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대의 안도입성은 시간문제로 되고 있었다. 친일적인 지주들은 일본인들을 맞기 위하여 벌써 기발까지 준비하였다. 구국군은 양강구에 더 오래 머물러있을 수 없게 되었다. 맹탄장부대에는 산을 끼고 초원이 있는 나자구, 왕청방향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도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하여 구국군과 함께 안도를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을 채택한 것이 바로 양강구에서 열린 병사공작위원회 회의였다. 총적인 지향은 왕청으로 활동거점을 옮기는 것이지만 당분간은 퇴각하는 구국군부대들이 집결되고 있는 나자구에 틀고 앉아 거기서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우사령부대도 안도에서 나자구로 철수하였다.

우리가 북만으로 갈 준비를 한창 다그치고 있을 때 철주동생이 나를 만나려고 양강구에 찾아왔다.

『형, 나두 형님네 부대를 따라가구 싶어. 형님없이는 토기점골에서 더 못살겠어요.』

동생은 내가 묻기도 전에 찾아온 용건을 스스로 고백하였다. 동생이 우리 부대를 따라가고 싶어하는 심정은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소사하골짜기에서 남의 눈치밥을 얻어먹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 감수성이 예민한 그 나이의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로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마저 토기점골을 떠나면 영주는 어떻게 하니? 그 애가 고독해서 견디지 못할텐데.』

『둘이나 남의 집 밥을 먹으니 미안해서 못견디겠어요. 막내 혼자만 있으면 덜 미안할 것 같애.』

나는 철주의 말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동생의 나이가 열여섯살이니 총을 메워주면 부대를 따라다니며 군인생활을 할 수도 있었다. 철주는 나이에 비해 몸집고 크고 체격도 좋았다. 하지만 아직 뼈가 채 여물지 않아서 유격대의 짐이 될 수 있었다. 더구나 철주는 안도지구에서 공청사업을 추켜세워야 할 무거운 책임을 걸머지고 있었다.

『네가 이년이나 삼년후에 그런 청을 한다면 형은 너의 청을 선뜻 받아들일게다. 그런데 지금은 그 청을 들어줄 수 없구나. 좀 고생스럽고 고독스럽더라도 몇해만 참아다구. 남의 집에 가서 머슴살이도 하고 계절노동 같은 것도 하면서 공청사업을 좀 본때있게 내밀어보아라. 지하활동도 무장투쟁 못지 않게 중대한 사업인데 그걸 무시하면야 안되지. 공청사업을 하다가 때가 되면 혁명군에 오너라.』

나는 철주가 떼를 쓰지 못하게 여러가지로 구슬려보았다. 그러다가 그를 데리고 못가에 있는 객주집에 갔다. 문풍지소리가 궁상스럽게 붕붕거리는 썰렁한 방안이었다.

나는 술과 안주를 청하였다. 싸늘하게 식은 언두부접시 두개, 그사이에 놓은 술병 하나.

그것을 보더니 철주는 눈물이 글썽해지는 것이었다. 동생은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한잔의 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벌써 짐작하고 있은 모양이었다.

『철주야, 너의 청을 들어주지 못하는 이 형을 용서해다구. 낸들 왜 너를 데리고 다니구싶은 마음이 없겠니. 너를 떼두고 가자니 내 가슴도 아파서 찢어질 것만 같구나. 그렇지만 철주야, 섭섭한 대로 우리는 여기서 또 헤어져야겠다.』

나는 술기운의 덕으로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서는 입에 쉽사리 옮길 수 없는 말을 단숨에 해버리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고여 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밖에 나오자 철주도 마시던 술잔을 내버린 채 나를 따라 일어섰다.

『알겠어요, 형!』

이 한마디와 함께 철주는 뒤로 다가와 내 손을 소리없이 잡았다 놓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어 나는 동생과 헤어졌다. 그리고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그 음산하고 처량한 못가의 가을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그 날 내손을 살그머니 잡았다 놓고 가던 동생의 손을 더 오래 그리고 더 뜨겁게 잡아주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군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것은 너무나 쓸쓸한 작별이었다.

만일 그때 내가 철주의 청을 들어주었더라면 동생은 스무살도 채 되지 못한 나이에 일찍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실로 불같이 살다가 불같이 가버린 인생이었다.

철주는 열살을 넘기기 바쁘게 혁명조직을 따라다니었다. 무송에 있을 적에는 새날소년동맹 선전책으로 활동하였고 소사하에 와서는 구공청위원회 비서로 사업하였다.

양강구에서 나와 헤어진 철주는 그후 수많은 공청원들을 키워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시키었다. 그는 자청해서 어려운 반일부대와의 사업도 하였다. 그는 반일부대병사들과 함께 대전자시가를 습격하는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그가 관계하였던 두의순이 지휘하는 반일부대는 일본군의 간도토벌대와 잘 싸웠다고 한다.

그후 철주는 안도 반일부대 공작부장의 중임을 지니고 연길현 부암동 장재촌 사슴페에 있는 서규오반일부대와의 사업도 하였다. 서규오는 반일을 하겠다고 하면서도 조선공산주의자라면 덮어놓고 적대시하는 성미가 괴벽하고 고집이 센 두령이었다. 그도 초기에는 조선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냈다.

서규오가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냉대하기 시작한 것은 부암동의 반일부녀회원들이 그가 첩으로 삼으려고 억류해두고 있던 공청원처녀(조선여자)를 탈환해 온후부터였다. 그 처녀는 연예대원들과 함께 반일부대에 선전공작을 하러 갔다가 그에게 억류되었다. 일단 그렇게 걸려들면 어떤 여자이든지 서규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서는 무사할 수 없었다.

서규오는 그런 방법으로 자주 여자를 갈아 대였다.

부녀회원들이 공청원여자를 탈환해 온후부터 조선사람들은 서규오의 부대에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되었다. 과거에 서규오와 너나들이로 허물없이 지내던 사람들까지도 그의 곁에 가서 붙지 못하였다. 서규오는 상사병으로 고민하면서 부하들을 시켜 조선사람들을 박대하고 탄압하였다.

이런 때에 철주동생이 한의자격을 가지고 있는 임춘추동무를 데리고 서규오의 부대에 찾아갔다.

『두령님병이 심하다기에 문병을 하러 왔습니다.』

철주가 유창한 중국말로 깍듯이 인사를 하였지만 서규오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조선사람은 보기도 싫고 조선사람들과는 말조차 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두령님병을 떼볼 가 하여 용한 의원 한분을 데리고 왔는데 한번 치료를 받아보지 않겠습니까?』

철주가 다시 이런 말을 해서야 서규오는 조금 귀맛이 당겨 용한 의원이라면 진찰을 한번 받아보자고 하였다. 그는 임춘추동무의 침을 며칠동안 맞고나서 편두통때문에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임의원덕으로 골통속에 숨어들어왔던 잡귀를 쫓아버렸다고 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철주는 서규오부대에 눌러앉아 반일병사들과의 사업을 합법적으로 하였다.

훗날 우리의 방면군에 편입된 서규오는 10연대장으로 임명되어 최후까지 잘 싸웠다. 한때 아편과 여자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가지 못하겠다고 하며 난봉을 부리던 그가 혁명군에 편입된 후에는 공산당에까지 입당하였다. 내가 부대의 이름으로 입당을 축하한다고 말하자 『군지휘동지, 나는 오늘 입당하면서 군지휘동지의 아우를 생각했습니다. 철주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오늘과 같은 날을 맞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철주가 임춘추동무를 데리고 와서 자기의 병을 떼주던 사실과 자기가 반일의 길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꾸준히 이끌어주던 사실을 옛말같이 이야기해 주는 것이었다.

1935년 6월에 철주는 처창즈근방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나는 철주가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경박호반에서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큰 강이나 호수를 보기만 하면 동생생각을 하군 한다.

철주까지 전사하고나니 막내동생은 의지가지할데 없는 고아가 되었다. 김정룡이네가 처창즈유격근거지로 들어간 다음부터 동생은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며 남의 집에서 아이보개도 하고 심부름군노릇도 하면서 밥을 얻어먹었다. 관동군이 나에 대한 『귀순』공작에 써먹으려고 나의 연고자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이던 때였으므로 막내동생은 자기의 이름자와 출신마저 속이고 동북 3성은 물론, 중국관내의 도회지들과 농촌들에까지 들락날락하며 정처없는 유랑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다 나니 그는 베이징에도 얼마간 가있었다.

나도 해방 후 일본경찰들이 남기고 간 문건에서 동생의 수배와 관련된 자료들을 보았다.

막내동생은 신경맥주공장에서 일할 때 고향이 너무 그리워 조국에 나와서 석달가량 지냈다. 그때 그는 검은 양복차림에 흰구두를 신고 만경대에 나타났다.

그 차림새가 어찌나도 의젓하고 늠름해 보였던지 우리 할아버지는 막내손자가 무슨 벼슬자리라도 얻어가지고 자수성가를 한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그때 막내동생은 조부모님들에게 시름을 끼쳐드리지 않으려고 장춘에서 대학을 다닌다고 하였다. 경찰이 사진까지 내돌리며 지명수배를 하고 있던 때여서 그는 고향에 나와서도 만경대에 있지 못하고 첫째 고모네 집에서 숨어 지내다가 다시 만주로 들어가버리었다.

양강구를 떠난 반일인민유격대의 40명대오는 돈화와 액목을 거쳐 산발을 타고 남호두방면으로 북상하였다. 우리 부대가 나의 「머슴꾼」시절이 흘러간 그 유명한 푸르허마을에 들려 정치공작을 한 것도 이때이며 돈화현 할바령부근에서 돈도선(돈화ㅡ도문)철도부설공사에 동원된 일본군수송대와 격전을 벌인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 전투가 있은 후 나는 돈화현 두도량자에서 고재봉도 만났다.

적들의 폭압이 심한 사도황구를 떠나 두도량자로 활동무대를 옮긴 고재봉은 지하조직이 운영하는 농민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두도량자에서 돈화현성까지는 30리밖에 안되었다.

나는 그때 두도량자에서 고재봉의 어머니도 만나보았다.

우리는 일본군수송대를 들이치고 노획한 밀가루를 집집마다 나누어주고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인민들과 함께 먹었다. 그 전투에서 노획한 광목천은 농민학원에 주어 학생들에게 교복을 해 입히도록 하였다.

두도량자를 떠난 우리 부대는 다시 북상하여 관지부근과 남호두지방에서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을 한 다음 왕청지구에 들어가 당, 공청 조직들과 대중단체들의 사업을 요해하면서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얼굴을 익히었다. 이것은 장차 왕청에 활동거점을 잡기 위한 기초작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왕청에 가서도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을 늦추지 않았다. 나는 이광의 별동대가 총 몇자루를 해결하려고 잘못 건드려놓은 관보전부대를 만나려고 이수구에 찾아갔다. 그런데 관보전은 벌써 항일을 포기하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그때 관영장을 만나기만 하면 왕청동무들을 대신하여 그에게 사죄도 하고 공동투쟁을 위한 방도도 의논하면서 지난날 조, 중무장부대들 사이에 일시적으로 조성되었던 갈등과 대립을 청산하려고 하였다.

관보전은 달아났지만 나머지사람들이라도 만나려고 연락을 보냈더니 100명쯤 되는 반일부대병사들이 돈화현성에서 일본군대를 족친 김일성부대가 어떤 부대인지 보자고 하면서 우리를 찾아왔다. 나는 그들앞에서 왕청별동대가 무기를 해결하기 위해 관영장부대의 병사들에게 손을 댄것이 비우호적인 처사였음을 인정하고 조중인민의 공동투쟁과 반일부대의 사명과 관련된 허심탄회한 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에 대한 반일부대사람들의 반향이 좋았다. 코산이라는 지휘관은 그 연설을 듣고 나서 자기도 관보전처럼 항일을 포기할 생각을 하였는데 이제부터는 옳은 길을 걷겠다고 하였다. 그 결의대로 그는 반일전선에서 잘 싸웠다. 왕청에서 큰 두통거리로 되었던 반일부대와의 화해는 이처럼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우리는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에서 나타나고 있던 좌경적 편향을 없애고 그들을 항일연합전선에 더 많이 인입하기 위한 목적으로 나자구에서 반일병사위원회를 소집하였다. 그때 동녕현성에 집결된 구국군부대들은 소련을 경유하여 중국관내에로 퇴각할 차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 국경밖으로 달아나려고 서두르는 구국군의 도주를 막고 그들을 반일전선에 튼튼히 묶어놓으려고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유격투쟁앞에 엄중한 난관이 조성될 수 있었다. 반일부대들을 격파하기 위하여 사방에 분산되었던 적들의 『토벌』역량은 몇백명밖에 되지 않는 우리의 유격대들에 집중되어 유년기에 있는 우리의 무장력을 단숨에 질식시킬 수 있었다. 적아의 역량관계는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해질 수 있었다.

그 당시 일본군은 만주의 군소도시들을 다 점령할 계획밑에 도처에서 반일무장력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들은 현소재지까지 다 점령하려고 획책하였다.

회의에는 나와 이광, 진한장, 왕윤성, 호진민, 주보중을 비롯하여 30~40명이 참가하였는데 나와 이광은 우리 나라를 대표하였고 진한장, 왕윤성, 호진민, 주보중은 중국측을 대표하였다.

회의의 기본안건은 구국군의 도주를 막고 반일연합전선을 강화하기 위한 대책에 관한 문제였다.

회의에서는 먼저 왕청유격대의 과오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과오의 시초로 된것은 왕청부대에서 발생되었던 「김명산사건」이었다. 김명산은 원래 장학량군시절의 「보위탄」에 있다가 9.18사변후 6명의 중국인부하를 거느리고 왕청유격대로 반변해 온 조선사람이었다. 그는 명포수출신으로서 싸움을 잘하였다. 왕청부대동무들은 그가 반변해오자 금덩이가 굴러들어온다고 기뻐하였다.

그런데 반변해온 중국인대원 6명중 한명이 적통치구역에 정찰을 나갔다가 대감자음식점에 들려 값도 치르지 않고 호떡 한그릇을 먹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에게는 음식값을 물어줄 돈이 없었다. 그는 부대에 돌아와 자기가 돈도 내지 않고 음식을 먹고 온 사실에 대하여 솔직하게 보고하였다.

현당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좌경분자들은 유격대의 명예를 훼손시킨 해독분자라는 감투를 씌워 그 중국인대원을 총살하였다. 현당 군사부의 조치로 왕청에서 처형당한 중국인대원들의 수는 무려 10여명에 달하였다.

김명산과 함께 반변해 들어 왔던 나머지 중국인대원들은 이러한 공포분위기에 놀라 부대를 탈출하여 마촌근방에 주둔하고 있는 관보전부대에 찾아갔다. 유격대가 중국사람들을 함부로 총살한다는 그들의 선전을 듣고 위험을 느낀 관보전은 유격대의 주둔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깊은 골짜기에 부대를 이동시켜가지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살해할 기회를 노리었다.

10월혁명기념일이 되자 왕청사람들은 날창과 몽둥이와 같은 원시적인 무기들을 휴대하고 행사장에 모여들었다. 그들이 이런 유치한 무기들을 들고 기념식장에 나타난 것은 행사분위기를 돋구기 위해서였다.

기념식장에 사람들이 집결하는 것을 자기네 부대에 대한 공격준비라고 잘못 판단한 관보전은 분개하여 자기의 수하에서 참모장의 직책을 가지고 구국군대원들에 대한 교양과 통일전선운동을 추진시키고 있던 유격대공작원 김은식과 홍해일, 원홍권 등 여러명의 조선사람들을 총살하였다. 속담에도 있는 것처럼 「가는 방망이 오는 홍두깨」와도 같은 역습이었다.

그후 투쟁을 포기한 관보전의 부대는 삼삼오오 떼를 지어 적의 통치구역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왕청부대는 관부대의 투항을 막는다고 하면서 몇차례에 걸쳐 그들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들이 무장을 순순히 내놓지 않는다고 하여 관부대의 투항병 몇명을 죽이었다.

이 사건을 발단으로 하여 관보전부대는 조선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복수전을 시작하였다. 조선청년들 중에서 공산주의운동을 한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붙들어다가 총살하였다. 조직된지 몇달 되지 않은 왕청유격대는 반일부대에 포위되어 많은 희생을 내였다.

반일부대와의 관계에서 발로된 이와 같은 미숙성과 무분별성은 조중관계를 급격히 약화시키고 조선혁명앞에 헤어나기 어려운 함정을 파놓았다.

회의참가자들은 반일부대와의 관계를 망쳐놓은 다음에도 그 과오의 엄중성을 잘 깨닫지 못하고 그 무슨 복수를 운운하는 왕청유격대의 지휘관들을 가차없이 비판하였으며 장시간에 걸치는 논의를 거쳐 구국군과의 사업에서 지켜야 할 원칙과 행동조례에 대하여 다시한번 확인하고 그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에 도달하였다.

다음으로 우리가 회의에서 논의한 것은 어떻게 하면 구국군의 발목을 만주땅에 잡아매두고 그들로 하여금 항일을 계속하도록 하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구국군은 그 당시 수만명에 달하는 역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에게 일본군을 당해낼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일본사람들 자신이 유포시킨「천하무적」설을 그대로 받아들여 정말 이 세상에는 일본을 당해낼 힘이 없고 일본군대에 대적할만한 군대가 없다고 인정하면서 투쟁을 거의나 포기하였다. 그들에게 남은 것이란 어떻게 하면 일본군에게 죽거나 포로되지 않고 아직 전쟁의 불찌가 튀지 않고 있는 산해관 너머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겠는가 하는 타산뿐이었다.

일본군은 간도지방에서 왕덕림부대에 공격의 예봉을 돌리고 있었다. 일본군이 왕덕림부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게 되면 나자구도 불원간 적의 수중에 들어갈 수 있었다.

회의참가자들은 어떻게 하나 구국군과 함께 나자구를 사수하자고 결의하였다. 나자구를 사수하자면 왕덕림을 설복하여 그가 소련으로 달아나지 않도록 해야 하였다. 구국군의 속심은 소련을 거쳐서 중국본토로 가자는 것이었다. 반일부대두령들과 병사들 속에서 소만국경을 넘어가는 것은 하나의 추세로 되고 있었다. 수만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던 이두와 마점산도 소련을 경유하여 중국본토로 달아나버리었다. 구국군의 도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출로는 일본군과 전투를 한번 본때있게 하여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적황군」에 대한 환상과 공포심을 완전히 숙청해버리는 것이었다.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가운데서 왕덕림을 설복할 수 있는 적임자는 주보중이었다. 주보중은 국제공산당의 위임을 받고 왕덕림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나는 주보중에게 왕덕림을 설복하여 그가 어떤 일이 있던지 퇴각을 중지하고 유격대와의 연합전선에 나서도록 해보라고 권고하였다.

『우리는 동만에 거주하는 조선사람들을 토대로 해가지고 유격전을 장기적으로 할 수 있소. 문제는 구국군인데 당신이 무슨 수를 써서든지 왕덕림을 설복해서 그들이 만주땅에 버티고 서서 최후의 한사람까지 항전을 계속하도록 해야 하오. 그 사람들이 소련으로 가겠다는 건 시베리아에 가서 사회주의혁명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소련땅을 거쳐 관내로 도망치려는 것이요.』

주보중은 그 말을 듣자 해결하기 힘든 숙제라고 하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들이 아직 속내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구국군이라는건 사실 겁쟁이들의 집단이요. 일본놈들의 비행기가 우르릉 하고 삐라 한장만 뿌려도 부들부들 떨면서 꽁무니를 빼는 시라소니무리란 말이요. 그러니 도저히 전투를 해볼 수 없구만. 그렇게 비겁한 무리들을 나는 난생처음 보았소. 구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을 친다는 건 망상이나 다름없소.』

주보중과 같이 연합불가능설을 제창하는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이렇게 되어 의견대립이 생기고 불가능론을 고집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진행되었다. 그때는 다 제마끔 영웅이고 천재이고 지도자였다. 구국군병사공작위원회라고 하는 것은 각지에 나가서 지방공작을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임시적인 조직인 것만큼 누구라고 할만한 지도자가 없었다.

그러나 회의는 내가 의장이 되어 집행하였고 회의는 회의대로 다하였다. 내가 의장으로 회의를 집행한 것은 직급이 높아서가 아니라 구국군들과의 사업에서는 김일성이 노장이라고 하면서 중국동무들이 나를 추대하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나자구회의다. 구국군병사공작위원회로서는 마지막회의였다. 이 회의를 마감으로 병사공작위원회는 해체되었다.

나자구회의의 결정에 따라 나와 이광, 진한장과 주보중, 호진민은 왕덕림부대, 오의성부대, 채세영부대와의 사업을 나누어 맡기로 하였다. 오의성과 채세영은 다 왕덕림의 부하들이었다.

얼마후 오위성부대에 간 진한장한테서 통보가 왔다. 오의성이 나자구회의의 방침에 응하기로 약속하였다는 낙관적인 소식이었다.

내가 왕덕림부대와의 사업을 하고 있을 때 일본군이 나자구일대로 밀려들었다. 적들은 우리 주력부대가 왕덕림부대와 연합전선을 형성하면 큰일이라고 하면서 대병력을 동원하여 빠른 속도로 공격해왔다. 왕덕림은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나자구에서 도망쳤다. 수천수만명의 대병력이 돌개바람에 말려가는 가을락엽처럼 일본군의 탄막을 피해 소만국경쪽으로 철퇴하였다.

몇십명에 지나지 않는 유격대역량만으로는 도저히 나자구를 사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도 구국군과 함께 동녕현쪽으로 후퇴하였다. 동녕현까지 따라가서라도 기어이 구국군을 돌려세우자는 것이었다. 적은 인원을 가지고 대병력과 격전을 벌리면서 후퇴하다나니 우리는 도중에 고생을 많이 하였다. 우리가 적의 대군과 싸우면서 동녕현방향으로 갈 때에는 추운 동지달이어서 반일병사들 가운데도 얼어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구국군을 따라가면서 꾸준히 왕덕림을 설복하였다. 그때 그가 나의 말을 들었더라면 공동전선을 하여 동북지방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왕덕림은 나의 권고를 듣지 않고 끝내 소련을 거쳐 중국관내로 가버리었다.

우리는 왕덕림과의 교섭을 단념하고 노정을 바꾸어 최종목적지인 왕청지구로 향하였다. 나자구에서 수백리를 걸어 소만국경이 보이는 곳까지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서는 내 마음은 비길 데 없이 침울하고 암담하였다. 수만명에 달하는 구국군도 감히 일본군에 대항하지 못하고 뺑소니를 치는데 18명밖에 남지 않은 우리 부대는 이 겨울을 도대체 어떻게 나야 하는가. 어떤 묘술로 이 엄혹한 고비를 넘겨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8명이면 일본사람들이 즐겨 쓰던 표현에도 있는 것처럼 『창해일속』과 같이 미미한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부대가 40명으로부터 18명으로 줄어든 것은 여러 가지 사정에서였다. 싸움에서 전사도 하고 병을 만나 떨어진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몸이 허약해서 내보낸 사람도 있고 개중에는 투쟁을 못하겠다고 해서 집으로 돌려보낸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독립군출신의 나이 많은 대원들과 일부 농촌청년들이 더욱 견디기 힘들어하였다.

마지막까지 대오에 남은 것은 길림시절부터 공청조직에 망라되어 투쟁하던 동무들이었다. 그 18명을 데리고 사선을 헤치면서 왕청으로 나올 때 내가 새롭게 깨달은 것은 사람은 조직생활을 통해 단련되어야 어떤 극단적인 정황에서도 자기의 신념을 끝까지 고수하고 혁명가로서의 도덕적인 책임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왕청으로 가는 노상에서 오의성의 연락병을 만나 그와 함께 행동하였다. 그 연락병의 이름은 맹소명이라고 하였다.

우리 대원들은 처음에 신분을 알아보려고 그를 단속하였다. 일본간첩들이 사방에 우글우글할 때였으므로 우리는 신분을 확인할 수 없는 낯선 사람들에 대해서는 몹시 경계하였다. 맹소명에게는 구국군병사공작위원회와 반일부대와의 협약으로 발급된 반일회원증이 있었다. 이 반일회원증을 유격대원들에게도 주고 반일부대병사들에게도 주었다. 이 증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양측에서 서로 보호하고 도와주게 되어있었다. 맹소명은 반일회원증뿐 아니라 오의성이 왕덕림에게 보내는 응원요청까지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가 오의성의 연락병이라는 것을 완전히 신임할 수 있었다.

맹소명이 천교령으로 가게 된 데는 그럴만한 곡절이 있었다.

『사실은 이 편지를 전하려고 동녕까지 갔댔는데 왕덕림이 달아나는 바람에 허탕을 치고 돌아옵니다. 오의성한테 오니 그도 로모저하에 한개 대대만 떨구고 홍석라자쪽으로 철수해버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글쎄 로모저하에 떨궈두었다는 그 한개 대대마저 소삼차구(천교령)쪽으로 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대대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나중엔 죽더라도 항일을 해아겠으니까요.』

맹소명의 항일의식은 아주 견결하였다. 그는 동북 3성에 시국을 평정할만한 인물이 없다고 개탄하면서 대장님은 우리가 이긴다고 생각합니까? 일본이 이긴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물었다.

『우리가 이긴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의 어떤 작가는 사람은 패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승리를 위해서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다 승리를 위해서 지금 이 눈속을 헤쳐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맹소명과 함께 소삼차구방향으로 갔다는 그 대대장을 찾기로 결심하였다. 우리는 그 한개 대대에 연합전선의 명줄을 걸고 어떤 일이 있든지 그 대대만은 꼭 설복하여 투쟁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맹소명은 왕청까지 가서 우리와 함께 요영구방위전투에도 참가하였다. 그는 가장 어려운 때에 우리를 도와주었고 우리와 더불어 생사를 같이한 잊을 수 없는 동행자였다. 1974년에 맹소명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가 나자구등판에서 만나게 된 때를 감회깊이 상기시키었다.

나는 그 편지를 보고 지난날 우리와 함께 고난속에서 우의를 나누던 오의성의 연락병이 살아있다는 것과 그가 돈화합작사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가장 힘들게 넘긴 고비는 노흑산에 갔을 때라고 생각한다. 노흑산까지는 덜렁덜렁하였지만 구국군이 동행하였으므로 우리는 고생을 많이 하면서도 별로 외로운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이 소련으로 다 도망 가버린 후로는 그 광막한 등판에 우리 18명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왕덕림이 월경하면서 남겨두고 간 일부를 데리고 주보중까지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가다 나니 우리는 완전히 고립무원한 상태에 빠지었다.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돌아 치면서 투항을 권고하는 삐라를 뿌리고 땅에서는 「토벌」에 동원된 일본군무리들이 사방에서 우리를 포위하였다. 우리 나라의 고산지대에서조차 볼 수 없는 혹독한 추위와 허리를 치는 장설때문에 대오는 좀처럼 앞으로 전진할 수가 없었다. 임시변통으로 그날그날 얻어먹으며 힘들게 저축해둔 식량도 바닥이 났다. 5월에 소사하에서 입고 떠난 군복마저 다 찢기고 터져서 살이 드러났다.

이런 때에 우리는 나자구등판에서 마가성을 가진 좋은 노인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어려운 고비를 모면하였다. 우리가 마노인을 만난 것은 음력 섣달그믐날이었다. 사상으로 보면 무정견, 무소속인데 국민당의 정치에 대해서는 덜 돼먹었다고 침을 뱉는 영감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염세주의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들에게 덕을 베풀지 않고서는 괴로와서 견디지 못하는 착하고 인정깊은 호인이었다.

마노인한테는 집이 두채가 있었다. 아래채에는 우리가 들고 윗채에는 구국군패잔병들이 들어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반소사상을 가진 사람들로서 소련이 공산국가라는 이유로 월경을 시도하지 않고 만주에 떨어진 자들이었다. 패잔병들 가운데는 오의성이 로모저하에 떨궈두고 갔다던 곽대대장의 부하들도 있었다.

맹소명은 여장을 풀어놓기 바쁘게 구국군의 맥을 짚어봐야겠다고 하면서 자진하여 윗채의 패잔병들을 찾아갔다. 나는 그에게 구국군병사들이 우리와 손을 잡고 공동으로 움직일 용의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타진해보라고 하였다. 맹소명은 곽대대장의 부하들 중에 아는 사람들이 많으니 1차적으로는 자기가 먼저 그들의 속심을 떠보고 승산이 보이면 김대장이 가서 정식으로 교섭을 해보는 것이 어떤 가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패잔병들을 만나고 온 맹소명은 어깨를 떨구고 우울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연합전선은커녕 아무 것도 못할 놈들입니다. 저놈들은 벌써 토비가 될 공론을 하고 있습니다.』

마노인도 구국군패잔병들이 우리의 무장을 해제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주었다. 그들이 우리의 총을 탈취해가지고 비적의 대오를 확장할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운명과 혁명전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에서 반일부대병사들이 수천수만명 와글와글할 때에는 일본군과 싸움을 해도 당장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들이 다 달아나고 없는데다가 우리 대오마저 18명밖에 남지 않고 보니 그저 막연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왕청에 갔대야 총 여라문자루밖에 없으니 그걸 가지고 무슨 일을 치르겠는가. 연길에 있는 무기라야 총 몇십자루 정도밖에 안될 것이고 설상가상으로 저 무지막지한 패잔병들마저 우리의 무장을 빼앗겠다고 날치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나자구의 이름 모를 등판까지 왔는데 왕청으로 돌아갈 길도 묘연했다. 이 일을 어떻게 할 작정이냐? 자신에게 반문도 해보았다. 무장을 줴버리고 다시 돌아가 지하투쟁이나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고생스럽더라도 무장투쟁을 계속할 것인가?

이런 동요가 없었다고 하면 진실을 외곡하고 역사를 위조하는 것으로 될 것이다. 나는 그때 나뿐 아니라 우리 집단에서 동요가 있었다는 것을 숨기지 않으며 또 숨길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강철도 산화되면 변하는 법이다. 인간은 강철도 아니거니와 그 강철보다 약하고 변이성이 많은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강철보다 훨씬 더 억세다고 말할 수 있다. 강철은 자기 힘으로 산화과정을 막을 수 없지만 인간은 자기의 사상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스스로 통제하고 조정할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동요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동요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데 있는 것이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조절할 줄 아는 고유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혁명가를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역경을 순경으로 만들 줄 아는 강의하고 창조적이고 희생적인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어떻게 해야 할지 향방을 잡지 못하였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한이 있더라도 무장투쟁을 계속해야겠는데 남아있는 대원들이란 모두 스무살도 채 안되는 홍안의 청년들이었다. 내 자신도 아직은 경험이 어리다고 할 수 있었다. 길림바닥에서 삐라를 쓰고 연설이나 하며 돌아다닐 때에는 모두가 영웅호걸이었는데 이런 경우에는 누구나 다 초학도들이었다. 지하공작을 할 때에는 방법이 많았지만 수만명의 우군을 다 잃어버리고 패잔병들만 남은 무인지경에서 18명의 행로를 어떻게 개척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풀기 어려운 과제였다.

윗집에 든 패잔병들은 토비가 될 것을 계획하였지만 우리는 그런 노릇을 절대로 할 수가 없었다. 조직군중이 있는 곳에 가야 무슨 방법이 나서겠는데 조선인부락은 200리쯤 가야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어간도 일본군이 없는 골짜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혁명이란 이다지도 간고한 것인가, 불과 2~3년동안이면 손쉽게 결판을 낼 수 있으리라고 보았던 우리 혁명이 어쩌면 이렇게도 험한 벼랑끝에 와 서게 되었는가, 안도에서 나팔을 불며 도도하게 출발하였던 우리의 대오가 황량한 이 산등에서 전진을 멈추고 마는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이 부대를 무으려고 끼니를 건는 것은 며칠이었고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몇날 몇밤이었던가. 이 부대를 위해 세상을 하직하시는 어머니의 곁에도 가있지 못하고 사랑하는 동생들과도 생리별을 한 내가 아닌가. 차광수도, 최창걸도 이 대오를 위해 청춘을 바치지 않았는가. 차광수는 돈화에 정찰을 나갔다가 전사하였다.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고 걸어가야 할 길을 생각하는 내마음은 온 지구덩어리가 통째로 매달린 듯 무겁기만 하였다.

내가 아궁앞에 앉아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노인이 내옆에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자네가 책임자인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장이라는 사람이 눈물은 왜 흘리는가?』

『눈바람을 맞으면서 오느라고 그런가 봅니다.』

대답은 그런 식으로 굼때었으나 나는 사실 눈바람탓이 아니라 앞날에 대한 걱정때문에 눈물을 흘리었던 것이다.

노인은 한참동안 나를 굽어보면서 길다란 채수염을 연방 내리쓸었다.

『자네가 저 윗채에 든 놈들때문에 근심하는 것 같은데 너무 상심하지 말게. 내 오늘저녁 좋은 곳에 데려다 주겠으니 거기 가서 며칠 푹 쉬라구. 한 스무날 쉬면서 공부도 하고 영양보충도 하면 머리가 제갈량처럼 잘 돌아갈 걸세.』

밤중에 마노인은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우리들을 모조리 흔들어깨워 설음식으로 빚어놓은 만두를 먹이었다. 그리고는 한 50리 실히 떨어진 곳에 있는 산막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산막은 비행기도 볼 수 없는 울창한 수림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산막집이라고 해야 한장정도의 삿자리나 겨우 깔 수 있는 크기의 방안이었는데 거기에 자그마한 헛간이 하나 붙어있을 뿐이었다. 헛간에는 마노인이 옹노를 놓아서 잡아 얼군 노루와 토끼도 있었고 밀, 강냉이 같은 낟알과 망도 있었다.

『방은 좁지만 짚을 펴고 지내면 불편한대로 그럭저럭 급한 대목을 넘길 수 있을 거네. 여기에 숨어있으면서 몸들을 추세우라구. 바깥소식은 내가 며칠에 한번씩 와서 전해주지. 자네들이 이 산막을 떠날 때는 길안내도 내가 해주겠네.』

노인이 이런 말을 하면서 산막에 불을 지펴줄 때 우리는 고마움에 목이 메여 다같이 눈물을 흘리었다. 그처럼 한적하고 쓸쓸한 등판에서 마노인과 같이 성실한 은인을 만난 것은 누구에게나 쉽게 차례질 수 없는 행운이었다. 대원들은 모두 「하느님」이 우리를 굽어본다고 농을 하였다.

우리는 그 산막에서 보름 남짓하게 정양도 하고 학습도 하고 노루사냥도 하였다.

산막집에는 마노인이 가져다둔 책들이 많았다. 소설책도 있고 정치서적도 있었으며 위인들의 전기도 있었다. 마노인이 비록 깊은 산중에서 사냥을 생업으로 삼고 있었지만 학식은 아주 풍부한 분이었다. 여럿이 순번을 다투어가며 경쟁적으로 읽다 나니 책은 어느 것이나 다 보풀이 일고 너덜너덜해졌다.

책을 읽은 다음에는 반드시 소감을 발표하거나 일정한 주제를 정해놓고 논쟁을 벌리었다. 제가끔 마르크스가 어떻게 말했고 레닌이 어떻게 말했다는 식으로 명제를 따로 인용해가면서 자기 주장을 논증하느라고 열을 올리었다. 마르크스주의창시자들의 명제나 유명한 작가들의 명문가운데서 몇가지씩은 다 뜬금으로 외워가지고 다닐 때였다. 그 당시에는 청년들이 모여 앉기만 하면 손중산도 비판하였다. 그 누구를 숭배하는 것도 멋이었지만 모두다 숭상하는 위인을 비판하는 것도 하나의 멋으로 되고 있었다.

그때는 다 자기가 잘났다고 할 때였다. 모두가 다 걸작이고 영웅호걸이었다.

우리는 이 산막에서 앞으로의 행동방향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논의하였다. 흩어져서 집으로 돌아가겠는가? 아니면 왕청의 조선인부락에 가서 거기에 있는 별동대를 모아가지고 부대를 확대하여 투쟁을 계속할 것인가?

누구나 다 투쟁을 계속하자고 결의하였는데 해룡에서 입대한 한 동무만은 몸이 약해서 우리들과 같이 무장투쟁을 계속할 것 같지 못하다고 실토하였다. 그 동무의 체력이 유격투쟁을 할만큼 준비되지 못한 것 만은 사실이었다.

우리는 그가 그런 고백을 하는데 대하여 까박을 붙이거나 문제시하지 않았다.

『못가겠으면 여기서 직방 못가겠다고 말하는 것이 좋다. 혁명은 억지로 하지 못한다. 강권이나 위협으로써는 할 수 없는 것이 혁명이다. 그러니 가려면 가고 투쟁을 계속하려면 남아서 투쟁해야 한다.』

나는 부대를 책임진 지휘관으로서의 자기의 견해를 이렇게 밝히고 각자가 스스로 결심을 채택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며칠 후 우리는 한자리에 다시 모여 앉아 대원들의 결심을 들어보았다. 일행중 16명은 죽는 한이 있어도 혁명을 계속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런데 나머지 두명은 부대를 떠나게 해달라고 제기하였다.

해룡에서 온 동무는 이번에도 몸이 약해서 무장투쟁을 하지 못하겠으니 집으로 보내달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자기를 비겁쟁이라고 인정하지 말아달라는 부탁도 하였다. 몸이 약해서 못하겠다고 하니 우리로서는 그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우리를 따라다니기가 힘들면 집으로 가라, 우리는 그걸 허물하지 않겠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꼴을 해가지고는 못간다, 옷이 다 꿰져서 거렁뱅이꼴이 되었는데 그런 몰골로야 부모들품으로 돌아갈 수 없지 않느냐, 가기는 가되 조선인부락에 가서 여비를 얻어가지고 의복이랑 해입고 가라고 하였다.

다른 동무는 소련에 넘어가서 공부를 좀 하겠다고 하였다.

『소련에 보증인도 없이 무턱대고 넘어가면 공부를 시켜주겠는지 노동을 시키겠는지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왕청에 가서 일을 좀 하다가 그곳과의 연계가 맺어지면 조직의 보증을 받아가지고 떠나는 것이 좋지 않는가.』

두 동무는 내 말을 긍정하면서 내가 하라는대로 하겠다고 하였다.

그후 우리는 마노인의 안내로 무사히 나자구등판을 떠났다. 노인은 우리를 왕청현 전각루까지 안내해주었다. 참으로 친절하고 다심하고 인정깊은 노인이었다. 몇해후 우리가 근거지안팎에서 적들을 사정없이 답새기던 유격투쟁의 활성기가 도래하였을 때 나는 얼마간의 천과 식량을 가지고 나자구등판을 찾아갔다. 그러나 마노인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지금도 나의 기억속에는 마노인의 영상이 60년전의 모습그대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어느때인가 나는 작가들에게 그 노인을 원형으로 하여 가극이나 연극을 하나 만들어보라고 하였다. 그 노인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는 가극이나 연극을 만들어낼 수 있는 훌륭한 소재이다.

그 겨울에 우리가 나자구오지에서 굶어 죽지 않고 얼어 죽지 않고 총탄에 맞아 죽지 않은 것은 기적중의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도 그때 무슨 힘이 시련속에서 우리를 일어서게 하였는가, 무슨 힘이 우리를 패배자나 낙오분자로 만들지 않고 승리자로 만들어 항일의 기발을 그냥 추켜들게 하였는가고 자문하군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것은 혁명에 대한 책임감이었다.』라고 긍지에 넘쳐 자답하군 한다. 그 책임감만 없었더라면 우리는 눈구뎅이 속에 그대로 주저앉아 두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는 그때 우리가 주저앉으면 조선이 다시 소생하지 못한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죽어도 조선을 구원할 사람들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더라면 우리는 나자구등판의 눈사태 속에 파묻혀 더는 일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