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릉개건관계부문 일군협의회에서
한 연설 1993년 10월 20일

 

오늘협의회에서는 단군릉개건문제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단군릉을 잘 개건하는것은 우리 나라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가진 오랜 력사국이고 우리 민족이 생겨난 때로부터 하나의 피줄을 이어온 단일민족이며 혁명의 수도 평양이 단군의 태가 묻힌 조선민족의 원고향이라는것을 보여주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이번에 고고학자들이 단군릉을 발굴하고 거기에서 단군의 유골과 그의 안해의 유골을 찾아냈으며 단군의 유골이 지금으로부터 5,011년전의것이라는것을 확증함으로써 단군이 신화적인물이 아니라 고조선의 실재한 건국시조라는것이 과학적으로 판명되였습니다. 단군릉을 잘 꾸려놓으면 조선민족이 반만년의 오랜 력사를 가진 민족이라는것을 선전하는데도 좋고 남조선인민들과 해외동포들을 교양하는데도 좋을것입니다.

지금 우리 인민은 단군의 유골이 발굴되고 그것이 5,011년전의것으로 판명되였다는 소식에 접하여 대단히 기뻐하고있으며 조선민족이 반만년의 력사를 가진 슬기로운 민족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에 넘쳐있습니다. 남조선인민들과 해외동포들 속에서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서도 우리가 단군의 유골을 발굴한것과 관련하여 계속 커다란 반향이 일어나고있습니다.

지금까지 단군은 신화적인 존재로 전해져왔습니다. 단군이 신화적인 존재로 전해오게 된것은 오랜 세월 우리 조상들이 원시조인 단군을 신성한 존재로 여기면서 그에 대한 여러가지 전설을 많이 지어낸것과 관련되여있습니다. 묘향산과 구월산에 단군과 관련한 전설들이 많은데 나는 어렸을 때 아버님한테서 단군에 대한 전설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단군의 유골이 발굴되고 유골의 년대가 과학적으로 확증됨으로써 전설로만 알려지고 전하여오던 단군이 반만년전에 실지로 존재하였던 사람이라는것이 명백하게 되였습니다.

나는 우리 고고학자들이 단군릉에서 단군의 유골을 발굴하고 그것이 5,011년전의것이라는것을 확증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너무 기뻐서 김정일동지에게 그것이 사실인가고 물어보았습니다. 김정일동지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면서 단군릉에서 단군의 유골이 나왔고 단군유골의 년대는 고고학연구소를 비롯한 여러 연구기관들에서 현대적인 측정기구로 수십번이나 측정하여 과학적으로 확증한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단군의 유골을 검증한데 의하면 그의 키가 170센치메터이상 되는데 당시 사람으로서는 상당히 크고 체격이 웅장한 사람으로 볼수 있다고 합니다. 단군의 유골년대는 현대물리학의 첨단기술의 하나인 전자상자성공명법을 적용하여 현대적측정기구로 측정하였기때문에 매우 정확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대과학을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단군의 유골에 대한 년대측정결과를 믿지 않을수 없으며 만일 그것을 믿지 않으면 현대과학의 첨단기술을 부정하는것으로 됩니다.

단군릉에서 단군의 유골을 발굴하고 단군이 반만년전의 실재한 인물이라는것을 고증한것은 우리 민족의 유구성과 단일성, 발상지를 확증하는데서 력사적의의를 가지는 커다란 성과입니다. 단군릉발굴사업을 통하여 우리 인민은 민족의 원시조를 찾게 되였으며 우리 나라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가진 동방의 선진문명국이고 우리 민족이 단군을 원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이라는것을 떳떳이 자랑할수 있게 되였습니다. 단군릉이 고조선의 건국시조의 무덤이라는것이 과학적으로 판명됨으로써 고조선으로부터 련면히 계승되여온 고구려, 고려의 시조왕들의 무덤이 모두 우리 나라 북반부에 있다는것이 실증되였습니다. 고조선건국시조의 무덤인 단군릉과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인 동명왕릉은 평양시에 있고 고려시조왕의 무덤인 왕건왕릉은 개성시에 있는데 이것은 우리 민족의 발상지를 론증하는데서 위력한 증거로 됩니다.

지난날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을 강점하고 우리 나라를 저들의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단군과 고조선의 력사를 말살하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습니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다음 단군과 관련한 력사책들과 우리 나라 고대사와 관련한 책들을 빼앗아 불태워버렸으며 나중에는 조선민족을 말살하기 위하여 ≪동조동근론≫까지 들고나왔습니다. 일제의 간악한 조선민족말살책동으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의 귀중한 력사자료와 민족문화유산들이 없어지고 민족의 전통이 여지없이 짓밟혔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일제의 주구로 전락되여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는 놈들의 ≪동조동근론≫을 지지하여나섰습니다.

해방전에 최남선, 리광수 같은자들은 민족을 배반하고 ≪동조동근≫과 ≪내선일체≫를 떠벌이면서 우리 인민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고 광분하였습니다. 그때 최남선과 리광수는 일제에게 추종하여 우리 항일유격대를 귀순시켜보려고 삐라까지 써서 뿌리면서 악랄하게 책동하였습니다.

당시 이름있는 지식인들가운데서 홍명희는 일제의 ≪동조동근론≫을 반대한 량심적인 지식인이였습니다. 리돈화도 일제의 ≪동조동근론≫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천도교의 월간잡지 ≪개벽≫의 편집사업을 맡아보면서 글을 많이 써서 발표하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을 강점하고 민족말살정책을 악랄하게 감행하였지만 우리 민족을 말살하지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단군릉을 발굴하고 단군유골을 찾아낸것은 우리 나라 고고학의 위대한 승리이며 조선민족의 크나큰 자랑입니다.

력사학계에서는 이번에 이룩한 고고학의 성과에 토대하여 단군과 고조선의 력사에 대한 연구사업을 더욱 심화시켜야 하겠습니다. 지난날 사대주의자들과 일제의 어용학자들에 의하여 우리 민족의 고대력사가 적지 않게 외곡되였습니다. 우리는 주체적립장에 튼튼히 서서 단군과 고조선의 력사에서 외곡되였거나 잘못된것을 모두 바로잡아야 합니다.

단군이 실재한 인물이라는것이 과학적으로 고증된 조건에서 이제는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이 녀자로 변한 곰과 관계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단군신화는 무시되여야 할것입니다.

단군이 조선민족의 원시조라는것이 확증된것만큼 단군릉을 건국시조의 무덤답게 잘 개건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인 동명왕릉을 훌륭하게 꾸려놓았고 고려시조왕의 무덤인 왕건왕릉도 지금 개건하고있습니다. 왕건왕릉개건공사는 왕건의 생일이 1월 30일이기때문에 다음해 1월 30일에 개건식을 할수 있도록 올해말까지 공사를 끝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단군릉을 개건하면 우리 나라 건국시조왕들의 무덤을 다 꾸려놓는것으로 됩니다.

단군릉은 조선민족의 원시조의 무덤이므로 동명왕릉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개건하여야 합니다. 조선민족의 원시조를 내세우는 의미에서 단군릉은 동명왕릉보다 높이도 더 높게 만들고 무덤도 동명왕릉처럼 흙으로 쌓지 말고 돌로 피라미드식으로 크게 쌓는것이 좋겠습니다.

단군릉을 돌무덤으로 꾸리려면 철근 같은것은 얼마 들지 않지만 돌은 많이 들것입니다. 단군릉을 개건하는데서 돌공사가 중요한것만큼 돌가공을 잘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단군릉을 크게 개건하려면 산등성이를 많이 깎아내야 하므로 시간이 좀 걸릴수 있지만 볶아치지 말고 공사를 질적으로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단군릉안에 사람들이 들어가볼수 있게 릉뒤에 문을 내며 무덤칸은 관대를 2개 놓고 사람들이 여러명 들어가서 돌아볼수 있도록 크게 만들어야 합니다.

단군의 유골을 영구보존하기 위한 대책을 철저히 세워야 합니다. 단군의 유골은 우리 민족이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이라는것을 증명하여주는것이기때문에 유골이 영구보존되도록 하는것이 단군릉을 꾸리는데서 기본으로 되여야 합니다. 단군과 그의 안해의 유골을 영구보존할수 있게 유리관에 넣고 밀봉한 다음 무덤칸에 놓도록 하여야 합니다.

무덤칸안에 단군의 유골은 남쪽을 향하여 오른쪽에 놓고 안해의 유골은 그 왼쪽에 놓으면 될것입니다. 옛날 우리 나라의 풍습에 결혼식이나 환갑잔치를 할 때 남자와 녀자의 서는 자리를 남쪽을 향하여 부동녀서로 정하고 남자는 동쪽에 서고 녀자는 서쪽에 서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한문글자 좋을 호자만 보아도 알수 있습니다. 좋을 호자는 녀자 녀자옆에 아들 자자를 붙인 글자인데 녀자 녀자는 왼쪽에 쓰고 아들 자자는 오른쪽에 쓰지만 아들 자자를 기준으로 하여 보면 남자의 오른쪽에 녀자가 있는것으로 됩니다. 남자가 왼쪽에 서고 녀자가 오른쪽에 서는것을 남좌녀우라고 합니다. 부부가 살다가 죽은 다음에는 남자와 녀자의 위치를 바꾸어 남편의 시체는 안해의 오른쪽에 놓고 안해의 시체는 남편의 왼쪽에 놓게 되여있습니다. 공민왕의 무덤을 보아도 그렇게 되여있습니다.

단군릉안에 벽화는 원상대로 회복하기 어려우므로 그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옛날책에 단군릉안에 벽화가 있었다는것이 소개된것을 보면 거기에 벽화가 있은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벽화가 지금 단군릉안에 흔적으로라도 남아있다면 몰라도 다 없어져 어떤 벽화였는지 알수 없는 조건에서 그려놓기 곤난합니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라고 하더라도 고조선의 벽화를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재현할수는 없습니다. 현대사람들이 고조선시기의 사람들보다 그림을 그리는 재간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고조선시기의 벽화를 보지도 못한 조건에서 아무리 상상하여 잘 그린다고 하여도 그때 사람들이 그린것처럼 그릴수 없습니다. 단군릉안에 벽화를 잘 그려놓아도 거기에 벽화가 있었다는것이나 보여주는것으로 되지 력사적가치가 없으므로 벽화를 그려놓지 말고 참관자들에게 설명을 할 때 옛날에 벽화가 있었지만 다 없어졌다고 알려주는것이 낫습니다.

안악3호무덤의 벽화는 그대로 남아있기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그 벽화에는 짐승을 잡아 걸어놓은것을 비롯하여 그 시기의 풍속이 구체적으로 반영되여있습니다. 안악3호무덤이 고구려의 고국원왕의 무덤으로 확증되였으면 좋습니다.

개성시에 있는 왕건왕릉안에는 벽화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왕건왕릉안의 벽화가 못쓰게 되지 않게 잘 보존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단군릉의 돌기단을 높게 하지 말고 알맞춤하게 하여 밑에서도 범돌조각상을 비롯한 돌조각상들이 올려다보이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릉을 돋보이게 하느라고 돌기단을 너무 높게 하여 밑에서 돌조각상이 올려다보이지 않으면 좋지 않습니다. 돌기단을 높인다고 하여 릉이 더 돋보이는것이 아니므로 1안대로 돌기단을 낮추어 돌조각상이 잘 보이도록 하여야 합니다. 돌기단을 낮추더라도 기단벽에 부각장식은 하는것이 좋겠습니다.

릉문은 고조선의 건축형식맛이 나게 돌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해방전에 출판물에 난 단군릉의 사진에도 돌로 세운 릉문이 있는것만큼 단군릉의 릉문을 돌로 세우는것이 력사적사실로 보아도 맞고 고조선의 건축형식에도 맞습니다. 목조건축형식으로 된 고구려건축형식의 릉문은 동명왕릉에 이미 만들어놓은것만큼 단군릉에 또 만들어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단군릉에 릉문을 세우지 않아도 일없지만 고조선무덤맛이 나게 릉문을 돌로 세우는것이 나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단군릉을 개건하는것은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우리 인민들에게 평양에 돌무덤형식으로 된 고조선건국시조의 무덤이 있다는것을 보여주기 위한것이므로 단군릉에 제당은 건설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남조선사람들이나 해외동포들이 단군릉을 보러 와서 제사를 지내겠다고 할수 있으므로 상돌은 만들어놓는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남조선에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인이 몇십만명 된다고 하는데 그들이 단군릉을 보러 올수 있습니다. 앞으로 북남래왕이 실현되면 대종교인들이 중근동나라들에서 기독교인들과 이슬람교인들이 예루살렘과 메카로 해마다 순례하듯이 단군릉에 찾아올수 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을 꾸드스라고도 부르는데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예수가 태여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성지라고 하고있으며 예수의 출생년도를 기준하여 서력을 쓰고있습니다. 남조선에 있는 대종교인들은 단군이 출생한 년도를 기준으로 하여 단기를 쓰고있습니다. 올해를 단기 4326년이라고 한다는데 이번에 단군의 유골을 발굴하여 계산한것보다 년대가 짧습니다. 올해를 단기4326년이라고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우리가 단군릉을 잘 꾸려놓으면 대종교인들이 평양에 와서 단군릉을 보고 좋아할것입니다.

천도교청우당위원장을 하다가 사망한 최덕신도 단군숭배자였습니다. 그는 조선사람을 단군을 조상으로 하는 배달민족이라고 하면서 미국에 있을 때 ≪배달신보≫라는 신문도 발간하였습니다. 지금 그의 부인이 천도교청우당위원장을 하고있는데 그가 베이징에 가서 남조선천도교 교령을 만나 다음해에 동학당란 100돐을 남조선천도교인들과 같이 기념할데 대한 문제를 토론하고있습니다.

우리가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을 내놓았는데 그것이 실현되면 대종교인들뿐아니라 남조선의 각계각층 사람들이 공화국북반부에 많이 올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오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다 맞이하여야 합니다.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에 대한 선전을 널리 하여야 합니다. 지금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에 대한 반향이 항일무장투쟁시기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내놓았을 때처럼 큽니다. 항일무장투쟁시기 조국광복회10강령을 내놓았을 때 국내외혁명가들뿐아니라 애국적청년학생들, 종교인들까지 그 강령을 지지하여나섰습니다. 그때 천도교 함경남도 도정이였던 박인진도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호응하여나섰습니다. 박인진은 그때 삼수, 갑산, 풍산, 북청 일대의 천도교인들을 관할하였습니다. 내가 지난해에 박인진의 부인을 만났는데 그후에 그가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단군릉을 남조선사람들과 해외동포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와보아도 손색이 없게 잘 꾸려야 합니다.

단군릉을 개건하는것과 함께 단군과 관련되여있는 다른 유적들도 다 잘 꾸려야 합니다. 단군릉을 개건할 때 단군유적들도 같이 꾸려놓아야 사람들이 그 유적들을 보고 단군이 실재한 인물이였다는것을 더 잘 인식할수 있습니다. 단군유적들은 단군이 실재한 인물이였다는것을 증명하는데서 보조적역할을 합니다.

단군과 관련된 유적이 단군릉주변에도 있고 묘향산과 구월산에도 많습니다. 단군릉주변에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있으면 그것도 사람들이 참관할수 있게 보존하며 단군이 배놀이를 하였다는 단군호도 꾸리고 그 주변을 유원지식으로 정리하여야 합니다.

묘향산에 단군이 활쏘기련습을 하였다는 단군대와 천주석이 있는데 그곳도 잘 꾸려놓아야 합니다. 단군이 묘향산에서 활쏘기련습을 한것이 사실일수 있으므로 그곳을 잘 꾸리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묘향산에 단군과 관련한 건물이 있었으면 그것도 꾸리고 거기에 단군의 상상화를 그려붙이는것이 좋겠습니다. 옛날에 솔거가 단군을 상상하여 그렸다는 단군의 초상이 있는것만큼 그것을 그려붙이고 사람들에게 단군의 상상화를 그려붙였다고 설명해주면 될것입니다.

구월산에 있는 단군대도 정비하고 단군사도 복구해놓아야 합니다. 환웅이 곰과 관계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전설은 무시하여야 하므로 구월산에 있는 단군굴은 꾸리지 않아도 됩니다.

단군릉에 있는 기적비는 해방전에 민족주의자들과 유지들이 일제의 단군말살책동으로부터 단군을 보호하기 위하여 돈을 모아 단군릉을 꾸리고 세워놓았던것이라고 해설하여주는것이 좋겠습니다.

오늘 내가 방향을 준대로 단군릉복구위원회에서 구체적으로 협의하여 단군릉을 고조선의 건국시조의 무덤답게 잘 꾸려야 하겠습니다. 단군릉복구위원회 성원들이 일을 책임적으로 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