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선군태양 김정일장군」(3) 중에서

 



 

   조국통일은 최대의 애국이고 민족의 숙원이다. 민족대국상의 애도속에서도 우리 인민의 통일열망과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우리 인민의 이 통일열망과 의지를 한몸에 안으시고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위원장의 명의로 7월 11일 북남최고위급회담을 일단 연기한다는것을 남측에 공식통고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하시였다. 이것은 어버이수령님께서 마련하신 북남최고위급회담의 유효성을 천명한 통일지향적인 조치였다. 정세가 어떻게 변하고 환경이 어떻게 달라지든 어버이수령님의 필생의 뜻을 받들어 통일성업을 기필코 이룩하시려는 장군님의 신념과 의지는 확고부동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 서거 100일중앙 추모회가 진행된 주체83(1994)년 10월 16일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조국통일을 이룩하는것은 수령님의 유훈이며 온 민족이 통일된 조국에서 화목하게 잘살도록 하시려는것이 수령님의 뜻이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수령님께서 그처럼 바라시던 조국통일의 력사적위업을 기어이 성취하여 수령님의 생전의 뜻을 꽃피워야 합니다.》라고 자신의 통일의지를 엄숙히 천명하시였다.

그러나 남조선에서는 우리의 통일지향적인 립장과는 정반대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외세의 부추김밑에 남조선의 《문민》집단은 동족의 아픈 가슴에 마구 칼질을 해댔다. 그들은 우리의 유고비보가 나간지 30분도 못되여 군대와 경찰에 《특별경계령》과 《갑호비상령》을 내렸다. 수만명의 경찰을 내몰아 대학가의 분향소들을 들부시고 북행길에 오른 조의방문단성원들을 체포구속하는 만행을 감행했다. 《한총련》을 《대남적화통일의 주력군》이라는 모자를 씌워 탄압해나섰다.

어버이수령님의 서거 한돐추모행사에 참가하고 돌아간 통일맞이 7천만겨레모임대표이며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공동의장인 문익환목사의 부인 박용길녀사를 구속하고 사법처리하려고 날뛰였다. 뿐만아니라 《국회》에서 《남북협력동결》, 《인도주의사업중단》 등 북남관계의 전면차단을 골자로 하는 《남북페쇄정책》을 선포했다. 그리고 우리와 그 어떤 대화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추태까지 부렸다. 이것은 북남최고위급회담개최를 약속하였던 남조선당국자로서 전민족적의사에 반역하는 반인륜적이고 반통일적인 배신행위였고 우리에 대한 공공연한 대결행위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에 대처하여 즉시 반격을 가하게 하시였다. 우리는 11월 20일부터 잠정적으로 판문점 우리측 련락사무소대표들을 철수시키고 그 업무를 중지시켰다. 한편 애도기간에도 범민족대회를 진행한것을 비롯하여 북과 남, 해외 애국세력의 통일운동을 힘있게 추동해나갔다. 그리하여 남조선의 《문민》반역집단은 온 민족으로부터 더욱 규탄배격되고 고립되였다.

이런 정세속에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주체85(1996)년 11월 24일 일요일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를 현지시찰하시였다.

이것은 어버이수령님의 조국통일유훈을 기어이 실현하시려는  장군님의 확고부동한 의지의 표시였다.

그이께서는 경무원들과 함께 뻐스를 타시고 판문점구역안으로 들어가시였다. 적아의 총과 총이 맞부딪치고 항상 첨예한 대결기운이 서려있는 최전연, 최전방을 전사들과 함께 뻐스를 타시고 찾으신 선군령장 김정일장군님. 그이께서 조국통일의지가 얼마나 투철하시고 통일갈망이 얼마나 절절하신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판문점행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앞길을 막아나서는 일군들에게 오늘의 복잡한 정세하에서 판문점을 시찰하는것은 인민군대와 인민들에게 우리 혁명위업에 대한 승리의 신심을 주는 한편 적들에게 타격을 주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결연히 말씀하시였다.

그 어디보다도 긴장이 감도는 판문점구역으로 들어가시는 장군님의 뇌리에는 나라의 허리를 둘로 갈라놓은 이 분계선의 철조망을 하루빨리 걷어내고 나라의 강토를 본래의 모습으로 이어놓아야 하겠다는 하나의 생각만이 가득하였다.

이윽고 뻐스는 판문점에 건립한 어버이수령님의 통일 친필비앞에 이르렀다. 안개자욱한 둔덕에 화강석친필비가 자태를 드러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뻐스에서 내리시였다. 수행일군들도 모두 내렸다.

피눈물의 해 1994년을 의미하여 비돌의 총너비 9.4m, 수령님께서 생의 마지막친필존함을 남기신 력사의 날인 7월 7일을 뜻하여 비문판의 너비 7.7m의 친필비가 뜻깊은 사연을 말하는듯 숭엄하게 서있었다.

장군님께서는 형언할수 없는 감회를 안으시고 어버이수령님의 친필이 아로새겨진 비문앞에 서시였다. 청신한 대기속에서 젖빛안개가 실어온듯 고요가 흐르는 정적, 수행원들은 소리없이 그이를 둘러쌌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한동안 친필비너머 하늘가 먼곳을 바라보시였다. 장군님의 가슴은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들었다. 그이께서는 비에 활달하게 새겨진 글발에서 이윽토록 눈길을 떼지 못하시였다.

김일성 1994. 7. 7.》

장군님께서는 정교한 목란꽃장식부분 웃단에 새긴 해석비문도 한자한자 읽으시였다.

《민족분렬의 비극을 가시고 조국통일성업을 이룩하기 위한 력사적문건에 생애의 마지막친필존함을 남기신 경애하는 김일성주석의 애국애족의 숭고한 뜻 후손만대에 길이 전해가리》

주체83(1994)년 7월 7일 아침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산책시간까지 바치시며 통일의 대문을 활짝 열어제낄 조국통일관계문건을 검토하시였다. 문건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완성하신것이였다. 문건을 다 보신 수령님께서는 만족하신 안색으로 이 문건의 표지상단에 활달한 필체로  김일성 1994. 7. 7.》이라고 수표하시였던것이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남조선당국자가 우리를 찾아오겠다고 하였는데 이제 평양에 들어와보면 생각되는바가 많을것이라고, 아무리 심보가 고약한 사람이라도 우리의 현실을 직접 제눈으로 보고 우리의 공명정대한 조국통일방안을 들으면 흠을 잡을수 없을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또다시 격앙된 음성으로 《조국통일은 내가 우리 인민에게 줄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오. 조국통일의 대사변을 맞이할 준비를 빈틈없이 갖추어나가야 하겠소.》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귀전에는 어버이수령님의 그 유정한 음성이 금시 들려오는것 같았고 그이의 눈앞에는 수령님의 자애로운 영상이 우렷이 떠오르는듯 하였다.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을 그리실 때마다 갈마들던 아픔을 지금은 숭엄한 감정속에 묻으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수행원들을 둘러보시며 추억깊이 말씀하시였다.

《나는 분렬의 상징인 판문점을 통일의 상징으로 바꾸어놓으려는 념원에서 해마다 해내외의 수많은 통일운동자들이 모여 통일행사를 벌리는 이곳 판문점에 조국통일의 구성이신 수령님의 통일친필비를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3(1994)년 7월 가슴터지는 상실의 아픔속에서도 일군들에게 어버이수령님께서 생애의 마지막에 친필로 남기신 조국통일관계문건을 민족만대에 길이 전해갈 귀중한 국보로 잘 보관할데 대한 간곡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리고 그후에는 수령님의 불멸의 사적과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을 력사와 민족앞에 길이 전해가도록 판문점에 친필비를 세울데 대한 구상도 펼쳐주시였고 친필비형성도안으로부터 해설문내용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보아주시며 건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일일이 풀어주시였다.

그리하여 조국해방 50돐이 되는 주체84(1995)년 8월  11일 판문점 통일각앞에는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통일친필비가 수령님의 통일령도업적을 길이 전하는 불멸의 기념비로, 통일의 상징으로 훌륭히 건립되게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화강석비돌에 살아움직이는듯 한 어버이수령님의 친필을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시면서 《비에 새겨진 수령님의 친필은 불과 아홉글자밖에 되지 않지만 여기에 담겨진 뜻은 수천수만자의 비문으로도 대신할수 없는 거룩하고 위대한것입니다.》라고 친필비가 담고있는 거대한 의미를 일깨워주시였다.

그리고 판문각로대에까지 나가시여 적정을 알아보시고 조국통일의 의지를 더욱 굳히시는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고 다시 친필비앞에 오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의 친필비앞에 이렇게 서니 생각되는것이 많다고 하시면서 수령님께서 조국통일위업에 기울여오신 수많은 낮과 밤을 감회깊이 돌이켜보시며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라가 분렬된 첫 시기부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민족의 분렬을 누구보다 가슴아파하시며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불면불휴의 심혈을 다 바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한 로선과 방침, 방안과 제안들을 몸소 구상하시고 작성하시였으며 그것을 해마다 보고와 연설, 담화를 통하여 천명하시였는데 그 수는 수백건에 달할것이다. 북과 남이 합의하고 민족앞에 엄숙히 선언한 조국통일3대원칙도,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도,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도 다 우리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가장 합리적인 조국통일방침이다.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조국통일3대원칙,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 이것이 조국통일의 3대기둥, 3대헌장이라고 말할수 있다. 항일혁명투쟁시기를 내놓으면 우리 수령님의 한생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의 한생이였다고 할수 있다.

장군님의 추억깊은 말씀은 계속되였다.

조국통일을 위하여 온갖 심혈을 다 바쳐오신 수령님께서는 생애의 마지막나날에도 전체 조선인민에게 통일된 조국을 안겨주시려고 분망한 시간을 보내시면서 조국통일을 위한 전략문건에 마지막친필을 남기시고 갑자기 순직하시였다. 수령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이 력사적인 친필에는 수령님의 강의한 통일의지와 신념이 함축되여있고 조국통일에 대한 수령님의 확신이 담겨져있다.

장군님의 말씀은 절절하고 뜨거우시였다.

그이께서는 선언하시듯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수령님의 념원과 의지대로 조국을 반드시 통일하여야 합니다. 수령님께서는 일찌기 자신의 대에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하지 못하면 나의 대에는 꼭 조국통일위업을 완성하여야 한다고 교시하시였습니다. 나는 수령님의 유훈대로 우리 시대에 반드시 조국을 통일하려고 합니다.》

계속하여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과업과 방도에 대하여 밝혀주시면서 조국통일을 위한 강령적지침으로 되는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위대한 사상, 위대한 철학이 있다고 하시며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의 우리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표명하시였다.

판문점의 안개를 거두며 조국통일의 밝은 서광이 눈앞에 비쳐들고 적진을 짓누르는 중압이 그이께서 서계시는 곳으로부터 남쪽으로 무섭게 뻗쳐나가는듯 하였다.

그이께서 표명하시는 철석의 통일의지는 안팎의 분렬주의자들에게 내리는 준엄한 선고이기도 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판문점시찰보도가 나간 이후에야 비로소 이 사실을 알게 된 남조선강점 미군사령부와 남조선군부는 《당시 안개가 껴 10m 앞도 볼수 없었기때문에 김정일비서인지의 여부를 파악할수 없었다》고 실토했으며 판문점경비를 맡은 미군헌병들도 그 시간에 승용차 한대와 소형뻐스 한대가 왔던 관측이 있을뿐 안개로 하여 록화확인이 불가능했다고 토설했다.

남조선의 주요신문들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판문점시찰소식을 널리 보도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통일선물을 안겨주시려는 민족적거사》, 《조국통일의 봉화를 지펴올리신 민족의 일대 장거》, 《분렬의 상징인 판문점을 통일의 상징으로 전환시키신 력사적쾌거》로 된다고 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판문점시찰은 분렬과 대결의 상징으로서의 판문점의 력사에 통일의 상징으로서의 새 년륜이 새겨지게 한 민족사적사변이였다. 그것은 장군님의 선군혁명력사를 빛내이는 통일헌신의 실록이였다.

정녕 판문점에 세워진 친필비는 조국통일의 길에 한생을 바치신 어버이수령님의 령도업적을 민족사에 금문자로 아로새긴 수령님의 업적비인 동시에 수령님의 조국통일사상과 로선을 그대로 변함없이 틀어쥐고 기어이 통일을 이룩하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확고한 의지의 기념비이기도 하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판문점시찰은 온 겨레에게 통일의 신심과 의지를 크게 안겨주고 조국통일운동에 무한대한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