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으로 보는 세상이야기(2)

재미교포 김성일
 

지금 북에서 공연하고 있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

세상의 많은 노래가운데 슬플 때도 기쁠 때도, 남자도 여자도 그리고 노인도 어린아이도 함께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리랑이 유일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나라를 잃고 망국의 한을 안고 조국을 떠날 때도 아리랑을 불렀고 해방이 되어 환희에 젖어 귀국선을 타고 돌아올 때에도 아리랑을 불렀다.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황해도아리랑 등 팔도강산 어디에도 아리랑가락이 있다. 서편제로도 부를 수 있고 동편제로도 부를 수 있는 곡, 심지어는 이념의 장벽을 넘어 남북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이 아리랑.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공연은 노래곡 「아리랑」으로 시작한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남부여대 혹은 가장이 홀로 조국산천 뒤에 두고 두만강, 압록강을 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물론 애환에 젖은 아리랑이다. 그러나 공연의 마지막부분은 경쾌하고 환희에 넘치는 아리랑으로 막을 내린다.

우리 민족을 『아리랑민족』이라 하면서 『지구상에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있지만 우리는 반 만년역사속에 함께 살아온 문화민족, 항상 새 것을 창조하며 살아온 아리랑민족이다. 그러나 강도 일제는 우리를 노예로 삼았고 외세는 우리를 갈라놓고 말았다. 아, 어찌 슬프지 않는가.』라고 비탄에 젖은 멘트가 나오면서 아리랑공연이 시작된다.

아리랑공연을 어떻게 보는가는 각자의 자유에 맡기고 지금으로부터 만 70년전 1937년 6월에 간삼봉마루에 울려 퍼졌던 아리랑으로 돌아가 아리랑공연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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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님은 『비유해 말하면 간삼봉전투와 구시산전투는 보천보전투의 메아리라고 볼 수 있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6권 222페지)라고 회고하고 있다.

간삼봉전투는 무적황군 일본군의 신화를 완전히 깨뜨려 버리고 백두산지구에 진출한 항일유격대의 혁명활동의 전성기를 마련하는 하나의 중요한 전투였다.

바로 이 전투에서 김일성주석님은 일본의 「야마도정신」과 우리 민족의 「아리랑의 얼」을 대비시키고 있다.

다시말하여 『… 부정의를 정의로 알고 악을 선으로 착각하는 천치들, 총구앞에 부나비처럼 뛰어들어 보람없는 개죽음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무사도라고 자부하는 청맹과니들, 타민족의 시체더미위에서 축배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야수들, 자기가 죽으면 천조대신의 혼이 자기를 굽어살피고 천황이 자기 명복을 빌며 일본국민이 자기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망상하는 정신불구자들』(6권 218페지)의 정신, 이것이 「야마도정신」이다.

일본군벌과 대신들은 「야마도정신」으로 죽은 장병들을 잠간 피였다 지는 「사꾸라꽃」에 비긴다. 그리고 이것이 「황군의 정신」이라고 미쳐 날뛰면서 적들은 간삼봉마루에 개미떼같이 기여오른다.

간삼봉은 13도구와 8도구에 이르는 1백여리 대지우의 서강고원 북쪽에 솟아있는 세개의 봉우리이다. 1937년 6월 30일 안개가 자욱한 간삼봉마루로는 2 000여명의 적들이 기여오른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적아간에 하루종일 전투가 진행되는 가운데 육박전까지 벌어졌다.

그런데 이때에 산마루중턱에서 난데없이 「아리랑」노래가 울려 퍼지지 않는가? 젊은 여성유격대원들이 이 와중에 아리랑을 합창하고 있는 것이다. 1절은 우리가 다 아는 가사에다 3절에서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저기 저 산이 백두산이라지/ 동지섣달에도 꽃만 핀다』로 이어진다.

간삼봉너머엔 원시림이 끝없이 펼쳐있고 그위로 백두산이 흰구름우에 떠있다.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아리랑이 울려 퍼지자 최정예를 자랑하던 74연대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지경으로 허물허물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병사들은 스스로 투항해 기여들기 시작하였다. 간삼봉전투에서 생긴 『가보쨔』란 용어 하나가 황도일군의 참패를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호박』이란 뜻이다. 죽은 일군의 시체를 가마니에 넣어 실어나르는데 마을농민들이 달구지에 싣고가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일본장교가 하는 말이 『가보쨔』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이를 놀리기 위해 『금년엔 호박풍년이라서 좋겠수다.』라고 했다고 한다. 간삼봉전투이후 일본놈들을 두고 『호박대가리』라는 은어마저 생겨날 정도였다.

김일성주석님은 「야마도정신」에 「아리랑얼」을 대치시키면서 『여대원들이 싸움을 하면서 부른 「아리랑」이 전 대오에 퍼지었다. 격전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강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간삼봉전투장에 울린 「아리랑」은 혁명군의 정신적 종심을 비쳐 보이고 낙천주의를 시위하였다. 적들이 「아리랑」을 듣고 어떤 기분에 잠겼겠는가 하는 것은 그닥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6권 218페지)라고 하였다.

잡힌 포로들이 이 노래를 듣고 느낀 감상에 대하여 고백하기를 그 노래를 듣고 처음에는 어리둥절해졌고 다음순간에는 공포에 잠기었으며 나중에는 인생허무를 느꼈다고 하였다. 부상자들중에는 신세를 한탄하며 우는자들도 있었으며 한쪽에서는 도망병까지 났다는 것이었다. 적들은 겨우 200여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도망치고 말았다.

일본이 우리 민족의 얼에 빠지는 이유는 아리랑에서 보는바와 같이 이 곡에 인간의 온갖 감정이 다 아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막상 북의 아리랑공연을 보면 선군정치를 내세우는 총검술같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극히 한 부분이다. 공연내용속에는 농사의 종자혁명, 나아가 환경생태보존적인 친환경적인 것도 있다.

김일성주석님은 유달리 간삼봉전투를 정신 대 정신의 싸움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야마도와 아리랑의 싸움말이다.

그런데 독자들이여 놀라지 말라. 이 전투에 최악질적으로 기여오른 인물이 다름아닌 조선사람 김석원(1893-1978)임을, 아니 가네야마(金山錫源)임을. 생존년대를 보면 85살까지 그는 최근까지 산 인물이다. 이 사람에 대하여서는 따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김석원에 대하여 회고록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간삼봉에서의 패전은 일본의 사무라이들에게 있어서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되었고 김석원이라는 이름은 그 치욕의 대명사로 되였다.』(6권 222페지)

해방후 38°선에서 숙적 김석원과 다시 조우한다.

당시 북의 최현 항일투사가 김석원을 복수하고 말겠다고 할 때에 김일성주석님은 이를 강력하게 만류했으며 『지금은 최현도 김석원도 이 세상에 없다. … 나는 북과 남의 모든 새 세대들이 민족의 핏줄을 두 토막으로 동강낸 인위적인 그 장벽을 하루속히 제거해버리고 자주적인 통일조국에서 화목하게 살기를 바란다. 김석원도 말년에는 이런 염원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6권 223페지)라고 용서의 념을 회고록에서 애틋하게 담고 있다. 나는 이 말을 진실한 것으로 믿고 싶다.

회고록은 북 주민들의 바이블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북녘동포들도 김주석님의 이 말을 유언으로 삼아 원수를 끌어안고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도 평양에서 아리랑을 공연하는 진정한 의미가 아닐 가? 만약에 이런 김주석님의 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연의 지엽적인 것을 헐뜯거나 체제선전용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간삼봉마루에서 울려 퍼진 아리랑의 의미를 무색케 하고 말 것이다. 이는 참으로 이 땅에 살아갈 새 세대들에겐 불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지구상 인류의 병들은 정신을 치료할 「아리랑」 그리고 그것을 담지하고 있는 아리랑민족, 저 태고적 대흥안령산맥을 넘으면서 불렀다고 하는 이 아리랑이 있는 한 우리는 아리랑의 민족혼으로 통일을 이루어내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