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일 성
 
미국에 있는 조국통일촉진회
회장일행과 한 담화
 
(주체71(1982)년 10월 13일)

 

 

    나는 김성락선생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부인과 함께 조국을 또다시 찾아온데 대하여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부인은 건강합니까?

    나는 선생이 지난해 조국을 방문하고 돌아가서 나라와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일꾼들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해외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는데 대하여 나는 기쁘게 생각하며 높이 평가합니다.

    우리는 미국에 사는 조선동포들의 조국내왕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미국에 사는 동포들이 조국에 올 수 있으면 다 와서 우리의 조국통일정책을 알고 조국의 현실을 직접 보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해외동포들이 조국에 왔다가면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도 커지고 조국 형제들과의 혈육의 정도 깊어질 것입니다. 지금 남조선과 해외의 어떤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하면 마치 머리에 뿔이 나고 별나게 생긴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하여서도 많은 해외동포들이 조국에 와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조국을 다녀간 해외동포들이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주변에 있는 조선사람들에게 조국의 소식을 알려주며 우리의 조국통일방침내용을 해설해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미국에 있는 우리 동포들속에서 조국을 방문하려는 사람들의 수가 해마다 늘어나 다음해에는 더 많아질 것 같다고 합니다. 지금은 지난 시기와 달리 미국에 있는 우리 동포들이 조국에 오는 여권문제가 그리 힘들지 않게 해결되고 또 중국과 미국사이에 항로가 개설되어 여객기가 정기적으로 오가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다 얼마든지 조국에 내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미동포들은 조국을 내왕하면서 우리 당의 조국통일방침을 잘 알고 그것을 미국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조선노동당 제6차대회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을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새롭게 내놓은 조국통일방안과 통일국가의 10대시정방침에서 연방형식의 통일국가는 그 어떤 나라의 위성국으로도 되지 않으며 그 어떤 외세에도 의존하지 않는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로, 블록불가담국가로 되어야 한다는 것, 국가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자주적인 정책을 실시하여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밝혔습니다.

    우리가 세우려는 연방형식의 통일국가는 철저한 중립국가입니다. 우리 나라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은 모두 큰 나라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연방형식의 통일국가는 중립노선을 확고히 견지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나라를 스위스나 오스트리아처럼 중립국가로 만들고 블록불가담정책을 실시하자는 것입니다.

    내가 지난해에 우리 나라를 방문한 오스트리아사회당 중앙비서를 만나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에 대하여 해설해준 일이 있는데 그는 우리가 통일된 조선을 중립국으로 만들려 한다는 말을 듣고 아주 좋은 안이라고 하면서 지금까지 우리의 주장을 잘 모르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우리 일꾼들을 오스트리아에 초청해서 자기 당의 간부들과 당학교학생들이 우리 당의 통일정책과 주체사상에 대한 강의를 받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오스트리아사회당 중앙비서의 말을 듣고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우리 당의 통일정책에 대한 해설선전을 더 잘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미국사람들은 우리 당의 조국통일방침에 대하여 옳은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물론 요즘 미국의 일부 계층들은 우리가 자주적이며 중립적인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하는데 대하여 관심을 돌리면서 진짜 조선이 주변에 있는 큰 나라들의 위성국이 되지 않고 자주적이며 중립적인 나라로 되겠다고 한다면 미국의 대조선정책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사람들과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 대다수가 우리의 조국통일방침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면서 조선이 주변나라의 위성국이 되지 않겠는가고 우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4월에 진행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합동회의에서 나라의 통일을 자주적으로 실현할 뿐 아니라 통일을 이룩한 다음에도 변함없이 자주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명백히 천명하였습니다.

    조국통일을 자주적으로 실현하자면 남조선에서 미국군대를 철거시키고 조선의 내정에 대한 미제의 간섭을 끝장내야 합니다. 미국군대의 남조선강점과 조선의 내정에 대한 미제의 간섭은 우리 나라의 자주적 통일을 실현하는데서 가장 큰 장애로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사람들에게 우리 당의 조국통일방침을 잘 알려주어 그들이 그에 대한 옳은 인식을 가지고 우리 나라의 자주적 통일을 실현하는데 장애를 조성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앞으로 미국이 어떻게 나오는가 하는데 따라 정세는 우리의 자주적인 조국통일위업에 유리하게 전변될 수도 있고 불리하게 조성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전반적 정세가 조국통일을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변되게 이끌어가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사람들과 가깝게 지내거나 연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들에게 당신들이 미국사람들을 만나면 조국통일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잘 전달하라, 우리는 동족끼리 불질을 하고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을 원치 않는다, 미국사람들이 《남침위협》이요 뭐요 하고 떠들어대는데 우리는 《남침》할 생각이 없으며 오히려 북침을 우려하고 있다, 미국사람들이 진정으로 조선반도의 평화를 바란다면 남조선의 호전분자들과 함께 전쟁소동을 더 이상 벌이지 말아야 하며 남조선당국자들이 먼저 불질을 하지 못하게 단단히 통제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라고 말해주군 합니다.

    우리가 미국사람들에게 우리의 의사를 전달할만한 사람들을 만나면 늘 이런 이야기를 하여 보내지만 미국사람들은 아직도 우리 당의 조국통일방침에 대해 옳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시간이 흐르면 미국사람들도 우리에 대한 의심을 어느 정도 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미국당국자들이 그 누구의 《남침위협》에 대하여 떠들고 있는 것은 남조선을 무력으로 깔고 앉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국사람들이 남조선과 일본을 군사기지로 만들고 조선반도주변에서 무력을 증강하고 있는 주요한 목적은 소련의 태평양진출을 견제하자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있지도 않는 우리의 《남침위협》을 운운하면서 남조선에 대한 저들의 군사적 강점을 합리화하려 하고 있습니다.

    재미동포들은 조국내왕을 통하여 발전하는 조국의 현실을 바로 보고 주변사람들속에 그에 대한 소개선전을 잘하여야 합니다.

    선생의 부인은 1937년에 평양을 떠나 미국에 갔다가 45년만에 평양에 왔다고 하는데 몰라보게 변한 평양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내가 열네살나던 해 평양을 떠났다가 조국을 해방하고 20년만에 돌아왔을 때 평양은 옛날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보통강주변을 비롯하여 평양의 어디에나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내가 어느날 보통벌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려고 그곳을 돌아보니 수해로 하여 그들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보통벌을 돌아보고 와서 어떻게 하나 보통강개수공사를 빨리 해야 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보통강줄기를 돌려놓기 위한 공사는 이미 해방전에 계획이 세워져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돈을 대겠다고 하지 않아 공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보통벌사람들이 일제의 식민지통치밑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자연의 재해와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들로서는 진정한 해방을 맞이하였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보통강줄기를 돌려놓고 보통벌사람들을 움막집에서 벗어나게 해야 그들에게 참다운 해방의 기쁨을 안겨줄 수 있었습니다.

    나는 보통강개수공사계획을 검토한 다음 1946년 5월에 강줄기를 팔동교쪽으로 돌려놓기 위한 착공식을 하고 첫 삽을 떴습니다. 그때 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하였는데 내가 삽을 들고 나서자 청년학생들을 비롯하여 평양시민들이 모두 보통강개수공사에 떨쳐나서 돌격전을 벌였습니다. 우리는 평양시민들을 총동원하여 얼마 안되는 사이에 보통강줄기를 돌려놓았습니다.

    보통강줄기를 돌려놓았더니 그 이듬해 장마때 전에 없이 큰물이 나 평양시안의 하수도들이 넘쳐나고 해방산밑까지 잠겼으나 보통벌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보통강개수공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큰 홍수로 하여 보통벌의 숱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내가 어느날 보통벌에 나가니 그곳 인민들은 어른 아이 할 것없이 모두가 달려나와 김일성장군님, 우리는 장군님의 덕분으로 살아났습니다, 장군님께서 보통강개수공사를 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올해같은 큰 홍수에 다 떠내려가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저마다 인사를 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을 만나보고 돌아와서 회의를 열고 간부들에게 우리가 인민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해놓으니 그들이 얼마나 좋아하는가, 우리가 인민을 위한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더 열성을 내어 일을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보통강유원지를 꾸리는 사업을 전후에 다시 시작하여 완공하였습니다. 선생과 부인이 제일 먼저 찾은 곳이 보통강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보통강주변은 훌륭한 유원지로 되었습니다. 보통강유원지를 꾸려놓으니 그 주변사람들은 물론 평양시안의 수많은 근로자들이 하루 일을 끝내고 거기에 가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내가 녹화자료를 하나 보았는데 올해 여름 일본의 도시들에서는 큰물피해를 입고 숱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으며 남조선의 전라도, 경상도 일대에서는 큰물피해를 입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우리 공화국북반부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관개공사를 하고 수리화를 완성하였기 때문에 큰물피해와 가뭄피해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지난해 겨울에 눈이 오지 않은데다 올해에 봄부터 비가 오지 않아 몹시 가물었지만 1,500여개의 크고 작은 저수지들이 있어 가물때에는 논밭에 물을 대주고 7월, 8월에 폭우가 쏟아질 때에는 그 물을 저수지에 잡아둠으로써 농사에 지장을 받은 일도 없고 피해를 입은 일도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관개공사를 본격적으로 진행한 것은 전쟁이 끝난 다음부터였습니다.

    내가 정전직후 어느날 용강군과 온천군에 나가보니 그곳 농민들은 밭에 물을 대주지 못하여 수수를 1정보에서 겨우 500~800킬로그램밖에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곳 농민들과 담화를 해보니 그들은 물을 어디에서도 끌어올 수 없어서 하는수 없이 그렇게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지도를 펼쳐놓고 보니 정말 온천군은 앞에는 바다가 있고 뒤에는 오석산줄기가 쭉 뻗어있어 물을 가까운 곳에서 끌어올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강서군에 저수지를 만들만한 골짜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가 다음날 그 골짜기를 찾아가보니 거기에는 50세대가량의 농촌살림집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곳 농민들에게 이 골짜기에 저수지를 만들어 대동강물을 채워놓은 다음 물을 뽑아서 강서와 용강에서도 쓰고 산굴을 통하여 온천사람들에게도 보내주려고 한다, 그러면 물고생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지어 잘살 수 있다, 국가에서 다른 곳에 집을 지어주려고 하는데 거기에 옮겨 살면 어떻겠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곳 농민들은 장군님께서 농민들을 잘살게 하려고 하시는 일인데 무엇 때문에 반대하겠는가고 하면서 모두 절대찬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농민들의 집을 다른 곳에 지어주고 그 골짜기를 막는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저수지를 만들 때 강서와 용강, 온천 농민들을 비롯하여 주변사람들이 모두 떨쳐나섰습니다. 나는 그때 그들에게 전쟁을 한 뒤이니 나라에 돈이 없다, 그러니 저수지공사에 동원되는 사람들은 자기가 먹을 식량을 지고 와야 하며 공사를 인력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우리의 호소에 호응하여 농민들은 자기가 먹을 식량을 가지고 와 밥을 해먹으며 등짐으로 흙을 져날라 저수지 제방뚝을 쌓았습니다. 이런 간고한 투쟁으로 저수지를 완공하여 논밭에 물을 대주니 농민들은 너무 좋아서 물길에 첨벙첨벙 뛰어들어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돌아갔습니다.

    관개공사를 한 다음부터 1정보에서 수수를 500~800킬로그램밖에 내지 못하던 땅에서 벼를 9~10톤 내게 되었으며 수수죽이나 겨우 먹던 농민들이 흰쌀밥을 배불리 먹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농사가 잘되어 농장원들이 잘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프리카나라 국가수반들은 우리에게 농업기술협조단을 파견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요청대로 우리 농업기술자들을 아프리카나라들에 보내주고 있습니다.

    지난해에 우리 나라를 방문한 탄자니아대통령은 우리를 만나 자기 나라에 협동농장을 꾸려놓았지만 관리운영사업도 걸리고 농사도 잘 안된다고 하면서 자기들도 주체농법을 배워 조선처럼 농사를 잘해보겠으니 탄자니아에 농업기술협조단을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내가 농업기술자들이 얼마나 요구되는가고 물으니 그는 좀 많이 보내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우리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가도 탄자니아농사를 대신하여 지어줄 수야 없지 않는가, 우리 농업기술자들이 가서 몇개의 협동농장을 시범적으로 운영하면서 농사를 지으면 그 과정에 탄자니아사람들이 농법도 배우게 되고 기술자도 양성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탄자니아에 농업과학원을 꾸려주고 세곳에 농업기술협조단을 보내어 농업생산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고향마을에 조직된 협동농장은 대통령의 동생이 관리위원장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8명의 농업기술협조단 성원들을 파견하여 농장을 시범적으로 관리운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전에 탄자니아에 파견된 우리 농업기술협조단의 사업정형을 요해하여보니 그들은 탄자니아에 가서 농사일을 잘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탄자니아에 가있는 우리 농업기술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나라에는 집들에 소가 많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빅토리아호를 비롯하여 큰 호수들이 많지만 그것을 이용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 농업기술협조단 성원들은 야장간을 꾸려놓고 가래와 후치를 비롯한 여러가지 소농기구와 농기계를 만들어쓰게 하였으며 소를 코꿰어 길들여가지고 농사에 적극 이용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농업기술자들이 잘 도와주니 탄자니아에서는 강냉이를 정보당 500~800킬로그램밖에 내지 못하던 밭에서 5~6톤씩 수확하였다고 합니다. 탄자니아에서는 농법만 개조하여도 8~10배의 높은 알곡수확을 낼 수 있습니다.

    탄자니아대통령은 우리 농업기술협조단 성원들의 방조밑에 자기의 고향마을이 한해사이에 부자가 되었다고 좋아하면서 어쩔줄 몰라하였습니다. 그는 우리 농업기술자들이 가있는 자기 고향마을의 농사형편을 알아보기 위하여 한해동안에 그곳을 몇십번이나 돌아보았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농업기술협조단이 탄자니아에 파견하여 농업생산을 높이고 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우리 농업기술자들을 파견하여줄 것을 요구하는 나라들이 더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를 방문하고 있는 사응투메프린시페민주주의공화국  대통령도 자기 나라에 우리 농업기술자들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사응투메프린시페민주주의공화국의 인구는 10만명 되나마나하고 영토는 우리 나라의 한개군정도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이 나라 대통령이 우리가 자기 나라의 한개농장을 시범적으로 꾸려주면 그것을 전국에 일반화하겠다고 하기에 우리는 농업기술자들을 보내주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나라에도 농업기술자들이 많이 필요하지만 농업기술이 뒤떨어진 아프리카나라들의 사정을 고려하여 그 나라들에 농업기술자들을 보내어 농업기술협조를 성의껏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근로자들의 정신도덕적 풍모도 좋습니다.

    1961년 9월 어느날 우리 당 제4차대회를 축하하러 온 어느 한 나라 당대표단성원들이 청산리에 가본 일이 있습니다. 그들이 청산리에 가보니 농장원들은 다 논밭에 일하러 나가고 어린이들은 탁아소, 유치원과 학교에 가고 늙은이들이 있는 몇집을 내놓고는 거의 모든 집들이 비어있었지만 집들에 자물쇠를 잠그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집에 사람이 없고 비어있는데도 자물쇠를 잠그지 않으면 누가 와서 물건을 훔쳐가지 않는가고 하면서 잘 이해가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그들에게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으로서 인민들의 예의도덕이 밝다는 것, 특별히 잘살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이 먹고 입고 쓰고 사는데 걱정이 없다보니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나라에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적놈이 많다고 하면서 사람들의 정신도덕상태가 좋은 우리 나라를 몹시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나라에는 도적놈과 술망나니들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디에 가면서 집을 비울 때에는 먼저 자물쇠부터 잠근다고 하였습니다. 미국도 발전된 나라이고 잘산다고 하지만 깡패가 너무 많아서 밤에 사람들이 마음놓고 다니지 못한다고 합니다.

    나는 전후복구건설이 끝난 다음 총련의 한덕수의장에게 일본에 있는 우리 동포들가운데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모두 조국에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나라의 형편은 비록 어려웠지만 같은 혈육들이 이국땅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일본사람들로부터 온갖 민족적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렵게 사는 동포들을 조국에 데려오게 하였는데 지금 10만명의 재일동포들이 귀국하여 공화국북반부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는 어느날 재일귀국동포의 집을 방문하여 그 집 아주머니에게 조국에 와서 살아보니 어떤가고 물어보았습니다. 아주머니는 조국에 오니 무엇보다 좋은 것은 남편이 일본에 있을 때에는 몇푼 안되는 돈을 벌어 다 술을 사마셨는데 이제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며 다음에 좋은 것은 남편이 일본에 있을 때에는 밤마다 도박을 하고 쩍하면 자기를 때리군 하였는데 이제는 도박도 안하고 자기를 때리지도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언제인가 어느 한 광산에 가보니 그곳에는 귀국동포와 함께 사는 일본인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의 남편은 광산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기술자였습니다. 내가 그 여성에게 조선에 와서 살아보니 어떤가고 물으니 그 여성은 남편이 일본에 있을 때에는 밤낮 술을 마셨지만 조선에 와서는 박사가 되겠다고 계속 공부만 하고 있어 그것이 제일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 여성은 우리가 일본에 다시 가고 싶지 않은가고 물어보자 무엇 때문에 일본에 가겠습니까, 일본은 잘사는 사람은 더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더 못살게 되어있는 세상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조선공민권을 가지고있기 때문에 일본에 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나라의 부강발전을 위하여 건설을 계속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좀더 건설하고 나라를 발전시키면 우리 나라는 세상에 부럼없는 나라로 될 것입니다.

    선생과 부인을 위하여 내가 오늘저녁 만찬을 마련하였으니 많이 들기 바랍니다.

    기독교에서는 식사하기 전에 기도를 드리는것으로  알고 있는데 선생은 먼저 기도를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선생과 부인이 지난날 부인이 교편을 잡고 있던 청산리에 가보았다고 하는데 청산리는 안창호선생의 고향입니다.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러 왔던 김구선생도 청산리에 갔댔습니다. 그때 그곳에는 안창호선생의 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남북연석회의에서 조선사람은 남에 있건 북에 있건 어디에 있건 남의 장단에 춤추지 말자, 조선사람은 춤을 추어도 조선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자, 북과 남이 힘을 합쳐 조선사람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통일하자고 한 연설을 듣고 김구선생은 좋아하면서 자기들도 절대로 미국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김구선생은 자기는 북반부에 눌러앉고 싶으나 그렇게 하면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를 억류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할 수없이 돌아가야 하겠다고 하면서 남조선에 나가 활동을 하다가 맞갖지 않으면 북반부에 들어오겠으니 자그마한 과수원이나 하나 주십시오, 그러면 그 과수원이나 가꾸면서 여생을 보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김구선생은 남조선에 나가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사업을 하다가 나쁜놈들에게 테러를 당하였습니다. 김구선생이 테러를 당하지 않고 계속 활동하였더라면 조국통일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들쭉술은 우리 나라의 특산입니다. 들쭉술은 말이 술이지 과일즙과 같아 여성들이 마셔도 일없으며 소화도 잘되고 몸에 좋습니다.

    선생은 이번에 강양욱선생을 만나보았다고 하는데 그는 지금 눈어둠병에 걸려 앞을 잘 보지 못합니다. 강양욱선생이 몇해전에 다리가 썩어들어가는 병에 걸렸을 때에는 우리 의료일꾼들의 정성어린 치료로 다리를 자르지 않고 고쳤으나 지금 앓고 있는 병은 치료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내장과 같은 눈병은 수술을 잘하면 고칠 수 있지만 당뇨병으로부터 오는 눈어둠병은 수술도 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는 강양욱선생의 눈을 고쳐주기 위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안과계통의 이름있는 의사들을 데려다 치료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선생은 고령인데도 지금까지 시력이 나쁘거나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사업에 지장을 받는 일이 없다고 하는데 매우 좋은 일입니다. 일을 계속하자면 눈과 귀를 잘 보호하여야 합니다.

    쏘가리는 좋은 물고기입니다. 쏘가리는 민물고기인데 크고 가시가 적으며 살이 많고 맛이 있습니다. 쏘가리는 물속의 큰 돌밑에 있으면서 풀을 먹지 않고 작은 물고기들과 벌레들을 잡아먹고 사는 생활력이 강한 물고기입니다. 쏘가리는 우리 나라의 압록강에 좀 있고 주로 대동강에 많습니다. 얼마전에 우리 나라를 방문한 어느 한 나라 사람들이 쏘가리회를 먹어보고 처음 먹어보는 물고기회인데 별맛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음식은 다른 나라 사람들도 좋아합니다. 내가 중국에 갔을 때 중국 당과 정부 지도자들은 우리의 중국방문을 환영하여 베이징에서 큰 연회를 마련하였으며 그에 대한 답례로 우리도 큰 연회를 차렸습니다. 그때 우리가 차린 연회에는 전부 우리 나라의 음식들을 내놓았는데 중국사람들속에서 그에 대한 평이 매우 좋았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우리가 내놓은 수박과 포도도 맛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만찬회에 내놓은 포도가 우리가 중국에서 연회를 차릴 때 내놓았던 알이 크고 맛이 좋은 유다른 종류의 포도입니다.

    우리 나라의 유명한 평양밤을 가지고 만든 요리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좋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들에도 밤이 있지만 우리 평양밤처럼 단맛과 향기가 없고 슴슴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것이 좋은데 대하여 응당한 긍지를 가져야 하지만 다른 나라의 좋은 것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이번에 중국의 지방도시인 서안을 참관하면서 그곳 감나무들에 감이 많이 달린 것을 보고 우리 나라에서 감나무재배방법을 잘 연구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식물학자들이 감나무를 잘 재배하려면 감나무묘목을 해변가에 심어 해풍을 맞게 해야 한다고 한 말을 듣고 금수산의사당 주변과 당중앙위원회 청사주변에 심은 감나무들에 해변가의 흙을 파다가 주게 하였는데 이번에 중국 서안에 가보니 그곳 감나무들은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어도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서안에서 감나무들이 한아름씩 되게 자라나고 나무마다 감이 많이 열린 것만큼 우리가 재배방법을 잘 연구하면 평양에서도 감나무를 잘 키워 많은 감을 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중국 사천성을 돌아볼 때 사천성당 제1서기와 차를 같이 타고 다니면서 식물재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보았습니다. 내가 사천성당 제1서기에게 몇해전에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항주에서 참대묘목을 주어 그것을 우리 나라의 고성과 옹진반도 일대에 심었는데 잘 자란다고 말해주자 그는 자기도 산동성당 제1서기를 할 때 항주에서 참대나무와 차나무를 산동성에 가져다 심어보니 다 잘 자란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사천성당 제1서기에게 당신이 좋은 것을 알려주었다, 산동성에 항주 차나무가 잘 자라면 산동성의 대안인 우리 나라 황해남도에도 항주 차나무가 잘 자랄 것 같은데 항주 차나무묘목을 우리에게 좀 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다음해에 항주 차나무를 우리에게 꼭 보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항주 차나무를 황해남도의 옹진, 강령일대와 강원도 고성일대에 심으면 잘 자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삼차는 우리 나라 개성인삼으로 만든 것입니다. 인삼은 우리 나라 인삼이 제일 좋습니다. 다른 나라의 인삼은 개성인삼과 비슷하지만 성분을 분석하여보면 개성인삼과 비교가 안됩니다. 인삼차에는 사람의 몸에 좋은 성분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인삼차를 아침마다 한봉지씩 더운물에 타서 마시면 신진대사가 잘되고 세포들의 활동이 촉진되어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훨씬 좋을 수 있습니다.

    선생은 오래 앉아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선생과 같은 애국지사들이 오래 앉아있으면서 조국통일을 위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몸이 불편하지 않으면 다음해에 또 선생과 부인이 아들, 딸, 며느리, 손자들을 데리고 조국을 방문하여 휴식도 하고 자식들이 조국에 대해서도 잘 알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