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14)]

 중간강령(interim program)을 위하여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난항에 빠졌을 때는 발상전환이 필요하다

토론을 좀 더 심화시키기 위해 지금까지 우리식 변혁담론에서 논한 줄거리를 짚어보면, 민주주의변혁의 세 가지 과업이 주요 논제로 되었음을 상기할 수 있다. 그것은 자주적 민주정권 또는 진보정권을 세우는 민주주의변혁의 제1과업, 중요산업 국유화 시행과 그에 기초한 우리식 보편적 복지제도 수립 및 자립경제체제로의 대전환을 이룩하는 민주주의변혁의 제2과업, 진보적 민주주의강령과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을 완수하는 민주주의변혁의 제3과업이다. 이 세 가지 과업을 다른 방식으로 서술하면, 자주적 민주정권은 민주주의변혁의 수단이고, 중요산업 국유화는 민주주의변혁의 방법이고, 양대 강령의 완수는 민주주의변혁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우리식 변혁담론의 순차적 3대 과업을 서술하건, 또는 우리식 변혁담론의 수단-방법-목적을 서술하건 간에 선결해야 할 과업은 정권문제, 더 정확히 표현해서 집권문제에 귀착된다. 집권문제를 민주주의변혁의 요구와 이익에 맞게 해결하지 못하면 이 땅의 진보정치는 현 상태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적 정치세력이 집권문제에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지금 민주노동당과 진보적 정치세력은 첫 번째로 제기되는 집권문제에서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적 정치세력은 유력하고 실현가능한 집권방도를 도무지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난항을 뚫고 나갈 돌파구를 찾을 수 없을까?
 
벗어나기 힘든 난항에 빠졌을 때는,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과감한 발상전환이 필요하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적 정치세력은 집권전략에 대한 기존 인식을 새로운 시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민주노동당과 진보적 정치세력이 생각해 온 집권이란 민주노동당의 단독집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단독집권은 가까운 장래에 실현될 가능성이 없으므로, 단독집권을 일단 접어두고, 집권전략의 발상을 우선 공동집권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단독집권이 불가능해진 정치현실이 그러한 발상전환을 요구하고, 2012년의 중대한 변화를 향해 줄달음치는 한반도 당면정세가 그러한 발상전환을 절실히 요구한다.
 
공동집권으로의 발상전환이 진보대통합과 범야권 정당연합체 결성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전의 글들에서 이미 논한 바 있다. 다시 말하면, 진보대통합과 범야권 정당연합체 결성으로 집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민주노동당과 진보적 정치세력이 민주주의변혁의 돌파구를 열어놓을 유일한 기회인지도 모른다. 2012년의 중대한 변화를 앞둔 시기에, 민주노동당과 진보적 정치세력은 시급하고 절실한 당면과제에 직면한 것이다. 

민주주의변혁의 두 걸음을 위한 한 걸음

민주노동당과 진보적 정치세력은 2012년에 한나라당의 집권연장을 저지해야 하며, 그와 동시에 민주당의 단독집권도 저지해야 한다. 한나라당은 집권연장에 전력하고 있으며, 그에 질세라 민주당도 정권탈환에 전력하고 있다. 이처럼 두 방향에서 각기 작용하는 두 종류의 후진동력을 민주노동당과 진보적 정치세력이 한꺼번에 저지하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다.
 
만일 민주당이 단독으로 집권하면, 낡은 형의 민주개혁정권이 다시 들어서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는 또 다시 민주개혁의 실패한 과거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민주당의 정권탈환으로 세워질 민주개혁정권이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달리 진보정치의 길을 열어놓을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후퇴를 모르고 오직 전진만 알아야 하는 민주주의변혁의 길에서 우리 사회를 민주개혁의 실패한 과거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무의미이며 패배다. 한나라당의 접권연장만 최악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민주당의 단독집권도 그에 버금가는 최악의 시나리오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힘들고 복잡한 경로를 밝아가야 할 민주주의변혁이 2012년의 중대한 전환기에 힘에 부쳐 두 걸음을 앞으로 내딛지 못하면,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뒷걸음을 칠 것이 아니라, 우선 한 걸음이라도 내딛으면서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선 한 걸음이라도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 걸음은 장차 민주주의변혁의 두 걸음을 위한 한 걸음이다.

베네주엘라 정치현실이 보여주는 것

2006년 12월 3일 베네주엘라에서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그 나라의 대통령 임기는 6년이다. 2006년 12월 대선에서 우고 챠베스(Hugo Chavez) 대통령이 62.87%의 득표율로 재선되었다. 만일 챠베스 대통령이 2006년 대선에서 패하였다면, 베네주엘라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과 역행으로 대파국에 빠졌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2012년 대선이 중요한 것처럼, 그 당시 베네주엘라에게는 2006년 대선이 중요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대선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 만일 챠베스 대통령이 속한 제5공화국 운동(Movimiento V Republica)이라는 당시 집권당이 단독으로 2006년 대선에 나섰다면 패하였을 것이다. 그런 현실을 간파한 제5공화국 운동은 다른 중도좌파정당과 좌파정당들에게 합당을 제안하였다. 지금 민주노동당이 진보대통합을 제안한 것과 비슷하다. 인민선거운동(MEP), 베네주엘라 인민당(UPV), 혁명적 뚜빠마로운동(MRT)을 비롯한 11개 좌파 또는 중도좌파 군소정당들이 합당하였다. 현 집권당인 베네주엘라 연합사회당(PSUV)은 그렇게 하여 창당되었다.
그러나 연합사회당이 2006년 대선에서 얻은 득표율은 45.99%밖에 되지 않았다. 연합사회당이 베네주엘라 공산당, 만인을 위한 조국(PPT), 사회민주당(PODEMOS)과의 정치연합에 성공하여 그 세 당이 득표율 14.60%를 보태주었기에 대선에서 압도적 표차로 승리할 수 있었다.
 
베네주엘라의 경험을 보더라도, 합당과 정치연합이 대선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었음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단결과 연합이 승리의 길이라는, 누구나 아는 만고의 진리는, 2006년 베네주엘라 대선에서만이 아니라 2012년 우리의 대선에서도 통한다. 중요한 것은, 중도좌파정당들과 좌파정당들이 합당하는 방식으로 창당된 연합사회당의 강령이다. 연합사회당의 7대 강령을 요약하면 이렇다.

1. 볼리바리안 혁명을 수호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한다.
2. 반제, 반자본의 기치를 든 국제주의를 추구한다.
3. 인민권력협의회에 기초한 정권을 세운다.
4. 민주적 계획경제를 실현한다.
5. 자연환경을 수호하고 생산을 계획화한다.
6. 국가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국방력을 강화한다.
7.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인민정권에 기초한 국가를 건설한다.

베네주엘라는 좌파정치의 역사가 길고, 좌파정당이 중도좌파정당보다 우세하기 때문에 11개 정당이 모여 위와 같은 사회주의강령을 합의, 작성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의 정치현실은 한참 뒤져있다. 우리의 정치현실에서는 거꾸로 중도우파정당이 중도좌파정당에 비해 우세하다. 따라서 우리식 변혁담론에서 말하는 범야권 정당연합체가 결성되더라도, 거기서 베네주엘라식 사회주의강령을 합의, 작성할 가능성은 없다.
 
이 땅에서 범야권 정당연합체를 결성하는 경우, 민주주의변혁강령을 추구하는 중도좌파정당과 민주개혁강령을 추구하는 중도우파정당들이 정치연합을 실현하게 된다. 따라서 범야권 정당연합체는 민주주의변혁강령과 민주개혁강령의 중간지대에 자리잡을 것이다. 

중간강령을 합의, 작성할 수 있을까?

이 땅에서 범야권 정당연합체를 결성하여 공동집권을 실현하려는 경우, 또 다른 걸림돌이 민주주의변혁의 앞길을 가로막게 된다. 그 걸림돌은 공동강령을 어떻게 합의, 작성할 것인가 하는 난제다.

민주노동당이 단독집권을 실현하는 경우에는 민주주의변혁이 요구하는 강령, 곧 진보적 민주주의강령과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을 실현하면 되는 것이므로, 걸림돌이 나타날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민주노동당과 중도우파정당들이 공동으로 집권하는 경우는 사정이 달라진다. 범야권 정당연합체를 결성하는 첫 단계에서부터 민주노동당은 자기 강령을 전면적으로 실현하지 못하는 일종의 한계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범야권 정당연합체에 참가할 중도우파정당들은 진보적 민주주의강령이 아니라 민주개혁강령을,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이 아니라 남북 화해협력강령을 추구하는 정당들이다.

범야권 정당연합체가 공동집권전략에 따라 연립정권을 구성하려면 공동강령을 합의, 작성하고 그것을 국민대중에게 제시하여 지지를 이끌어내야 하는데, 공동강령을 어떻게 작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간단치 않다. 공동강령을 합의, 작성하지 못하면, 범야권 정당연합체를 결성할 수 없고, 공동집권도 가능하지 않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범야권 정당연합체는 중간강령(interim program)을 합의하는 길밖에 없다. 민주개혁단계에서 민주주의변혁단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연립정부가 요구하는 것이 바로 중간강령이다. 범야권 정당연합체의 중간강령은 중도좌파정당과 중도우파정당들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다. 그것은 진보적 민주주의강령과 민주개혁강령의 중간선에 위치하며, 자주적 평화통일강령과 남북화해협력강령의 중간선에 위치한다.
 
범야권 정당연합체의 중간강령은 힘에 부쳐 두 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적 정치세력을 한 걸음이라도 내딛도록 떠밀어주는, 변혁과 개혁의 중간선에 자리잡은 최저강령이다. (2010년 12월 12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