적으로 결합된 동지관계는 영원하며 총알도 단두대도 그런 동지관계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조선혁명은 영도자에 대한 충정으로 숭고한 모범을 보여준 수많은 동지들을 낳았습니다. 그런 동지들이 우리 주위에 하나의 은하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김책이 서거한 다음 우리는 그를 영원히 추억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 가까이에 있는 성진시와 그의 심혈이 깃든 청진제철소 그리고 평양공업대학을 각각 김책시, 김책제철소, 김책공업대학으로 명명하고 인민군대의 한 군관학교도 그의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김책시에는 그의 동상도 세웠습니다.

나는 오늘도 사회주의건설에서 언제나 김책의 이름을 가진 도시와 공장, 대학이 앞장서기를 바랍니다.

김책은 남의 뒤꽁무니에서 우물거리는 것을 제일 싫어하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선봉에서 달려나갔습니다. 우리 나라 산업건설에서 김책이 해놓은 일이 적지 않습니다. 나는 경제관리를 잘하지 못하는 공장, 기업소들을 볼 때면 속으로 김책이 만일 이걸 안다면, 김책이 만일 이걸 안다면 하는 생각을 하군 합니다. 그가 산업상으로 일할 때 우리 나라 경제는 치차처럼 잘 맞물려 돌아갔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김책과 함께 사업하던 일꾼들도 적지 않은데 동무들은 그가 우리 나라 산업건설을 위해 바친 심혈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