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17일 「우리민족끼리」에 실린 글

 

조선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강점과 통치는 천추만대

용납못할 특대형의 국가조직적범죄이다
 

일제의 조선민족말살죄행록
 

조선인민의 철천지원쑤 일제가 우리 나라를 군사적으로 강점하고 식민지통치를 강행한 때로부터 105년의 세월이 흘렀다.

조선강점기간 일제는 제국주의식민지통치력사상 일찌기 있어본적이 없는 가장 야만적이고 반인륜적인 만행을 감행하였으며 우리 인민에게 온갖 불행과 고통을 들씌웠다.

조선사람 100여만명을 학살하였으며 1938년이후에만도 840만여명을 랍치, 련행하였다.

우리 말과 글, 지어 조선사람의 성까지 없애기 위해 비렬하게 책동하였으며 반만년의 오랜 력사를 자랑하는 민족의 귀중한 문화재부들을 닥치는대로 파괴략탈하였다.

조선중앙통신사는 일제가 조선에 대한 군사적강점기간 감행한 만행을 조선민족말살을 노린 전대미문의 특대형범죄로 락인하고 그것을 폭로단죄하는 죄행록을 발표한다.

 

조선민족말살을 노린 대학살만행
 

일제가 우리 나라에 대한 군사적강점기간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은 조선사람들을 잔인무도하게 학살한것이다.

일제는 극악한 무단통치, 《문화통치》, 파쑈테로통치를 실시하면서 수많은 조선사람을 죽이는 천추에 용납못할 반인륜적범죄를 감행하였다.

《조선인은 일본법률에 복종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 《조선사람들은 혹가이도 아이누족처럼 멸족시키면 족하다.》는것이 조선사람들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살인통치의 기본방식이였다.

일제는 이에 기초하여 민족자주정신, 반일의식을 지닌 조선의 애국자들과 군중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학살하였다.

일제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떠선 조선인민의 반일의병투쟁을 압살하기 위해 방대한 침략무력을 투입하고 《토벌》작전을 벌리였다.

일제가 줄여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1906년 여름부터 1911년까지 2 800여회에 걸쳐 의병《토벌》을 감행하였으며 그 과정에 15만명이상의 조선애국자들을 학살하였다.

《토벌》지역을 초토화하고 일반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야수적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의병들의 근거지로 지목된 부락들에 대한 초토화작전과 의병참가자들의 가문, 가족을 모조리 없애기 위한 멸종멸족정책에 의하여 헤아릴수 없이 많은 무고한 조선인남녀로소들이 목숨을 잃었다.

1919년 3. 1인민봉기때에는 전국적범위에서 10여만명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봉기진압을 위해 《조선총독》과 조선강점군 사령관은 룡산과 라남의 2개 사단무력과 헌병, 경찰을 총동원하였으며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일본본토에서 6개 대대병력과 헌병 400명을 더 끌어들이였다.

시위대렬에 총포사격을 가하여 시민들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도처에 싸다니면서 《조선사람사냥》에 미쳐날뛰였다.

일제는 1920년에 조선강점군, 함경남북도경찰, 만철수비대 등을 동원하여 간도조선인들에 대한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간도대《토벌》로 세상에 알려진 이 참극사건에서 일제는 가장 가혹하고 악착한 방법으로 3만여명의 조선사람을 죽였으며 온 간도땅을 피바다에 잠그었다.

이러한 살인만행을 감행하고서도 일제는 그것을 《토벌》작전의 《승리》로 떠들면서 라남19사단을 《표창》하는 추태를 부리였다.

1926년 6. 10만세운동과 원산부두로동자들의 총파업, 광주학생사건 등 우리 인민의 반일투쟁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면서 로동자, 농민, 학생들을 닥치는대로 체포투옥하였다.

일제는 1930년대에 들어와 《조선사람 100명을 죽이면 그가운데 적어도 공산주의자가 한명은 있을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죽이라.》는 폭언과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빼앗으라.》는 《3광정책》을 떠들면서 조선인《토벌》에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1931년 가을과 1932년 봄에 동만《토벌》을 벌려놓고 조선사람에 대한 살륙만행을 감행하여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일제는 또한 각종 폭압기구들을 내오고 악법들을 조작공포하여 조선인민의 초보적인 인권과 자유의 마지막흔적까지 짓밟았으며 죄없는 사람들에게 생트집을 걸어 체포투옥, 고문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1911년부터 제국주의침략사에서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극악무도한 악법인 《범죄즉결령》을 시행하였으며 경찰서장이나 헌병분견대장에게 일정한 법적수속이나 재판도 없이 조선사람들을 마음대로 처형할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1912년 3월에는 《조선감옥령》을 발포함으로써 가장 야수적인 감옥제도를 조선에 세웠다.

1925년에 《치안유지법》, 1928년에 《신치안유지법》, 1936년에 《사상범보호관찰령》을 조작발포한 일제는 1940년대에 들어와서도 《사상범예방구금법》, 《국가보안법》, 《조선림시보안법》 등 수많은 파쑈살인악법들을 만들어냈다.

일제는 조선민족대학살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식민지통치의 직접적담당자이며 현지집행자인 《조선총독》들을 일본에서도 가장 악명높은 파쑈분자들로 골라보냈다.

일제의 침략군과 헌병, 경찰 등 폭압기구들 그리고 모든 악법들이 례외없이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체포투옥, 고문학살하는데 동원되였음은 더 말할것도 없다.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휘둘러 조선애국자들을 닥치는대로 잡아가두는 일대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1922년 검거건수가 13만 8 539건이였다면 1925년에는 그것이 19만 1 203건으로, 1926년에는 26만 1 558건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일제가 줄여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1924년부터 1929년까지 검거건수는 87만 5 522건, 검거된 조선사람은 수백만명에 달하였다.

1934년에는 《사상범》의 혐의를 들씌워 6만 655명, 1938년에는 16만 5 300명의 조선사람들을 검거투옥하였다.

일제가 조선민족의 자주정신과 반일의식을 거세말살하기 위해 감행한 만행들은 그 야수성과 악랄성에 있어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반인륜적범죄이며 극악한 민족배타주의에 기초한 인간살륙전, 민족말살행위이다.

조선민족에 대한 일제의 대학살만행은 1938년이후 더욱 로골화되였다.

일제는 이 시기에 무려 840만여명의 조선사람들을 랍치, 련행하였으며 그중 41만 7 000여명을 전쟁대포밥으로, 778만 4 800여명을 죽음의 고역장으로, 20만명의 녀성들을 일본군위안부로 내몰아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게 하였다.

일제는 《지하대본영》과 비밀군사기지건설에 동원되였던 수만명의 조선사람을 《비밀보장》의 구실로 집단학살하거나 세균무기생체실험대상으로 삼는 극악한 살인범죄를 저질렀다.

일제에 의해 랍치, 련행되여 끌려갔던 징병자들과 징용자들중 70여만명, 일본군위안부중 14만 3 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강점군 헌병사령부에서 발행한 도서 《폭도토벌지》, 공안조사청의 비밀자료 《재일조선인의 개황》,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발행한 도서 《조선경찰개요》 등에 의하면 일제는 조선에 대한 군사적강점기간 도합 100여만명의 조선사람을 학살하였다. 이것은 당시 우리 나라 인구 20명당 1명이 일제에 의해 학살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일제가 감행한 전대미문의 대탄압, 대학살은 아시아와 세계제패를 위해 한 민족, 한 나라를 희생시킬것을 획책한 일본당국의 조선민족말살정책과 침략야망에 기인된것이다.

《조선총독》이였던 사이또는 《조선통치방침》에서 조선의 독립과 자치를 허용하지 않을것이라고 공공연히 선포하였으며 해외조선인들을 다루는 문제에 대해 《한편으로는 그들에 대한 단속을 하고 그 소굴을 소탕할 필요가 있으며 다른편으로는 … 황국신민화할 필요가 있다.》고 떠벌였다.

1942년에 《조선총독》으로 군림한 고이소는 《시정방침은 변함이 없다.》, 《믿을수 없는 무리들에 대하여서는 … 관리나 민간인을 막론하고 단호히 탄압하겠다.》고 공공연히 줴치면서 파쑈적폭압을 강화하는데로 나아갔다.

이러한 망발들은 조선사람들속에서 나타나는 반일감정이나 애국적운동이 그 어떤 형태로 발현되든지 무자비하게 탄압할것이라는 강권정치, 폭압정치를 선포한것으로서 사실상에 있어서 조선민족전멸론이였다.

참으로 일제가 감행한 조선인대학살만행은 그 규모와 잔인성에 있어서 동서고금의 침략사와 전쟁사에서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가장 악독하고 야만적인 인권유린행위이다.

 

조선민족의 얼을 유린말살
 

일제의 조선민족말살죄행에서 엄중한것은 우리 민족을 《야마도민족화》하기 위해 가장 교활하고 집요한 방법으로 민족동화정책을 강행실시한것이다.

일제는 조선통치의 궁극적목적을 《첫째도 동화, 둘째도 동화》로 규정하였으며 조선의 력사와 문화전통을 없애고 민족성을 거세하는것을 그 실현방도로 내놓았다.

일제의 군경들은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기의 것, 력사전통에 대해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의 혼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자기 선조들을 경시하고 멸시》하게 한 다음 《일본의 서적과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것이다.》고 떠벌였으며 어용학자들도 《…조선력사를 진멸하여버림으로써 그 흔적을 아예 없애버리는것이 좋다.》는 강도적론리를 들고나왔다.

일제는 조선강점초시기부터 조선인민을 철저히 노예화하며 민족성을 말살하는것을 국가시책으로 삼고 통치기구들을 총동원하였다.

《고적 및 유물보존규칙》과 《조선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보존령》 등 허울좋은 간판밑에 각종 악법과 략탈기구들을 만들어냈다.

헌병, 경찰 등을 동원하여 우리 나라의 곳곳에 있는 문화유적들을 닥치는대로 파괴, 소각하였으며 귀중한 문화유물들을 훔쳐가는 강도행위를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24대왕 원종의 소릉과 비를 비롯한 고려시기의 고분들이 전부 도굴략탈당하였으며 지어 조선왕궁에까지 일제의 마수가 뻗쳤다.

일본에서 발간된 《고적조사보고》가 조선의 시조릉인 단군릉 그리고 고려태조릉 등 고려의 력대 왕릉들이 1910년대에 이르러 일제에 의해 단 1기도 남지 않고 모조리 도굴되였다고 서술한것은 결코 우연치 않다.

일제는 강점후 10년간에 대동강류역과 룡연일대에서 무려 1 400여기에 달하는 고분을 파헤치고 유물들을 수탈하였다.

략탈해간 문화유물은 도꾜국립박물관에 진렬된 4만여점을 비롯하여 수십만점에 달한다.

초대《통감》이였던 이또 히로부미를 비롯한 력대《통감》과 《총독》들, 권력을 등에 업은 단체들과 깡패들이 략탈에 뛰여들었다. 데라우찌는 조선의 고서적만 해도 무려 2만 3 000여권이나 략탈사취하였으며 조선왕궁건물까지 헐어다 야마구찌현에 《조선관》을 설치하였다.

지금까지 력사유적유물에 대한 외래침략자들의 파괴략탈행위와 관련한 적지 않은 비화들이 전해지고있지만 조선문화유적유물을 파괴략탈한 일제의 만행과 같은 날강도적인 범죄행위는 일찌기 없었다.

일제는 자기 나라보다 3 000년이상 앞선 조선민족의 유구한 력사를 없애버리기 위해 단군조선을 비롯한 고조선의 력사를 잘라버린 《조선사》를 조작하였다.

조선력사와 관련한 서적들을 《불온도서》라고 하면서 20만부이상 불태워 버림으로써 히틀러의 분서란동을 초월한 희세의 만행을 감행하였다.

우리 나라의 모든 사고들을 손에 넣고 세계적인 문화재보인 오대산본 《리조실록》 1 800여권과 규장각에 소장되여있던 수많은 귀중한 도서들을 일본으로 빼돌렸으며 강화도사고를 백주에 도끼로 까고 고서적들을 무더기로 훔쳐냈다.

강점기간 무려 5차례에 걸쳐 우리의 민족고전에 대한 수색작전을 벌리고 수백명의 《학자》들을 방방곡곡에 들이밀어 수많은 고서적들을 략탈하였다.

일제는 《리조실록》을 비롯한 우리의 민족고전들과 력사를 기록한 귀중한 국보들을 외국에 팔아버렸으며 일본땅에서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와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일제는 또한 조선사람에게서 민족성과 얼을 뿌리뽑기 위해 사상문화분야에서의 악랄한 파쑈화책동의 일환인 《황국신민화》정책을 로골적으로 실시하였다.

《황국신민화》책동은 1937년 중일전쟁도발을 계기로 하여 더욱 발광적으로 벌어졌으며 1941년 태평양전쟁도발이후에는 최절정에 이르렀다.

일제가 조선민족을 《황국신민화》하는데서 중요하게 노린것은 조선사람들속에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와 《일본족과 조선민족은 하나의 조상을 이룬다.》는 《동조동근》사상을 강제로 불어넣어 우리 인민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는것이였다.

일제는 《내선일체》를 들고나오면서 일본과 조선이 지리적으로 가깝고 예로부터 《하나의 나라》, 《하나의 령토》를 이루었으며 《일본사람과 조선사람은 하나의 령토안에서 산 한 민족》이라고 떠들어댔다.

일제는 《내선일체》와 함께 《동조동근》론을 동시에 강요하였다.

《동조동근》론을 합리화하기 위해 력사적사실까지 날조하였으며 저들의 어용사가들을 동원하여 그것을 《론증》하는 자료를 《리론》적으로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고 책동하였다.

일제는 반만년의 력사를 가진 조선민족을 몇십년동안에 《일본화》하기 위해 《황국신민의 무사도정신》을 강제주입시키려고 집요하게 책동하였다.

국민학교 입학생들에게 선참으로 일장기에 대한 노래를 배워주었으며 노기와 같은 광신적인 군국주의두목을 《충군충효》의 표본으로 내세우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교재에 포함시키였다.

《황국신민의 서사》나 《황국신민체조》, 《정오묵도》 역시 조선사람을 일본사람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내리먹이였다.

특히 일제는 조선민족을 이 세상에서 영영 없애기 위해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말을 쓰도록 강요하였다.

《내선일체는 국어상용으로부터》라는 구호를 내걸고 관청, 회사, 학교, 공장에서는 물론 가정과 교회, 목욕탕안에서까지 일본말을 사용하라고 하였다.

일본어를 《국어》로 책정하고 일본말을 쓰지 않으면 벌금을 받아내거나 육체적제재를 가하였다.

지어 일본말을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기차표도 팔아주지 않았다.

조선작가들에게 일본말로 작품을 쓸것을 강요하였으며 일본말로 된 《국민문학》잡지까지 발간하였다.

일제는 1940년부터는 《창씨개명》의 미명하에 조선사람의 성과 이름을 강제로 빼앗는 천추에 용납못할 죄행을 범하였다.

민족의 넋과 정신이 반영되고 유구한 력사가 깃들어있는 조선의 지명들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짓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일제의 민족동화정책에 의하여 조선민족은 1940년대 전반기에 이르러 민족으로서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못하는가, 유린당한 민족성을 부활시키는가 부활시키지 못하는가 하는 운명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였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고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으며 조선말대신 일본말을 쓰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는것이 우리 민족에게 강요된 운명이였다.

이 모든것은 일제의 조선에 대한 군사적강점이 조선사람의 민족성과 얼을 여지없이 짓밟아버리고 철저히 《일본화》, 식민지노예화함으로써 조선민족자체를 말살하기 위해 감행된 천추에 용납못할 전대미문의 범죄이라는것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조선민족의 삶의 터전을 파괴략탈
 

일제의 조선민족말살죄행에서 용납될수 없는것은 우리 인민을 질식시키기 위해 무자비한 물적자원략탈행위를 감행한것이다.

당시 우리 나라는 인구의 80%이상이 농민이였으며 그들의 기본생산수단과 생존수단은 토지였다.

일제는 우리 나라에 대한 식민지지배초시기 벌써 토지강탈에 매여달렸으며 《한일합병》후 보다 로골화하였다.

《토지소유권의 조사확인》이라는 명목으로 《토지조사령》을 선포하고《수속위반》, 《증거불명》 등의 구실을 붙여 100여만정보에 달하는 막대한 토지를 비법적으로 강탈하였다.

한편 《산미증식계획》, 《공출》 등의 간판으로 3 900만t의 쌀을 략탈해갔다.

이에 대해 도서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력사적조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2 600만명의 조선사람들에게 가장 나쁜 감정을 품게 한것은 쌀의 공출과 사람의 공출이다. …1937년 지나사변을 일으켰을 때 관민들은 다같이 쌀은 문제없다고 말하고있었다. 왜냐하면 … 이 일본내지의 4개 섬과 조선과 대만을 합치면 가장 적을 때에는 800만석, 많을 때에는 1 500만석을 가져왔다. 이것을 조선은행권, 대만은행권이라는 종이장으로 샀다. 특히 금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일본의 수탈자들이 지불담보가 없는 관리화페인 《조선은행권》으로 쌀을 샀다는것은 그들자신이 말한바와 같이 조선의 쌀을 공짜로 빼앗았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쌀수탈의 강도적성격은 쌀《공출》제도를 실시하던 시기에 더욱 집중적으로 드러났다. 그 시기 일본수탈자들은 조선농민들에게서 생산비의 9%도 안되는 헐값으로 쌀을 앗아갔다. 그 관리화페마저도 《전시저금》, 《애국공채》의 명목으로 걷어들이였다.

조선농민들이 자기 살붙이처럼 중히 여기던 소를 194만 3 000여마리나 끌고가 도살해버렸다.

일제의 농촌략탈행위로 말미암아 조선의 농촌들은 만성적인 기아지대로 되였으며 춘궁기는 《년례행사》처럼 들이닥쳤다.이렇게 되여 우리 나라에서 《보리고개》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조선사람들은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다 못해 정든 고향을 버리고 살곳을 찾아 이국땅에로 류랑의 길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는 1918년 5월 1일 《림야조사령》을 조작공포하고 우리 나라의 림야면적 1 600만정보가운데서 1 300만정보를 《국유림》의 명목으로 빼앗았으며 나머지는 일본지주들과 친일주구들의 소유로 넘겼다.

1902년부터 1945년 7월까지의 기간에 7억 6 940만 2 347㎥에 달하는 막대한 량의 목재를 략탈하였다.

《조선총독부》에 직속된 4개의 영림창과 26개의 벌목사업소, 100여개의 벌목작업장을 통해 압록강과 두만강연안에 울창하였던 200여만정보의 대원시림을 파괴하였으며 13개 도청산하에 조직된 영림서와 미쯔이물산, 스미또모재벌 등 일본의 대재벌들과 기업체들을 내세워 조선의 방방곡곡에서 산림자원을 략탈해갔다.

《조선광업령》, 《어업령》을 비롯한 식민지략탈법들을 조작공포하여 우리 나라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수산자원들을 가장 악착한 방법으로 긁어갔다.

일제가 우리 나라에서 강탈해간 물적자원은 액상으로 볼 때 천문학적수자이다.

금, 은, 동, 아연, 철광석 등 략탈하여간 58종에 달하는 각종 광물의 금액은 1945년 8월 우리 나라에서의 각종 광물시세에 기초하여 볼 때 20억¥에 달하였다.

1910년부터 1942년사이에 빼앗아간 수산물 1 432만t(양식생산물은 제외)의 금액도 당시 액상으로 11억 260여만¥이였다.

재정 및 금융을 통한 수탈액도 막대하다.

그중 일부 지표별 액상만 보아도 세금 153억 1 152만 5 000¥, 군사비(1937-1945년) 16억 1 090만 9 896¥, 사업공채(1911-1944년) 139억 610만¥, 전시강제저금(1938-1944년) 54억 9 616만 8 000¥, 국채, 저축채권, 보국채권, 특별보국채권 2억 6 023만¥, 조선내의 금융기관들의 유가증권을 통한 총액 72억 3 362만 1 000¥이다.

이것만 보아도 일제가 감행한 각종 자원의 략탈규모가 얼마나 방대한것이였는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조선인민이 일본의 식민지통치로 하여 당한 정신적, 인적, 물적피해는 그 형태와 내용, 규모에 있어서 참으로 인류력사에 전무후무한 최대최악의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과거를 청산할 대신 패망후 시종일관 또다시 우리 나라를 타고앉으려는 야망을 추구하고있다.

일본의 대조선정책은 예나 지금이나 조선민족을 저들에게 순종하는 노예로, 우리 나라를 일본령토의 일부로 만들려는것이다.

지난 세기 중엽 일본은 미제가 우리 공화국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하자 곧 공업의 전반적인 생산체계를 전시체제로 개편하고 미국에 군수품들을 전적으로 생산보장하였다. 뿐만아니라 군사기지들과 군사시설들을 설치하도록 전령토를 미국에 맡기였다.

조선전쟁에 침략무력을 들이밀어 무고한 조선인민을 살해하고 삼천리강토를 페허로 만드는데 직접 가담하였다.

1950년 7월 27일 영국의 로이터통신은 《7월에 벌써 일본군의 조선전쟁참가자수는 2만 5 000여명에 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일본의 조선침략전쟁가담은 철두철미 저들의 대조선정책인 조선민족말살을 노린 극악한 범죄행위이다.

일본은 패망이후 65년간 우리 나라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정치군사적위협공갈과 경제적제재를 끊임없이 감행하였을뿐아니라 일제의 식민지통치후과로 일본에서 살고있는 조선사람들과 그 후대들에 대해 가혹한 민족적차별과 탄압을 계속하여왔다.

일본의 이러한 행위는 명백히 구일본제국이 감행한 조선민족말살책동의 연장이다.

제반 사실은 일본이야말로 조선민족에게 천추만대를 두고도 씻을수 없는 범죄를 감행한 백년숙적임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지금 우리 군대와 인민은 일본의 죄악을 총결산할 의지에 차있다.

일본은 우리 군대와 인민을 똑똑히 알고 분별있게 처신하여야 하며 과거죄행에 대해 조선민족앞에 성근하게 사죄, 배상하여야 할것이다.

 

조선중앙통신사

주체99(2010)년 11월 16일

평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