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93)
 

폐품처리장에서 다시 꺼냈나?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그들의 움직임은 25년 전의 경험을 연상케 한다

올해 대선에 노동자-민중 독자후보를 출마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 수구언론의 눈 밖에 나 있고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지만, 진보정치권 안에서 생겨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기에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
 
노동자-민중 독자후보를 출마시키려는 움직임은 지금까지 아래와 같이 전개되었다. 2012년 8월 21일 민주노총 새정치특별위원회에서 노동자-민중 독자후보전술이 논의되었고, 공교롭게도 같은 날 진보신당 창당준비위원회가 진행한 기자회견에서도 그 전술이 제기되었다. 또한 9월 12일에는 진보인사 30여 명이 모여 '노동자-민중 후보 추대 1차 연석회의'를 진행하였다.
 
노동자-민중 독자후보를 출마시키려는 대선전술은, 이 땅의 진보정치세력이 비판적 지지와 독자후보 추대로 갈라졌던 1987년 대선 경험을 연상케 한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6월 민주항쟁으로 급격히 전환된 정치정세는 진보정치세력에게 정권교체를 실현할 대선전술을 요구하였다.
 
정권교체라는 대전환을 기다리던 25년 전 대선국면에서, 당시 진보정치세력의 선택은 비판적 지지와 독자후보 추대로 갈라지는 바람에 정권교체에서 실패하였다. 만일 그 때 진보정치세력이 비판적 지지전술로 힘을 결집하여 미국과 노태우 일당의 군사독재정권 연장책동을 파탄시키고 정권교체에 성공하였더라면, 그리고 5년 뒤 노태우 정권에 이어 군사독재정권의 '사생아'로 출현한 3당합당을 저지할 수 있었더라면, 그리하여 1988년부터 1997년까지 10년이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전진하는 10년'이 되었더라면, 아마도 우리는 지금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펼쳐진 대선국면에서 이 땅의 진보정치세력에게는 진보적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치역량을 결집시킬 대중정당이 없었기 때문에 비판적 지지전술을 불가피하게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 때 이 땅에 진보적 대중정당이 있었다면, 비판적 지지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25년이 지난 오늘도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25년 전에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오직 야당만을 정권교체의 담당자로 인정하고 있었고, 따라서 진보정치세력이 야당과 힘을 합하여 정권교체를 실현하는 비판적 지지전술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민중독자후보전술은 그러한 정치현실과는 동떨어진 '진보의 허상'을 쫓아가다가 진보정치세력을 분열시키고 결국 좌초해버린 전술이었다.

통합과 연대까지 오는 데 25년 걸렸다

우리 노동계급과 근로대중도 다른 나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처럼 자기의 독자적인 진보정당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87년 대선 패배 이후 진보정치세력이 처음 눈을 뜨게 된 참신한 정치과업이었다. 그래서 1990년대 10년 동안 이 땅의 진보정치세력은 진보적 대중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였지만, 실패를 거듭하였다.
 
1990년대 진보정당 건설운동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이었나?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이 결집한 각계층 진보적 대중조직이 아직 건설되지 못한 불리한 조건에서 서둘러 추진한 정당건설이었기 때문에 실패하였고, 새로운 사회를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이 실현될 미래상으로 투시하는 과학적인 발전전망을 아직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패하였고, 이 땅의 사회정치적 현실에 꼭 들어맞는 우리식 두 단계 사회변혁의 과학적 인식에 근거한 정당건설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1990년대를 그렇게 보내고, 2000년 1월에 창당된 민주노동당은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강령으로 제시하여 이 땅의 진보정치를 한 걸음 더 전진시키는 중대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단독역량만으로는 진보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어놓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2000년대에 민주노동당이 밀고 나간 진보정치운동 10년은 그런 한계를 안고 있었다.
 
바로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이 땅의 진보정치는 통합과 연대의 새로운 전략을 선택하였다. 2011년에 민주노동당이 제기한 진보대통합과 야권연대는 바로 그러한 선택으로 불러일으킨 진보정치의 커다란 변화이며 발전이었다.
 
돌이켜보면, 진보정치가 통합과 연대까지 오는 데 무려 25년 긴 세월이 흘렀다. 그 25년 동안 진보와 변혁의 험로에서 수많은 민주열사들과 통일열사들과 노동열사들이 정적들의 폭력에 희생당했고, 그 고귀한 희생의 자취를 묵묵히 뒤따르며 청춘을 바친 수많은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쇠창살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눈물겨운 투쟁을 벌였다.
 
그들의 희생과 투쟁에 의해 민주노총과 전농을 비롯한 진보적 대중단체들이 건설된지도 오래되었고, 진보적 대중정당의 경험도 10년 이상 연륜을 쌓았고, 통합과 연대의 전략을 선택하여 진보와 변혁의 새로운 국면도 열어놓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와 발전은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기본구조가 갖춰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당면한 과업은 그 기본구조에 추진동력을 공급하는 것이다.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기본구조에 공급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에너지, 바로 그것이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진보정치발전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놓으려는가?

그런데 25년 전에 실패하여 폐품처리장에 파묻혀버린 줄 알았던 민중독자후보전술이 이번에는 노동자-민중독자후보전술이라는 더 길어진 이름으로 갑자기 다시 나타났으니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통합진보당을 외면하는 일부 진보인사들이 통합진보당이 추진하려는 야권연대전략을 반대하기 위하여 꺼내놓은 독자후보전술은 '반대를 위한 반대'이며, 현실성과 합리성을 갖추지 못한 '폐품전술'이다. 그런 '폐품전술'을 제기한 것은 25년 동안 이 땅의 진보정치가 숨가쁘게 헤쳐온 역사적 경험을 망각한 퇴행이다. 단순퇴행이 아니라 25년 전의 뼈저린 실패를 되풀이하려는 전략적 패착이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아래와 같다.
 
무엇보다도, 노동자와 민중이 지지할 노동자-민중 대선후보가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대선을 불과 100일도 남겨두지 않은 촉박한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그것도 당적 기반도 없는 노동자-민중 대선후보를 급조해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비과학적이며 무모한 '진보의 허상'이다. 당적 기반도 없이 급조한 노동자-민중 대선후보를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인정해줄 리 만무하다.
 
독자후보전술을 꿈꾸는 진보인사들은, 정치현실에서 동떨어진 '진보의 허상'을 쫓을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대선국면 민심동향부터 진지하게 다시 살피고 대선전술 좌표를 올바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 야권연대전략으로 정권교체를 실현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폐품처리장에서 낡은 독자후보전술을 다시 꺼내어 진보정치 발전사의 '시계바늘'을 25년 전으로 돌려놓으려는가?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전략, 다시 정독하라

오늘 통합진보당이 추구하는 야권연대는 25년 전에 논의되었던 비판적 지지가 아니다. 오늘의 야권연대와 25년 전의 비판적 지지를 같은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우리식의 두 단계 사회변혁론에 대한 무지가 빚어낸 인식혼란이다. 우리식의 두 단계 사회변혁론을 알지 못하고 급진주의 조급증에 빠진 일부 좌파정치활동가들이 야권연대와 비판적 지지를 동일시하는 착각에 빠지는 법이다.
 
25년 전의 비판적 지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오늘의 야권연대는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 이후에 발전되어온 이 땅의 정치현실을 전면적으로 반영하고,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에 의거한 우리식의 두 단계 사회변혁노선을 견지하는 과학적인 진보정치전략이다. 그렇게 보는 논거는 아래와 같다.
 
첫째,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전략은, 이번 분당소동 이전까지만 해도 약 10%의 지지층밖에 결집시키지 못한 통합진보당의 단독역량으로는 정권교체를 실현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에 근거한다.
 
둘째,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전략은, 그 당이 장차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기 위한 진보정치발전의 교두보를 확보해야 한다는 현실인식에 근거한다. 야권연대라는 전략적 교두보가 없으면, 저 깊고 넓은 강을 건너 진보적 정권교체의 피안에 도달하지 못한다.
 
셋째,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전략은 새누리당의 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민주통합당과 무조건 힘을 합하고 보자는 식의 우경적 타협전술이 아니라, 진보적 대중정당의 단독집권전략를 수행하기 위한 집권준비기의 전략이다.
 
길은 멀고, 투쟁은 간고하지만

당을 우경화시키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당을 분당으로 끌어간 우경파벌주의자들의 소동 속에서도 기어이 당을 지켜냈으니, 분당은 통합진보당 사수파의 전략적 패배가 아니라 전술적 패배다. 통합진보당을 지킨 사수파의 수호전은 그런 전술적 패배로 끝난 게 아니다. 우경파벌주의자들이 빠져나간 통합진보당의 앞길에는 더 크고 격렬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진보 대 수구의 정치투쟁, 변혁 대 반변혁의 계급투쟁은 올해 대선국면에서 정권교체 대 집권연장의 격렬한 전면대결로 전개되는 것이다.
 
통합진보당 사수파는 자기 당을 사랑하는 당원대중들, 지지자들과 함께 전열을 재정비하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지지를 받는 야권연대전략을 수행하는 격전에서 반드시 승리하여 전세를 역전시켜야 한다.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2012년의 대선국면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길은 멀고, 그 길을 헤쳐가는 투쟁은 간고하다. 하지만 역사는 말한다. 진보적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민심을 받들고, 민주열사들과 통일열사들과 노동열사들이 남긴 염원과 지향을 간직하고,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이 실현될 눈부신 미래를 사랑하는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최후 승리가 있으리라고... (2012년 9월 13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