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삶의 보금자리』 중에서

 1. 삶의 닻을 내린 보금자리

  1) 운명의 선택 

□ 북두칠성 바라보며 

북두칠성은 하늘에서 그 놓임새에 의해 천극(북극)의 위치와 북쪽방향을 인차 가려낼수 있게 하며 별들의 위치각에 의해 시간도 알아낼수 있게 한다.

해방후 애국의 마음을 지니고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북으로 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중에는 여러 분야의 과학자들도 있었다. 수의학자였던 김종희선생도 그들중의 한사람이였다.

 

김종희(1909. 2. 26-1996. 10. 24) 수의학자

김일성종합대학 농학부 부학부장, 수의학연구소 소장, 북조선농림수산련맹 위원장으로 사업, 주체45(1956)년 1월부터 농업과학원 수의학연구소 연구사로 사업, 많은 도서들과 사전들을 집필편찬하였고 가치있는 과학론문들을 국내외잡지들에 발표. 《김일성상》계관인, 원사(1965년), 교수(1979년), 박사(1965년).

  

해방전 김종희선생은 수의학을 배우려는 푸른 꿈을 안고 외국에 나가 대학을 다니던중 학생운동에 참가한것으로 하여 쫓겨나 고향에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였었다. 그는 몇년후 다시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어느 한 대학의 농학부 수의과를 졸업하였다.

일제의 패망은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있으면서도 민족적억압과 멸시를 당해야 하였던 그에게 있어서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부산가축위생연구소를 책임지게 된 그는 우역혈청을 비롯한 여러가지 수의예방약을 만들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보람있는 일을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남조선에서 지식인들에게 차례진것은 일제식민지통치때와 다름없는 예속과 굴욕뿐이였다.

연구소에 미군고문이 틀고앉아 조선사람들의 일거일동을 감시하면서 저들의 명령에 복종할것을 강요하였다. 그는 조선의 운명이 장차 어떻게 될것인지 하는 암담한 생각을 하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인 1946년 2월 어느날 북조선림시 인민위원회 농림국 축산부에서 사업하는 한 사람이 김종희선생을 찾아왔다.

그는 김종희선생에게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오랜 지식인들의 운명과 전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돌리고 전국적범위에서 그들을 찾아내여 정권기관과 과학연구기관, 교육문화기관들에서 중요한 일을 맡아 수행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한데 대하여 알려주었다.

그는 이러한 일들이 모두 김일성장군님의 발기하에 진행되고있는데 그이께서는 수의학을 전공해온 김종희선생에 대하여 이미 알고계실뿐아니라 선생을 만나보라고 자기를 이렇게 보내주시였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연을 전해주었다.

1946년 봄을 앞둔 북조선 방방곡곡에서는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기 위한 력사적인 토지개혁이 준비되고있었다. 그런데 압록강, 두만강일대의 일부 농촌마을들에 침습해들어왔던 우역이라는 소전염병이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평안북도의 농촌마을들로 급격히 퍼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농촌의 기본역축이였던 소들이 쓰러지는것을 막지 못하면 땅을 분여받고 해방후 첫해 농사를 짓게 될 농민들의 논밭갈이에 큰 지장을 줄수 있었다.

일제는 조선소들을 해마다 수천마리씩 략탈해가면서도 방역기관이라고는 부산에다 가축위생연구소라는것을 하나 설치하고 우역예방약을 그곳에서만 생산하게 하였다. 그것도 사실은 소의 전염병이 일본에 침습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약은 타산에서 꾸려놓은것이였다.

이 사실을 깊이 파악하고계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일군을 부산으로 파견하시면서 김종희선생을 찾아가서 지금 그가 어떻게 살고있는지 알아도 보며 수의예방사업을 발전시키는데 대해서도 상론해보고 또 우역예방약도 구해오라고 이르시며 그 선생이 꼭 해결해줄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김종희선생은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름없는 식민지지식인에 불과했던 자기를 아시며 한번 만나보지 않으시고도 절대적인 믿음을 주시였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였다.

과학자로서 한생에 처음으로 그렇듯 큰 믿음을 받아안은 그는 그날부터 동료들과 함께 우역예방약을 마련하는데 달라붙었다.

사실 미제와 그 주구들이 판을 치는 남조선에서 우역예방약을 만들어 38°선을 넘어 북반부로 보낸다는것은 목숨을 내건 모험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온갖 애로와 난관을 무릅쓰고 예방약을 만들어 열흘만에 평양으로 실어보내였다.

우역예방약이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종희선생이 참으로 애국적인 큰일을 했다고 거듭 분에 넘치는 치하를 주시였다.

수의축산학자로서 김종희선생이 우역예방약을 만들어 보내준것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보람있고 떳떳한 일이였다.

그런데 이것이 《죄》로 되여 김종희선생은 미제와 그 주구들의 박해를 받게 되였다. 집에는 협박장이 날아들었고 나중에는 연구소방화사건까지 조작되여 그것이 그의 소행이라고 날조되기도 하였다.

김종희선생은 끝내 연구소에서 쫓겨나게 되였고 해방된 제땅에서조차 또다시 울분속에 괴로운 나날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 많은 돈이 와닿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훌륭한 일을 한 과학자가 겪고있는 고통이 가슴아프시여 수의예방약값도 치르며 생활에 보탬도 하라고 보내주신것이였다.

돈에 깃든 사연을 알게 된 김종희선생은 솟구치는 격정으로 하여 며칠째 잠을 이룰수 없었다. 그의 마음을 달래주는듯 밤하늘에서는 북두칠성이 유난히도 밝게 빛나고있었다.

북두칠성을 우러르던 김종희선생은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북조선이 자기가 가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참다운 과학연구를 하자고 해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북으로 가야 했고 인간으로서 조국과 인민을 위해 참되게 살기 위해서도 북으로 가야 했다.

그리하여 김종희선생은 1946년 11월 여러가지 가축예방약을 만드는데 쓰이는 균주를 넣은 트렁크를 가지고 가족들과 함께 38°선을 넘어서게 되였다.

달빛이 고요히 흐르는 밤하늘에서는 북두칠성이 그들이 가는 길을 밝혀주고있었다.

그가 가족들과 함께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또다시 자동차와 려비를 보내주시며 무사히 평양까지 올수 있도록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주체36(1947)년 1월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 조국건설을 위한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평양에 무사히 도착한 김종희선생을 몸소 만나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두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며 선생이 해방전에는 식민지인테리로서 민족적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해방후에는 우역예방약을 북조선에 보내준것으로 하여 미《군정》과 남조선반동파들의 박해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폭행까지 당하였다고 하는데 고생이 많았겠다고 위로해주고나시여 이렇게 말씀을 이으시였다.

《선생은 많은 우역예방약을 보내줌으로써 북조선에서 우역이 만연되는것을 방지하고 춘경을 보장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선생이 가지고온 균주는 수의학을 발전시키는데 큰 도움으로 될것입니다. 우리는 선생의 애국적소행을 높이 평가합니다.》

《장군님!…》

생의 은인이신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르며 김종희선생은 뒤말을 잇지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그가 어느 길로 들어왔는가도 알아보시며 려관에서 불편하지는 않는가, 가족들은 다 무사한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물으신 다음 정말 그간 고생이 많았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 나라의 축산업과 수의과학발전문제를 가지고 오랜 시간에 걸쳐 담화를 나누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는 앞으로 선생이 나라의 수의과학연구사업과 수의축산전문가, 기술자들을 육성하는 사업에 크게 이바지할것을 기대하고있다고, 선생은 지금 종합대학 농학부에서 교육사업을 하고있는것만큼 수의축산전문가들을 많이 육성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단기강습소를 조직운영하는 사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데 대하여서와 가축위생방역사업에도 깊은 관심을 돌릴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잠시 말씀을 멈추시고 김종희선생을 한동안 믿음어린 눈길로 바라보시다가 이렇게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선생이 할 일은 매우 많습니다. 대학에서 교육사업도 하여야 하고 수의기술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단기강습소도 조직운영하여야 하며 가축위생연구소도 꾸리고 운영하여야 합니다.》

마디마디 김종희선생에 대한 크나큰 사랑과 믿음이 어려있는 말씀이였고 일제식민지통치의 후과로 하여 뒤떨어졌던 조선의 축산업을 발전시키며 인민들에게 하루빨리 고기를 먹이시려는 뜨거운 은정이 넘치는 말씀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종희선생에게 자기의 지식과 기술을 마음껏 발휘할수 있는 넓은 길을 열어주시고도 그가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서 더 많은 일을 하도록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연구사업도 하면서 대학구내의 자그마한 건물에서 학생들과 함께 가축예방약을 만들고있다는 보고를 받으시였을 때에는 못내 기뻐하시면서 좋은 일을 시작하였다고, 축산업을 발전시키자면 집짐승들에게 먹일 약도 만들어야 한다고 하시며 모든것이 부족한 새 조국 건설시기였지만 귀중한 자금을 내여 가축위생연구소건물을 새로 짓도록 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러차례에 걸쳐 그를 만나주시고 나라의 축산규모가 커지고 고도로 집약화되여가는데 맞게 수의축산과학이 나아갈 길을 환히 밝혀주시였다.

김종희선생은 그 사랑과 믿음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나라와 민족의 번영을 위한 길에 자기의 재능과 열정을 다 바쳤다. 그리하여 자체의 힘, 자체의 기술로 우리 나라에서 필요되는 우역 및 돼지페스트왁찐과 혈청 등 각종 집짐승전염병예방약들을 충분히 생산해낸것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집짐승전염병을 미리 막아낼수 있는 50여종의 예방약과 전염병진단약을 새로 연구도입함으로써 나라의 수의생물약품공업을 발전시키고 수의위생방역사업을 강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할수 있었다.

김종희선생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은 세월과 더불어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각별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72(1983)년 겨울 그가 지방출장을 가던중 뜻하지 않게 다리에 부상을 입었을 때 반년이 넘는 오랜 기간 외국에 가서 치료를 받도록 해주시였다. 그리고 그가 80살이 되던 주체78(1989)년 2월에는 은정어린 생일상을 보내주시였다.

절세의 위인들의 이처럼 크나큰 사랑과 믿음이 있어 김종희선생은 《김일성상》계관인의 한사람으로, 원사, 교수, 박사로 80고령에 이르도록 왕성한 패기와 지칠줄 모르는 정열을 안고 과학연구사업과 저술사업을 벌려나갈수 있었다.

과학원 함흥분원 부원장이였던 후보원사, 교수 려경구선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려경구(1913. 2. 8-1977. 4. 29) 화학자

주체37(1948)년 6월이후부터 산업성 흥남연구소 소장, 화학건재공업성 중앙연구소 소장, 과학원 화학연구소 소장, 과학원 함흥분원 과학부원장 등 과학부문의 중요한 직책들에서 오래동안 사업, 후보원사(1952년), 교수(1961년).

 

부유한 량반가문에서 태여난 려경구선생은 해방전 대학을 졸업하고 다년간 외국에서 고분자화학부문 연구를 하다가 남조선에 돌아와 서울에서 교편을 잡았었다.

해방이 되자 일제를 대신하여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에 의하여 조작된 《국립서울대학교안》을 반대하는 투쟁에 나선것이 《죄》가 되여 그는 교단에서 쫓겨나게 되였다.

학교는 있어도 제 나라, 제 민족을 위한 교육이 없는 사회, 과학자는 있어도 나라의 부강번영을 위한 과학연구사업을 할수 없는 어둡고 짓눌린 세상이 바로 해방후 미제가 강점한 남조선땅에 펼쳐진 현실이였다.

과학자, 교육자로서의 희망은커녕 생계조차 막막하여 울분으로 날을 보내고있던 그에게도 구원의 손길이 닿아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직후 미제의 악랄한 책동으로 과학탐구의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남조선의 지식인들의 처지를 가슴아프게 여기시여 그들을 북으로 불러주시는 조치를 취해주시였는데 그때 려경구선생도 데려오도록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던것이다.

하여 려경구선생은 1946년 10월 절망과 울분만을 안겨주던 남조선땅을 떠나 주저없이 북두칠성이 밝게 비쳐주는 북행길에 오르게 되였다.

화학자인 그는 화학공장들이 집중되여있는 흥남땅에 삶의 닻을 내리고 흥남지구인민공장 기술부장, 기사장의 무거운 책임을 지고 파괴된 공장들을 일떠세우는데 자기의 모든 지혜와 열정을 다 바쳤다.

새 조선건설의 벅찬 나날이 흘러가던 주체37(1948)년 1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평양에서는 첫 인민경제계획인 1947년도 인민경제계획을 완수한 공장, 기업소 지배인, 기술자들의 회의가 열리였다.

이 회의에 참가한 려경구선생을 따로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건강은 어떠하며 가족들은 다 왔는가에 대하여 물으시며 그의 두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그러시고는 기사장동무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시면서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다고 다정히 말씀하시였다.

지난날 식민지지식인의 설음속에 그가 당한 슬픔과 번민을 헤아려보시고 재생의 넓은 품에 안아주시였을뿐아니라 민족공업을 떠받들어나가는 중책을 맡겨주신분도, 남조선에 있던 그의 가족들까지 데려오도록 해주시여 아무런 불편없이 생활하도록 보살펴주신분도 바로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 불러 자기와 가족들의 안부까지 물어주시고 일제식민지통치시기 대학교단에 서기까지 했던 불민한 과거보다 미제에게서 받은 박해를 더 중시하시며 위로의 말씀을 해주시는 그이의 은정이 너무도 고마와 려경구선생은 끝내 마음속격정을 터치고야말았다.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고있는 그를 다정히 바라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늘 점심식사를 같이 하면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라고 하시면서 미리 준비해놓은 식탁으로 그를 이끄시였다. 그러시고는 음식그릇들을 그의 앞으로 당겨놓으시며 어서 들라고 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처음에 계획이 힘들다고 하였는데 해보니 어떤가고 물으시고나서 우리는 항일무장투쟁시기에도 자기 힘을 믿고 자기 힘으로 강대성을 자랑하던 왜놈들을 쳐부셨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사실 려경구선생을 비롯한 공장의 일군들은 처음 1947년도 인민경제계획을 받아안았을 때 걱정부터 앞세웠었다. 그도 그럴것이 1947년도 흥남지구인민공장앞에는 낡고 파괴된 공장을 복구하며 그 전해의 생산량에 비해 2배나 넘는 류안비료와 수십종의 화학제품을 생산하여야 할 과업이 나섰던것이다.

공장의 일군들이 방대한 계획과제를 놓고 신심이 없어 망설이고있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을 믿으시고 자기 조국의 산업을 복구건설해야 한다는 자각만 가진다면 꼭 해낼것이라고 힘과 용기를 안겨주시였다.

그후 흥남지구인민공장에서 년간계획을 넘쳐수행했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누구보다도 기뻐하시면서 려경구선생이 일을 잘한다고 거듭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이런 사실들을 가슴뜨겁게 되새겨보는 려경구선생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 민주조선을 건설하자면 할 일이 많다고, 특히 우리에게는 기술일군이 부족하다고, 몇사람 안되는 기술일군들이 건국사업에서 주인다운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용기를 내여 일해봅시다. 우리도 도와주겠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계속하여 공장의 기술자들과 관리일군들을 키워낼데 대한 문제, 로동자, 기술자들을 새 조국건설에로 불러일으키는 문제 등 오랜 시간에 걸쳐 귀중한 말씀을 주시고 그를 바래주시면서 몸건강하여 일을 잘하라고 거듭 당부하시였다.

그로부터 얼마후 려경구선생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귀중한 선물과 표창장을 받아안게 되였다.

 

표 창 장

 

  흥남지구인민공장 려경구

우 동지는 확고한 민주사상과 애국적열성으로 1947년도 인민경제계획을 완수함에 헌신 참가하여 책임있게 사업을 수행하였으므로 이를 표창함

 

1948년 2월 8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김 일 성

 

위대한 수령님의 표창장!

이것은 그대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기를 바라시는 절세의 위인의 크나큰 믿음이였고 그 길에서 더 많은 일을 하기를 바라시는 그이의 뜨거운 당부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 려경구선생의 소원을 헤아리시여 과학탐구의 넓은 길을 열어주시고 과학연구문제와 그 방도까지 제시해주시며 그가 과학연구의 길에서 큰 성과를 거두도록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그는 1948년 6월이후부터 흥남지구에 새로 내온 산업성 흥남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되였고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의 어려운 속에서도 수많은 참고도서들과 실험설비들을 보장받으며 안전하고 편리한 조건에서 연구사업을 진행해나갔다.

전후에도 그는 과학원 화학연구소 소장, 과학원 함흥분원 과학부원장 등 나라의 과학부문의 중요직책에서 오래동안 사업하면서 염화비닐에 대한 연구사업을 심화시켜 공화국에서 처음으로 주체적인 염화비닐공업을 창설하는데 크게 기여할수 있었다.

해방후의 복잡한 정세속에서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북행길에 오른 과학자들은 비단 김종희, 려경구선생들만이 아니다. 그들속에는 김병제선생과 같은 언어학자도 있다.

김병제선생으로 말하면 해방전 일제의 민족어말살책동이 날로 악랄해지자 우리 말과 글을 지켜내야 한다는 의로운 생각을 가지고 조선말연구를 시작한 량심적인 언어학자였다. 그는 조선어학회에도 관여하면서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애썼지만 그것을 《죄》로 몰아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할수 없었다.

그는 해방이 되자 서울에서 조선말사전편찬과 조선말교과서심사 등 조선어의 고수발전을 위한 일련의 사업들에도 참가하였지만 미제가 강점한 남조선에서는 우리 민족어발전의 길이 여전히 막혀있었다.

미제가 《군정》기간 영어를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한다고 선포한것으로 하여 남조선땅에서는 일본어대신에 영어를 할줄 알아야 《출세》의 길이 열리고 공문서에도 영어로 된 수표가 있어야 효력을 발생하는 비극적인 현실이 펼쳐지게 되였다.

미제의 군화에 강토가 짓밟히고 영어에 의해 조선의 말과 글이 무참히 유린당하는 남조선의 현실이 혐오스러울수록 그의 마음은 하늘가에서 찬란히 빛을 뿌리는 북두칠성에 끌리였다.

그는 해방후 북반부에서 우리 말로 된 교과서를 출판하고 교육도 우리 말과 글로 할뿐아니라 연극을 비롯한 문학예술작품들이 우리 말로 창작공연되고 우리 말 방송이 국내는 물론 국외에까지 울려퍼지고있다는 소식을 이미 들어왔었다.

마침내 김병제선생은 조선어를 연구하는 학자인 자기가 서야 할 곳은 바로 우리 민족의 넋과 얼이 살아 숨쉬는 북반부라는 결심을 내리고 38°선을 넘어서게 되였다.

북반부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의 교단이 그를 맞아주었고 1948년에 진행된 북남총선거에서 그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였다.

어느날 경치좋은 대동강기슭에 자리잡은 교원사택마을을 돌아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 김병제선생의 집을 찾아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조선에서 온 대학선생인데 집이 다 꾸려지지 않은데 들게 해서 안됐다고, 우리가 대학선생들을 잘 돌보아주어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학생들이 자기 나라 말을 똑똑히 알도록 잘 가르쳐줄데 대하여서와 앞으로 우리 말을 더욱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발전시킬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어연구에 언제나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며 전쟁전에 만든 조선말사전교정지를 당과 국가의 중요문건들과 함께 보관하시였다가 전시에 언어학자들에게 보내주시였다.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시기 언어학연구소를 창설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 여러차례에 걸쳐 김병제선생을 만나주시면서 언어학발전에서 나서는 리론실천적문제들도 환히 밝혀주시였다.

조선어가 소중히 지켜지고 그 발전의 넓은 길이 열려져있는 사회주의조국의 발전과 더불어 김병제선생은 과학원 언어학연구소 소장, 내각직속 국어사정위원회 부위원장,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고문소장의 직책에서 일생 과학연구활동을 벌리면서 언어학연구의 새로운 분야들을 개척하는데 이바지하였으며 능력있는 언어학자들을 수많이 키워냈다. 그는 공화국의 원사, 교수, 박사로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조선어연구발전에 헌신하였다.

이렇듯 지난날 남조선에서 갈길 몰라 헤매이던 과학자들은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북으로 들어왔기에 그들은 자기의 지식과 열정, 땀과 헌신을 애국의 길에 깡그리 쏟아부을수 있었으며 조국청사에 아름다운 삶을 수놓을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