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입]

-자주민보이창기 기자의 기행문 -
 

장백현에서 압록강을 따라 차로 20여분을 남쪽으로 내려가면 18도구하가 압록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작은 동굴이 하나 있다.

바로 김일성주석이 이 장백현 일대와 국내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비밀지하조직 사업을 할 때 은신처로 이용했던 석회암 동굴이다.

앞과 뒤로 작은 봉우리가 서 있어 보초를 세우면 주변 움직임을 감시하기 좋았으며 동굴 입구는 골짜기 아래 깊은 곳에 있었다.

그 앞에는 18도구하가 빠르게 흘러내려가며 큰 물소리를 만들어 주어 동굴안의 소리를 막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물이 흐르는 곳에서는 군견도 냄새를 맡지 못한다.

지금은 그 동굴 입구가 있던 계곡 옆으로 도로를 내느라고 밀어버려 동굴의 중간지점이 언덕에 조금 노출되어 있는 상태이다.

사라진 입구와 노출된 지금의 입구를 비교해 보면 동굴은 계곡에서부터 점차 위쪽방향으로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계곡이 흐르는 동굴 입구는 늘 공기가 차게 마련이어서 안에서 피운 연기와 더운 공기는 위쪽으로 해서 산꼭대기와 뒤쪽 마을로 빠져나가게 되었던 것 같다.

1965년 항일투사 박영순을 단장으로 하는 항일유적지 답사단이 장백현에 왔을 때 김일성주석이 꼭 찾아보라고 했다며 밭골 동굴을 찾기 위해 인근 마을을 수소문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때 유복순 여사 아버지가 밭골은 약칭이고 정식명칭은 대밭골이라면서 그 동굴을 안내해주어 조선 답사단에게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유복순 여사 아버지는 1982년 74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면서 그의 딸인 유복순 여사에게 그 동굴 입구에 김일성 장군이 사용하던 동굴이라는 기념비를 꼭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당시에 동굴 인근에 집이 세 채가 있었는데 이 집 사람들 몰래 식량을 가져다 주느라 유복순 여사의 아버지는 늘 조심했다고 한다.

식량을 운반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고 한다.

유복순 여사 어머니가 떡을 잔뜩 해서 장백현에 팔러간다고 하고선 동굴에 가져다주기도 했는데 한번은 너무 일찍 돌아오는 바람에 일제 기관의 문초를 받았는데 가다가 넘어져서 떡을 망쳐서 장사를 못하고 왔다고 둘러대는 등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모면했었다고 한다.

동굴이 있던 18도구는 장백현에서도 가장 조선 안쪽으로 깊이 들어간 지점이다. 국내로 조직원을 파견하고 또 국내의 조직원을 만나기에 좋은 장소였던 것이다.

흠이 있다면 압록강 국경변이라 일제의 감시망이 매우 심한 곳이고 강변 초소도 분명히 조밀하게 배치되었 있을 곳이라는 점이다.

비밀근거지를 깊은 밀림속이 아닌 압록강 바로 앞에 만들어놓은 것은 좀 위험을 감내하더라도 순전히 국내 독립운동을 더 잘 도와주기 위한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내에서 살던 사람들이 압록강을 건너서 다시 장백현의 산이나 골짜기를 타고 곰의골 밀영이나 홍두산 밀영 등 조선인민혁명군 밀영이 있던 깊숙한 밀림지대까지 들어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건너다닌 사람들도 없진 않았지만 밀림 도처에 밀정이 우글거리고 마을마다 주재소(경찰서)가 즐비한 곳에서 행동거지가 조금만 달라도 바로 눈에 뜨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국내 인사들을 들어가 만나기에도 편하고 또 밤에 살짝 압록강만 건너오게 하면 바로 만날 수 있는 곳이 18도구 대밭골 동굴근거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일제는 김일성주석이 아무리 기상천외하고 과감한 작전을 펴는 신출귀몰한 사령관으로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 코밑에 그런 근거지를 만들어놓고 일시에 활화산으로 터져오를 조선독립의 끓는 용암을 국내 깊이 줄기차게 불어넣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알았다면 이 오묘하고 기상천외하며 대담한 은신처에 기절초풍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