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90)
 

기로에 선 진보적 대중정당과 진보적 노동운동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파벌주의 질곡과 노동조합주의 포위망

2012년 8월 17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1년 노조 조직대상 노동자 1,709만 명 가운데 172만 명이 노조에 망라되어 노조조직률이 10.1%다. 우리 사회에서 노조조직률은 1989년에 19.8%로 정점에 오른 뒤 계속 하강곡선을 그렸고, 요즈음에는 10% 선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지난 20여 동안 이 땅의 노동운동이 노동자의 양적 급증추세를 따라잡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2011년 현재 전체 노조원 172만 명 가운데, 민주노총 조합원이 56만2,310명(32.7%), 한국노총 조합원이 76만8,953명(44.7%), 미가맹 노조 조합원이 36만6,746명(21.3%), 국민노총 조합원이 2만1,913명(1.3%)이다. 민주노총 창설 이후 17년이 되었건만, 이 땅의 전체 노동자 1,709만 명 가운데 민주노총 조합원이 차지하는 비율은 3.3%밖에 되지 않는다.
 
위의 통계자료가 말해주는 것처럼, 진보적 노동운동과 어용적 노동조합주의운동이 33 대 67의 비율로 판세를 이루고 있는 것은 이 땅의 노동운동에 어용적 노동조합주의가 만연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전체 노동자 중에 민주노총 조합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3.3%밖에 되지 않는 것은 이 땅의 진보적 노동운동이 아직 약세를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어용적 노동조합운동이란 노동자의 계급정치역량을 강화하여 진보와 변혁으로 나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노동조건개선과 임금인상에만 매달려 자본가계급과 타협하고 중도우파정권에 협조적인 노동조합주의(trade unionism)의 운동형태다. 잘라 말해서, 그런 어용적 노동조합주의이야말로 진보적 노동운동의 앞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선진적 노동자들이 노동계급 일반을 진보적 노동운동으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어용적 노동조합주의 포위망에 갇혀 있을 때,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노동자 계급정당을 건설하는 급진적 방식으로는 진척되지 못한다.
 
더욱이 이 땅의 수구우파정권이, 진보와 변혁을 지향하는 선진적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폭력으로 짓밟는 '국가보안법'이라는 강력한 정치탄압수단을 틀어쥐고 있고, 수구우파정권과 야합한 '대중언론'이 강력한 반노동자 선동을 토해내고 있는 조건에서,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처럼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이라는 과업을 실현할 수 없는 오늘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 그 대안으로 제기된 것이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이다.
 
진보적 노동운동은 진보적 대중정당을 건설함으로써 자신을 정치세력화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진보적 대중정당의 장성과 발전은 진보적 노동운동에 의거하여야 한다. 진보적 노동운동이 장성, 발전된 만큼 진보적 대중정당도 장성, 발전되는 것이다.
 
진보적 노동운동이 분열되고 미약하면, 그에 의거하는 진보적 대중정당도 그 이상으로 장성, 발전되지 않는다. 진보적 노동운동이 파벌주의 질곡에 빠져 있고 노동조합주의 포위망에 갇혀 있으면, 진보적 대중정당의 장성,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에서 노조조직률이 10%선을 유지하는 것과 진보적 대중정당에 대한 대중지지율이 10%선을 유지하는 것은 무관하지 않으며, 민주노총 조합원이 전체 노동자 가운데 약 3%를 차지하는 것과 진보적 대중정당의 대선 독자후보가 약 3%의 득표율을 얻는 것은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진보적 노동운동에게는 파벌주의 질곡에서 벗어나고 노동조합주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나아가 자기의 사회정치역량을 더욱 장성, 발전시키는 당면요구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 진보적 노동운동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민주노총은 어떠한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지금 민주노총 지도부는 파벌주의 질곡에 빠져있고, 민주노총 자체는 노동조합주의 포위망에 갇혀 있다. 32.7%와 3.3%라는 저조한 수치가 그런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진보적 노동운동의 정치적 무능, 그리고 전략적 오판

민주노총이 자기의 정치방침을 논의하는 공식기구인 '새정치특별위원회'가 2012년 8월 21일 2차 토론회를 진행하였다. 그 토론회에 관한 언론보도를 읽어보면, 세 가지 문제가 시야에 들어온다.
 
첫째, '새정치특별위원회' 2차 토론회에서는 민주노총이 "진보정당의 동원부대로 전락하였다"고 평가하였다고 한다. 진보적 노동운동의 정치적 무능에 대한 자조적인 평가로 들린다.
 
반성적으로 고찰해야 할 문제는, 민주노총이 겪는 그런 정치적 무능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 건설된 통합진보당에서 민주노총이 사실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정치적 무능에 빠진 것이다.
 
진보적 노동운동이 왜 진보적 대중정당 안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을까? 민주노총 지도부는 그렇게 된 원인을 진보적 대중정당의 패권주의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원인규명은 자기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는 오류다.
 
만일 진보적 대중정당에 패권주의가 존재한다면, 그 패권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진보적 노동운동의 몫이다. 진보적 노동운동의 정치역량만이 진보적 대중정당의 패권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패권주의 극복은 진보적 노동운동이 수행해야 할 중요한 정치임무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파벌주의 질곡에 빠지고 노동조합주의 포위망에 갇혀 정치적으로 무능한 민주노총 지도부에게 진보적 대중정당의 패권주의를 극복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민주노총은 진보적 대중정당의 패권주의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파벌주의 질곡부터 청산해야 한다.
 
둘째, '새정치특별위원회' 2차 토론회에서는 민주노동당이 자유주의정치세력과 통합하여 통합진보당을 건설한 오류를 지적하고,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철회를 정당하다고 평가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평가는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에 대한 부정을 전제한 것이다.
 
이전에 발표한 나의 글들에서 여러 차례 논한 것처럼,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은 노동자 계급정당을 건설하는 원칙과 방도와는 다른 자기의 고유한 원칙과 방도에 따라 건설되어야 한다. 진보적 대중정당은 진보와 변혁을 지향하는 여러 정치역량들을 통합하고,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요구하는 중간적 정치역량까지 끌어들여 건설하는 것이다.
 
당의 사회계급구성으로 보면, 진보적 대중정당은 선진적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과 중간적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이 폭넓게 연합한 형태의 정당이다. 그와 달리, 노동자 계급정당은 진보와 변혁을 지향하는 정치역량만으로만 건설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자유주의세력과 통합하여 통합진보당을 건설한 것이 오류라고 비판한 '새정치특별위원회'의 견해는,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요구하는 중간적 정치역량을 배제하고 선진적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의 정치역량만으로 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견해다.
 
그런 주장은 앞으로 정치정세가 지금보다 더 발전하여 노동자 계급정당을 건설해야 할 때 나와야 하는 것인데, 너무 조급하게 지금 나왔다. 객관현실을 무시하고 주관관념에 사로잡힌 조급증은 진보와 변혁의 앞길에 혼란을 조성한다.
 
셋째, '새정치특별위원회' 2차 토론회에서는 민주노총이 2012년 대선에 독자후보를 내고, 새누리당과 민주당을 제외한 진보적 대선후보들과 민중경선을 치러 단일 대선후보를 선출하자는 논의도 있었다고 한다. 민주노총이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으니, 당연히 대선에 자기의 독자후보를 내겠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된다.
 
그러나 '새정치특별위원회' 2차 토론회에서 논의된 '진보적 대선후보' 선출방안은, 민주노동당이 지난 10여년 동안 추진하다가 실패로 끝난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자기의 그런 실패경험을 딛고 나아가 통합진보당을 건설하고 민주당과 야권연대를 실현하는 새로운 정치방침을 채택하였다.
 
그런데 '새정치특별위원회'가 그처럼 실패로 끝나 폐기된 대선방침을 다시 끄집어내었으니, 이것은 진보정치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놓고, 실패가 뻔한 선거방침을 고집하는 일이다.
 
이번 대선에서 통합진보당이 민주당과 야권연대를 실현하려는 까닭은 진보적 정권교체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2013년에 박근혜 정권이 등장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통합진보당이 진보적 정권교체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는커녕 사실상 속수무책으로 될 것이다.
 
진보적 대중정당이 사실상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던 이명박 정권 5년의 암울한 경험이 2013년부터 또 다시 5년이나 연장되는 것이다.
 
2012년 대선이 진보정치에 주는 의의는 바로 그런 속수무책의 악순환을 끊어버릴 절호의 기회라는 데 있다. 통합진보당이 속수무책의 악순환을 끊어버릴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도는 야권연대로 정권교체를 실현하는 것밖에 없다.
 
'새정치특별위원회'가 이처럼 명백한 이치를 외면하고 이미 폐기된 대선방침을 다시 끄집어낸다면, 불행하게도 진보정치가 좌절하는 속도가 빨라질 것이다. (2012년 8월 23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