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이 있는 곳에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는 곳에 군대가 있다는 것은 하나의 초보적인 정치상식이다. 모나코와 같은 특수한 몇몇 나라들을 제외한 세계의 대소국가들은 거의 모두가 자체방위를 위한 민족군대를 가지고 있다. 지구상의 수많은 약소국가들이 식민주의자들의 총 몇방에 자주권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수백년동안 노예살이를 해온 것은 군대가 없었거나 약한데도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구한국의 군대도 나라를 지켜내지 못하고 괴멸되었다. 내란을 평정할 때는 그렇게도 극악스럽던 군대가 외적앞에서는 대포도 변변히 쏘아보지 못하고 삿대질을 얼마간 하다가 주저앉아버리었다. 우리 나라가 망한데는 국정이 부패한데도 있었지만 군력이 쇠약한 탓도 있었다.

망한 나라를 찾아보려고 조선의 선각자들은 독립군을 조직하였다. 국권을 강탈당한 민족이 그 국권의 수복을 위해 군대를 조직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민족주의자들이 독립군을 조직하여 여러해동안 무력항쟁을 해왔다면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유격대를 창건하여 일본제국주의침략자들에게 철추를 내리었다. 소규모의 비밀유격대로 항일장정의 첫걸음을 떼였던 우리의 무장대오가 이제는 간도 모든 현들에서 연대규모로 발전하였다.

동기「토벌」의 포화가 멎은 뒤 우리는 반일인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른 지방의 유격대지휘관들과 함께 그 방도를 심중하게 상론하였다. 각 현에 조직되어 있는 유격대의 연대들을 하나의 군으로 통합하는 문제는 조성된 정세의 요구로 보나 반일인민유격대자체발전의 합법칙성으로 보나 한시도 미루어서는 안될 초미의  과제로 나섰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는 것은 장성강화된 유격부대들에 대한 통일적 지휘를 더 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 전투력을 높이며 일제의 대규모적인 공세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하는 혁명적인 조치였다.

혁명군문제가 처음으로 우리의 논의에 오른 것은 명월구회의때였다. 그때 우리는 반일인민유격대의 전망문제를 논하면서 유격대를 일단 대대규모로 조직해 가지고 일정한 기간 질량적으로 발전시키다가 때가 되면 대부대혁명군으로 개편하자고 결의하였다. 물론 이 문제가 회의에서 기본안건으로 상정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혁명군대의 장래와 관련된 이 문제를 두고 대표들은 회의장안팎에서 진지한 논의를 거듭하였다. 대부대혁명군의 가장 열렬한 주창자는 오빈과 박훈이었다.

식민지나 반식민지 나라들에서의 항쟁무력은 처음에 작은 규모로 조직되는 것이 상례이다. 소규모의 역량으로 무장대오를 조직한 다음 그것을 밑천으로 살금살금 역량을 확대해 가다가 조건이 성숙되면 부대들을 통합하는 방법으로 하나의 군을 내온다. 멕시코에서 망명을 끝내고 쿠바로 돌아온 초기의 카스트로부대는 82명이었다. 그들 중 살아남은 12명이 7자루의 총을 가지고 시에라 마에스트라산에 들어가서 대오를 늘이고 힘을 키우다가 아바나에 입성하여 바티스타친미독재정권을 벼락같이 무너뜨리었다.

1933년 하반기부터 간도에서는 유격대역량을 통합하고 그 지휘체계를 단일화할 데 대한 문제가 중요한 논점으로 상정되었다. 그것은 적의 동기「토벌」을 격파하기 위한 마촌작전과 수천수만평방키로미터의 판도에서 전개된 영웅적 방위전이 가르쳐준 교훈이기도 하였다.

작전을 총화하는 자리에서 중대호상간의 협동문제, 부대의 통합문제를 가지고 열변을 토한 것은 소왕청관내에서 90일동안 우리와 함께 시종일관 방위전에 참가한 2중대장이나 3중대장이 아니라 작전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은 한흥권중대장이었다. 한흥권은 마촌작전과 관련하여 자기네 중대가 받은 임무는 노야령을 넘어 동만으로 쳐들어오는 적을 견제하는 것이었는데 그동안 적과 접전해본적은 단한번도 없었고 주력부대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었다고 토론하였다. 말하자면 적이 유격근거지를 「토벌」할 때 자기가 적의 뒤통수를 쳐야 하겠는데 그러지 못했고 또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때 그 토론을 들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한흥권의 토론은 자기비판적인 것이었으나 그에게는 사실 비판을 받을만한 건덕지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자기 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한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그러면 그가 왜 자기를 의리도 없고 혁명성도 없고 통찰력도 없는 지휘관이라고 타매하였겠는가. 그가 총화모임에서 강조하려고 한 것은 요컨대 무엇이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한흥권이 자기를 근시안이라고 자탄할 때 나는 나대로 그를 지도하는 상급의 자각을 가지고 마촌작전이 남긴 심각한 교훈을 도출해냈다. 그것이 바로 수시로 변화되는 전투정황에 맞게 중대호상간의 협동을 원만히 조직하자면 그를 총괄할만한 지휘, 참모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하자면 지휘체계를 단일화해야 한다는 교훈이었다.지휘체계를 단일화해야겠다는 그들의 요구는 결국 반일인민유격대를 통합하여 정연한 군체계를 갖춰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적의 동기「토벌」을 분쇄하기 위한 방위전의 전과정에서는 각 지방에 산재하고 있던 유격부대들이 익측과의 협동적 연계나 원조도 없이 고군독전하였다.

화룡현의 경우를 보면 적들이 어랑촌유격근거지에 대한 「토벌」을 시작한 것이 1933년 11월초라고 한다. 이 첫「토벌」은 강력한 타격을 받고 일단 좌절되었다가 11월말부터 단 3일동안 진행된 2차 「토벌」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싸움의 전부라고 한다. 수자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어랑촌에 대한 「토벌」은 소왕청에 대한 공격보다 보름정도나 앞선 것으로 된다. 만일 이런 때 교전상태에 놓여있지 않은 다른 현의 유격부대들이 상호협동의 원칙밑에서 적들의 배후를 타격한다면 어랑촌유격대는 한결 헐한 싸움을 했을 것이었다.

연길현이나 훈춘현의 사정도 이와 대동소이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여 주는가?

유격구마다 「토벌」을 당하는 시기가 서로 다른 상황에서 각 현과 구에 있는 유격부대들을 통일적으로 움직이는 단일한 지휘체계가 있고 참모기구만 있으면 모든 유격대들이 서로 손발을 맞추어가며 상호협력의 강력한 무기로 싸움을 보다 용이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때늦게나마 시사해준다.

그런데 유격대에 대한 지도가 현과 구를 단위로 하여 실현되고 있던 당시의 조건에서는 이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협조관계가 이루어질수 없었다. 이것은 동기「토벌」당시의 유격대지휘체계가 현실적 요구에 수응하지 못하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유격대의 지휘는 각급 당군사부가 하게 되어 있었다. 한개 현에 무력이 한두개 중대밖에 없던 유격운동의 초창기에는 전투도 작은 규모로만 하였으므로 현과 구를 단위로 하여 군대를 지휘하는 체계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유격대의 대오가 확대되고 적들의 「토벌」역량도 백단위로부터 천단위나 만단위로 껑충 뛰어올라간 형편에서는 작은 전투만 골라가며 할 수도 없었다. 전투란 교전일방의 의사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적들이 역량을 끊임없이 증강해 가며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조건에서 우리도 맞불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적들이 사방에서 무슨 사단, 무슨 여단, 무슨 연대 하며 무력을 긁어 모아가지고 대부대로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가 힘을 합치지 못하고 이웃을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이골짜기, 저골짜기에 뿔뿔이 엎디어 제가끔씩 뚱땅거리기만 하였는데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계속 싸워야 하는가? 큰 도시나 성시를 치러 갈 때에는 이 현, 저 현에서 인원들을 추려가지고 집중된 역량으로 적을 쳤는데 방어전에서는 왜 현별, 유격구별로만 싸워야 하는가?

이것은 마촌작전을 전후한 시기 나를 사로잡고 있던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여 유격운동은 그 내용과 규모에 알맞는 새로운 그릇을 요구하고 있었다. 우리앞에는 현과 구들에 널려있는 무장부대들을 한 체계에 묶어 세울 수 있는 전환적인 대책이 필요하였다. 이 요구를 가장 빠르게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은 반일인민유격대를 통합하여 대부대혁명군으로 개편하는 것이었다.

요영구에 주둔하고 있던 4중대장의 편지도 같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었다. 4중대장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마촌작전총화에 참가하지 못하고 자기 중대의 총화내용을 편지로 써서 마촌에 보내주었다. 그 편지를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은 중대장의 전령병으로 일하던 오진우였다. 마촌작전을 총화하면서 나는 반일인민유격대를 통합하는 문제에 대하여 심중히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놓고 주진, 양성룡 등과 자주 협의하였다.

어느날 나는 양성룡이네 집에 가서 기타를 탔다. 내가 기타를 탄 것은 마음이 흥겹거나 편안해서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여 그 당시의 나의 심경은 대단히 울적하였다. 마촌작전은 비록 승리로 결속되었으나 유격구는 가슴을 파내리는 고통에 울고 있었다. 우리와 생사를 같이하던 수많은 얼굴들이 진토속에 묻혀 일어나지 못하였다. 마지막 한대의 서까래마저 다 타버린 재무지우에서 집들을 다시 일떠 세우고 생활을 새롭게 조직해 나간다는 것은 조련치 않은 일이었다.

군사문제를 의논하고 싶어 양성룡을 찾아갔는데 그도 침울한 기색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어젯날의 대대장은 「민생단」감투를 쓰고 구금되었던 것을 몹시 분하게 여기고 있었다. 우리가 보증을 서서 겨우 감옥신세는 면했지만 그는 복직되지 못하였다. 그는 소왕청과 나자구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양식공작을 하고 있었는데 「토벌」에 안해와 어머니를 잃고 나서는 더 과묵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대부대혁명군조직에 대한 화제를 꺼내자 그는 대뜸 반색을 하면서 범상치 않은 열의를 보이었다.

『문제는 어떤 형식과 방법으로 부대들을 통합하는가 하는데 있다고 생각하오.』

양성룡은 찬성, 불찬성이라는 말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형식과 방법 문제를 상정시키는 방법으로 군조직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였다. 그가 제일 걱정한 것은 반「민생단」투쟁에 열을 올리고 있은 배타적 기분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가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바로 거기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고충이 있었고 그러한 난점들을 용의주도하고 원만하게 풀어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투쟁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자기 식의 원리와 자막대기로 재고 내려 먹이던 「국제노선」이 득세하고 이른바 계급적 이익과 국제적 연대성의 이름밑에 민족적 전통과 지향을 한마디로 민족주의적 편향으로 통렬히 공격하던 그 시기 남의 나라땅에서 혁명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우리의 독자적인 무력건설구상을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반일인민유격대를 대부대혁명군으로 통합개편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주진도 찬성하였다. 성격이 괄괄하고 대범한 주진은 내가 말을 꺼내기 바쁘게 격렬한 손짓을 해 가면서 부대들을 통합해 가지고 큼직큼직하게 싸움을 해보자고 말하였다. 나는 큼직큼직하게 싸우자는 그 표현이 못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간도의 조선사람들이 한결같이 아끼고 사랑한 호걸남아 주진한테서만 들을 수 있는 통쾌한 표현이었다.

그는 조선사람들이 부대들을 통합하여 독자적인 혁명군을 내오게 되면 「조선연장주의」감투를 쓸 수도 있는데 그런 감투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말고 하루속히 일을 내밀자고 하였다.

동장영과 같은 사람도 우리의 구상을 지지하였다. 그는 동만에 조직되어 있는 반일인민유격대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무장력이며 그 구성에서도 조선사람들이 압도적다수를 이루고 있으며 중국땅에서 조직된 것이기는 하지만 종국적으로는 조선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의 혁명적 무장력으로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동장영의 이 평가는 조선혁명을 운운하는 것 그자체가 민족주의로 범죄시되던 당시의 실정에서 아주 공정하고 진보적인 것이었다.

동장영도 정당하게 지적한 것과 같이 동만은 물론, 남만의 이홍광, 이동광, 북만의 허형식, 김책, 이학만, 최용건 등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만주지방의 당건설에서 선구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군건설에서도 개척자, 주창자, 영솔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군을 이루고 있은 지휘관들과 대원들의 절대다수도 조선공산주의자들이었다.

동장영은 군을 내오되 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연대성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서로 지지하고 보충하는 형식과 방법을 적절하게 선택할 것을 권고하면서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조중쌍방간에 다같은 이익을 주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우리가 반일인민유격대를 대부대혁명군으로 통합개편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당파견원 반성위도 국제당노선에 부합되는 정당한 방침이라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다.

왕청대대를 함께 이끌던 양성룡으로부터 후에 인민혁명군독립1사 사장을 했던 주진, 동만특위의 동장영, 국제당파견원 반성위에 이르기까지 이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반일인민유격대를 대부대혁명군으로 통합개편할 데 대한 방침을 인식하는데서 완전한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통합개편된 무장력의 명칭선택과 그 성격규정에서도 그들은 우리와 대체적으로 견해를 같이하였다.

우리는 1934년 3월에 정식으로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할 데 대한 방침을 제기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투쟁목적에도 맞고 그것을 담당수행하는 정치적 역량의 성격에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초기에 동만의 일부 지역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공농유격대라고 명명한 것은 그 성격규정에서 계급성 일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으로서 사회적 해방에 앞서 민족적 해방과 독립을 선차적인 과제로 내세웠던 우리 혁명의 성격은 물론, 중국공산주의자들이 주관한 동북혁명의 성격에도 맞지 않았다.

항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기 위한 준비사업으로 동만지방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각 현에 있는 유격대 대대들을 연대로 발전시키었다. 그리하여 간도지방 유격대의 총무력은 5개 연대에 달하였다.

각 연대에는 유격대에 대한 당적 지도를 사명으로 하는 정치부를 두고 작전, 정찰, 통신임무를 담당한 참모부서와 피복, 양식, 군의 사업을 보는 후방처를 설치하였다.

왕청연대는 동만지방 연대무력의 시초로 되었으며 항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는 제1단계 준비사업이 낳은 산아들 중 첫번째 산아로 되었다.

항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는데서 우리가 제2단계의 목표로 설정한 것은 사단체계를 내오는 것이었다.

우리가 사단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은 마촌작전과정에서였다. 5,000명의 대군을 2개 중대역량으로 대항한다는 것은 세계전쟁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소부대에 의한 적후교란전으로 유격구앞에 가로놓인 난관을 타개하면서도 줄곧 우리에게 군단은 몰라도 사단급의 무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몇천명쯤 되는 무력을 가지고 대포를 꽝꽝 쏘아대면서 대부대활동도 하게 되면 얼마나 성수가 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각 현들에 연대들이 이미 조직되고 또 그 역량도 빠른 속도로 불어가는 조건에서 사단을 조직하는 것은 한시도 지체시킬 수 없는 최대의 과제였다.

우리의 목표는 조선인민혁명군산하에 2개 사단과 1개 독립연대를 선차적으로 꾸리고 그 성과를 확대시켜 장차 수개 사단의 무력을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런 목표를 세우고 연길과 화룡에 있는 연대들로 하나의 사단을 꾸리고 훈춘과 왕청에 있는 연대를 기본으로 다른 하나의 사단을 또 편성하기로 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는 과정에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가 새로운 당지도기관으로 출현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는 군대안의 당조직에 대한 지도와 함께 지방의 당조직들에 대한 지도도 동시에 감당하는 무거운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무력의 담보가 없이는 지방당조직들이 자기자신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에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종전까지는 지방당조직들이 군대안의 당조직까지 지도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는 사업은 1934년 3월부터 5월사이의 극히 짧은 기간에 진행되었다.

이 소식에 접한 유격구역인민들은 앞을 다투어 군대를 지원하고 도처에서 성대한 경축모임들을 준비하였다.

왕청의 여성들은 축기를 만들어 우리에게 주었고 공청에서는 아동유희대 축하공연을 마련하였으며 여러가지 체육경기도 벌리었다.

연길의 삼도만유격구역에서는 적통치구역대표들까지 참가한 1,000여명의 군중 대회와 시위가 있었다.

인민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의 편성에서 조국광복의 앞날을 더욱 뚜렷이 확신하게 되었으며 군대와 일심동체가 되어 항일혁명전쟁에 한결같이 떨쳐 나설 굳은 결의들을 다지었다.

우리는 반일인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함으로써 보다 넓은 판도에 자유롭게 진출하여 적극적인 대부대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광활한 길을 열어놓았다. 만일 우리가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지 않았거나 연대나 사단과 같은 대부대의 군사력을 제때에 마련하지 않았더라면 암운에 덮인 조국을 밝히며 높이 타오른 보천보의 횃불도 마련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무송, 간삼봉, 홍두산, 이명수, 대홍단, 홍기하 등 국내와 만주도처에서 적의 정예부대들을 죽음의 함정으로 몰아넣은 연전련승의 기쁨도 맛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동기「토벌」에 이어 유격구를 위협하던 악명높은 위공작전도 파탄시키지 못하였을 것이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함으로써 우리는 무력항쟁으로 기어이 조국의 광복을 이룩하려는 조선민족의 의지를 내외에 힘있게 과시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경우에 따라서 동북인민혁명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활동하였다.

우리의 견해에 의하면 동북이라는 명칭은 어느 한 나라를 의미하는 국호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지역적 개념으로 통용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조직한 인민혁명군이 「만주인민혁명군」이나 「중국인민혁명군」이 아니라 동북인민혁명군이라는 명칭으로도 활동한 것은 반만항일을 투쟁목적으로 내세우고 있었던 중국동지들에게 있어서도 적합한 것이었다. 결국 동북인민혁명군은 조선인민혁명군으로서의 사명과 함께 중국공산주의자들의 반만항일위업에 이바지하는 혁명무력으로서의 사명도 동시에 감당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간도와 동변도 일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조선반도전역에서 가장 강대한 무장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통합개편하는 과정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취한 원칙적인 입장과 용의주도한 정치적 아량은 그후 일제를 반대하는 조중인민의 공동투쟁,  특히 중국 동북지방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만일 우리가 당시의 주객관적 정세를 고려함이 없이 우리 혁명의 주체노선에 명실상부한 형식이나 명칭만을 고집하였더라면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항일무장투쟁을 중국인민의 광범한 지지성원속에서 효과적으로 전개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훗날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한 다음에도 조중항일연합군의 성격에 맞게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할 때에는 동북항일연군이라고 하였고 조선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거나 조선에 나와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정황에 맞게 이름을 바꾸어가며 활동함으로써 이르는 곳 마다에서 조중양국인민의 사랑과 보호 속에 살며 싸울 수 있었다.

우리가 운동의 그 어떤 형식적인 측면보다도 본질적인 내용을 더욱 중시한 것은 지금의 시점으로 평가해보아도 참으로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원칙적인 견해와 폭넓은 태도로 하여 우리는 언제나 국제주의자로서의 자기 본분을 지키면서도 투쟁의 민족적 성격과 독자성을 원만히 고수할 수 있었으며 바로 이것으로 하여 중국동지들이나 국제당으로부터 높은 존경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의 출판물들은 간도에 조직된 인민혁명군을 동북인민혁명군이라는 이름으로가 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썼다.

1935년 상해 상무인서관에서 발행된 「동방잡지」는 동북에서의 빨치산투쟁에 대하여 쓰면서 간도에 조선인민혁명군이 3,000명 있다고 했으며 이것을 프랑스 빠리에 있는 구국출판사에서 발행한 「동북항일열사전」에 그대로 전재하였다.

후에 동북항일연군이 편성된 다음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를 2군이라고 부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성격에 있어서 조중량국인민의 국제적인 반일통일전선체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제2군안의 조선인들은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독자적 임무를 수행하면서 중화민족의 해방운동을 국제주의적 기치아래 지원하였다.

간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 조직되어 그 전과를 확대해 가고 있을 때 누구보다도 공포를 느끼고 그 존재의 위험성에 대하여 제일 큰소리로 떠든 것은 일본제국주의침략세력이었다.

그들은 동만과 남만에서 활동하는 우리의 항일무장력을 그 명칭은 어떻든 『김일성군』으로 통칭하여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한후 반일공동투쟁의 성과를 위하여 간도지방에서 공헌영, 채세영, 사충항, 이삼협 등이 이끌던 항일의용군은 제2군의 군대호를 가지고 있던 조선인민혁명군과 연합하였는데 이것을 「동북화한인민혁명군」(동북조중인민혁명군)이라고도 하였다.

이런 공정을 거쳐 사실상 동만땅에서는 1930년대 전반기에 벌써 조중항일무력의 연합이 확고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주보중은 자기의 글에서 「항일연군 제2군은 동시에 〈조선인민혁명군〉이었다. …항일유격전쟁중 중조인민은 공동사업을 위하여 선혈로 얽혀져 있었다.」라고 함으로써 조선인민혁명군의 실체를 인정하고 공동투쟁노정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던 조중항일무력의 연합을 격찬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사람들도 만주, 특히 간도에 조직된 빨치산을 「조선인순혈빨치산」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우리 동무들이 발굴한 자료에 의하면 소련의 이름있는 중국 및 조선문제전문가였던 웨. 납포포르트는 1937년에 소련의 국제정치잡지 「태평양」에 쓴 「북부조선지역에서의 빨치산운동」이라는 글에서 『…조선빨치산들의 대부분은 통합되어 있고 자기의 중앙을 가지고 있으며 인민혁명군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썼으며 『조선빨치산과 만주빨치산간의 현존하는 연계와 접촉의 확대는 일본군국주의자들에게 매우 큰 불안을 주고 있으며 바로 그것으로 하여 일본은 국경지역에 커다란 주목을 돌리고 있다.』고 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는 것은 단순한 명칭의 교체나 실무적인 재편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항일유격대가 걸어온 전투적 노정을 총화하고 그 성과와 경험을 확대하는 방향에서 유격대의 지휘체계를 개선하고 대오를 질량적으로 강화하는 군건설의 새로운 단계를 의미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한 이후 우리는 적들의 위공작전을 분쇄하기 위한 적극적인 군사작전을 벌리었다.

최종소탕전이라고 호언장담하던 동기「토벌」에서 참패한 관동군 수뇌부와 도쿄의 군부는 실패의 원인과 책임을 규명하는 소동을 벌리던 끝에 1934년 봄부터 종전의 초토화전술을 재검토하고 보다 악랄한 새로운 「토벌」계획으로 이른바 위공작전이라는 것을 들고 나오게 되었다. 그것은 군사적 포위공격과 정치적 폭압, 경제적 봉쇄를 배합하여 유격구를 종국적으로 소멸하려는 악랄한 작전이었다. 우리는 일본사람들의 이 신발명을 장개석이 중국 소비에트구를 공격할 때 쓰던 봉쇄정책의 재판이라고 보았다.

장개석의 봉쇄정책이 「정치공포, 경제공황의 비인간적 세계를 현출하여」 공산군으로 하여금 입지도 못하게 하고 먹지도 못하게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면 위공작전은 유격구의 인민과 군대를 모조리 굶겨 죽이고 얼구어 죽이고 쏘아 죽이고 태워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일본사람들은 이작전을 위하여 집단부락을 만들어 군대와 인민을 분리시키고 중세기적인 십가연좌법과 오가작통법과 같은 보갑제도로 모든 항쟁세력을 적발숙청하려고 하였다.

봉쇄정책과 위공작전은 전술적인 측면에서도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장개석의 전술은 「온찰온타 조보정책」이었다. 이 전술은 상대를 포위한 다음 급하게 추격하지도 않고 깊이도 들어가지 않으며 어떤 지점을 점령하면 천천히 그것을 공고화하며 다시 내놓지 않을 방도까지 연구하면서 다음 지점에로의 공격으로 이전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전술에 대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일본사람들이 고안해낸 「보보점령」전술이었다.

우리 동무들이 이 전술을 두고 『일본사람들 신세두 참 가련하게 되었구만. 장개석의 신세까지 지게 되었으니.』라고 한 것은 실없는 우스개 소리가 아니었다.

적들은 위공작전을 준비하면서 1934년 봄부터 유격구주변에 관동군정예부대들과 조선강점군부대들을 더 많이 끌어들였으며 위만군부대들을 증강하였다.

우리는 적들이 위공작전을 확대하고 있는 긴박한 정세에 대처하여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로 하여금 유격구방어에 계속 힘을 넣으면서 대규모적인 작전으로 적후방의 군사정치적 지점들을 연속타격하여 놈들의 기도를 앞질러 파탄시키는 한편 보다 유리한 지대에 유격구를 확대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조성된 난국을 주동적으로 타개하고 피로써 쟁취한 승리를 공고히 하며 앙양된 인민들의 혁명적 기세를 계속 고조에로 이끌 수 있게 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춘기공세를 벌려 왕청지방에서 적의 주요배치지들과 소백초구, 대두천, 석두하자와 전각루를 비롯한 집단부락건설장들을 습격하였다. 훈춘과 연길, 화룡의 동무들도 집단부락건설장들에 대한 습격으로 적의 위공작전기도를 첫걸음부터 짓부숴 버리었다.

우리는 이 공세에서 이룩한 성과를 공고히 하고 주동에 튼튼히 서서 위공작전을 완전히 파멸에로 몰아넣기 위하여 곧 하기공세를 개시하였다. 이 공세의 중심적 지향은 유격구역을 안도현 서북부와 왕청현 동북부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적이 위공할 때 우리가 고정된 몇개 유격구만 지키고 있으면 그것은 적의 기대에 맞장구를 치는 것으로 되며 그들의 기도에 협력하는 것으로 된다.

유격구를 안도현 서북부로 확대하는 것은 인민혁명군 제1사와 독립연대가 담당하고 왕청현 동북부로 확대하는 과업은 인민혁명군 제2사에 떨어졌다. 대전자와 푸르허를 연결하는 이 유격활동구역이 안도현의 생명선이라면 나자구, 노모저하, 태평구, 삼도하자 일대는 훈춘현과 왕청현의 생명선이었다. 이고장들은 모두 목단령과 노야령을 끼고 있는 유격활동의 이상적인 적지로서 독립운동시기부터 홍범도, 최명록, 이동휘, 황병길과 같은 이름난 무관들의 관심속에 있었다.

우리는 1사 사장 주진과 독립연대장 윤창범으로 하여금 대전자-푸르허 일대에 대한 공격을 선행하게 하여 적의 주의가 그리로 쏠리게 한다음 나자구방면으로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관동군의 시선이 안도현 대전자일대에 쏠리고 있을 때 우리는 인민혁명군 2사 4, 5연대의 일부와 반일부대들과 함께 나자구방면으로 진출하여 삼도하자와 사도하자를 차지하였다. 삼도하자에서 조선인민혁명군과 1,500여명에 달하는 반일부대장병들과의 연환모임이 열리었다. 이것은 나자구전투의 승리를 위한 일종의 사상전이었다. 나자구전투에는 반일부대측에서 공헌영부대, 사충항부대, 채세영부대, 이삼협부대 등이 참가하였다.

나자구는 왕청현 백초구, 동녕현성과 연결된 적들의 군사적 요충지었다.

나자구시내에는 문장인영장이 이끄는 위만군 수백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나자구는 원래 500호 정도의 주민세대를 가진 그리 크지 않은 고장이었는데 9,18사변후 적의 군사적 거점으로 급속히 발전하여 1932년 봄부터는 간도임시파견대의 중요한 기지로 되었다. 일제는 이 파견대가 철수하자 증강된 1개 대대이상의 병력을 나자구에 상주시키고 그것을 위공작전의 한개 밑천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우리가 선제공격을 가하여 나자구일대를 장악하는 것은 위공작전의 한 귀퉁이를 깨뜨리는 동시에 새로운 유격구를 확대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는 주되는 고리었다.

우리는 삼도하자의 이태경노인네 집에서 반일부대의 지휘관들과 함께 나자구공격과 관련된 작전회의를 하였다.

이태경은 의병과 독립군 경력을 다같이 가지고 있는 우국지심이 매우 강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한때 최자익과 함께 북로군정서에서 총무로 일한적도 있었다.

서일이 보통병졸에 지나지 않는 이태경을 총무로 임명한 것은 그의 뛰어난 사격술과 서예솜씨에 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일이 단군을 숭상하는 대종교를 설교하자 이태경은 그에 입교하여 독실한 신자가 되었으며 김좌진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을 주장하였을 때에는 거기에도 동조하여 그 대가로 권총까지 선사받았다.

간도 대「토벌」을 앞두고 김좌진이 북만으로 철수할 때 노인은 상전들을 따라 밀산에 갔다. 그러나 김좌진이 연길현 도목구의 청림속으로 깊숙이 사라진 후에는 그도 동료들과 함께 사도하자지방에 와서 총을 파묻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이태경노인에 대한 인상가운데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내가 반일부대 지휘관들에게 작전의도를 설명하려고 나자구시가약도를 펼쳐놓았을 때 바람결에 펄럭거리지 말라고 노인이 그 약도의 창문쪽귀퉁이를 돌로 지질러놓던 일이다. 이태경네 집안사람들은 그 돌을 복돌이라고 하였다. 닭알처럼 매끈매끈하게 생긴 기묘한 돌이었다. 노인의 말이 자기가 십리평에서 북로군정서 총무로 있을 때 어떤 친구가 죽기 전에 그 돌을 넘겨 주었는데 오래 간수하고 있으면 복이 차례진다는 유언까지 남기었다는 것이다.

그 복돌은 지금 조선혁명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태경노인은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에게 그 돌을 가보로 넘겨주었다. 김일성장군이 작전지도우에 놓고 만진 돌인데 잘 간수하라고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1959에 항일무장투쟁전적지답사단이 중국 동북지방에 갔을 때 노인의 아들은 그 돌을 우리 답사단에 넘겨주었다.

이태경노인은 공산주의가 싫다고 하면서도 우리를 돕는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나자구 반일회장 최정화의 소개로 이 노인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33년 여름이었다. 그때 나는 백마를 타고 삼도하자에 가서 군중정치공작을 하였다. 그 과정에 삼도하자 반일회를 조직하고 거기에 마을의 좌상인 이태경노인을 망라시키었다. 이 노인이 반일회에 가입해 가지고서는 마을사람들을 잘 교양하였다. 마을의 좌상이며 첫째가는 유지인 그가 하는 한마디한마디의 말을 동리사람들은 누구나 다 잘 받아들이었다.

마을에 의병이나 독립군출신이 한두명만 있으면 그런 마을은 혁명화도 더 쉽게 할 수 있었다. 이태경처럼 무기를 파묻고 투쟁을 중도반단한 독립군들도 거의나 애국심 하나만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핵심이 되어 이집저집 돌아다니며 산에서 고생하는 혁명군을 잘 돕자고 호소하면 누구나 다 『그래얍지요.』 하였다. 그들이 나서서 마을에 혁명군이 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고 물으면 『떡을 쳐얍지요.』 하든가 『소를 잡아얍지요.』 하였다. 독립군출신들중에 변절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것은 극소수이고 절대다수는 말년까지 깨끗하게 살았다. 그래서 나는 어떤 마을에 가나 독립군출신 유지들과의 사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석현에서는 오태희, 서대파에서는 최자익, 마촌에서는 이치백, 동일촌에서는 김동순, 삼도하자에서는 이태경 하는 식으로 독립군출신 영감들부터 선참으로 찾아가 인사도 하고 목침을 베고 나란히 누워서 시국이야기도 나누었다.

해방후 어떤 사람들은 독립군출신들을 사상이 다르다고 하면서 배척하였다. 공산주의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볼 때었다. 간혹 편협한 사람들이 간부사업을 할 때에 그런 사람들을 따돌리는 일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시종일관하게 고수해온 통일전선정책에 찬물을 끼얹는 망동이었다.

나는 그런 경향에 부닥칠 때마다 이렇게 말해주군 하였다. 『사조가 다르다고 독립군출신들을 배척하는 것은 고약한 짓이다. 독립군이 공산주의자로 되지 못한 것은 제한성이지 죄가 아니다. 당신들은 혹시 춘향이나 이도령이까지도 공산주의자로 만들려는 것이 아닌가.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다고 애국선배들을 몰라보면 안된다. 시대마다 다른 사조가 있는 법인데 무엇때문에 배척하고 경계하고 따돌리는가. 그래 남들이 뜨뜻한 온돌방에서 처자권속을 거느리고 더운 밥을 먹으며 살아갈 때 독립군이 생명을 걸고 조선독립을 위해 싸운게 죄란 말인가?

나는 집에서 제밥벌이나 하며 편안하게 산 사람들보다는 총을 메고 싸운 의병이나 독립군들이 더 훌륭한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독립군을 배척하면 우리가 인민에게서 버림을 받는다는걸 명심하라.』

우리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만경대에 혁명자유가족학원이 섰을 때 거기에 독립군유자녀들도 입학시키었고 우리의 새 조선 건설노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독립군출신 인사들이 있으면 그들을 능력에 따라 간부로도 배치하였다. 초대농민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강진건선생과 공화국내각의 초대도시경영상 이용선생도 독립군출신들이었다.

우리가 작전회의를 끝내고 전투준비를 하고 있을 때 적들이 선손을 쓰려고 먼저 성시밖으로 쏟아져 나왔다는 정찰보고가 지휘처에 날아왔다. 우리는 유리한 지대에 그들을 끌어다가 주력을 소멸한 다음 계속적인 추격전으로 성시공격을 개시하였다. 연합부대는 폭우속에서 어려운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동녕현성전투와 마찬가지로 나자구전투에서도 제일 큰 암초는 서산포대였다. 이 포대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하여 전투는 3일간이나 계속되었다.

3일째 되는 날 우리가 반일부대지휘부에서 회의를 하고 있을 때 서산포대에서 쏜 박격포탄에 주보중을 비롯한 몇몇 반일부대지휘관들이 중경상을 당하였다. 주보중은 공헌영부대의 참모장으로 이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다. 지휘관들의 부상으로 사기가 저락된 일부 반일부대들이 나자구를 등지고 무질서하게 퇴각을 시작하였다.

이 퇴각을 저지시키지 못하면 싸움은 패전으로 끝날 수 있었다. 서산포대를 점령하는가 못하는가 하는 것은 나자구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고리로 되었다. 서산포대에는 박격포뿐만 아니라 중기관총과 경기관총들도 여러정 배치되어 있었다.

이 포대의 화력에 의하여 이미 한흥권중대장이 창자가 쏟아져 나오는 치명상을 당하였고 조왈남도 전투능력을 잃어버리었다. 한흥권의 부상이 얼마나 처참했던지 그는 자기를 쏘아 달라고 애원까지 하였다.

나는 좌절상태에서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도 포대로 접근하지 못하고 엎드려있는 인민혁명군 대원들을 향해 외치었다.

『동무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서산포대를 점령하자! 혁명을 위하여 최후의 피한방울까지 다 바쳐 싸우자!』

그리고는 사창으로 적을 쏘아 눕히면서 앞으로 돌진하였다. 포대위에서 기관총탄이 우박처럼 날아와 귓부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떤 탄알은 모자에 구멍을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숨을 톺을 사이도 없이 그냥 앞으로만 돌진하였다. 대원들이 땅을 걷어차고 일어나 내 뒤를 따랐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서산포대는 30분만에 점령되고 포대꼭대기에는 붉은기가 휘날리었다.

그 깃발을 본 반일부대병사들도 신심에 넘쳐 총돌격에로 이전하였다. 그들을 좌절에서 돌격에로 불러일으키는 데서는 주보중을 비롯한 중국공산주의자들의 희생정신이 큰 감화력을 발휘하였다. 주보중은 중상을 당한 몸이었으나 두팔을 벌리고 동요하는 반일병사들을 막아 나서며 서산포대에 휘날리는 저 붉은기를 못보는 가고 외쳤다. 그 모습을 본 반일병사들은 퇴각을 중지하고 함성을 지르며 적진으로 육박하였다.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나자구를 지키던 문영장과 일본지도관은 관동군사령관에게 보낸 마지막 전문에서 김일성 등 2,000의 합류비에게 6일 5주야동안의 포위공격을 당하여 이제는 다 죽게 되었다고 비명을 지르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탄약은 이미 다 떨어지고 우리들의 운명은 경각에 이르렀다. 하지만 우리들은 국가를 위하여, 만주건국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음을 떳떳하게 여긴다. 사령관, 이를 용서하라.』

나자구와 대전자에서의 우리의 승리는 조선인민혁명군이 항일전쟁에서 이룩한 첫 성과들 중에서 가장 큰 성과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나자구진공전투는 적들의 위공작전기도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놈들을 걷잡을 수 없는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이 전투이후 유격구주변의 대소「토벌대」는 오금을 펴지 못하고 겁이 나서 벌벌 떨었다.

실로 나자구전투는 왕청유격구 동북부일대의 적을 제압함으로써 유격구확대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였으며 반일부대와의 연합전선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나자구전투후에도 우리는 적들의 위공작전기도를 파탄시키기 위한 맹렬한 군사정치활동을 벌였다. 유격구가 해산된 후 동만의 혁명군중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안도와 나자구일대에 많이 가서 뿌리를 내릴 수 있은 것은 우리가 일찍부터 군사정치활동을 맹렬하게 벌려 이 지역을 보이지 않는 혁명근거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혁명군은 1934년의 하기공세에서 피도 적지 않게 흘리었다. 대전자의 전승담속에는 화룡유격대 조직자의 한사람이며 연대정치위원인 노동자계급출신의 신망높은 지휘관 차룡덕이 뿌린 피도 찍혀있다. 그는 조선인민혁명군이 편성된 후 처음으로 전사한 정치위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