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학연구소 2003년 12월 9일)

 

북(조선)의 핵억제력과 미국의 적대정책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 례>

1. 들어가는 말

2. 적대정책 포기와 핵억제력 포기

3. 부시 정부의 새로운 협상전략

4. 부시 정부의 방안과 북(조선)의 방안

5. '아미티지 프로세스'와 '럼스펠드 독트린'의 동시적 추진

1. 들어가는 말

조·미 두 나라는 지금 팽팽한 긴장상태에서 정치적 대결을 계속하고 있다. 조·미 관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북(조선)이 제기한 동시행동 원칙과 미국이 제기한 순차행동 원칙이 충돌하고 있다. 부시 정부가 제기한 순차행동 원칙이란 북(조선)이 먼저 핵억제력을 포기해야 안전보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미 두 나라의 정치적 대결에서 겉으로 드러난 현상은 동시행동 원칙과 순차행동 원칙의 충돌이지만, 그 본질은 적대정책을 포기하라는 북(조선)의 요구와 핵억제력을 포기하라는 미국의 요구가 충돌하는 것이다. 북(조선)은 2003년 8월 14일에 발표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미국이 대조선적대시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도 핵억제력을 포기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다."고 밝혔다.

미국의 적대정책 포기가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서 북(조선)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미국이 우리를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판단의 기준은 조미 사이에 불가침조약이 체결되고 조미외교관계가 수립되며 미국이 우리와 다른 나라들 사이의 경제거래를 방해하지 않는 때로 볼 수 있다." (『조선중앙통신』 2003년 8월 29일자) 지난 11월 5일 박길연 유엔주재 북(조선)대사는 뉴욕에서 러시아의 『이타르-타스통신』과 가진 단독회견을 통해 미국의 북(조선)에 대한 불가침, 조·미 관계의 정상화, 미국의 북(조선) 경제발전 보장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면서 미국의 적대정책 포기를 촉구하였다. (『연합뉴스』 2003년 11월 5일자)

지금 제2차 6자회담이 열리지 못하고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까닭은, 미국이 적대정책을 포기할 것을 약속하라는 북(조선)의 요구와 북(조선)이 핵억제력을 포기할 것을 약속하라는 미국의 요구가 접점을 찾지 못한 채 계속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에서 제2차 6자회담을 개최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발생한 조·미 관계의 충돌현상을 분석하고 그 충돌현상의 중심부에 있는 본질적 측면들을 밝혀보려고 한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나는 조·미 관계의 충돌현상을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그 현상의 본질적 측면을 밝혀내는 것도 역시 민족주체적 관점에 의거해야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한(조선)반도의 현 정세를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인식하는 내용은 일반 언론들이나 분석가들이 비주체적 관점에서 인식하는 내용과 상당히 다른 것이며 어떤 부분에서는 상반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글은 일반 언론들이나 분석가들의 분석과 상당히 다르고, 심지어 상반된 내용으로 되어 있다.

민족주체적 관점이 끊임없이 변화·발전하는 정세의 운동양태와 운동원리를 밝혀주는 과학적 관점이라는 나의 생각은 이 글을 작성하는 과정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비주체적 관점에 서 있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사실을 나열하는 작업에서 멈추고 있지만, 민족주체적 관점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들의 내적 연관관계와 그것이 한(조선)민족에게 주는 의미를 해명한다.

6자회담 개최문제와 관련하여 드러난 복잡·미묘한 양상은 한(조선)반도 정세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일까? 이 글에서 탐구하려는 것은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이다.

2. 적대정책 포기와 핵억제력 포기

6자회담과 관련하여 북(조선)과 미국이 벌이고 있는 정치적 대결은 적대정책 포기 대 핵억제력 포기의 대결로 요약된다. 북(조선)은 미국에게 적대정책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으며, 미국은 북(조선)에게 핵억제력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핵억제력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미국에 대해서 북(조선)은 미국이 상응하는 조치를 동시적으로 취하는 경우 핵억제력을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북(조선)의 핵억제력 포기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

북(조선)이 핵억제력을 포기하는 것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을 받아들이고 핵시설을 해체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조·미 두 나라의 견해가 어긋나지 않는다.

북(조선)은 핵억제력 포기라는 것이 핵확산금지조약 복귀, 핵사찰 수용, 핵시설 해체라고 못박음으로써 이미 보유한 핵무기 폐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혔다. 다른 한편, 미국 측도 핵억제력 포기라는 것이 이미 보유한 핵무기를 폐기하는 문제까지 포함하는 것이라고 명백하게 지적한 적은 없다.

그런데 최근에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에 관한 정보를 언론에 흘려주고 있는 것이나, 미국 언론들이 지난 시기 우크라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핵무기를 폐기하였던 사례를 언급한 것은 가볍게 지나칠 일이 아니다. 혹시 부시 정부는 핵억제력 포기의 범위를 핵무기 폐기에까지 확장하려는 것은 아닐까?

만일 핵억제력 포기가 이미 보유한 핵무기를 폐기하는 문제까지 포함하는 경우, 북(조선)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선 공인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있지도 않은 핵무기를 폐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사실이 공인되고, 핵무기를 폐기하는 문제까지 거론되는 경우, 조·미 관계와 6자회담의 전도는 헤어나기 힘든 곤경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왜 그럴까? 북(조선)의 핵무기를 폐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제원자력기구는 핵무기개발사업을 감시하고 중지시키는 과제를 담당할 수 있지만, 이미 보유한 핵무기를 폐기하는 과제에 대해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핵무기 폐기는 국제원자력기구의 책임과 권한 밖에 있는 문제다.

국제원자력기구가 할 수 없으므로, 미국이 직접 나서서 북(조선)의 핵무기를 폐기해야 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구 위에 존재하는 그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의 핵무기를 폐기할 권한이 없다. 핵무기 보유는 주권국가의 고유한 권한이다.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지 않은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어도 다른 나라가 그것을 문제로 삼지 못하듯이,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한 북(조선)이 핵무기를 보유한 것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가 문제로 삼을 수는 없다.

북(조선)은 미국이 적대정책을 포기하면 핵억제력을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것에 비하여, 미국은 북(조선)이 핵억제력을 포기하면 적대정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북(조선)에 대한 안전보장을 문서로 약속하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쟁점은, 북(조선)이 핵억제력을 포기하는 것에 상응하는 조치로 적대정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보장을 문서로 약속하겠다는 부시 정부의 비이성적인 태도다. 북(조선)이 미국에게 동시행동 원칙을 강하게 요구하는 까닭은, 부시 정부가 비이성적인 태도를 고집하면서 6자회담의 전도를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적대정책을 포기한다는 말과 안전보장을 문서로 약속한다는 말은, 언뜻 보면 일맥상통하는 의미로 생각될 수 있으나 그 두 가지 개념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적대정책 포기는 미국이 단독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과제인 반면, 안전보장의 문서화는 6자회담에 참가한 4개 나라와 남(한국)이 공동으로 책임을 지는 과제다. 미국이 혼자서 책임을 지는 것보다 미국을 포함하여 여럿이 공동으로 책임지는 것이 더 믿을 만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대상에 대한 공동책임이란 책임주체의 책임성이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책임소재가 분명하지 않게 됨으로써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상황에 가서 서로 다른 쪽에 책임을 떠넘기면서 결국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부시 정부는 불가침(nonaggression)이라는 말을 회피하면서 의도적으로 안전보장(security assurance)이라는 말만 쓰고 있으며, 조·미 사이에서 발생한 '핵문제'를 동북아시아의 지역문제라고 강변하고 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변인 션 맥코맥(Sean McCormack)은 기자회견에서 "북(조선)의 핵문제는 미·조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현안"이라고 주장하였다. (『연합뉴스』 2003년 9월 5일자)

부시 정부가 핵문제를 지역현안이라고 하면서, 불가침이라는 말 대신에 안전보장이라는 말을 쓰는 까닭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안전보장이라는 개념은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들 사이의 다무적 관계(multilateral relation)에서 성립되는 것이며,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이 북(조선)을 침략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불가침이라는 개념은 조·미 쌍무적 관계(bilateral relation)에서 성립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불가침이라는 개념은 무력으로 대치하는 준전시상태에 놓여 있고, 교전당사국으로 되어 있는 북(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의미를 갖는 개념이며, 북(조선)과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를테면, 북(조선)과 중국 사이에는 이미 조·중 동맹조약이 체결되어 있으므로 불가침 문제를 논할 여지가 없으며, 북(조선)과 러시아 사이에도 조·러 동맹조약이 체결되어 있으므로 불가침 문제를 논할 여지가 없다. 일본은 북(조선)에 대해서 교전당사국이지만, 직접 무력을 대치한 준전시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므로 불가침조약을 체결할 필요가 없다. 남(한국)과 북(조선)의 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므로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불가침을 합의하는 불가침선언을 채택해야 하는데, 남북의 상호불가침선언은 이미 남북기본합의서에 포함되었다. 그러므로 남북이 상호불가침선언을 이중적으로 채택할 필요는 없다.

부시 정부가 조·미 두 나라의 쌍무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가침 문제를 북(조선)과 남(한국),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사이의 다무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집단안보문제로 바꿔놓으려는 것은 합리성을 배제한 억지논리이며, 쌍무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가침 보장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책략이다. 부시 정부는 적대정책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다무적 관계의 집단안전보장문서를 채택하려는 책략을 펴고 있는 것이다.

부시 정부가 쌍무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가침 보장의 책임을 회피하는 까닭은, 만일 불가침을 보장하는 경우 적대정책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대 미국 정부가 고착해놓은 북(조선)에 대한 적대정책을 부시 정부가 포기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까? 부시 정부가 적대정책을 포기하면, 조·미 사이의 적대관계를 존립기반으로 하는 주한미군은 주둔근거를 잃게 되고 그에 따라 주한미군 철수압력이 거세질 것이다. 적대정책을 포기함으로써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경우, 한·미 군사동맹체제가 해체됨으로써 미국은 남(한국)에 대한 지배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부시 정부가 심히 우려하는 문제는 불가침 보장→적대정책 포기→주한미군 철수→한·미 군사동맹체제 해체→남(한국)에 대한 지배력 상실로 이어지는 불가항력적인 사태의 연쇄적 발생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부시 정부가 불가침을 보장할 수 없는 조건에 있다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적대정책을 움켜쥔 상대방이 다무적 안전보장문서를 작성해주겠다는 말만 믿고 자진하여 무장을 해제할 정도로 어리석은 나라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현재 6자회담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다무적 안전보장문서를 어떠한 방식과 내용으로 채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적대정책 포기라는 본질적 문제를 다무적 안전보장의 문서화라는 비본질적 문제로 대체하려는 부시 정부의 책임회피전술을 어떻게 저지하는가 하는 것이다.

북(조선)의 견해에 따르면, 미국이 북(조선)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하는 것은 곧 불가침조약 체결로 구체화된다. 불가침조약은 미국 연방의회의 비준을 받아야 하므로 다른 외교문서들과 달리 법적 구속력을 가질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침략과 약탈이 난무하는 제국주의시대에 불가침조약의 법적 구속력을 믿을만하다고 여기는 것 역시 순진한 생각이다. 제국주의국가들이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깨뜨리고 침략전쟁을 도발한 역사적 경험이 그런 종류의 취약성을 뚜렷이 입증한다.

이처럼 불가침조약도 믿지 못하게 된 마당에, 북(조선)이 쌍무조약도 아닌 다무적 안전보장문서 따위를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북(조선)의 안전을 종이장으로 보장해주겠다는 부시(George W. Bush)의 공식발표는, 북(조선)에게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주체의 사회주의를 건설한 북(조선)이 자기의 안전을 다른 나라에 보장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며, 자기를 고립·압살하려는 적대정책에 매달려 있는 제국주의국가와 안전보장을 논하는 것이야말로 궤변 중의 궤변이다. 북(조선)은 2003년 8월 12일에 발표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제3자에 의한 우리 제도의 '안전'을 운운하는 것은 우리에 대한 모독"이라고 못박았다.

지난 9월말 뉴욕에서 열린 남(한국), 북(조선), 미국, 중국, 일본 정부 당국자의 비공식 모임에서 부시 정부 당국자가 어떻게 하면 적대정책 포기를 입증할 수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 물음에 대해서 북(조선) 정부 당국자는 조·미 공동성명 사본을 제시하면서 북(조선)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교토통신』 2003년 10월 21일자) 그의 발언은 조·미 공동성명에 적대정책 포기의 의미가 들어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2000년 10월 12일 조명록 차수가 백악관을 방문한 역사적 사건과 더불어 세상에 발표되었던 조·미 공동성명과 미국의 적대정책 포기는 어떻게 연관되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워싱턴에서 발표된 조·미 공동성명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조·미 "두 나라 사이의 쌍무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조치들을 취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구절이다. 지금 북(조선)이 미국에게 강하게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조·미 쌍무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다.

조·미 쌍무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조치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그 조치는 두 가지인데, 조·미 공동성명은 그 조치들이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로 바꾸는 조치와 조·미 관계를 개선하는 조치라고 규정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조·미 공동성명은 조·미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도 밝혀주었다. 즉 조·미 쌍무관계에서 새로운 방향을 취하는 첫 번째 중대조치로서 "적대적 의사를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공약"을 채택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적대의사 포기선언과 관계정상화 공약이다. 그러므로 북(조선)이 미국에게 강하게 요구하는 것은 적대의사 포기선언과 관계정상화 공약인 것이다. 그 밖의 사항들도 있지만 그런 것들은 부차적인 요구들이다.

적대의사를 포기하고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조·미 공동성명에 따르면, 그것은 "자주권에 대한 호상존중과 내정불간섭의 원칙에 기초한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뜻한다. 이 대목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북(조선)이 미국에게 자주권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사실이다.

북(조선)이 미국에게 제기한 자주권 문제를 달리 표현하면, 미국에게 북(조선)의 자주권을 침해하지 말라는 요구다. 미국으로부터 지배와 간섭을 받지 않는 북(조선)이 미국에게 자주권을 침해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얼른 이해되지 않지만, 북(조선)의 주권문제, 영토문제와 결부하여 생각하여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남(한국) 정부가 한(조선)반도 전체를 자기 영토로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조선) 정부도 한(조선)반도 전체를 자기 영토로 인정한다. 그런데 북(조선)의 견해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이 미쳐야 할 영토 절반을 미국이 무력으로 강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조선)은 주한미군 문제를 군사문제만이 아니라 영토강점과 주권침해의 문제로 인식한다. 북(조선)은 미국이 자기 영토의 절반인 남(한국)을 군사적으로 강점하고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미국에게 북(조선)의 자주권을 침해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자기 영토를 점령한 제국주의군대의 철거를 요구하는 것은, 북(조선)만이 아니라 모든 주권국가의 정당한 요구며 반드시 관철해야 하는 역사적 임무가 된다. 여느 나라들과 달리, 민족의 자주성과 국가의 자주권을 생명처럼 중시하는 북(조선)으로서는 미국이 자기 영토의 절반을 강점한 것으로 하여 자기 생명이 갉아 먹히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낄 것이다. 북(조선)이 주한미군 철수라는 전략적 과업을 최우선적 과업으로 여기며 모든 힘을 그 과업수행에 집중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북(조선)이 미국에게 요구하는 적대정책 포기란 북(조선)의 자주권을 침해하지 말라는 요구로 해석되는 것이며,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주한미군을 철수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그렇지만 북(조선)은 6자회담과 관련하여 미국에게 요구할 때는 주한미군을 철수하라고 요구하지 않으며, 적대정책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그 까닭은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조·미 쌍무적 관계에서 다루어야 하는 것이지, 6자회담과 같이 주변나라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다무적 관계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6자회담에 참가한 중국, 러시아, 일본은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해결하는 책임, 권한, 지위를 가진 당사국들이 아니며, 남(한국)은 미국에게 자기의 군사권을 이양하고 정치·군사적으로 예속되어 있으므로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해결하는 책임, 권한, 지위를 갖지 못했다. 따라서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조·미 쌍무회담에서 해결될 것이며, 북(조선)이 자주권을 침해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대상은 오로지 미국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2차 6자회담이 열리더라도 미국이 북(조선)에게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약속하고, 그에 상응하여 북(조선)이 핵억제력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하는 정치협상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니다. 6자회담에서는 적대정책을 포기하는 문제와 핵억제력을 포기하는 문제가 논의되는 것이지 주한미군 철수문제까지 논의될 수는 없다. 북(조선)은 제2차 6자회담에서 부시 정부로부터 적대정책을 포기한다는 약속을 받아내려 하고, 미국은 그 회담에서 북(조선)으로부터 핵억제력을 포기한다는 약속을 받아내려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6자회담은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조·미 국교를 수립하기 위한 조·미 쌍무회담을 예비하는 성격, 기능, 지위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6자회담은 예비적인 조치를 합의하는 예비회담이고, 조·미 쌍무회담은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본회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비회담이 잘 진행되어야 본회담이 열리게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렇지만 6자회담이 조·미 쌍무회담을 예비하는 성격, 기능, 지위를 가지는 일종의 예비회담이라고 해서, 6자회담이 완결된 뒤에야 본회담 격인 조·미 쌍무회담이 열린다고 말할 수 없다. 아마도 일정기간 동안 6자회담이 조·미 쌍무회담과 병행될 수도 있을 것이고, 6자회담이 유럽연합까지 포괄하는 7자회담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으며, 동아시아안보협력체로 성격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3. 부시 정부의 새로운 협상전략

위에서 지적한 대로, 부시 정부의 적대정책 포기가 결국 주한미군 철수와 조·미 국교수립으로 귀결된다고 해서, 적대정책이 하루아침에 간단히 폐기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적대정책은 몇 단계를 밟아가면서 폐기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부시 정부가 적대정책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실행해야 할 첫째 단계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북(조선)이 요구해오고 있는 바에 따르면, 적대정책을 포기하는 첫째 단계는 미국이 북(조선)을 침략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북(조선)은 2002년 10월 평양에서 열렸던 조·미 정치회담에서 처음으로 불가침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 회담에서 제기한 불가침 문제가 불가침조약 체결을 요구한 것인지 불가침선언을 요구한 것인지는 분명하게 알려진 바 없는데, 북(조선)은 2002년 10월 25일에 발표된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서 조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불가침 문제를 해결할 것을 처음으로 요구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부시 정부가 불가침조약 체결요구를 한사코 거부한다는 것이다. 백악관 고위관계자는 미국은 북(조선)에게 조약과 같은 안전보장을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미국은 남(한국)과 일본 등과 동맹조약을 맺고 있지만 북(조선)은 그러한 조약을 맺을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3년 11월 26일자)

부시 정부는 왜 불가침조약 체결요구를 거부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은, 부시 정부가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려 해도 미국 연방의회의 반대에 부딪쳐 비준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절차상의 문제, 그리고 미국은 다른 나라와 불가침조약을 맺은 선례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미국은 역사적으로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적이 없고, 비준절차에서 걸림돌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부시 정부가 불가침조약 체결을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결정적인 조치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불가침조약 체결요구를 한사코 반대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불가침조약 체결과 주한미군 철수는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는 것일까? 북(조선)이 미국에게 요구하는 불가침조약은 미국이 북(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는 외교문서로서, 침략전쟁을 반대·저지하는 정의로운 조약이다. 그에 반해서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남(한국)을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지키는 방위조약이 아니라 한·미 연합군이 미국의 전쟁계획에 따라 조선인민군과 전쟁을 하기 위한 전쟁조약이다. 평화협정과 정전협정이 양립될 수 없는 것처럼, 조·미 불가침조약과 한·미 상호방위조약도 양립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조·미 불가침조약이 체결되면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존립근거가 흔들리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북(조선)이 미국에게 불가침조약 체결을 요구하는 것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무력화하기 위한 정치공세라고 볼 수 있다. 북(조선)이 종래의 평화협정 체결요구를 불가침조약 체결요구로 대체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불가침조약 체결을 요구하면서 강한 압박을 가하는 북(조선)에 대해서 부시 정부는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여론의 비판은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지 않으면서 무작정 '버티기 작전'에 매달려 있는 부시 정부에게 쏟아졌다.

이를테면, 미국 의회조사국(CRS)의 한국(조선)문제 전문가 래리 닉쉬(Larry Niksch)는 2003년 11월 4일에 방송된 『자유아시아방송(RFA)』의 대담에서 부시 정부는 북(조선)이 요구하는 불가침조약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북(조선)이 불가침조약과 연계하여 밝힌 의제들이 무엇인지 제대로 공론화하지 못하고 북(조선)의 요구를 아무런 설명 없이 거부만 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영국 리즈대학교 명예선임연구원 에이던 포스터 카터(Aidan Foster Carter)는 2003년 11월 26일 『아시아타임스』 인터넷판에 올린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부시의 대북(조선)정책」이라는 글에서 출범한 뒤로 3년이 되어 가는 부시 정부가 대북(조선)정책을 수행하는 데서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것은 '유일 초강대국'이 직무를 유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비판하고, 부시의 대북(조선)정책이 파국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미국 국무부 대북(조선)교섭담당 대사로 일하다가 지난 8월에 사임한 잭 프릿처드(Charles L. Pritchard)는 얼마 전 미국에서 발간되는 군축전문 월간지에 실린 회견기사에서, 미국 정부는 지금까지 북(조선)과의 협상에서 실질적인 대안을 하나도 제시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제2차 6자회담은 미국이 북(조선)의 핵무기개발사업을 폐기시킬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부시 정부의 대북(조선)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주한미국대사 출신으로서 현재 뉴욕의 코리아협회(Korea Society) 회장인 도널드 그레그(Donald P. Gregg), 워싱턴의 브루킹스 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의 한국(조선)문제 전문가인 마이클 오핸런(Michael O'Hanlon), 조지 워싱턴 대학교 교수 마이크 모치즈키(Mike Mochizuki)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여론은 부시 정부에게 압박효과를 별반 내지 못한다. 부시 정부에게 실질적인 압박효과를 주는 것은,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하고 폐연료봉을 재처리한 북(조선)이 지하핵실험을 실시할 경우 동북아시아에서 핵확산금지체제가 무너지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의 엄습이다. 미국 관리가 밝힌 바에 따르면, 6자회담 도중 조·미 양자회담이 40분 동안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김영일 외무성 부상은 세 가지 위협발언을 하였다고 한다. 즉 "부시 정부의 적대정책은 북(조선)으로 하여금 핵무기 보유사실을 선언하게 만들고 있으며, 핵실험을 실시함으로써 북(조선)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음을 전세계에 알리게 만들고 있으며, 미사일과 같은 무기운반체계를 시험발사함으로써 북(조선)의 핵무기 운반능력을 보여주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2003년 8월 30일자) 40분 동안의 조·미 양자회담에서 핵무기 보유선언, 핵실험 실시, 미사일 시험발사를 단행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위협하였던 김영일 부상은 이튿날 전체회담에서 다른 참가국들이 보는 자리에서 똑같은 내용으로 미국을 위협하였다. (『워싱턴포스트』 2003년 9월 5일자) 미국 국무부 고위관리는 6자회담에서 북(조선)으로부터 위협발언을 들었을 때 매우 당혹스러웠다고 하면서, 핵실험 위협발언은 미국의 정책에 대한 그릇된 진술과 억측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그 위협발언은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하기에 워싱턴에 보고하였다고 말했다. (위와 같은 신문)

일부 분석가들은 북(조선)의 핵실험 가능성이 미국에게 더 이상 압박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북(조선)이 부시 정부의 다무적 안보보장 문서화 제안을 받아들이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그것은 빗나간 판단이다. 6자회담에서 김영일 부상이 밝힌 내용을 보더라도, 북(조선)은 자기의 핵억제력을 대외적으로 입증함으로써 미국이 장악한 핵확산금지체제에 결정타를 가하는 여러 가지 방도를 준비해둔 것으로 생각된다. 지하핵실험은 그런 방도들 가운데 하나다.

나의 판단으로는, 미국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릴 세 가지 조건이 동아시아에서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조선)이 자기의 핵억제력을 입증하는 압박공세가 이 세 가지 조건과 결합하는 경우 대미압박공세 효과는 극대화될 것이 분명하다. 북(조선)의 대미압박공세 효과를 극대화할 세 가지 조건이란, 대만의 분리독립운동, 일본 집권세력의 극우화 추세, 주한미군의 감축이다. 이 세 가지 조건은 현재진행형이다. 대만의 집권세력이 2004년에 분리독립을 추진하려고 책동함으로써 중국과 대만 사이에 정치·군사적 긴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위태롭게 되고 있으며, 미국의 개입으로 중국·대만 문제가 복잡해지고 있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일본 집권세력의 극우화 추세가 반미성향과 결합될 가능성에 대해서 워싱턴의 전략가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우려하는 것도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지난 11월 25일 부시는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GPR)를 공식 선언하였고, 그에 따라 2004년부터 주한미군이 감축·재배치되는 것도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처럼 대만해협, 일본열도, 한(조선)반도에서 정치·군사적 변동이 일어나는 시기에, 북(조선)이 자기의 핵억제력을 입증하는 대미압박공세를 취할 경우, 미국이 장악한 동아시아 핵확산금지체제는 핵무기 개발의 연쇄반응이라는 미증유의 혼란에 휘감기며 공중분해될 것이다. 2003년 10월 21일 20개 아시아·태평양 국가들 및 유럽연합의 군사정책 담당 고위관리들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 도쿄에서 열린 비공개 토론회에서 중국 국방대학 부설 전략문제연구소 소장 양이는 "북(조선)이 실제로 핵무기를 보유하는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현재 한·일 양국의 핵과학기술 수준을 감안하면 양국은 정치적 결단만 내려진다면 수개월 내에 핵무기를 쉽게 보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핵개발 연쇄반응이 틀림없이 촉발될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연합뉴스』 2003년 10월 21일자)

북(조선)이 지하핵실험으로 대미압박공세를 취할 가능성에 대해서 미국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불안해하는 것은 남(한국)의 국가정보원이 2003년 10월 28일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제출한 보고에서도 드러났다. 그 보고에 따르면, 미국과 남(한국)은 북(조선)의 핵실험에 대한 탐지능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현재 남(한국)은 20여 곳, 미국은 10여 곳에 핵실험을 감지할 수 있는 특수진동감지장치를 설치해놓았다고 한다. (『연합뉴스』 2003년 10월 28일자) 위에서 논한 몇 가지 문제를 생각할 때, 북(조선)이 자기의 핵억제력을 대외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대미압박공세의 결정타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지난 시기 클린턴 정부는 시간을 질질 끌면서 북(조선)의 붕괴를 기다리는 전략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오늘날 부시 정부는 그나마 시간이라도 질질 끌 수 있는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클린턴 정부의 '시간끌기작전'은, '북(조선) 붕괴위기설'에 기울어진 워싱턴의 전략가들이 미국의 대북(조선)정책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는 판단에 따라 추진하였던 작전이었으며, 당시 북(조선)의 대미압박공세는 결정타가 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이 아니었다. 클린턴 정부가 1993년 6월에 뉴욕에서 조·미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나서 무려 7년 동안이나 시간을 질질 끌면서 2000년 10월에 가서야 조·미 공동성명을 채택하였던 것은, 미국이 붕괴위기에 몰린 북(조선)에 대해서 전략적으로 우세하다고 판단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북(조선)이 1998년 8월에 광명성 1호를 발사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고난의 행군'을 이겨내지 못했다면, 클린턴 정부는 조·미 정치회담을 거부하였을 것이며, 워싱턴 정치권에서 퇴장할 때까지 줄곧 '시간끌기작전'에 매달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에 비해서 오늘의 부시 정부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 부시가 대북(조선)정책을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했던 2001년 6월부터 2003년 4월 조·중·미 3자회담에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는다. 2001년 6월부터 오늘까지 부시 정부는 어떤 태도를 취해왔을까?

일반 언론의 왜곡보도와 편파보도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감각에는 2001년 6월부터 오늘까지 부시 정부가 클린턴 정부보다 더 강경하게 북(조선)을 압박하여온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클린턴 정부는 집권기간 8년 동안에 1993년, 1994년, 2000년 세 차례나 북(조선)과 정치적 합의를 하였으며, 정권 말기에는 클린턴의 평양방문까지 준비하였던 것에 비하여, 부시 정부는 정치적 합의를 한 차례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미 기본합의마저 깨버리고 '악의 축'이니 '선제공격'이니 하는 공격성 발언으로 북(조선)을 자극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나열해놓으면, 부시 정부가 클린턴 정부보다 더 강경하게 북(조선)을 압박해왔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정반대의 현상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클린턴 정부는 북(조선)이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였을 때 전쟁을 도발하려고 기도하였지만, 부시 정부는 북(조선)이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고 핵연료봉 재처리를 완료하고 영변핵시설을 재가동하는데도 전쟁도발을 기도하기는커녕 위협발언조차 하지 못하였다. 북(조선)이 핵억제력을 물리적으로 입증해 보이겠다고 강도 높게 압박할 때도, 부시 정부는 속수무책으로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올해 2003년 초부터 북(조선)은 가중되는 파상적 압박공세로 워싱턴을 불안에 몰아넣고 있다.

차츰 강도를 높여가며 파상적으로 압박하는 북(조선)의 공세를 받은 부시 정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새로운 협상전략을 들고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부시 정부가 들고 나온 새로운 협상전략이란, 미국이 북(조선)에 대한 경제봉쇄를 점차적으로 완화하고 최종적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런 내용은 지난 8월 27일부터 29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렸던 6자회담에서 북(조선)에게 제안되었다.

부시 정부 고위관리의 발언을 인용한 『뉴욕타임스』 2003년 9월 5일자 보도에 따르면, 부시는 지난 8월말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에 참가하는 대표들에게 "제재를 점차적으로 완화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종국적으로 평화협정에 이르는 일련의 조치(a range of steps from gradually easing sanctions to an eventual peace treaty)"를 취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북(조선)에게 전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뉴욕타임스』는 그 기사에서 평화협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영어로는 평화조약(peace treaty)으로 적었다. 한(조선)반도의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공고한 평화보장체제의 법적 조치를 논할 때, 일반적으로 평화조약이라는 용어와 평화협정이라는 용어를 혼용하고 있으므로 그 기사에 나온 평화조약이라는 용어는 평화협정이라는 용어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의 초점은 부시 정부가 제기한 새로운 협상전략에서 평화협정 체결이라는 특정개념이 사용되었는가, 아니면 평화보장체계 수립이라는 불특정개념이 사용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미국 언론의 보도기사만 가지고서는 어떤 개념이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여기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문제와 평화보장체계를 수립하는 문제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양자의 차이를 지적하는 까닭은, 미국이 북(조선)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않고서 한(조선)반도 평화보장체계를 수립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시 정부의 새로운 협상전략에 포함된 한(조선)반도 평화보장체계를 수립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뉴욕타임스』가 그것을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뜻으로 해석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부시 정부가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내용의 협상전략을 제기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글에서 나는 『뉴욕타임스』의 표현을 빌려 부시 정부의 새로운 협상전략을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내용으로 설명한다.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담 차관보이며, 2002년 10월에 평양에서 열렸던 조·미 정치회담에 미국 측 수석대표로 나섰던 제임스 켈리(James A. Kelly)는 지난 8월 6자회담에 참석하여 제재를 점차적으로 완화하고 최종적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방안을 북(조선)에 제안하였다고 한다. 『뉴욕타임스』는 부시 정부가 그러한 제안을 한 것을 두고, 북(조선)에 대한 접근에서 '의미 있는 전환(significant shift)'이 있었던 것으로, 또는 '새로운 협상전략(new negotiating strategy)'을 채택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와 다른 정부관리들의 말에 따르면, 부시는 2003년 8월 텍사스에 있는 자기의 목장에서 국무장관 콜린 파월(Colin L. Powell)과 국무차관 리처드 아미티지(Richard L. Armitage)로부터 새로운 협상전략에 관한 보고를 받았으며, 8월말 6자회담이 열리기 직전 고위급 국가안보보좌관들과 만나 논의한 뒤에 새로운 협상전략의 구체적인 내용을 승인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부시 정부가 북(조선)에게 경제제재의 점차적인 완화와 평화협정의 종국적 체결을 해결방안으로 제안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8월말에 열린 6자회담은, 북(조선)의 표현을 빌리면, "초보적인 결실을 보지 못하고 그 어떤 전망도 예고할 수 없는 탁상공론의 마당으로" 되었으며, "조·미 사이의 핵문제 해결에서 아무런 의의도 없는 백해무익한 회담으로 되고 말았다." (『조선중앙통신』 2003년 9월 2일자 론평 「베이징 6자회담과 우리의 원칙적 립장」) 그렇게 된 까닭은, 북(조선)의 지적에 따르면, "미국은 실질적인 정책전환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고" 북(조선)이 제기한 "일괄타결 도식과 동시행동 원칙에 반대의사를 표명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자회담에서 미국이 취한 태도는 북(조선)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으며, 중국과 러시아의 회담참가자들로부터도 비판적인 지적을 받았다. 6자회담에 중국 측 수석대표로 참가하였던 외교부 부부장 왕이는 미국의 대북(조선)정책이 한(조선)반도 핵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주된 장애(main obstacle)'라고 지적하였고(『워싱턴포스트』 2003년 9월 4일자), 러시아 측 수석대표로 참가하였던 외무차관 알렉산드르 로슈코프(Alexander Losyukov)는 "회담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미국의 전향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연합뉴스』 2003년 8월 28일자)

미국이 6자회담에서 취한 태도에 대해서 북(조선)은 이렇게 지적하였다.

"미국대표단 단장인 국무성 차관보 제임스 켈리는 미국의 목표는 북조선의 핵무기계획을 가시적인 검증에 의해 완전하게 불가역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북조선이 핵무기계획을 검증가능하게 불가역적으로 완전히 포기하여야 안전담보와 정치경제적 혜택문제에 대해 론의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핵문제 해결을 위해 미조쌍무회담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조선이 핵계획을 포기한 다음에야 관계정상화를 목표로 한 미싸일, 상용무력, 위조화폐, 마약거래, 테로, 인권, 랍치 등 문제들에 대한 미조쌍무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불가침조약은 적절치 않으며 필요되지도 않고 흥미도 없다고 하면서 북조선이 핵계획을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게 포기한다는 것이 확인되면 다음 회담에서 안보상 우려문제들을 다른 나라들과 토의할 용의가 있다고 하였다." (『조선중앙통신』 2003년 8월 29일자 보도)

미국 언론도 6자회담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북(조선)은 미국이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조건에서 핵사찰을 수용하고 핵시설을 해체하겠다는 단계적 방안을 제안하였으나, 미국은 그 제안을 거부하였다. 미국은 대안은 제시하지 않고 북(조선)이 핵무기 생산을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중단한 뒤에야 그에 상응한 혜택을 논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뉴욕타임스』 2003년 9월 2일자)

이처럼 6자회담이 아무런 성과 없이 막을 내린 원인은, 미국이 북(조선)이 제시한 동시행동 원칙에 따른 해결방안을 전면 거부함으로써 적대정책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는 데 있다.

4. 부시 정부의 방안과 북(조선)의 방안

나는 지난 8월 20일에 작성한 논문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은 부시 정부에 의해서 바뀌었는가?」에서 부시 정부가 6자회담 추진과 조·미 국교수립을 상정한 대북(조선)정책을 추진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그 계획추진과정을 '아미티지 프로세스(Armitage Process)'라고 불렀다. 6자회담이 열리기 직전, 조·미 "외교관계 정상화는 상황이 진전되면 확실히 가능한 일"이라고 밝혔던(『연합뉴스』 2003년 8월 23일자) 국무부 고위관계자의 발언에서도 '아미티지 프로세스'의 지향점이 조·미 국교수립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나는 위의 논문에서 부시 정부가 6자회담에 나선 것을 '아미티지 프로세스'의 첫째 단계를 밟은 것으로 이해하였으면서도, 6자회담에서 출발하여 조·미 국교수립에 이르는 길고 복잡한 과정에서 미국이 북(조선)에게 무엇을 제공하려고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나는 부시 정부가 지난번 6자회담에서 이른바 새로운 협상전략에 따라서 제재조치를 점차적으로 완화하고 종국적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해결방안을 내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임스 켈리는 지난번 6자회담에서 조·미 국교수립, 조·일 국교수립, 그리고 정전협정을 대체하여 새로운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문제를 제안하면서 안전보장방안을 포괄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발언하였다. 남(한국)의 한 언론은 6자회담 당시 부시 정부가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당사자로서 조·미 두 나라 이외에 남(한국)과 중국도 포함시키는 문제까지 검토했다고 보도하였다. (『시사저널』 2003년 11월 20일자)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면, 부시 정부의 새로운 협상전략은 6자회담 개최→경제제재 완화→평화협정 체결→조·미 국교수립이라는 단계적 해결방안을 중심내용으로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단계적 해결방안이 '아미티지 보고서(Armitage Report)'의 전략구상에 기초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미국 언론도 경제제재 완화와 평화협정 체결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방안은 리처드 아미티지가 오랫동안 주장해온 것임을 인정하였다. (『뉴욕타임스』 2003년 9월 5일자)

그런데 부시 정부가 경제제재 완화와 평화협정 체결을 새로운 협상전략으로 들고 나왔다는 사실은 세상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지금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안전보장 문서화 제안이다. 부시 정부도 언론을 상대로 말할 때는 경제제재 완화와 평화협정 체결에 관련한 제안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그 대신 안전보장을 문서화하는 제안에 관해서만 언급한다.

그렇다면 평화협정 체결제안과 안전보장 문서화 제안은 어떻게 연관되어 있을까? 『니혼게이자이신붕』 2003년 11월 5일자 워싱턴발 보도에 따르면, 부시 정부는 북(조선)이 핵무기 개발계획을 포기하고 생물·화학무기와 미사일 문제를 해결한다면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새로운,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방안을 북(조선)에게 제의하였는데, 그 제의는 지난 4월 베이징에서 열렸던 조·중·미 3자회담과 지난 8월 베이징에서 열렸던 6자회담에서 북(조선)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요미우리신붕』 2003년 11월 7일자 워싱턴발 보도에 따르면, 부시 정부는 북(조선)에 대한 2단계 안전보장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즉 6자회담이 진행되는 제1단계에서 안전보장을 문서화하고, 북(조선)의 핵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제2단계에 가서 항구적인 안전보장을 문서화한다는 것이다. 나는 일본 언론의 보도기사들에서 언급한 항구적인 안전보장의 문서화라는 개념을 평화협정 체결을 뜻하는 개념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부시 정부의 새로운 협상전략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단계를 북(조선)이 핵시설을 해체한 이후, 다시 말해서 '완전한 핵포기' 이후로 잡아놓았다는 사실이다.

부시 정부가 요구하는 '완전한 핵포기'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교토통신』 2003년 11월 26일자 보도에 따르면, 네 단계 방안으로 실행되는 '완전한 핵포기'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제1단계는 북(조선)이 핵시설, 저장고, 이미 제조한 핵탄두를 폐기하는 데 요구되는 정보를 공개한다. 제2단계는 북(조선)이 핵확산금지조약에 복귀하고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을 입국시키고 핵사찰을 허용한다. 제3단계는 북(조선)이 5대 핵보유국 전문가들이 입회한 가운데 핵무기 개발사업을 폐기한다. 제4단계는 플루토늄을 포함한 모든 핵물질과 관련 설비를 북(조선) 밖으로 반출한다. 이것이 부시 정부가 북(조선)에게 요구하는 이른바 '완전한 핵포기'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부시 정부의 새로운 협상전략은 위의 네 단계를 모두 실행한 이후에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겠다는 것이다. 부시 정부의 고위관리는 "북(조선)이 핵무기개발사업을 포기하는 구체적인 조치를 취할 때, 북(조선)에 대한 안전보장은 효력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 2003년 11월 25일자) 한 마디로 말해서, 부시 정부의 새로운 협상전략은 동시행동 원칙을 거부하면서 이른바 '완전한 핵포기'를 우선적으로 실행하라는 순차적 단계설정을 추진하려는 전략이다.

그러나 북(조선)이 먼저 핵억제력을 포기한 뒤에 미국이 적대정책을 포기하겠다는 순차적 단계설정은 지극히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억지이므로 북(조선)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에 반해서, 북(조선)은 위에서 논한 대로, 핵억제력 포기와 적대정책 포기를 동시적으로 단계적으로 실행하자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원칙을 처음부터 일관되게 강조한다. 이러한 북(조선)의 방안에 대해서는 중국도 지지한다. 11월 21일 『워싱턴포스트』와 대담한 중국 국무원 총리 원자바오는 "미국이 조선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안보문제가 해결되는 조건에서 조선은 핵무기개발계획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언급하였다."고 말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부시 정부가 추구하는 새로운 협상전략의 목적이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북(조선)의 핵억제력을 포기시키는 무장해제에 집중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북(조선)의 방안은 어떠할까? 북(조선)은 6자회담에서 다음과 같은 일괄타결 방안과 동시행동 순서를 제시하였다. 먼저 일괄타결 방안은 미국의 책임과 북(조선)의 책임으로 되어 있다. 미국의 책임은 네 가지인데, "조·미 불가침조약 체결, 조·미 외교관계 수립, 조·일 및 북남 경제협력실현 담보, 경수로제공 지연으로 인한 전력손실 보상 및 경수로 완공"이다. 북(조선)의 책임은 세 가지인데, "핵무기 생산중단 및 핵사찰 허용, 핵시설 해체, 미사일시험발사 보류 및 수출중지"다. 다음으로, 동시행동 순서는 "미국이 중유제공을 재개하고 인도주의 식량지원을 대폭 확대하는 동시에 조선은 핵계획 포기의사를 선포하며, 미국이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전력손실을 보상하는 시점에서 조선은 핵시설과 핵물질 동결 및 감시사찰을 허용하며, 조·미, 조·일 외교관계가 수립되는 동시에 조선은 미싸일문제를 타결하며, 경수로가 완공되는 시점에서 조선은 핵시설을 해체하는 것"이다. (『조선중앙통신』 2003년 8월 29일자)

나는 지난 8월 10일에 작성한 「조·미 대결전은 또 하나의 분수령을 넘고 있다」는 글에서 지난 4월 베이징에서 열렸던 조·중·미 3자회담에서 북(조선)이 미국에게 제시한 4단계 방안에 관해서 설명한 바 있는데, 8월에 열린 6자회담에서는 더 정교하게 다듬어진 4단계 방안이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북(조선)의 4단계 방안을 다시 요약·정리하면, 제1단계에서 미국은 중유공급 재개 및 식량지원을 실행하고, 북(조선)은 핵억제력 포기의사를 선포한다, 제2단계에서 미국은 불가침조약 체결 및 전력손실 보상을 실행하고, 북(조선)은 핵사찰을 허용한다, 제3단계에서 미국은 조·미 국교수립을 실행하고 조·일 국교가 수립되며, 북(조선)은 미사일 문제를 타결한다, 제4단계에서 미국은 경수로 공사를 완공하고, 북(조선)은 핵시설을 해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조·미 국교수립이라는 정치과제가 부시 정부의 방안에도 들어있고, 북(조선)의 방안에도 들어있다는 점이다. 그 정치과제에 관해서는 두 나라가 일단 견해의 일치를 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조·미 국교수립으로 가기 위한 단계를 서로 다르게 설정했다는 데 있다. 부시 정부는 먼저 북(조선)의 핵억제력을 포기하게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국교를 수립하는 방안을 내놓았으며, 북(조선)은 동시행동 원칙에 따른 4단계 일괄타결방안을 내놓았다.

동시행동 원칙을 반대하면서 핵억제력 포기부터 먼저 실행하라고 요구하는 부시 정부에게 북(조선)이 자기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한 방법은 더욱 강한 압박공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10월 16일 북(조선)은 외무성 대변인의 담화발표를 통해서 부시 정부를 더욱 강하게 압박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부시 정부는 조·미 뉴욕접촉마저도 꺼리고 있다. 부시 정부는 핵문제를 대화를 통하여 해결함으로써 조·미 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려고 하지 않고 있다.

(2) 부시 정부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시간을 끌어보려고 한다면, 북(조선)도 이미 공개된 필요한 수단을 더욱 완비·강화할 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3) 부시 정부가 핵억제력부터 포기해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동시행동 원칙을 반대한다면, 북(조선)은 핵억제력을 유지·강화하는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것이다.

(4) 북(조선)은 때가 되면 핵억제력을 물리적으로 공개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다.

이처럼 북(조선)이 핵억제력을 계속 강화하면서 핵억제력을 물리적으로 공개하겠다고 드센 압박공세를 취하자, 부시 정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흘만에 한 발 물러섰다. 10월 19일 미국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한 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미국은 불가침조약이나 불가침협정이 아니라 안전보장을 북(조선)에게 제공하려 하며, 제공방식으로서는 6자회담에 참가한 당사자들이 모두 서명한 공동성명의 형식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미국 텔레비전 방송에서 미국이 생각하는 것은 북(조선)과 미국 사이의 양자합의가 아니라 6자회담 형식 안에서의 다자합의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튿날인 10월 20일 이번에는 부시가 직접 나섰다. 태국 방콕에서 열리고 있었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부시는 태국 총리 탁신과 정상회담을 한 자리에서 "미국은 북(조선)을 침략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명백하게 밝힌 바 있다. 또한 미국은 북(조선)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야망을 버리기를 기대한다는 것을 이미 명백하게 언급한 바 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 2003년 10월 19일자) 또한 부시는 같은 시점에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조선)에 대한 다무적 안전보장을 문서로 제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2003년 10월 23일 동남아시아 순방을 마치고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하는 길에 부시는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보좌관들이 계속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면서 이례적인 기자회견을 34분 동안 진행하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표명하였다.

(1) 부시는 중국 국가주석 후진타오가 북(조선)의 지도자에게 압력을 가하여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사업을 폐기하고 문서화된 안전보장을 받아들이도록 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2) 부시는 1년 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몹시 싫어한다고 말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기자들의 물음에 대해서 답변을 피하고, 그 대신 자신은 인민들을 굶주림과 영양실조와 발육부진에 시달리게 만드는 그 어떤 사람도 존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3) 부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안전담보(security guarantee)를 원한다고 말해왔지만 미국은 북(조선)이 핵무기 사업을 폐기하는 조건으로 조약이 아니라 미국은 북(조선)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적은 문서를 채택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4) 부시는 미국의 협상안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하느냐는 기자들의 물음에 대해서 답변을 피하고, 그 대신 "어떻게 될지 두고 보겠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2003년 10월 23일자)

북(조선)의 강한 압박공세에 당황한 부시 정부는 대통령,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국무장관의 공개적인 의사표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재빨리 북(조선)과 직접적인 접촉을 시도하였다. 부시가 발언한 다음날인 10월 24일 미국 국무부 코리아과장 데이빗 스트로브(David Straub)가 뉴욕에 있는 유엔주재북(조선)대표부를 방문하여 한성렬 차석대사와 회담한 것이다. 그 회담에서 한성렬 차석대사는 부시가 표명한 안전보장을 문서화하는 방안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요청했고, 스트로브는 부시의 발언을 되풀이하는 형식으로 설명했다. 한성렬 차석대사는 그 제안에 흥미가 있다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문서를 상정하고 있는지, 북(조선)이 핵억제력을 포기할 경우 미국은 어느 단계에서 안전보장을 문서화할 것인지, 문서는 6자회담 구도 안에서 어떻게 교환되는지 등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아사히신붕』 2003년 10월 27일자)

미국이 이처럼 부산하게 움직이자, 조·미 관계에서 중재역할을 자처하는 중국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10월 29일부터 31일까지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우방궈가 중국국가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을 공식방문하였다. 그 기회에 중국은 북(조선)에 원유 50만t과 식량 20만t을 제공하기로 약속하였다.

10월 20일의 부시 발언에 대해서 북(조선)은 10월 25일에 발표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1) '서면불가침담보'에 관한 부시의 발언이 조·미 평화공존을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고 동시행동 원칙에 기초한 일괄타결안을 실현하는 데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고려할 용의가 있다.

(2) 동시행동 원칙을 수용하려는 의지가 확인되지 않는 한, 현 상태에서 6자회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3) 동시행동 원칙에 기초한 일괄타결안이 실현된다면, 조·미 사이의 핵문제는 간단히 풀리게 된다.

주목할 것은, 부시 정부가 북(조선)의 강한 압박에 밀린 나머지 다무적 안전보장을 문서화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북(조선)이 요구하는 동시행동 원칙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교토통신』 2003년 11월 8일자 워싱턴발 기사에 따르면, 11월초 중국 외교부 부부장 왕이가 워싱턴을 방문하였을 때, 부시 정부는 왕이에게 제2차 6자회담에서 북(조선)이 완전한 핵포기를 약속하면 미국은 북(조선)의 안전보장을 제공한다고 약속하는 구상을 전달하였다는 것이다.

11월 16일 북(조선) 외무성 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이 제기한 질문에 대해서 답변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혔다.

(1) 북(조선)은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종착점으로 하는 일괄타결안'을 미국에게 제시하였다.

(2) 미국이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불가침조약 대신 부시가 언급한 '서면불가침담보'를 고려할 의사가 있다.

(3) 미국의 우려를 고려하여 동시행동 원칙에 대한 표현상 문제도 조절할 수 있다.

(4) 미국의 적대정책이 근본적으로 철회되고 북(조선)에 대한 위협이 실천적으로 제거되는 단계에 가서 북(조선)은 미국이 우려하는 핵계획을 포기할 용의가 있다.

(5) 조·미 사이의 핵문제를 해결하는 전망은, 미국이 동시행동 원칙에 기초한 일괄타결안을 받아들일 용의를 가지는가 안 가지는가에 달려있게 될 것이다.

나는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논한다.

(1) 나의 판단으로는, 북(조선)이 말하는 '한(조선)반도의 비핵화'와 미국이 말하는 북(조선)의 '완전한 핵포기'는 일맥상통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비핵화라는 개념은 핵무기를 시험, 제조, 생산, 개발하지 않는다는 것,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것, 국제원자력기구 핵사찰을 수용하는 것을 뜻한다. 1994년 10월에 제네바에서 채택된 조·미 기본합의에는 "조선은 조선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을 이행하기 위한 조치를 일관성 있게 취한다."고 되어있다. 11월 21일 『워싱턴포스트』와 대담한 중국 국무원 총리 원자바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겠다는 것과 조선반도의 비핵화가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점을 언급하였다."고 말했다. 북(조선)이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지향하는 일괄타결안을 미국에게 제안한 것은 북(조선)의 '완전한 핵포기'를 요구하는 미국을 회담으로 이끌어내려는 북(조선)의 주동적 조치라고 말할 수 있다. 북(조선)은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조·미 정치회담의 최종 목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완전한 핵포기'를 요구하는 부시 정부과 협상할 수 있는 길을 넓힌 것이다.

(2) 북(조선)이 '서면불가침담보'를 고려하겠다고 말한 것은, 종래의 불가침조약 체결 요구를 수정하여 불가침선언을 채택할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북(조선)의 불가침조약 체결요구와 미국의 다무적 안전보장 제공이 팽팽히 맞선 대치의 평행선은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것이 아니며, 조·미 두 나라가 '서면불가침담보'를 합의함으로써 끝나게 될 것이다.

(3) 북(조선)은 동시행동 원칙에 관한 표현도 상호합의에 의해서 조절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부시 정부가 동시행동 원칙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넓혔다.

11월 16일부터 17일까지 제임스 켈리는 일본, 중국, 남(한국)을 잇따라 방문하였다. 11월 16-17일에 일본을 방문하였고, 18-19일에는 중국을 방문하였다. 제임스 켈리는 남(한국), 중국, 일본을 연속하여 순방하면서 제2차 6자회담에 관한 부시 정부의 방안을 설명하였다.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이번에 켈리가 꺼내놓았던 제2차 6자회담에 관한 부시 정부의 방안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북(조선)에 대한 안전보장을 문서화하는 것은 제3차 6자회담으로 미룬다.

(2) 제2차 6자회담이 열리면, 북(조선)은 핵무기개발 포기의사를 표명하고, 6자회담에 참가한 5개 당사자들은 북(조선)에 대한 안전보장을 문서화하는 의사를 공동성명 형식으로 발표한다.

『아사히신붕』은 2003년 11월 23일자 워싱턴발 기사에 따르면, 미국은 12월 17일부터 베이징에서 제2차 6자회담을 열되, 북(조선)에 대한 안전보장을 문서화하는 것은 일단 뒤로 미루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 대신 북(조선)이 핵개발을 포기할 의사를 표명하고 나머지 5개 당사자들은 안전보장을 문서화할 의사를 표명하는 내용의 공동성명 또는 공동발표문을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임스 켈리가 베이징을 방문한 직후인 11월 22일부터 24일까지 북(조선) 김영일 외무성 부상은 베이징을 방문하여 중국 외교부 부부장 왕이와 회담하였다. 왕이는 김영일 부상에게 위와 같은 부시 정부의 방안을 전달하였다. 부시 정부의 방안을 전해들은 김영일 부상은 미국이 안전보장을 약속할 경우 핵무기 개발사업을 완전히 폐기하는 것을 포함한 새로운 제안을 할 용의가 있음을 중국 측에 밝혔다고 한다. (『마이니치신붕』 2003년 11월 30일자 베이징발 보도)

김영일 부상과 회담을 마치고 나서 왕이는 "미국이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제2차 6자회담이 개최되는 문제는 미국에게 달려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3년 11월 25일자) 왕이가 말했던 미국의 강경한 입장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 『교토통신』 2003년 11월 19일자 보도를 보면, 미국의 강경한 입장은 중국이 미국에게 제안한 것을 미국이 거부하였던 사건인 것으로 생각된다. 『교토통신』이 조·미 회담에 관계한 소식통의 말을 인용하여 워싱턴발로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중국은 북(조선)의 뜻에 따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해결방안을 미국에게 제시하였다고 한다.

(1) 미국은 북(조선)을침략하지 않는다고 불가침을 약속한다. 북(조선)이 중국을 통해서 미국에게 제안한 해결방안을 보도한 『교토통신』은 불가침약속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불가침선언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2) 남(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가 불가침선언의 증인인 된다. (미국의 불가침선언에 대한 관련국들의 보증)

(3) 북(조선)은 필요하다면 한(조선)반도 주변의 다른 나라들과도 불가침선언을 채택할 용의가 있다. (북(조선)과 다자간의 불가침선언 용의)

위의 내용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점을 주목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1) 불가침조약이 불가침선언(불가침약속)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조약을 선언(약속)으로 바꾼 것은 조약채택을 완강히 거부하는 미국과의 회담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북(조선)의 주동적 조치로 보인다.

(2) 불가침선언을 조·미 양자구도에서만이 아니라 다자구도에서도 채택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는 사실이다. 양자구도와 다자구도를 병행하려는 것은 양자구도를 완강히 거부하고 다자구도만을 고집하는 미국과의 회담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북(조선)의 주동적 조치로 보인다. 『교토통신』은 2003년 11월 17일자 보도에서 북(조선)이 미국과의 1대 1 불가침선언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제2차 6자회담 개최가 불투명하게 되었다고 분석하였으나, 그것은 잘못된 분석이다. 북(조선)은 불가침선언을 조·미 양자구도만이 아니라 다자구도에서도 채택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힘으로써 북(조선)과 미국의 대립점을 넘어설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이처럼 북(조선)이 주동적 조치를 취한 것으로 하여 미국 국무부에서는 제2차 6자회담이 곧 성사될 것으로 낙관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11월 18일 국무차관 리처드 아미티지는 국무부에서 열린 언론설명회에서 기자들에게 제2차 6자회담이 오는 12월에 열릴 것으로 낙관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3년 11월 19일자) 국무부 대변인 리처드 바우처(Richard A. Boucher)도 언론설명회에서 "우리는 이제 후속 6자회담 성사에 낙관한다. 지금 중국 당국이 방북결과를 토대로 하여 6자회담이 재개되도록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11월 24-25일 미국을 방문한 러시아 외무차관 알렉산드르 로슈코프는 제임스 켈리와 회담한 뒤, 12월 17일 또는 19일에 제2차 6자회담을 개최하는 것으로 계획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11월 25일 백악관 고위관계자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남(한국)이 제2차 6자회담을 오는 12월 중순에 개최하자는 데 공감대를 이루었으나, 북(조선)은 아직 동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2003년 11월 26일자) 중국은 제2차 6자회담에서는 북(조선)의 핵억제력 포기 선언과 미국의 불가침담보 제공이 동시행동 원칙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북(조선)과 공동보조를 맞추었다. (『러시아의 소리』 방송을 인용한 『연합뉴스』 2003년 12월 5일자 보도)

나의 판단으로는, 부시 정부가 동시행동 원칙을 거부하는 한, 제2차 6자회담이 2003년 12월 안에 개최될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 언론에서는 내년에 개최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이처럼 제2차 6자회담 개최가 불투명하게 된 원인은 부시 정부가 동시행동 원칙을 거부하면서 불가침 보장이 아니라 안전보장 문서화를 고집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안전보장을 문서화하더라도 핵무기에 의한 불위협과 불사용에 관한 보장은 하지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미우리신붕』이 2003년 11월 21일 부시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하여 보도한 바에 따르면, 부시 정부는 북(조선)에 대한 안전보장을 문서화하더라도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은 포함하지 않을 방침이라는 것이다.

부시 정부가 안전보장문서에서 핵위협과 핵사용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1994년 10월에 제네바에서 채택된 조·미 기본합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조·미 기본합의는 "미국은 조선에 대해 핵무기로 위협하지 않고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보장한다."고 명시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북(조선)을 핵무기로 위협하거나 북(조선)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하는 이른바 소극적 안전보장(negative security assurance)마저 거부하려는 것을 뜻한다.

북(조선)은 평양에서 열렸던 조·미 정치회담이 결렬된 직후인 2002년 10월 25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하여 "미국이 불가침조약을 통해 우리에 대한 핵불사용을 포함한 불가침을 법적으로 확약한다면 우리도 미국의 안보상 우려를 해소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3) 미국은 그나마 안전보장을 선언하는 문서도 이번에 열리게 되는 제2차 6자회담이 아니라 제3차 6자회담에서 채택하자고 고집한다. 이러한 태도는 '시간끌기작전'의 전형으로 보인다.

(4) 미국은 조·미 양자구도와 동아시아 다자구도에서 병행적으로 불가침을 담보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다자구도의 안전보장만을 채택하려고 고집한다. 미국은 어떤 경우든 북(조선)에 대한 안전보장은 6자회담에 참가한 6개 당사자들이 대등한 자격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북(조선)의 해결방안을 거부하였다.

5. '아미티지 프로세스'와 '럼스펠드 독트린'의 동시적 추진

북(조선)은 조·미 정치회담을 제국주의자들과의 타협이 아니라 제국주의자들과 맞서 싸우는 대적투쟁으로 생각한다. 정치적 타협에서는 쌍방이 주고받는 협상기술이 요구되는 데 비하여, 대적투쟁에서는 적을 굴복시키는 공격기술이 요구된다. 북(조선)이 조·미 정치회담에서 목적하는 바는, 미국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조·미 정치회담에서 북(조선)이 구사하는 전략과 전술은 비타협성, 공격성, 강경성, 대담성을 보인다. 다음과 같은 경험들은 북(조선)이 조·미 정치회담을 대적투쟁으로 보면서 미국을 굴복시키려고 하였음을 입증한다.

클린턴 정부 집권초기인 1993년 6월 뉴욕에서 열린, 조·미 공동성명을 채택하기 위한 회담에서 북(조선)은 공동성명에 미국이 북(조선)의 자주권을 존중하고 내정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포함시키기 위해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고 한다. (북[조선]이 개설한 인터넷 사이트 '우리민족끼리'에 실린 내용을 보도한 『연합뉴스』 2003년 11월 5일자 기사)

클린턴 정부 집권말기에 대북(조선)정책조정관을 지냈던 웬디 셔먼(Wendy Sherman)의 말에 따르면, 1999년 5월 당시 대북(조선)정책조정관이었던 윌리엄 페리(William J. Perry)를 단장으로 한 미국 정부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여 회담을 진행할 때, 북(조선)의 협상상대는 윌리엄 페리를 적으로 지칭하면서 그의 집이 있는 캘리포니아주 팰로 앨토(Palo Alto)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위협발언으로 회담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웬디 셔먼은 그들을 '강한 협상가'라고 불렀다.

미국 아시아재단 서울사무소 대표인 스캇 스나이더(Scott Snyder)는 북(조선)사람들에게 타협은 일상적인 기질이 아니라고 지적하였다. 이를테면 북(조선)이 회담장에 배치한 의자의 다리를 짧게 잘라내 자기들이 미국 측 회담대표들을 내려다보면서 회담을 진행하는 심리전을 수행한 적도 있으며, 회담에 참석하는 북(조선)의 대표 숫자를 매일 한 사람씩 줄임으로써 미국 측 회담대표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심리전을 벌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스캇 스나이더는 역사적으로 북(조선)은 작은 나라로서 세계 외교무대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려고 노력해왔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3년 4월 23일자)

지금까지 이 글에서 논한 대로, 북(조선)이 6자회담에서 관철하려는 목적은 조·미 국교를 수립하기 위한 결정적 국면을 열어놓는 것이다. 그런데 조·미 국교수립을 위한 쌍무협상은 6자회담에서 진행될 수 없고 조·미 정치회담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부시 정부도 이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부시 정부는 조·미 정치회담이 열리면 북(조선)이 주한미군을 철수하라는 강한 압박공세를 가할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에 6자회담에만 집착한다. 부시 정부의 여러 부서들 가운데서도 특히 주한미군 문제를 직접 관장하는 국방부와 합참본부가 조·미 정치회담을 완강하게 반대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부시 정부가 언제까지나 조·미 정치회담을 회피하면서 6자회담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 이러한 예상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가진다.

최근 중동정세가 미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 때문에 부시 정부는 곤경에 빠져있다. 치열하게 전개되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반미·반이스라엘 투쟁은 미국의 중동정책을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다. 더욱이 이라크의 반미저항세력으로부터 끈질긴 무력공격을 받고 있는 미군은 이라크전선에서 전의를 잃어버리고 있다. 이라크전선에 배치한 미군이 기습공격을 받는 횟수가 늘어나는 것과 비례해서 미군병사들의 탈영, 자살, 정신질환 발병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미군이 전의를 잃었음을 객관적으로 입증한다. 그런 상태에서 이라크에 미군을 계속하여 배치하는 것은 무모한 짓임을 부시 정부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부시 정부는 전의를 잃은 미군을 철수하고 그 대신 다른 나라의 군대를 이라크전선에 투입하려고 매우 분주하다.

그렇다면 부시 정부의 중동정책이 파탄지경으로 몰리는 것은 한(조선)반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게 될까?

(1) 노무현 정부가 미국의 강요에 굴복하여 이라크에 추가파병을 감행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노무현 정부의 대미예속성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을 뜻한다. 내년에 이라크전선에서 남(한국)군 사상자가 발생하면, 남(한국) 민중의 반정부투쟁과 반미자주화투쟁이 확산될 것이다. 남(한국)에서 반정부투쟁과 반미자주화투쟁이 확산되는 것은 워싱턴에서 주한미군 철수여론을 확산시키는 강력한 자극제가 된다.

(2)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의 발언권이 위축될 것이다. 알려진 대로,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는 국무부의 파월-아미티지-켈리가 추진하려는 '아미티지 프로세스'를 완강히 반대하는데, 그들의 발언권이 위축된다면 '아미티지 프로세스'를 실행에 옮길 공간이 넓어지는 것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국무부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경우, 핵억제력을 먼저 포기하라는 요구가 제거되면 제2차 6자회담은 곧 열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3) 대통령선거를 앞둔 부시 정부는 중동정책과 한(조선)반도정책이 한꺼번에 혼란과 파탄에 빠지는 것을 매우 우려한다. 미국 민주당은 대통령선거국면에서 기선을 잡기 위해서 부시 정부가 중동정책에서 실패한 것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킬 것이고, 6자회담의 전도가 불투명하게 되어 한(조선)반도정책마저 실패하였다는 비난공세를 퍼부음으로써 부시 정부를 곤경에 몰아넣을 것이다. 그럴수록 부시 정부는 한(조선)반도정책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가시적 성과를 거두어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 빠져들 것이다. 부시 정부가 다급한 상황에 빠질수록 북(조선)의 압박공세는 효과를 보게 되며, 압박공세의 효과가 커질수록 부시 정부가 핵억제력을 먼저 포기하라는 요구를 수정 또는 포기할 가능성도 커지게 된다.

지금 미국 국무부는 6자회담을 지렛대로 하여 '아미티지 프로세스'를 추진하려고 하고 있으며, 미국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는 해외주둔 미군을 재편(감축·재배치)하는 '럼스펠드 독트린(Rumsfeld Doctrine)'을 실행하고 있다. 국무부는 '아미티지 프로세스'에 따라 6자회담을 추진하고 있으며, 국방부는 '럼스펠드 독트린'에 따라 주한미군을 재편(감축·재배치)하는 준비에 들어갔다. 주한미군의 재편과정은 미2사단을 신속기동군으로 개편하는 한편, 서울에 주둔한 주한미군사령부를 후방으로 재배치하는 것으로 시작될 것이다. 11월 13일 극동을 순방하고 있던 국방장관 럼스펠드(Donald H. Rumsfeld)와 그의 수행원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내용을 언론에 밝혔다.

(1) 부시 정부는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을 '획기적으로 재편하는 문제'에 관련하여 곧 협의를 시작할 것이다.

(2) 주일미군 재편에 관한 협의는 2003년 12월 중순에 개최될 것이며, 주한미군 재편에 관한 협의도 6개월 안에 시작될 것이다.

(3) 부시 정부는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재편에 관한 협의를 2-3년 안에 마무리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3년 11월 14일자)

11월 19일 주한미국대사 토머스 허바드(Thomas Hubbard)는 서울기독교청년회가 주최한 비공개간담회에서 미국은 주한미군을 재배치하고, 주한미군사령부를 이전하는 문제를 3년 안에 해결하겠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2003년 11월 19일자) 위의 발언내용에 따르면, 주한미군을 재편(감축·재배치)하는 과정은 늦어도 2006년까지는 모두 끝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면 '아미티지 프로세스'와 '럼스펠드 독트린'이 동시적으로 추진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의 판단으로는, 조·미 국교수립을 위한 정치회담을 합의하는 조건과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조건이 동반적으로 성숙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건의 성숙은 북(조선)이 부시 정부에게 압박을 가하여 주한미군을 철수할 기회를 주며, 부시 정부가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감축함으로써 전면철수를 요구하는 북(조선)과의 정치회담을 재개할 기회를 준다. 핵억제력을 먼저 포기하라는 부시 정부의 요구가 제거되면서 열리게 될 제2차 6자회담은 그러한 기회를 안고 있는 것이다.

나는 6자회담이 진전되면 조·미 정치회담이 재개될 것이고, 조·미 정치회담은 조·미 관계정상화를 실현함으로써 주한미군의 재편(감축·재배치)을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로 연결시킬 것이며, 종국적으로는 주한미군의 전면철수가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6자회담의 진전은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촉진한다. (2003년 12월 8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