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는 《지원》의 뜻을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집에는 물론, 순화학교와 명신학교 등 이르는 곳마다에 《지원》이라는 두 글자를 붓글씨로 큼직하게 써붙이였다.

지금도 아버지의 필적이 더러 남아있지만 아버지는 붓글씨를 괜찮게 썼다.

당시는 서예를 숭상하던 때여서 명사나 명필들의 글을 받아 족자나 현액, 병풍을 만드는것을 하나의 멋으로 알았다. 나도 철이 없을 때에는 그것을 일반서예로 생각하였다.

아버지는 그 글씨에 어떤 표구도 하지 않고 그저 눈에 잘 띄우는 곳에 붙여두었다.

내가 철이 들자 아버지는 나에게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는것을 가르치면서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려면 큰뜻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지원》이란 문자그대로 뜻을 원대하게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뜻을 원대하게 가지라고 가르친다고 해서 별로 특이할것은 없다. 무슨 일을 하든지 높은 리상과 포부를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성공할수 없다.

그러나 《지원》의 사상은 개인의 영달이나 립신양명을 념두에 둔 세속적인 인생교훈이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참된 보람과 행복을 찾는 혁명적인생관이며 대를 이어가며 싸워서라도 기어이 나라의 광복을 이룩해야 한다는 백절불굴의 혁명정신이다.

아버지는 왜 큰뜻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 인민의 반일투쟁사와도 같은것이였다.

…우리 조선은 원래 국력이 막강한 나라였다. 무예가 발달하여 싸움에서 패한적이 별로 없고 일찍부터 문화가 개화하여 그 빛이 바다건너 일본땅에까지 비쳐갔다. 그런데 그렇게도 강성하던 나라가 리조 500년의 썩은 정치로 일조에 망국의 비운을 들쓰게 되였다.

네가 아직 세상에 태여나지 않았을 때 왜놈들이 총칼로 우리 나라를 먹어버리였다. 왜적들에게 국권을 팔아먹은 역신들을 《을사오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역신들도 조선의 얼만은 팔아넘길수 없었다.

의병들이 창을 들고 《왜멸복국》을 부르짖었다. 독립군은 화승대로 이 땅에 침노한 원쑤들을 쓸어눕히였다. 때로는 인민봉기의 만세함성과 돌팔매질로 이르는 곳마다에서 왜적을 치고 사람마다 울부짖어 인류의 량심과 세계의 정의에 호소하였다.

최익현은 대마도로 잡혀갔어도 원쑤들의 음식을 먹지 않고 단식으로 순국하였다. 리준은 제국주의렬강대표들의 면전에서 스스로 배를 갈라 우리 민족의 진정한 독립정신을 보여주었고 안중근은 할빈역두에서 이등박문을 격살하고 독립만세를 웨쳐 조선사람의 기개를 과시하였다.

환갑이 넘은 강우규로인까지도 사이또총독의 면전에 폭탄을 던지였다. 리재명은 망국의 한을 풀려고 단도로 리완용을 찔렀다.

민영환, 리범진, 홍범식과 같은 애국충신들은 자결로써 국권수호를 호소하였다.

한때는 우리 민족이 국채보상운동이라는 눈물겨운 운동까지 벌리였다. 국채란 로일전쟁후 일본에서 꾸어다 쓰고 갚지 못한 1,300만원의 빚을 말한다. 이 빚을 갚으려고 온 나라 남자들이 담배를 끊었다. 고종황제까지도 단연으로써 이 운동에 합세하였다. 녀자들은 반찬값을 아끼고 패물을 내놓았다. 혼수감을 바치는 처녀들도 있었다. 부자집의 상노와 침모, 떡장사, 나물장사, 짚신장사까지도 나라의 빚을 갚느라고 땀에 절은 푼전들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독립을 보존하지 못하였다.

문제는 나라를 찾겠다는 한마음한뜻으로 온 나라 인민을 불러일으켜 원쑤를 쳐물리칠만큼 힘을 키우는것이다. 마음만 굳게 먹으면 힘을 기를수 있고 힘만 기르면 능히 강적을 물리칠수 있다.

온 나라 백성들을 깨우치고 불러일으켜야만 국권을 회복할수 있는데 이 일은 하루이틀에 성취할수 없다. 그래서 뜻을 멀리 가져야 한다는것이다.…

아버지는 나의 손목을 잡고 만경봉에 오르내릴 때부터 이런 말씀을 자주 해주었다. 아버지의 가르침은 애국주의사상으로 일관되여있었다.

아버지는 언제인가 할아버지, 할머니앞에서 이런 말씀을 한적이 있다.

《나라를 독립시키지 못할바에야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내몸이 찢기여 가루가 될지언정 일본놈들과 싸워이겨야 하겠습니다. 내가 싸우다 쓰러지면 아들이 하고 아들이 싸우다 못하면 손자가 싸워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후날 삼사년이면 끝장을 볼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항일무장투쟁이 장기전으로 넘어갈 때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다시 상기했고 해방후에는 북과 남으로 갈라져 상반되는 길을 걷고있는 민족분렬의 장구한 비극을 체험하면서 그 말씀에 담겨있는 깊은 뜻에 새삼스럽게 숙연한 생각을 금치 못하였다.

바로 그 말씀이 우리 아버지가 품고계시던 《지원》의 사상과 신념, 조국광복에 대한 사상과 지향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집형편이 그처럼 어려운 때에 아버지가 강심을 품고 숭실중학교에 들어간것도 바로 《지원》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갑오개혁후 을사조약이 체결되기까지의 10년 남짓한 기간은 우리 나라에서 내정개혁의 파도를 타고 때늦게나마 근대적인 교육제도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지고있던 때였다. 신교육의 봉화를 들고 서울에서 배재학당이요, 리화학당이요, 육영공원이요 하는 학교들이 설립되여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배워주고있을 때 서선지방에서 미국선교사들이 전도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학교가 바로 숭실중학교이다.

숭실중학교는 전국적판도에서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신학문을 숭상하는 청년들이 이 학교를 많이 지망하였다. 력사, 대수, 기하, 물리, 위생학, 생리학, 체육, 음악과 같은 숭실중학교의 현대적인 교과목들은 나라의 후진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조류에 발을 맞춰나가고싶어하는 청년들의 관심을 끌었다.

우리 아버지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이 학교에 다니였다고 말씀하였다. 4서5경을 비롯하여 서당에서 힘들게 배우는 구학문은 아버지의 비위에 맞지 않았다.

선교사들이 내세운 교육목적과는 관계없이 숭실중학교에서는 후날 독립운동선상에서 큰 활약을 한 이름있는 애국인사들이 많이 배출되였다. 상해림시정부 의정원의 초대부의장을 거쳐 의장직을 력임한바있는 손정도도 이 학교 출신이였고 림정말기에 국무의원으로 활동한 차리석도 이 학교 졸업생이였으며 재능있는 애국시인 윤동주도 이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중퇴한 사람이였다.

강량욱선생도 숭실학교의 전문반을 다닌분이였다. 당시는 이 전문반을 숭실전문학교라고 불렀다. 숭실중학교란 숭실학교안에 있는 중학반을 말한다. 숭실학교에서 반일독립운동자들이 많이 배출되였기때문에 일본사람들은 이 학교를 배일사상의 책원지라고 하였다.

《글을 배워도 조선을 위하여 배우고 기술을 배워도 조선을 위하여 배우며 하늘을 믿어도 조선의 하늘을 믿어야 한다.》

아버지는 이런 사상으로 학우들을 깨우쳐주면서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을 묶어세웠다.

아버지의 지도밑에 숭실중학교에는 독서회와 일심친목회가 조직되였다. 이 단체들은 학생들을 반일사상으로 교양하는 한편 평양과 그 주변 일대에서 적극적인 대중계몽활동을 벌리였으며 1912년 12월에는 교내에서 학교당국의 비인간적인 학대와 착취행위를 반대하는 동맹휴학까지 조직하였다.

아버지는 중학공부를 하면서도 방학이면 안주, 강동, 순안, 의주 등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일대의 여러 지방들을 돌아다니며 대중계몽과 동지획득을 위한 활동을 벌리였다.

아버지가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 얻은 제일 큰 소득은 생사를 같이할수 있는 동지들을 많이 획득한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숭실중학교 동창생들가운데는 우리 아버지하고 인간적으로 가깝게 지내면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두고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도량도 크고 식견도 넓고 인격도 뛰여난 명망높은 청년선각자들이였다.

그런 동창생들가운데서 평양사람으로서는 리보식을 들수 있다. 리보식은 독서회에도 일심친목회에도 다 관여하였는데 후날 조선국민회조직을 위해서도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3.1인민봉기때에도 큰 활약을 하였다.

우리가 봉화리에서 살 때 그는 아버지를 만나려고 명신학교에도 여러번 왔다갔다.

평안북도출신의 동창생들가운데는 백세빈(백영무)이라는 피현사람이 아버지와 가깝게 지냈다. 아버지가 평안북도땅에 갈 때에는 이 사람이 길안내를 많이 하였다. 그는 조선국민회의 국외통신원이였다. 1960년 12월에 남조선에서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가 결성되였는데 백세빈은 그때 그 위원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박인관은 숭실중학교시절에 우리 아버지와 한 기숙사에서 생활한 사람이다. 처음 얼마동안은 아버지도 기숙사생활을 하였다.

1917년 봄에 박인관은 황해도 은률에 나가 광선학교 교원을 하면서 조선국민회에 망라되였다. 그는 송화, 재령, 해주 등지를 오가면서 동지들을 규합하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여 1년동안 해주감옥에서 고초를 겪었다. 그가 광선학교 교원으로 있을 때 학생들이 쓴 《반도와 우리와의 관계》라는 제목의 작문들이 지금도 은률사적관에 전시되여있다. 그 작문을 보면 당시 조선국민회의 영향밑에 있던 학교학생들의 사상동향과 정신세계의 일단을 알수 있다.

독립운동자들중에서 우리 아버지하고 제일 깊은 인연을 맺고있던 사람은 오동진이였다.

그가 우리 집으로 자주 드나든것도 아버지가 숭실중학교를 다닐 때였다. 오동진은 그때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대성학교를 다니고있었다. 순수한 인정관계를 초월하는 사상적인 교제였으므로 두분의 교제는 처음부터 진지하고 열렬했다. 오동진이 우리 아버지의 사상에 처음으로 공감한것은 1910년 봄 경상골 병대마당(리조말기의 군대병영앞에 있던 훈련장)에서 열린 운동회에서였다고 한다.

이 운동회에는 평양, 박천, 강서, 영유 등지에서 만여명의 청년학생들이 참가하였다.

아버지는 그날 운동회뒤끝에 있은 웅변대회에서 우리 나라가 문명국이 되자면 일본의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는 일부 학생들의 주장에 반기를 들고 우리 나라의 근대화는 우리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여 군중의 이목을 한데 모았다. 그 연설을 들은 청중들가운데 바로 미래의 정의부 사령인 오동진도 끼여있었다. 그 당시를 회상할 때마다 오동진은 《그날 김선생이 한 연설이 나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고 뜨겁게 말하군 하였다.

그는 1913년경부터 무역상(도매상)이라는 명목으로 서울, 평양, 신의주 등 국내의 주요도시들과 중국으로 드나들면서 그때마다 우리 아버지를 찾아와 독립운동의 장래를 두고 의논하였다.

나는 처음에 오동진을 그저 마음씨좋은 상인으로만 알고있었다. 후날 팔도구와 무송에 가서 살 때에야 그가 대단한 독립운동자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무렵에 벌써 송암 오동진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름이 뜨르르했다. 재산이라든가 배경을 보면 어려운 혁명을 하지 않고서도 살수 있는 사람이였지만 그는 직접 손에 총을 들고 일제와 싸웠다.

오동진은 우리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우애심이 지극하였다. 의주의 그의 집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바깥채는 통채로 그런 손님들을 위한 숙소로 리용되였다. 손님들이 하도 많아서 식모도 따로 데려다가 전문적으로 손님들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갈 때만은 바깥채가 아니라 안채에 모시고 그의 부인이 직접 부엌에 나섰다고 한다.

한번은 오동진이 부인을 데리고 우리 집에 다녀간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할머니는 그들에게 기념으로 밥바리를 선물하였다.

내가 오동진을 이처럼 상세하게 소개하는것은 그가 아버지의 친구이고 동지라는데도 있지만 나의 청년시절과 깊은 연고가 있기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와의 사이에 각별한 정을 느끼였다. 내가 길림에서 공부할 때 오동진은 일제에 의해 체포되였다. 썩 후날 내가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려고 간도일대를 돌아다니던 1932년 3월초에 그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간디의 예심기록문건이 2만 5,000여페지나 된다는 말을 듣고 몹시 놀랐는데 오동진의 예심기록문건은 무려 3만 5,000페지로서 64책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를 재판하던 날 방청자가 수천명이나 법정으로 쓸어들어서 아침부터 한다던 재판을 오후 1시가 지나서야 겨우 시작하였다. 오동진은 일체 심리를 거절했으며 재판장의 자리에 뛰여올라가 조선독립만세까지 불러 법정을 흔들어놓았다.

당황망조한 일본재판관들은 황황히 공판을 중단하고 피고도 없이 어물어물 판결을 해버렸다. 상소심에서 종신징역으로 구형되였으나 오동진은 끝내 해방의 날을 보지 못하고 옥사하였다.

우리가 유격대를 꾸리느라고 매우 어려운 싸움을 벌리고있을 때에 그의 고결한 절개와 투지를 반영한 공판기사와 그후 평양감옥으로 호송되는 용수를 쓴 사진이 신문에 공개되였다. 나는 그때 그 사진을 보면서 오동진의 드팀없는 애국심을 감회깊이 더듬어보았다.

이와 같이 숭실중학교시절에 아버지와 친근하게 지낸 사람들이 적지 않게 견결한 혁명가로 자라났고 후날 조선국민회의 골간으로 되였다.

아버지는 숭실중학교를 중퇴한 후에도 만경대의 순화학교와 강동의 명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대교육에 힘쓰는 한편 동지규합에 심혈을 기울이였다. 아버지가 숭실중학교를 중퇴한것은 혁명활동무대를 확대하면서 본격적인 실천투쟁을 벌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1916년에 방학을 리용하여 간도에 다녀왔다. 무슨 줄을 타고 갔는지 알수 없지만 간도를 거쳐 상해에 가서 손문의 국민혁명파와도 련계를 맺었다.

아버지는 손문을 중국부르죠아민주주의혁명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하였다.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중국에서 남자들이 머리태를 자르고 매주 하루씩 휴식하는 제도를 실시하기 시작한것도 부르죠아개혁파들의 노력에 의해 실현될수 있었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특히 손문이 중국혁명동맹회의 강령으로 내세운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와 5.4운동의 영향밑에 새롭게 내놓은 련쏘, 련공, 부조공농의 3대정책을 찬양하면서 그를 도량이 크고 의지가 강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혁명가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면서도 손문이 중화민국을 수립한 후 공화정치제도의 수립과 청나라 황제의 퇴위를 조건부로 원세개에게 총통의 자리를 양도한것은 실책이였다고 말씀하였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조선의 부르죠아개혁운동에 대해서 말씀하는것도 여러번 들었다. 아버지는 김옥균이 지도한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난데 대하여 매우 아쉬워하면서 개화당이 내놓은 혁신정강중 인권평등, 문벌페지, 인재등용, 청나라에 대한 종속관계의 페절을 암시한 독립사상 등은 모두 진보적인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김옥균을 뛰여난 인물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의 개혁운동이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근대력사가 달라질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미련까지 가지였다.

김옥균의 개혁운동과 정강에서 제한성을 찾고 우리가 그것을 주체적인 관점에서 분석해본것은 그후의 일이다.

우리에게 조선력사를 배워주던 선생들은 대체로 김옥균을 친일파로 규정하였다. 해방후 우리 나라 학계에서도 오래동안 김옥균에게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이였다. 그가 정변준비과정에 일본사람들의 도움을 받은것이 친일의 표적으로 되였다. 우리는 이것을 공정한 평가라고 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력사학자들에게 김옥균의 개혁운동에서 인민대중과의 결합에 주의를 돌리지 않은것은 물론 잘못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힘에 의거하였다고 그것을 친일로 평가하면 허무주의에 떨어진다. 그가 일본의 힘을 리용한것은 친일적인 개혁을 단행하자는데 목적이 있은것이 아니고 당시의 력량관계를 면밀히 타산한데 기초하여 그것을 개화당의 편에 유리하게 전환시키자는데 있은것이다,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전술이였다고 말해주었다.

아버지는 김옥균의 정변이 《3일천하》의 운명을 면치 못한 주요한 원인의 하나는 개혁파들이 백성들의 힘을 믿지 않고 궁정내부세력에만 의거한데 있다고 하면서 그들의 실패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였다.

아버지가 간도와 상해에 갔다온 목적은 짐작컨대 그때까지 소문으로만 들어온 해외독립운동의 실태를 직접 료해하여보고 새로운 동지들을 획득하며 차후활동방략을 세우려는데 있었던것 같다.

세계적으로 볼 때에도 그 당시는 식민지민족해방투쟁문제가 크게 성숙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런 나라들에서의 독립운동의 방식이나 방법은 아직 개척되지 못하고있었다.

아버지가 간도와 상해에 간 때는 중국혁명이 군벌의 준동과 제국주의렬강들의 간섭으로 일진일퇴의 심각한 곡절을 겪고있었다. 중국혁명에서도 기본장애물은 미국, 영국, 일본을 비롯한 외세였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망명해있는 적지 않은 독립운동자들은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환상에 포로되여 어느 대국의 힘을 빌어볼것인가 하는 공리공담으로 세월을 보내고있었다.

간도의 실태는 조선은 조선사람의 힘에 의하여 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신념을 더욱 굳게 해주었다. 간도에 갔다온 아버지는 군중계몽과 동지규합을 위해 침식을 잊고 뛰여다니였다.

이때는 우리가 만경대를 떠나 강동군 봉화리로 이사한 뒤였다. 아버지는 만경대에 계실 때처럼 낮에는 명신학교에서 글을 가르치고 밤에는 야학에 나가 군중계몽사업을 하느라고 늦게야 집으로 돌아오군 하였다.

나도 어느 학예회때 아버지가 써준 글을 가지고 반일연설을 한적이 있다.

아버지는 그때 혁명적인 시와 노래를 지어 학생들에게 많이 배워주었다.

아버지를 만나려고 많은 독립운동자들이 봉화리로 찾아왔다. 아버지자신도 동지들을 찾아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일대를 자주 돌아다니였다. 그 과정에 핵심들이 육성되고 군중적지반이 축성되였다.

이런 준비에 토대하여 아버지는 장일환, 배민수, 백세빈 등 애국적인 독립운동자들과 함께 1917년 3월 23일 평양 학당골에 있는 리보식의 집에서 조선국민회를 결성하였다. 조선국민회에 망라된 청년투사들은 손가락을 잘라 《조선독립》,《결사》라는 혈서를 썼다.

조선국민회는 전체 조선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조선사람자체의 힘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며 참다운 문명국가를 세울것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로서 3.1인민봉기를 전후한 시기 조선의 애국자들이 무은 국내외의 조직들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큰 반일지하혁명조직의 하나였다.

1917년이라면 국내에 비밀결사가 별로 없을 때였다. 합병후 조직된 독립의군부나 대한광복단, 조선국권회복단과 같은 단체들은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이 무렵에 와서 모조리 해산되였다. 지하활동을 하다가 발각되면 가차없이 잡아가던 때여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그런 활동에 가담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뜻있는 사람들이라 하여도 국내에서는 어쩌지 못하고 해외로 망명하여 이런저런 반일단체들을 만들어내는 정도였다. 그럴 용기마저 없는 사람들은 조선경내에서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가지고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소극적인 활동을 벌리였다.

이런 때에 조선국민회가 태여났다.

조선국민회는 반제자주적인 립장이 투철한 혁명조직이였다.

조선국민회의 취지서에는 장차 구미세력이 동양에 부식되고 일본이 그들과 패권을 다투게 될 시기가 닥쳐올것은 명백하므로 그 기회에 조선사람자체의 힘으로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동지들의 결속을 도모하며 그 준비를 진행하여야 한다고 밝히고있다.

취지서를 통해 알수 있는바와 같이 조선국민회는 외부세력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과는 달리 조선독립은 조선사람자체의 힘으로 이룩해야 한다는 자주적인 립장을 취하였다.

조선국민회는 간도에 동지들을 파견하여 그곳을 독립운동의 책원지로 만들기 위한 원대한 계획도 세웠다.

조선국민회는 그 조직이 매우 치밀하였다. 조선국민회에는 준비되고 검열된 애국자들만 엄선하여 받아들였으며 종적인 조직체계를 가지고 회원호상간에도 암호를 사용하였다. 비밀문서들도 암호로만 작성하였다. 조선국민회는 매해 숭실중학교 개학날을 계기로 회원들의 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지기로 하였다. 조선국민회는 그이후 조직된 학교계, 비석계, 향토계와 같은 합법적인 외곽단체들로써 철저히 위장되였다. 조선국민회는 산하에 구역장들을 두었으며 해외인사들과의 련계를 위하여 베이징과 단동에 통신원들을 배치하였다.

조선국민회는 튼튼한 대중적지반우에 선 조직이였다. 조선국민회에는 로동자, 농민, 교원, 학생, 군인(독립군), 상인, 종교인, 수공업자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이 다 망라되여있었으며 그 조직은 국내는 물론, 중국의 베이징, 상해, 길림, 무송, 림강, 장백, 류하, 관전, 단동, 화전, 흥경 등 외국에까지 널리 뻗어있었다.

조선국민회를 결성하고 확대해나가는 과정에 아버지는 장철호, 강제하, 강진건, 김시우 등 많은 동지들을 획득하였다. 그 한사람한사람의 동지를 찾는데 기울인 아버지의 로고는 말이나 글로써 다 표현할수 없다. 아버지는 한사람의 동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번은 오동진이 황해도지방으로 가다가 우리 집에 갑자기 들려 아버지를 만나고 간 일이 있다. 그날 그는 다른 때보다 별로 신수도 멀끔하고 인상도 좋아보이였다.

오동진은 좋은 사람을 하나 만났다고 하면서 자랑하였다.

《공영이라고 벽동사람인데 아직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요. 식견이 높고 키가 구척인데다가 미남자요. 사람이 듬직하고 게다가 격술까지 한다니 옛날 같으면 갈데 없는 병조판서감이더란 말이요.》

그의 말에 아버지도 기뻐하며 《옛날부터 인재의 공보다도 인재를 천거한 공을 더 높이 친다는데 그러고보면 이번 오선생의 벽동걸음이 우리 운동에 큰 자국을 새기였소.》라고 말씀하였다.

오동진이 돌아간 다음 아버지는 큰삼촌을 보고 짚신 몇컬레를 삼아달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다음날로 삼촌이 삼아준 짚신을 신고 길을 떠났다.

아버지는 한달가량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어찌도 걸음을 많이 걸었는지 신총이 다 끊어져 너덜너덜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지친 기색이 없이 웃으면서 사립문에 들어섰다.

그때 아버지는 공영이라는 사람을 만나보고 돌아와 몹시 흐뭇해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렇게 아버지를 통하여 동지를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도리를 배웠다.

조선국민회는 《한일합병》후 여러해동안 국내와 해외에서 아버지가 벌려온 정열적인 조직선전활동의 총화였다. 아버지가 이 조직을 통하여 판을 크게 벌리려고 계획했던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조직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되였다. 일제가 조선국민회에 대한 단서를 잡은것은 1917년 가을이였다.

바람이 몹시 부는 어느날 경찰 세놈이 갑자기 수업중에 있는 명신학교 교실에 달려들어 무작정 아버지를 체포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맥전나루까지 갔던 허씨가 나루가에서 아버지가 몰래 한 부탁을 가지고 어머니에게로 뛰여왔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부탁대로 지붕에 올라가 비밀문건들을 꺼낸 다음 아궁에 넣고 불을 질렀다.

아버지가 체포된 다음날부터 봉화리의 기독교인들은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명신학교에 모여 새벽기도를 드리였다.

평양과 강동일대의 인민들은 평양경찰서에 몰려가 아버지를 석방하라고 진정서를 들이댔다.

아버지에 대한 재판을 하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만경대에 계시던 할아버지가 큰삼촌을 경찰서로 보냈다. 재판을 한다는데 변호사를 사대야 할지 어째야 할지 아버지의 의향이나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삼촌이 가장집물이라도 팔아서 재판할 때 변호사를 사대겠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단마디로 그 말을 막아버리였다.

《변호사도 입으로 말하고 나도 입으로 말하는데 돈을 없애면서 따로 변호사를 사댈 필요는 없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한테 무슨 변호가 필요하겠느냐!》

일제는 평양지방법원에서 세차례에 걸쳐 아버지에 대한 재판을 벌리였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조선사람이 제 나라를 사랑하고 제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이냐, 나는 당국의 그런 부당한 심리를 인정할수 없다고 단호하게 항의하였다.

이렇게 되자 재판은 날자를 끌었다. 일제는 세번째 재판에서 강제로 형을 언도하였다.

아버지가 잡혀간 다음 형록삼촌이 우리를 만경대에 데려가려고 둘째 외삼촌(강용석)과 함께 봉화리로 찾아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봉화리에서 겨울을 나겠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때 만경대로 옮겨가지 않은것은 집에 찾아오는 조선국민회원들과 반일운동자들과의 련계를 지으면서 뒤수습을 하려는데 있었다.

어머니는 뒤처리를 깨끗이 해놓은 다음 이듬해 봄에야 우리를 데리고 만경대로 돌아갔다. 그때 할아버지가 외할아버지와 함께 달구지를 가지고 봉화리에 와서 이사짐을 싣고 갔다.

그해 봄과 여름을 나는 매우 우울하게 보냈다.

몇밤 자면 아버지가 돌아오는가고 내가 물을 때마다 어머니는 《이제 곧 돌아오신다.》면서 같은 대답만 하였다. 어머니는 어느날 나를 데리고 만경봉 그네터로 올라갔다. 나를 안고 그네에 걸터앉아 이런 말씀을 하였다.

《증손아, 저앞의 대동강얼음이 다 풀리고 나무잎이 푸르러도 너의 아버지는 돌아오시지 않는구나. 아버지가 나라를 찾기 위하여 싸우셨는데 그것이 무슨 죄가 되겠느냐. 네가 어서 커서 아버지 원쑤를 갚아야 한다.… 너는 커서 꼭 나라를 찾는 영웅이 되여라.》

나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후 어머니는 나도 모르게 감옥에 여러번 다녀왔다. 그렇지만 갔다와서도 감옥에 대한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한번은 어머니가 팔골에 목화를 타러 간다면서 나를 데리고 성안으로 떠났다. 어머니는 칠골외가에 들려 목화를 타달라고 맡겨놓고는 곧장 평양감옥으로 갔다.

그때 외할머니가 나를 떼여놓고 혼자 가라고 여러번 타일렀다. 철도 들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감옥에 가다니 될말이냐, 저 어린것이 철창안에 있는 아버지를 보면 얼마나 놀라겠는가고 하면서 한사코 반대하였다. 그때 내 나이가 일곱살이였다.

나는 보통강나무다리를 건너서자 첫눈에 인차 감옥건물을 알아맞히였다. 감옥이 어떻게 생겼다고 대준 사람은 없었지만 건물의 색다른 모양새와 주변의 스산한 분위기를 보고 저것이 감옥이다 하는 판단을 스스로 내리였다.

감옥건물은 그 외형만으로도 사람들의 혼을 뺄수 있으리만큼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하였다. 철문, 담장, 망루, 쇠살창은 물론, 파수병의 검은 복장과 눈길에 이르기까지 모든것에서 살기가 넘치고 독기가 풍기였다.

우리가 들어간 면회실은 해빛조차 잘 들지 않는 어둑컴컴한 방이였다. 그 방안의 공기는 숨이 막힐 지경으로 답답하고 흐리터분하였다.

아버지는 그런 속에서도 평소와 다름없이 웃고있었다. 나를 보자 반가와하면서 어머니더러 잘 데려왔다고 말씀하였다.

수의를 입은 아버지의 모습은 상해서 인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얼굴, 목, 손, 발 할것없이 살이란 살은 온통 멍이 들고 상처가 나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몸을 해가지고서도 오히려 집안사람들을 걱정하였다. 어찌나 기상이 도고하고 름름하였던지 분하고 원통한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운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네가 그새 컸구나. 집에 돌아가면 어른들의 말씀도 잘 듣고 공부도 잘해라!》

아버지는 간수가 있는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를 향해 태연하게 말씀하였다. 음성도 이전날과 다름없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큰소리로 《예, 아버지도 집에 빨리 돌아오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아버지는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러고는 어머니를 향해 간혹 집에 붓장사나 참빗장사들이 오면 잘 도와주라고 하였다. 혁명동지들을 념두에 두고 하는 말씀이였다.

그날 나는 아버지의 불굴의 모습에서 평생을 두고 잊을수 없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날의 인상가운데서 또하나 잊혀지지 않는것은 면회실에서 리관린을 만난것이다. 그는 평양녀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에 다니면서 조선국민회 회원으로 활동하고있었는데 불행중 다행으로 경찰의 마수가 그에게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리관린은 조선국민회원인 동창생 한사람을 데리고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봉건이 심하던 그때에 처녀로서 감옥에 그것도 사상범을 찾아간다는것이 사실 조련치 않은 일이였다. 감옥출입을 했다는것이 알려지면 시집도 못갈 세상이였다. 그런 때에 멋쟁이 신녀성이 사상범을 면회하러 왔기때문에 간수들도 놀라서 그를 조심스럽게 대하였다. 리관린은 밝은 얼굴로 아버지를 위로하고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그때 감옥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온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큰 사변이였다. 나를 감옥에 데리고 간 어머니의 깊은 뜻도 리해되였다. 아버지의 몸에 생긴 상처는 나로 하여금 악마와도 같은 일본제국주의의 존재를 온몸으로 느끼게 하였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상처에서 세계의 수많은 정치인들과 력사가들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하여 분석하고 평가한것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고 직관적인 표상을 얻었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나는 일본군경들의 행패를 많이 당해보지 못하였다. 호구조사와 청결검열차로 만경대에 내려온 일본경찰들이 무슨 생트집을 하나 걸어가지고 시비질을 하던 끝에 우리 집 장지문을 채찍으로 찔러 다 찢어놓고 그 문짝을 가마우에 내동댕이쳐서 솥뚜껑을 깨던 광경은 보았지만 죄없는 사람들의 육신에 그처럼 심한 상처를 내는것은 한번도 목격하지 못하였다.

그 상처는 항일혁명투쟁 전기간 잠시도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 면회에서 받은 충격이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큰 자욱으로 남아있다.

아버지는 1918년 가을에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나왔다. 큰삼촌이 할아버지와 함께 들것을 가지고 감옥으로 가고 동네사람들은 송산리에서 만경대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아버지를 기다리였다.

매를 너무 맞아서 온몸이 만신창이 된 아버지는 겨우 걸음을 옮기여 감옥문밖으로 나왔다.

할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자 분노로 치를 떨면서 아버지더러 들것에 누우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제 발로 걸어가겠습니다.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야 제가 어떻게 원쑤놈들앞에서 들것에 들려가겠습니까. 놈들이 보란듯이 제 발로 걸어가야 합니다.》하고는 흔연히 걸음을 옮기였다.

집에 돌아온 후 아버지는 삼촌들을 앉혀놓고 이런 말씀을 하였다.

《나는 감옥에서 물이라도 더 먹고 어떻게 하든지 살아나가서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심을 했다. 세상에 제일 못된놈들이 일본놈들인데 그놈들을 그냥 놔둘수가 있느냐. 형록이나 형권이도 왜놈들과 싸워야 한다. 죽어도 피값은 해야 한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도 장차 아버지의 뒤를 따라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사생결단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였다.

아버지는 병석에 있으면서도 책을 읽었다.

한동안은 눈병을 잘 고친다는 왕고모부 김승현네 집에서 보양을 하며 감옥에서 시작한 의학공부를 계속하였다. 거기에서 아버지가 좋은 의서들을 많이 구해가지고 왔다. 원래 아버지는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이 왕고모부네 집에서 의술도 배우고 의서도 탐독하였다.

아버지가 교원이라는 표면상의 직업을 의사로 바꾸려고 결심한것이 아마 감옥살이를 할 때부터였다고 생각된다.

아버지는 몸이 미처 추서기도 전에 평안북도일대에로 떠났다. 파괴된 조선국민회 조직들을 복구할 결심을 한것이다.

할아버지는 한번 먹은 마음을 굽히지 말고 어떻게 하나 소원을 성취하도록 하라고 아버지를 고무해주었다.

아버지는 그때 고향을 떠나기에 앞서 《남산의 푸른 소나무》라는 시를 남기였다. 그것은 몸이 찢겨 가루가 되여도 대를 이어가며 굴함없이 싸워 삼천리금수강산에 기어이 독립의 새봄을 가져오려는 아버지의 굳은 맹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