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일 성
 
여운형의 자녀들과 한 담화
 
(주체80(1991)년 11월 16일)

 

 

    동무들을 오래간만에 만나니 반갑습니다.

    내가 동무들을 1979년 설날에 만나고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나는데 나는 동무들을 친자식처럼 생각합니다. 동무들도 나를 친아버지로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몇달전부터 동무네 4형제를 다시 만나려고 하였으나 시간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어제저녁에 한 일꾼에게 여연구가 언제 서울로 나가는가고 물어보니 25일경에 나간다고 하기에 오늘 동무들을 오라고 하였습니다.

    여연구와 원원구는 1946년에 나를 찾아왔는데 그때는 동무들의 아버지가 적들에게 희생되기 전이었습니다.

    여원구가 지금 63살이면 이제는 나이가 들었습니다. 1946년에 여연구와 여원구가 나를 찾아왔을 때 언니가 동생보다 한살 더 먹었다고 하였으니 여연구의 나이는 64살일 것입니다. 여원구에게 손자손녀가 6명 있으면 손자손녀부자입니다. 여원구남편이 1982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고 하는데 참 안되었습니다. 여순구는 지금 49살이고 남편이 교육위원회 고등교육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으면 좋습니다. 여순구에게 아들이 3명 있으면 아들부자입니다. 여붕구가 여연구보다 9살 아래면 지금 55살이겠습니다. 여붕구의 맏아들이 26살인데 철도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 좋습니다.

    동무네 형제가 모두 9명이었는데 더러는 해방전에 일제놈들 때문에 죽고 또 조국해방전쟁시기에 미제침략자들 때문에 잘못되어 지금은 나를 찾아온 4형제 뿐이라고 하는데 동무네 가정이 일제놈들과 미제국주의자들의 피해를 많이 입었습니다. 아마 동무들도 남조선에 있었더라면 잘못되었거나 살아있다고 하여도 유랑걸식하면서 눈물속에 세월을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동무네 형제들이 서로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동무들이 아버지도 닮고 어머니도 닮았다고 하는데 여붕구는 꼭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여운형선생의 5촌조카인 여경구가 함흥에 있었습니다. 여경구는 동무들과 6촌형제간이 될 것입니다. 내가 여경구를 여러번 만나보았습니다. 여경구가 과학원 함흥분원에서 이승기박사와 함께 연구사업을 할 때 내가 그를 만나보았는데 그는 키도 크고 체격도 좋았습니다. 여경구가 사망하였다고 하는데 살아있으면 지금 한창 일할 때입니다. 여경구에게 아들 3명, 딸 2명이 있으면 좋습니다. 맏아들은 과학원 함흥분원에서 실장으로, 둘째아들은 과학원 함흥분원 부원장으로, 셋째아들은 과학원 물리학연구소 소장으로 사업하고 있고 딸도 과학자라고 하는데 자식들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과학자로 일하고 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여경구의 아들딸들이 평양에 출장을 많이 다니기 때문에 동무들의 집에 자주 찾아오군 하면 좋습니다.

    공화국북반부에는 가까운 친척으로서 여경구의 가족들이 있고 서울에 4촌, 6촌들이 있다고 하는데 여연구가 이번에 서울에 나가면 그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연구가 서울에 나가면 아버지묘소에 가보아야 하겠습니다. 여운형선생의 묘가 서울 우이동에 있다고 합니다. 내가 여운형선생의 묘에 나의 이름으로 화환을 보내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동무들이 좋아하니 됐습니다. 화환댕기에는 내 이름과 《고 몽양 여운형선생을 추모하여》라고 쓰려고 합니다. 화환에 댕기를 여기에서 달지 말고 따로 가지고 가서 묘소에서 다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연구가 서울에 나가 아버지의 묘를 찾아보겠다고 한데 대하여 남측에서 동의한 것만큼 자기 아버지의 묘에 화환을 가져다 놓는다고 하여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여연구가 이번에 서울에 나가 아버지의 묘를 찾고 나의 이름으로 화환까지 가져다 놓으면 남조선에서 큰 파문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운형선생은 나에 대한 숭배심이 대단히 높았으며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나를 몹시 흠모하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 남조선에도 있고 해외에도 많습니다. 1989년에 문익환목사와 함께 왔던 사람은 나에게 일본에서는 해마다 해외동포들이 몽양의 서거일을 기념하여 그를 추모하는 모임을 가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남조선당국이 문익환목사를 다시 감옥에 가둔데 대하여 계속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남조선당국이 우리의 압력에 굴복하여 문익환목사를 제5차 북남고위급회담을 전후하여 석방할 수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나는 동무들을 볼 때마다 여운형선생의 생각이 더 납니다. 내가 여운형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해방직후였습니다. 그때 그는 환갑나이었지만 정열도 있고 패기도 있었습니다.

    해방직후 여운형선생은 해방된 조선이 나아갈 길을 몰라 안타까운 자기의 심정을 담아 나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어왔습니다. 나는 여운형선생의 편지를 받고 기회가 있으면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다는 내용으로 회답을 보냈습니다. 해방직후 여운형선생이 나에게 보낸 편지들이 남아있었으면 좋겠는데 지금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마 당안에 기어들었던 나쁜놈들이 전쟁시기에 불태워버린 것 같습니다.

    1946년초에 서울에서 소미공동위원회를 할 때 그곳 정세를 잘 알아가지고 오라고 한 일꾼을 소련군복을 입혀 서울에 내보낸 일이 있습니다. 그 일꾼이 서울에 나가자 소련군복을 입은 조선사람이 왔다는 소문이 쫙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여운형선생은 그를 자기 집에 초청해놓고 내가 김일성장군을 만나러 북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느 때 가면 되겠는가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술을 마실줄 모르지만 여운형선생이 부어주는 술을 마시면서 선생이 결심하고 아무 때나 들어오면 된다,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는데는 아무런 수속도 필요없다고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그후 어느날이었습니다. 내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청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소련군복을 입고 서울에 나갔던 그 일꾼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다가 도로 뛰어올라와 서울에서 여운형선생이 찾아왔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어떻게 되어 여운형선생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불쑥 나타났는가고 말하는데 벌써 중절모를 쓴 사람이 방에 들어섰습니다. 나는 여운형선생을 처음 만나다보니 몰랐지만 서울에 나갔던 그는 이미 만나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가 소개를 해주어 여운형선생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여운형선생과 한참 이야기를 하다보니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내가 여운형선생에게 점심을 먹으러 우리 집에 가자고 하니 그는 좋아하였습니다. 그때에는 다른데 가서 점심을 먹을만한데도 별로 없었거니와 나를 만나러 서울에서 비밀리에 들어온 사람을 아무데나 데리고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날 여운형선생은 우리 집에 가서 김정숙동무가 차려준 조밥을 토장국에 말아 한그릇 다 내었습니다. 그는 아마 내가 자기를 국수집에 데리고가서 국수나 한그릇 대접해보낼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과는 달리 우리 집에 데리고 가서 조밥에 토장국을 대접하니 아주 좋아하였습니다. 그후 지내보니 여운형선생도 그런 음식을 좋아하였습니다. 여운형선생이 나를 찾아올 때마다 김정숙동무가 그의 밥상에 색다른 반찬을 한가지라도 더 올려놓으려고 시장에 나가 뭘 사오군 하였습니다. 예술영화 《해빛이 그리워》에도 여운형선생이  우리 집에 가서 조밥과 토장국을 먹었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운형선생이 나를 만나고 서울에 나가 서울대학교 학생들앞에서 내가 평양에 가서 만나본 김일성장군은 당년 34살의 청년장군이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모였던 수많은 청년들과 대학생들이 너무 좋아 만세를 부르고 모자를 벗어 올려 던지면서 굉장히 환호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내가 왜 김일성장군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아끼고 따르는가, 그것은 김일성장군이 백두산이 낳은 조선의 명장이시고 일제놈들의 무기를 빼앗아 무장투쟁을 벌여 조국을 광복한 민족의 영웅이시기 때문이다, 지난날 우리 나라에 의병이나 독립군이 있었지만 김일성장군이 거느린 군대처럼 무장투쟁으로 왜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해방한 그런 군대가 어디 있었는가, 진수성찬을 차려 장군님께 대접하고 그분을 높이 받들어모셔야 하겠는데 우리 3천만 백성들이 자기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기성세대가 못다한 일을 당신들, 청년들이 맡아 해달라고 하면서 김일성장군이 내놓으신 건국노선이야말로 자기의 신념이며 오직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길만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고 조국이 나아갈 진로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운형선생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자기의 호가 몽양인데 이제는 소원이 풀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보천보전투가 있은 다음부터 어떻게 하면 나를 만날 수 있겠는가 하고 자주 생각하다보니 나를 꿈속에서 만나군 하였는데 오늘은 이렇게 직접 만났다고 하면서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몽양이란 꿈속에서 해를 본다는 뜻입니다.

    해방직후 여운형선생이 나를 몇번 찾아왔댔는데 사진 한장 찍어두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사진을 찍어두었더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운형선생은 나를 찾아올 때마다 온천이 있는 배천땅을 거쳐 북으로 들어오군 하였습니다. 그때에는 배천온천이 분계선 남쪽에 있었습니다. 여운형선생은 배천온천에 요양을 간다는 소문을 내고 배천온천에 와서 기회를 보다가 산을 넘어 북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것을 보면 그가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여운형선생이 한번은 나를 찾아와서 인민당이 공산당, 신민당과 합당하였는데도 박헌영이 당안에 프락치를 박아넣고 계속 이간책동을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인민당은 따로 갈라져나와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인민당이 따로 나와서 활동하면 남조선청년들을 더 많이 묶어세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운형선생은 당과 국가 건설에 대한 나의 구상과 노선을 받들고 남조선에서 활동하다가 반동들에게 테러를 당하여 애석하게도 희생되었습니다. 여운형선생이 1947년에 희생되었으니 벌써 4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가 지금 살아있으면 105살입니다. 아까운 사람이 너무 일찍이 희생되었습니다. 여운형선생이 희생되지 않았더라면 1948년에 있은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여 큰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남북연석회의에 김구까지 참가하였는데 여운형선생이 살아있었으면 선참으로 들어와 참가하였을 것입니다.

    여운형선생이 나를 만나고 돌아가면서 자기가 남조선에 나가면 언제 잘못될지 모르겠는데 딸들을 북에 들여보내겠으니 공부를 시켜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여연구와 여원구를 나에게 들여보낼 때 앞으로 장군님을 받드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였다는데 그랬을 것입니다.

    여운형선생이 동무들을 나에게 맡기기를 잘하였습니다. 나는 여운형선생의 부탁대로 여연구와 여원구를 유학까지 보내어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때 여연구는 소련에 가서 영어공부를 하였는데 영어도 배우고 러어도 알게 되었으니 결국 두개 나라 말을 배운 셈입니다. 나이를 많이 먹다보니 지금은 영어와 러어를 잘 모르겠다고 하는데 외국어는 자주 써버릇하지 않으면 회화를 유창하게 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여원구는 소련에 가서 기술공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여붕구의 지금 직무가 적합한 것 같지 않습니다. 여붕구가 나이를 먹을수록 아버지의 모습과 신통히도 같아지는데 내 생각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남조선사람들과 접촉을 하면서 조국통일을 위한 활동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붕구와 여연구 남매가 한 기관에 같이 있어도 일없으니 여붕구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장으로 사업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동무들이 내가 외국을 방문하면 그동안 내가 그리워 빨리 돌아왔으면 하는 생각 뿐이라고 하는데 이번에 중국을 방문하는 기간에도 인민들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내가 빨리 돌아오기만 기다렸다고 합니다. 이번에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 당과 정부 지도자들도 만나고 지방참관도 하였습니다. 나는 중국 산동성에 있는 공자의 묘에도 가보았습니다. 이번 중국방문 기간에 중국의 당과 정부 지도자들이 나를 극진히 환대하였습니다.

    동무들은 아버지처럼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생명도 서슴없이 바쳐 싸울줄 아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국제적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소련공산당이 해산되고 동구라파사회주의나라들이 다 망하였습니다. 미제국주의자들과 남조선괴뢰들은 우리 내부를 와해시키기 위하여 우리에 대한 허위방송을 자꾸 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제 인도공산당 전국이사회 총비서를 만났는데 그는 자기가 민주독일에 갔을 때에는 그 나라에서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런데 자기가 민주독일방문을 마치고 돌아온후 한 10일 지나서 청년들이 들고 일어났다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나라가 망했다고 하면서 청년들에 대한 교양이 문제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년들을 혁명의 믿음직한 계승자로 준비시키기 위한 교양사업을 계속 강화하고 있기 때문에 염려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청년들에 대한 교양사업을 잘하지 않으면 혁명과 건설을 망쳐먹을 수 있습니다.

    나는 젊은 시절에 감옥생활을 해보았습니다. 내가 국민당군벌들에게 체포되어 길림감옥에 갇혔을 때 손정도목사와 김사헌, 고원암을 비롯하여 길림에 있던 조선사람들이 나를 석방시키기 위한 운동을 벌였습니다. 최동오선생도 나를 구출하기 위한 투쟁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때 국민당군벌들은 화성의숙 숙장인 최동오선생까지 끌고 와서 나를 확인하는 놀음을 하였습니다. 나는 길림시내 유지들과 독립운동자들의 도움으로 석방되었습니다. 내가 석방되지 못하고 계속 감옥에 갇혀있었더라면 항일무장투쟁을 벌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일제놈들이 길림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찾아 돌아쳤는데 그때까지 내가 감옥에 있었더라면 일제놈들의 손에 넘어갔을 것입니다.

    손정도목사는 우리 아버지와 《조선국민회》사건으로 감옥생활도 같이한 사람입니다. 그때 《조선국민회》사건으로 105명이 잡혔는데 손정도목사도 잡혀들어가 고생을 많이 하였으나 애국적 지조를 굽히지 않고 잘 싸웠습니다. 내가 길림에서 공부 할 때 손정도목사의 집에 자주 놀러가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그 집에서는 밥도 해주고 국수도 눌러주군 하였습니다. 손정도목사의 집에서 쫀드기떡을 먹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느날 손정도목사의 집에 가니 오래간만에 왔는데 내놓을 음식이 없다고 하면서 쫀드기떡이라도 맛보라고 하여 먹어보았는데 그 맛이 참 별맛이었습니다.

    오늘 동무들과 점심식사를 같이하려고 합니다. 내가 오늘 동무들을 위하여 언감자국수를 준비하였습니다. 여연구는 언감자국수를 먹어보았겠지만 동생들은 먹어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 과일을 좀 가지고가서 손자들에게 주어야 하겠습니다. 손자들이 어디에 갔다 왔는가고 물어보면 주석님한테 갔다 왔다고 말하여야 하겠는데 빈손으로 가면 그들이 섭섭해할 수 있습니다.